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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페르시아의 흥망과 아랍의 출현

 

페르시아 흥망과 아랍의 출현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

 

로마 제국과 패권다툼

로마 제국과 사투를 벌인 파르티아 왕조와 사산 왕조에 대해 알아보자.

파르티아는 오늘날 카스피 해 동남족의 호라 산 일대(지금의 이란 동북 지역)를 근거지로 하는, 스키타이계 유목민이었다. 이곳에서 아르사케스 1세(재위 기원전 247-217년)는 셀레우코스 왕조에 맞서 호라산 일대를 정복하고 파르티아 왕국을 세웠다.아르시케스 왕조라고 불리며 중국의 사기에는 안식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파르티아는 초창기에 서쪽의 셀레우코스 왕조와 동쪽의 박트리아 왕조의 압력을 받아 소국에 머물렀으나, 제6대 미트라다테스 1세(재위 기원전 171-139년) 때 염원하던 메디아 왕국을 물리치고 기원전 141년 티그리스 강가의 중요 도시 셀레우키아를 점령했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한 미트라테스 1세는 스스로를 대왕이라 불렀고 이후 약 400년에 걸쳐 왕국을 번영시켰다.

 

그의 통치 지역은 이란 고원지대에서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이르렀고, 오늘날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근교에 동서 교역의 중심지인 지역에 왕도 크테시폰을 건설했다. 이 때문에 동서 교역로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던 로마 제국과 치열한 충돌을 반복해야 했었다.

 

미트라다테스 2세(BC 124경~87경 재위) 때 메소포타미아는 확고한 파르티아 영토였으며, 로마의 루쿨루스와 폼페이우스의 조약(BC 66)에 따라 메소포타미아는 파르티아령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에서 시리아로 종단하는 로마군이 몇 차례에 걸쳐 이 땅을 통과하자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결국 로마도 말려들게 되었다. 로마 장군 가비니우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지만(BC 54) ,크라수스는 카라 전투(BC 53)에서 파르티아에게 패배 전사했고, BC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암살로 로마의 원정군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퇴각했다. BC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를 지나 파르티아 왕 프라테스 4세(BC 38경~32 재위)와 싸우려한 원정 계획은 비참한 결과로 끝났다. 그러나 AD 62년 파르티아의 볼로게세스 1세의 로마에 대한 공격도 니시비스(니시빈) 서쪽에는 이르지 못했고, 이듬해 63년 평화협약을 맺었다. 115년에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북방에서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메소포타미아로 진입해 메소포타미아는 싱가라까지 로마의 속령이 되었다. 이듬해 트라야누스는 티그리스 강을 건너 니시비스와 에데사를 점령했으나 하트라는 포위 속에서 저항해 트라야누스의 공격은 실패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메소포타미아를 포기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그뒤 파르티아 왕 볼로게세스 3세는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죽음을 기회삼아 아르메니아에 침입했으나 실패해 메소포타미아 서부는 다시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파르티아 제국 (250 BC–AD 226)

 

영화 [글래디에이트]에 나오는 로마 철인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폭군 콤모두스 황제가 죽자, 194년에 하트라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맞섰고 니시비스는 파르티아 군에 포위되었다. 그러나 195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친히 로마 군을 이끌고 그들을 진압했다. 그는 니시비스를 주요 식민도시의 지위로 끌어올렸고 이미 예멘의 아랍인이 들어와 정착해 있던 신자르 지역을 병합했다. 셉티미우스가 철수하자 형세는 나빠졌으나 198년 그가 다시 나타나자 파르티아인은 철수했다. 그뒤 평화가 지속되다가 216년 카라칼라 황제가 파르티아에 싸움을 걸었다. 217년 카라칼라가 카라 근처에서 암살된 뒤 후계자 마크리누스는 니시비스 근처에서 파르티아에 패하고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는 계속 로마 영토로 남았다.

 

이러한 로마와의 오랜 전쟁으로 파르티아는 차츰 힘을 소진하게 되어 224년 페르시아의 파르사 지방에서 일어난 아르다시르 1세(재위 224-241년)에게 아르타바누스 5세(재위 213-224년)가 패함으로써 파르티아 왕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파르티아의 뒤를 이은 왕조가 사산 왕조이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가 224년 죽자 파르스 지방의 자치국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지방 영주 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사 전역을 통일시킨 다음 종가격인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재패했다. 이어 그는 파르티아의 아르타바누스 5세를 무너뜨리고 226년 크테시폰(현 바그다드 남쪽 약 32킬로미터 지역)을 도읍으로 세웠다. 그는 스스로 '제왕의 왕(샤한 햐)'라고 불렀다.또 그는 자기가 옛 페르시아의 키루스를 시조로 하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계승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해 니시비스와 카라를 점령했다(233).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226년–651년)

사산제국은 로마제국과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유지하여 서로 뺏고 뺏기는 영토 전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훗날 비잔틴 제국에게 크게 패하고 새롭게 일어나는 이슬람 제국에 의하여 사산제국은 멸망의 길로 가게된다. 사산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야즈게르드는 투르크의 지원과 당나라의 지원을 요청하여 복원을 시도하지만 이슬람 제국에게 패하여 무너지고 만다.

 

로마와의 전쟁 중 � 번째 전투는 243년,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재위 238-244년)는 로마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과 카블 강이 만나는 지점 부근(지금의 이라크 국경에서 가까운 시리아령 바세라)에서 대패를 당하고 전사(암살당했다는 설도 있음)한다. 그 뒤를 이은 로마 황제는 고르디아누스의 근위대장관이었던 아랍의 필리푸스 황제였는데 거액의 배상금을 물고 아르다시르 아들 샤르프 1세(재위 242-273년)와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 로마로 철수했다.

 

두번 째 전투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황제(재위 253-258년)과의 전투에서 샤르프 1세는 6만의 로마군을 무찌르고 시리아와 카파도니아(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를 침략,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여러 주요 도시 대부분을 점령하고 파괴했으며 메소포타미아로 진입해 카라와 니시비스를 회복했다. 이 침략은 253년과 256년 두 차레에 걸쳐 이루어졌다.

 

세 번째 전투는 258년  샤푸르 1세(재위 242-273년)가 로마 제국 내의 분쟁을 틈타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와 니시비스와 카르하이를 공격하고 에데사(터키 동남부 우르파 마을)를 포위했으며 이때 접전을 벌인 7만의 로마군은 패배했고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260). 그뒤에도 메소포타미아를 둘러싼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로마 싸움은 계속되었다.

 

발레라아누스 황제가 포로로 잡힌 곳은 페르세폴리스 근교의 나크시에로스탐에 새겨진 조각 등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로마군은 국경선이 안정되자 오랫 동안 평화기를 누리다가 사전 준비 없이 갑자기 전장에 투입되어 사산 왕조군과 장기간 대치하면서 기아와 역병에 시달리다가 사산 왕조군이 요구하는대로 항복하였다고 한다. 로마 역사상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운명은 참담한 그 자체였는데 그는 노예로 전락했고 남루한 차림으로 묶인 채 군중 앞에 세워져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2년간의 포로 생활 끝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298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니시비스로 진출해 평화조약을 맺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일부는 다시 로마로 넘어갔다. 약 40년간의 평화 뒤에 샤푸르 2세(재위 309-379년)가 전투를 재개했다. 이 시기에 중앙 집권제의 기초가 확립되고 초기에는 로마와 관계가 좋았으나 로마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년)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아르메니아도 기독교로 개종하는 등 이를 따르자,양측이 심하게 대립했다. 사산 왕조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정하고 있었는데, 로마인 이주자들에 의해 차츰 기독교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샤푸르 2세는 기독교도를 탄압했고, 기독교 나라인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아르메니아를 지원하는 로마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런 싸움은 후대에도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독교 공인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센티우스와의 전투 직전에 환상 속에서 빛의 십자가와 함께 "이 표시를 앞세워 정복하라"는 글자가 나타났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는데 그는 그후 기독교로 전향했다고 한다. 313년 2월, 황제는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를 공인했다. 황제가 공인한 것은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것이지 기독교만을 공인한게 아니며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은것도 아니다. 그가 세례를 받은 것은 337년 죽음에 임박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헬레나는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황제는 기독교 공인과 함께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이 만나는 도시 비잔티움에 스스로 이름을 남길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였다. 당시 이미 로마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년) 황제 시대부터 사실상 동서로 나뉘었는데, 460년 서로마 제국은 고트족 등의 야만족에 의해 소멸하면서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한 동로마 제국은 이후 1000년이 넘도록 명맥을 유지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326년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진짜 십자가를 발견했다면서 그곳에 성분묘교회를 세웠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런 모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도 모른다. 기독교로서는 엄청난 행운이었으며 세계 종교로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사산 왕조와 로마 제국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363년 율리아누스 로마 황제가 전사했고 뒤를 이은 요비아누스 황제는 싱가라와 니시비스를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동부 전지역을 페르시아에 넘겨주고 평화조약을 맺었다. 여러 해 동안 로마의 영토였던 니시비스를 포기하자 그리스도교도들은 크게 놀랐다. 니시비스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네스토리우스를 탄핵한 뒤로 네스토리우스 파 중심지가 되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성쇠

6세기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새로운 격전이 벌어졌다. 카바드 1세가 지휘하는 페르시아군이 시리아로 침입했다. 동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페르시아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칼리니쿰에서는 패했다(531).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최대 번영기를 구가한 사람은 호스로우 1세(재위 531-579년)이다. 그는 즉위 후 시리아를 침공했는데, 540년에는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키고 멀리 예멘까지 정복해 비잔틴 제국이 장악하고 있던 인도와의 교역 루트를 지배했다. 그 후 561년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과 50년간의 평화조약을 맺어 서쪽 국경을 확정했다. 동쪽도 유목민인 에프탈을 격멸시켜 제국의 지배를 안정시켰다. 치세가 안정되는 가운데 그는 종교적으로도 관대한 정책을 펴 전통적인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제도를 확정해 보급하기 시작했다. 토지 세제를 확립해 수확량에 따른 세금 정책 대신에 정액의 토지세를 도입했다. 이 토지세 제도는 인두세와 함께 이후 아랍정복시대(이슬람 시대) 과세의 선례가 되었다.

 

그러나 호스로 1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532)도 오래 가지 못했고 로마령 메소포타미아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호스로 1세가 죽은 후 페르시아는 차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호스로우 2세(재위 590-628년) 때 페르시아는 마지막 번영기를 맞았다. 그는 아나톨리아 반도 거의 전 지역을 영토로 삼았고, 안티오키아는 물론 시리아 다마스쿠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해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영토를 재현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해 콘스탄니누스 모친 헬레나가 발견했다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빼앗아 크테시폰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전후의 혼란기에 로마는 다시 과거의 국경을 회복했다(591).

 

동로마 황제 포카스의 즉위(602)와 더불어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는 큰 전쟁이 일어나 호스로우 2세는 로마 제국 안으로 깊숙이 진군했으나 호스로우의 아들 카바드 2세는 병약하고 의지가 약해 메소포타미아 정복을 단념했다. 시리아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 군주의 지배에서 풀려났다고 기뻐했으나 곧 동로마의 무자비한 성직자들이 펼치는 압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비잔틴 제국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호스로우 2세와 사투를 벌여 628년에는 메소포타미아까지 진출하여 비잔틴 제국이 대부분의 영토를 회복했다. 그후 호스로우 2세는 반란군에 살해되고 그의 아들 카바드 2세는 병약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고 호스로우 2세의 손자인 야즈다기르드 3세가 21세의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는다. 이러한 혼란이 계속하는 동안 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자라나고 있었다.

 

같은해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를 일으켜 반도를 통일한 예언자 마호메트가 죽었다. 마호메트가 죽은 뒤 아랍은 한때 혼란기를 거쳤으나 예언자의 대를 이은 칼리프(후계자) 아부 바크르를 중심으로 재결속, 635년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카뒤쉬야에서 이슬람군과 사산 왕조의 양측 군은 대치했다. 하지만 사산 왕조의 마지막 왕 야즈디기르드 3세는 이 전투에서 참패해 크테시폰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가 이후 10여 년간 페르시아 국외를 떠돌다가 651년에 살해당하면서 사산 왕조는 허무하게 멸망했다. 그래서 중동의 판세는 아랍의 치세로 넘어가게 된다.

 

 

아랍의 정복과 칼리프 국가

 

이슬람 정권의 등장

우선 이 정권의 근간이 되는 아랍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라비아 반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한 인물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신에 대한 절대 권위'의 뜻)이 아랍에서 절대적인 종교로 자리 잡고 확산되었으며, 훗날 광활한 이슬람 세계 확립하는데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랍인의 기원

아랍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통상적으로 아라비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민족을 아랍인이라고 부르지만, 아리비아어는 셈어의 한 종류이다. 따라서 아랍인이란 '아라비아 반도를 본거지로 하는 셈어족'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랍이란 인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아시리아 비문에 등장했는데, 당시 아시리아 지배 속에서 시리아를 비롯한 동맹군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아라비아 사막을 근거지로 살아가고 있던 유목민인 베두인족 연합이 동맹군에 포함되어 1000필의 낙타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랍이란 말이 베두인을 나타내는 용어로 처음 인용되었다고 한다.

 

베두인은 아라비아어로 바두라고 한다. 바두란 원래 정착인(하달)에 반대되는 말이다. 지금도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도시 거주인, 오아시스 거주인, 유목민 또는 반유목민의 세 범주로 분류되며, 앞의 두 그룹을 하달이라 하며 후자를 아랍이라 부른다. 그래서 베두인이야 말로 진정한 아랍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랍인들 사이에는 예로부터 아라비아 반도에 거주하는 아랍을 2개의 그룹으로 나눈다. 하나는 남아라비아를 기원으로 하는 아랍으로, 이 그룹을 '참 아랍'이라 부르며 카프탄이라는 족장의 후손들이라 한다. 카프탄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기록돼 있는 '욕단'과 동일 인물이며, 또 다른 이름 야만(예멘)으로도 불린다. 또 다른 그룹은 북부 아라비아의 '아랍화된 아랍'이라고 불리는 집단으로, 아드난이라는 족장의 후손들이라 한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아드난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의 자손이라고 한다.

 

한편 베두인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기원전 10세기경, 남아라비아의 예멘(야만) 주변에는 이미 내륙의 사막에 가까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4개의 왕국이 존재했다. 이들 4개 왕국은 사바(수도 마리브),하드라마우트(샤브와),카다반(티무나),마인(칼루나)이었다. 이 중 사바 왕국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솔로몬에게 조공을 드린 시바의 여왕국에 종종 비유되고 있다. 이 왕국에는 발키스라는 여왕이 실제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 말 무렵, 사바족의 대를 잇는 히미아르족이 자파르를 수도로 하는 히미아르 왕조를 수립했다. 자파르는 오늘날 에멘의 수도 사나에서 서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마리브 주변이다. 이 마리브에는 지금도 거대한 댐의 유적이 남아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지진에 의한 댐 붕괴가 사바 왕국의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고 추측하고 있다. 댐의 붕괴로 농업에 큰 타격을 입었고, 사람들은 사막에서 유목을 시작하게 됐다.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풀을 �아 이동하면서 차츰 반도의 북부 지역 일대에 퍼져 생활하게된 민족이 베두인족이다. 이들 왕국은 이후에도 흥망을 반복했는데, 이들이 사바족과 그 대를 잇는 부족 카프탄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또 북아라비아 일대의 유목민인 베두인의 여러 부족도 아드난의 계보가 되기도 한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메카의 명문 쿠라이시족 출신으로 아드난의 계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지도. 브리태니카백과사전 지도

 

 

아라비아 반도 지형

아라비아 반도는 아라비아어로 '자지라트 알 아랍(아랍인의 섬)이라고 불린다. 동쪽과 서쪽 그리도 남쪽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북쪽은 내륙으로 통하는 드넓은 사막이다. 한마디로 갇힌 섬이며, 고립된 세계인 것이다.

 

이 아리비아 반도는 면적 약 260만 제곱킬로미터로 세계 최대의 반도이다. 이 반도는 페르시아 만에 연하는 동쪽 해안에는 티하마로 불리는 작은 저지대가 있으며,약간 내륙의 북쪽에는 생물이 살지 못하는 나푸드 사막, 남쪽의 룹알할리 사막이 있으며 두 사막 지대를 남북으로 연결하듯이 활 모양으로 형성된 다나 사막이 있다. 이들 사막이 넓게 분포되어 반도의 40%를 차지한다. 서쪽 홍해를 연하여 내륙에는 남북으로 높은 산맥이 우뚝 솟아 있으며 북쪽의 메디나 부근에서는 해발 1500-1600미터지만, 남쪽 예멘 부근에 이르러 해발 37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예멘에서 오만에 이르는 남쪽 해안의 내륙지대는 동서로 고지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남동부 마산담 반도 부근에서는 복잡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이 반도에서는 남쪽과 서쪽에서 부는 습한 바람이 산을 넘지 못하고 차단되는 바람에  내륙 지역에는 건조하여 넓은 사막이 분포되어 있다.그리고 북쪽에는 또다시 거대한 시리아 사막이 이어진다.

 

이런 지형적인 장벽을 뚫고 아라비아 반도에 칩입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실제로 고대로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외세의 침략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낙타를 가진 유목민들에게는 사막은 최적의 거주 공간이 된다. 이들은 이 사막지대를 생활 근거지로 하여 오아시스나 교역의 중계지는 발달하게 되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농경지나 도시가 발달하게 되었고 메카도 그런 도시 중에 하나이다.

 

아라비아 반도의 중심지 메카

이슬란교 창시자인 예언자 마호메트는 570년 무렵 아라비아 반도 서북부의 메카(마카)에서 태어났다.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 서쪽 홍해안 최대의 항만도시 제다에서 약 72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메카는 내륙 산맥의 서쪽 골짜기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계곡은 일종의 회랑을 형성하고 있는데, 중앙의 저지대에는 고대부터 카바(신의 집:정육면체)이 세워져 있었다.

 

이 일대의 강우량은 불규칙하며 때에 따라서는 많은 양의 비가 내려 카바가 물에 잠길 정도로 홍수가 발생하기도 한다. 또 여름에는 폭염이 내려 엄청난 더위가 몰려오는 곳이다. 주변 지역은 바위산으로 농사가 불가능한 지역이며 물은 우물에 의존해야하고 카바 군처에 잠잠의 샘이 유명하다.

 

하지만 메카는 교역 루트의 거점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다. 북쪽은 시리아,북동쪽은 계곡의 도로를 이용하여 이라크로,남쪽은 예멘, 서쪽은 제다항을 통해 바닷길로 연결되어 사방으로 열려있는 도시였다. 메카는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고대로부터 성지로도 이름을 날렸다.아브라함과 이스마엘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코란에 기록되어 있다.

 

메카를 지배한 것은 쿠라이시 부족으로, 마호메트의 5대 조상인 쿠사이이가 쿠라이시 부족을 통합해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이 땅을 정착지로 정했다. 마호메트가 정말로 쿠라이시 부족 출신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다.

 

6세기 후반 이후 메카의 교역은 급성장했다. 이는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대립이 격화되었기 때문인데, 메소포타미아를 경유하는 페르시아 만의 교역 루트가 급속히 무너지면서 대신 서아라비아 루트가 한층 중요해졌기 때문이었다. 메카는 양 진영의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킴으로써 번영을 누릴 수가 있었다. 교역 상품의 대부분은 메카의 부유한 상인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대상에 의해 운반되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