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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강대국들의 석유 침탈, '적색 협정'

 

 

강대국들의 석유 침탈, '적색 협정'

 

(Pahlavi)
                                            이란  팔레비 국왕

 

 

레자 칸은 1926년 '레자 샤 파흘라비'로 등극, 팔레비(파흘라비) 왕조(1926-1979)를 열게된다. 레자 샤는 과감하고 체계적인 서구화에 들어간다. 부족 중심의 형태로 운영되던 군대를 혁신, 상비군으로 만들어 왕정의 권력을 강화했고, 관료제를 뜯어고쳤다. 전국을 포괄하는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근대적인 대학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세속국가'를 지향했던 레자 샤의 원대한 야심을 알려준다. 이슬람권에서는 이슬람학자들이 교육을 맡았었다. 이슬람권에는 오래전, 10세기부터 대학이 발달했는데 아프간에서 테러리스트 온상이 되고 있다고  미국이 지탄했던 '마드라사'가 이런 교육기관들을 가리킨다. 이집트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성원(聖院)에 있는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대학 중 하나로 꼽힌다.

 

레자 샤는 이슬람 학자들에게서 교육권을 빼앗아 종교적, 전근대적 사고방식 대신 세속적, 서구적, 합리적, 근대적 국민의식을 고양시키려 했다. 그의 개혁으로 근대적 교육을 받은 관리들이 생겨나고 경제가 회복되고 중산층이 형성됐다. 교육 뿐만 아니라 사법권도 이슬람학자들에게서 근대적 사법기구로 넘어오게 됐다. 역시 이슬람의 독특한 측면인데,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종교-문화-사상-사회-정치체계의 통일체다. 꾸란의 말씀은 경전인 동시에 법전에 해당되고,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성직자' 개념이 없는 대신 이슬람 학자 겸 율법학자들이 무슬림을 지도한다. 권위있는 율법학자들(다른 종교권에서는 '성직자'로 부르는)이 법률적 판단을 해서 발표하는 것을 파트와(fatwa) 라고 하는데, 무슬림들에게는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구 법체계의 '판례'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레자 샤는 근대적 사법체계를 도입해서 성직자들의 자의적인 판결 관행을 중지시키고, 1936년에는 여성들의 차도르를 없앴다. 하지만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반대세력과 언론을 강도 높게 탄압했다. 봉건적 특권을 박탈당한 이슬람 세력은 결국 왕조의 적이 되고만다. 왕가와 성직자의 대립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다. 근본적으로 레자 샤의 근대화 정책은 봉건적 토지소유제도를 혁파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토대 없는 윗줄만의 개혁으로 그쳤고, 더욱이 개혁에 드는 비용도 농민 세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레자 샤는 소련과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의 경제관계를 강화했다. 소련과 영국은 석유 정책에 대한 보복으로 1941년 이란을 침공해 레자 샤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위기감을 느낀 그는 결국 아들 무하마드 팔레비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레자 샤는 영국군에 체포돼서 영국과 모리셔스 등지를 전전하다 1944년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팔레비 왕조는 친미 부패왕조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지만, 적어도 레자 샤는 "카자르 왕조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개혁을 추진, 이란인에 의한 근대화를 추진하고 제국주의에 맞서려 했던 정치가로 평가해야 한다"고 오늘날의 사가(史家)들은 말하고 있다. 그의 개혁이 성공했었다면 터키의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처럼 국부로 숭앙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레자 샤의 개혁이 케말 파샤의 개혁과 다른 점이 있었는데, 케말은 공화정을 택한 반면 레자 샤는 왕정을 택하였다.

 

아들 팔레비(보통 '팔레비 국왕'으로 불리는) 즉위 뒤인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을 침공한다. 이란은 연합국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영국과 소련의 경제적 침탈도 심해졌다. 소련군은 2차대전 종전후에도 가장 늦게까지 이란에 주둔했으며 이를 배경으로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 (Tudeh party)이 세력을 불렸다.

모사데크의 민족주의 정권과 팔레비 왕조의 부활

반외세 민족주의를 내세운 모하마드 모사데크 (Mohammad Mossadeq)가 이끄는 국민전선이 약진을 보이자 1951년 팔레비 국왕은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모사데크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유전 국유화를 단행했다. 그러자 이란 유전을 소유지분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이란의 대외자금 줄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모사데크가 투데당과 협력할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영국의 석유재벌 '세븐스타'들의 조종으로 정부까지 나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한다. 모사데크는 반역 혐의로 체포된뒤 3년간 복역하고 고향에 가택연금됐으며 1967년 사망했다. 후진국에 태어난 민족주의 정치인의 운명이었다.

 

모사데크를 쫓아낸 팔레비는 친미, 친영 노선을 노골화하고 비밀경찰(SAVAK)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했다. BP, 더치 셸 같은 서방 석유회사들이 이란의 유전을 장악했다. 1955년에는 바그다드조약이 성립된다. 바그다드조약기구(중동조약기구 METO)는 터키·이라크·이란·파키스탄·영국으로 구성된 상호방위동맹으로, '가맹국의 안전을 위한 협력'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중동진출을 막기 위해 결성된 것이었다. 회원국이 아닌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한 미국이 이 기구를 좌지우지했다. 1958년 이라크가 바트당 혁명 뒤 탈퇴하면서 이 기구는 해체되고 소련에 맞선 군사조약기구인 중앙조약기구(CENTO)가 만들어진다.

 

이란은 바그다드 조약기구(METO)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한데 이어 팔레비 국왕은 1959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 주둔을 허용한다. 1963년 팔레비는 6개항의 개혁조치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작했다. 주내용은 토지개혁, 근로자에 회사 이윤 분배, 삼림과 목초지 국유화, 국영사업장 매각, 노동자 농민에 유리하게 선거법 개정, 문맹퇴치 지원 등이었으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특히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던 토지개혁은 아버지 레자 샤 시절 무산됐던 것으로, 팔레비 국왕이 솔선해서 왕실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지소유자와 겹치는 이슬람 성직자층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한다.

 

이들은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반(反)백색혁명 운동을 벌였다. 호메이니는 가택연금 됐다가 이듬해 터키(뒤에는 이라크)로 망명했다. 성직자들의 반대 속에서도 토지개혁은 진행됐고, 경제도 나아졌다. 국정에 자신감이 생긴 팔레비는 1967년 10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대관식을 거행하고 1971년에는 페르샤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다. 내정이 안정되자 팔레비는 중동의 경찰 역을 자임하고 군비 강화에 나섰다. 내용은 실상 미제 무기 수입이었다. 국민들은 이런 친미노선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에 노엄 촘스키가 쓴 글을 보면, 이란이 당시 중동에서 지금의 이스라엘과 같은 역할, 즉 '미국의 경비견 노릇'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사데크 국민전선의 한 분파인 이란자유운동, 호메이니가 이끄는이슬람세력, 페다인(특공대 혹은 민병대)과 무자헤딘(이슬람 전사) 등 무장단체들이 모두 반 팔레비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반왕정 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어갔다.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

과시성 사업과 군비 강화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이란 경제는 1976년 후반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왕정의 무능과 부패 속에 빈부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1977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그간 묵인해왔던 왕정의 인권탄압에 우려를 표하고 개선을 요구한다. 그러던 차에 1978년 왕정은 호메이니를 음해하는 기사를 친정부지에 게재, 국민을 자극하고 쿰 시에서 열린 신학생 데모를 유혈진압한다. 이스파한의 바자르가 항의표시로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자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하는 등 78년 벽두부터 시위와 유혈진압의 악순환이 계속됐다. 8월 아바단에서 시위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렉스 시네마에 불이 나서 400여명이 숨지는데, 훗날 조사에서는 광신도의 방화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비밀경찰의 소행으로 믿었다. 9월 성난 군중이 테헤란 잘레흐 광장에 운집하자 경찰이 무차별 발포,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라크는 이란의 압력에 따라 이라크에 머물고 있던 호메이니를 추방했으며 호메이니는 프랑스 파리 망명해간다. 그의 프랑스 망명은 오히려 이란 반정부운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게 하는 계기가 됐다. 12월 팔레비 국왕은 온건파인 국민전선 지도자 바크티아르 와 협상, 바크티아르에게 총리직을 맡기고 출국하기로 결정한다. 이듬해 1월 팔레비는 이란을 떠났다. 그러나 1979년 출범한 바크티아르 정부에 대해 호메이니는 '불법'임을 선언하고 타도령을 내린다. 2월1일 호메이니 귀국. 군부마저 호메이니 지지로 돌아서자 바크티아르마저 망명해버리고 2월12일 왕정은 완전히 종식됐다. 이것이 이란 이슬람혁명이다.

 

1979년 2월 5일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르자간 (Mehdi Bazargan)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슬람최고혁명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였고, 정규군과 별도로 이슬람혁명수비대가 만들어져 무력으로 뒷받침했다. 12월에는 이슬람공화국을 표방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됐다.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 인질사건(11. 4.)이 발생했다. 이 인질사건으로 바자르간은 사임했다. 1980년 1월 바니 사드르( Bani Sadr)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혁명세력을 누르지 못했다. 사드르는 1년만에 실각해하고, 무자헤딘(MKO) 지도자 마수드 라자비 (Masoud Rajabi)와 함께 81년 7월 파리로 망명했다. 사드르는 파리에서 호메이니 축출 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란의 권력투쟁은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성직자 계급의 승리 이후 이란은 교조주의로 치닫는 동시에, 정정불안과 암살이 횡행한다. 사드르 실각 뒤 취임한 알리 라자이 대통령과 자베드 바호나르 총리가 나란히 암살됐다. 혁명위원회는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저항조직을 해체하고 3000여명을 처형했다. 1981년 혁명은 초기의 불안단계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여기서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다. 이라크는 인구의 65%가 시아파이고,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다. 이슬람국가들 중에서 시아파 인구가 많은 나라는 이 둘 뿐이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 혁명의 파고가 넘어올까 두려워하자 미국의 충동질로 이란을 선제공격을 해버린다. 주변 아랍국가들의 명시적, 암묵적인 지지 속에 1980년 7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다. 표면적인 이유는 Shatt al-Arab 수로 영유권 다툼이었다. 개전 후부터 1982년 여름까지는 이라크가 공격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1982년말부터 이란이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반격에 나서면서 지리한 소모전에 돌입한다. 미국 무기로 무장하고서도 미국의 이라크 지원사격으로 고립지경에 빠진 이란은 국민들의 '혁명 수호 의지'로 패전을 면할 수 있었지만 인명피해는 이란 쪽이 훨씬 컸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으로 오히려 이란 내에서는 혁명 분위기가 공고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전쟁이 1989년 9월 UN 중재 끝에 종료되고 호메이니도 사망한 후(1989년 6월)에야 이란은 정상적인 국가로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지금은 호메이니의 뒤를 이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최고종교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최근 정치 상황

이슬람 혁명의 긴장감과 '혁명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개혁과 개방을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198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특히 호메이니 사후 이같은 흐름이 두드러졌다.

 

1993년 하셰미 라프산자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자유화 조치들이 시작됐고, 이는 청년층과 여성 유권자들의 엄청난 지지 속에 무하마드 하타미 개혁파 대통령이 1997년 집권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기 연임을 하는 동안 하타미 대통령은 번번이 보수세력에 발목잡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는데에는 실패했다. 국제사회는 하타미 대통령의 '문명의 대화' 주장에 큰 호응을 표했고 미국의 빌 클린턴 정권도 이란 개혁파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줬지만, 이슬람 혁명의 수호세력을 자처하는 보수파들의 저항은 강했다.

 

서구식 입헌민주주의 절차와 이슬람 신정이 결합돼 있는 이란의 정치체제상 대통령은 전면적인 권력행사가 불가능하게 돼 있다. 특히 개혁파가 장악한 의회와 보수적인 사법부(이슬람 성직자들로 구성된 재판관들)의 갈등이 계속되면서 일부 지방에서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이슬람 민병대와 개혁파 학생들 간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타미 정부가 끝나고 2005년 치러진 대선에서는 보수파의 반격 속에 초강경 이슬람주의자인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재출마한 라프산자니 전대통령에게 압승을 거뒀다. 보수파의 승리는 이슬람 근본주의로의 회귀라기보다는 '개혁 피로감'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민주화, 자유화 개혁 속에 하타미 정권 시절 '개혁파 기득권층'이 생겨나 석유 이권을 서방에 팔면서 이득을 챙겼다는 국민적인 반발이 생겨났다는 것. 실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석유 이익은 국민에게' '서민들을 위한 정치'라는 슬로건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미국과 계속 핵 문제 등으로 충돌하면서 '강한 지도자'로 이슬람권에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있으나,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발언 등으로 서방과 계속 마찰을 빚고 있다.

 


  
석유의 분출 :
유전굴착시 석유 광상을 덮고 있는 덮개암을 뚫으면

광상내 압력으로 인해 석유는 지상으로 분출된다.

 

 

중동 석유자원 쟁탈전

 

중동에서 석유를 둘러싼 열강들의 쟁탈전 역사는 1908년 이란의 서남부

술라이만에서 뉴질랜드인(당시 영국의 식민지) 윌리엄 다아시에 의해 중동

지역 최초로 유전이 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란에서 석유의 발견이 알려

지자, 당시 영국의 ‘3C정책’ (케이프타운, 카이로, 캘커타를 잇는 지역을 영국

의 패권 아래에 두려는 정책)에 맞서 ‘3B’(베를린,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축으

로 패권을 장악하려는 독일의 제국주의 정책은 중동지역에서 대립의 각을 세

우게 되었다. 다아시는 1908년 5월 영국·페르시아석유회사(후에 영국·이란

유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다아시는 1914년 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두고 소유 주식을 매각하였는데, 독일과 치열한 군비경쟁에 돌입한 영국은

군성으로 하여금 다아시의 지분을 매입하고 함정연료를 석유로 전환하여 재래

식 연료인 석탄을 사용하는 독일 해군 함정과 비교하여 월등한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란 석유의 안전 공급을 보장하려는 영국과

를 봉쇄하려는 독일 간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결과적으로 석유라는 신종

략자원 때문에 유럽 국가들 간의 전장이 중동지역까지 확대된 것이다.

 

 

영국의 은밀한 동방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 최고조에 도달하고 있을 동안인 1916년에 조인된 외교

비밀 협정이었다. 조인국은 영국과 프랑스 였으며 이탈리아와 러시아가 나중에

합류했다. 이 협정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라 불리며 내용은 전쟁 이후 아리

비아 만의 미개발 석유 매장지에 대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영국의 목적

배반을 상세히 드러냈다.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따라 독일과 아무런 성과 없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몰두

하는 동안 영국은 놀라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인 140만 명 이상의 자국 군대

를 지중해와 페르시아 만 일대로 이동시켰다. 이유는 러시아 전선을 도우며 러

시아 곡물이 다다넬스 해협을 통해 서구 유럽으로 이동로를 확보한다는 명분이

으나 실상은 중동 지역의 장악이었다. 그러는 사이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는

거의 150만 명의 병사를 잃었고, 260만 명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강대국의 중동 지역 석유지배

 

사이코스-피코 협정으로 중동 지역이 나누어 졌는데, 프랑스는 주요 내륙 도시

인 알레포.하마.다마스쿠스를 비롯하여 시리아.레바논을 애워싼 이른바 'A 지

역'이라 불리는 곳뿐 아니라 당시 터키 석유회사에 도이치은행이 보유하고 있

던 석유 채굴권을 포함하여 북족으로는 석유가 풍부한 모술에 대한 통제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 권역의 남동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요르단에서 동족으로는

바스라와 바그다드가 포함된 이라크와 쿠웨이트 대부분에 해당하는 이른바 'B

지역'을 손에 넣게 될 것이었다. 나아가 프랑스 지역을 관통하여 하이파를 연결

하는 철도를 부설하여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탈리아는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 산악 지역 해안선과 도데카니소스 제도의

상당 부분을 약속 받았고, 제정 러시아는 오스만령 아르메니아와 예레반 남서

쪽의 쿠르디스탄 지역을 받기로 하였다.

 

이 은밀한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영국은 시리아와 레바론을 프랑스 '보호령'

으로 만들고 트란스 요르단, 팔레스타인,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영국령으로 하

는 것을 비롯하여 오늘날 지속되고 있는 현상대로 제멋대로 아랍 지역을 분할

하였다. 이미 페르시아는 1905년부터 사실상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사우

디아라비아는 그당시 영국의 전략적 이해에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영국의 몇 안되는 크다란 실책 가운데 하나였다.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영.미 석유회사들을 몰수하다

 영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세계의 석유 및 전략적 원자재를 지배하는 수익성

높은 제국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란을 포함한 중동 걸프 만 산유국들

에게 영국의 이익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 막대한 중동의 석유가 유럽으로 유입

되는 관문인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가 전략적인 우선순위가 되었다.

 

영국은 1941년 8월, 제2차 대전 중 독일의 소수 엔지니어들이 상주한다는 구실

로 소련과 같이 이란을 침공하였는데, 이란을 점령한 지 한 달 후 이란 국왕은

아들인 '무하마드 리자 팔레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팔레비는 영-러의 점령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다.

 

10만 명의 러시아군과 7만 명의 영국 및 인도군이 식량 우선권을 가진 동안 이

란인들은 굶어 죽고 있었으며 러시아군은 이란 북부지역을 강탈해 갔다. 1944

-1945년의 겨울 동안 영-미의 대여 군수물자를 이란 철도를 이용하여 러시아

본토에 운송하려고 석유 보급을 전용하는 바람에 혹독한 겨울 난방유 부족으

로 수천 명이 얼어 죽었다.

 

제3자의 도움을 구하려고 안감힘을 쓰던 이란 정부는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고,

1942년 미국의 한 군사 장교,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1990-91년 미군이 감행한

사막의 폭풍 작전 지휘관의 아버지)은 이란에서 1948년까지 6년 동안 국립 경찰

부대를 훈련시켰다. 1944년 12월 이란 영토에 대한 외국 군대의 점령과 갈취가

판을 치는 가운데 이란의 민족주의 지도자 모사데크 박사는 이란 의회에 외국과

석유 협상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모사데크는 영국의 <런던 타임지>의

1944년 11월 2일자 사설을 인용하여 영국-러시아-미국이 이란을 나누어 가질

것을 제안한 내용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결의안이 통과 시켰다. 그러나 1901년

부터 다시의 옛 채굴권인 남부 이란의 앵글로이란석유회사의 채굴권에 대해서

는 이후 논의하기로 하고 일단 보류하였다.

 

1948년, 새로운 유엔에 이 사안을 제소한 것을 비롯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인 끝

에 이란은 자국 영토에서 외국군을 강제로 찰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란은 석유회사를 통해 영국 정부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란 정부는

영국의 불합리한 석유 이윤 배당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가장 품질

높은 석유를 채굴하면서도 이란 정부에 8%의 노열티만 지불하고 있는 점에 분

노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란 정부는 추가적인 유정의 채굴에 대해서 거부하고

제출된 자료에 근거하여 채굴권의 정의와 양심의 원칙에서 다시 협상해야 한다

고 영국에 주장했다.

 

1949년 말 이란 모사데크 박사의 '국민전선당'이 소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석유

문제를 집중적으로 의제로 제기하면서 영향력을 넓힌 그는 결국 1951년 4월 총

리로 선출되었다. 모시데크는 본격적으로 석유 국유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

는데, 1951년 4월 자신의 내각을 구성하면서 이란 의회의 동의를 얻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은 즉시 보복을 하겠다고 위협했고 며칠안에 영국 해군이

'아바단'에 도착했다. 모사데크가 총리로 있는 28개월 동안 영국은 압도적인 걸

림돌 아래서 고민해야 했다. 1951년 9월 영국은 해외에 있는 영국 은행들에게

이란의 모든 자산을 동결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이란산 원유 선적의 금지를

함한 이란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제재를 선언했다. 영국 군함들이 이란 연해 바

로 밖에 주둔했고, 육군과 공군은 아바단 정유 시설에 가까운 영국 통치령 '이

라크'의' 바스라'에 급파되었다. 영국의 행동에 미국의 석유 메이저들도 동참하

였으며 경제제재는 런던과 뉴욕의 지도층이 자신들의 자산을 민족주권을 내세

우며 실행한 대응책이었다. 이란 석유를 살 가능성이 있는 다른 나라 구매자들

도 위협을 받고 구매를 단념토록 조치했으며, 이로한 이련의 조치로 이란의 취

약한 경제는 엠바고 현상이 바로 나타나기 시작했을뿐만 아니라 모사데크 정권

을 괴롭히는 경제난을 증폭시켰다.

 

모시데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하기 위해서 그해 9월 직접 미국으

로 건너갔으나, 안전보장이사회는 비겁하게도 그 문제 처리를 유보했다. 이런

행위에 대한 평가는 모사데크가 영-미의 석유 카르텔을 우습게 보았다는 결론

이다. 이러한 용기있는 약소국 지도자는 보기드문 유형이지만 모시데크  정권

의 붕괴는 얼마가지 않아 실현되고 말았다.

 

 

     

 

 

모사데크 몰락과 석유 카르텔의 공작

 

1953년 미국의 '슈워츠코프' 장군이 5년 만에 이란에 나타났다. 옛 친구들을 만

나기 위해 방문한 그는 이란 군대의 핵심 장성들을 만나 쿠테타를 선동하였으

며 성공시 그들은 권력을 약속받았다. 이란내 왕당파 분자들의 도움과 미국 중

안정보국은 'AJAX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1953년 영국의 비밀정보부와 전격

으로 협력하여 모사데크를 전복했다. 영국과 미국은 왕세자 '팔레비'를 지원

하여 모사데크에 맞서게 했다.왕세자가 돌아오자 경제제재가 풀렸다. 결국 영

미의 석유기업들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들은 그들의 권한에 도전하려는 어떠한

세력에게도 본떼를 보여주는 것을 실행했던 것이다. 바로 그 영-미 석유 기업

들이 25년 후에는 팔레비에게도 등을 돌리게 된다.

 

전후 미-소 냉전 기간은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에게 놀라운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데, 그들이 지목한 친공산주의자는 반드시 징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올가미를 씌우는 대로 그들은 권한을 마음대로 행사하면서 그들이 지목한

상대를 쓰러뜨릴 수가 있었으며 그러한 친공산주의자로 몰려 개도국의 정치

권력자들이 수없이 권좌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그 나라의

중요 원자재와 석유 자원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가 있었다. 1960년대 이탈리아

의 '마테이'가 이란과 러시아와 협력하여 석유 자립화를 꾀하다가 1962년 10월

27일 타고가던 전용기가 시칠리아에서 이륙하여 밀라노로 가던 도중 공중 폭

하여 사망한 사건 등도 영-미의 중앙정보국과 비밀 정보부에 의한 공작이었

는 사실이다

 

         

 

 

제1차 대전의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전후 처리의 일환으로 이라크와 시리

아를 각각 나누어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영국은 패전국 독일로부

접수한 당시 중동 석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터기석유회사(후에 이라

석유회사로 개칭)의 지분25%를 프랑스에 넘겨주는 대신 프랑스 통치지역인

 시리아를 관통하는 송유관 설치를 양해 받았다. 그러나 미국이 이를 가만히

고만 있지 않았다. 미국은 중동 석유이권에 대한 문호개방을 끈질기게 요구한

끝에 1928년 터키석유회사에 대한 경영 참여권을 획득하였다. 적선협정으로 불

리는 새로운 합의에 의해 영국의 터키석유회사 지배는 끝이나고 메이저들을 앞

세운 앞세운 영, 프, 미 열강의 중동석유에 대한 배타적 균점체제가형성되었다.

  그 후 석유경쟁은 중동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활발한 유전 개발활동 결과
1932

년 바레인, 1938년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각각 유전이 발견됐다. 제 

2차 세계대전을 맞아 중동의 석유는 더욱 절대적인 전략자원으로 평가됐다.

미 석유가 석탄의 대체연료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나 석유 생산은 늘어도 서

구의 석유 메이저의 몫만 커지는 상황에서 산유국의 불만은 커질 수 밖에 없었

다. 1950년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사데크는 영국·이란 석유회사의 국유화를 선

포하고 국영 이란석유회사(NIOC)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이란에서 물러난 영국은 석유재벌을 동원, 이란산 석유에 대한
불매운

동을 벌여 이란 경제를 마비시켰다.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고조

됨을 틈타 미국은 쿠데타를 도와 모사데크를 실각시키고 팔레비 왕을 복귀시겼

다. 자원민족주의 운동이 석유메이저의 힘에 굴복한 것이다.

  메이저들에 의한 석유 과잉생산으로 유가가 폭락하고 산유국의 수입이
줄어

들자 중동 산유국들은 공동대처에 나섰다. 전 세계 석유 수출 물량의 85% 이상

을 점유하고 있던 5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쿠웨이트, 이란, 베네

수엘라는 1960년 회합을 갖고 산유국의 이익옹호를 위한 석유수출국기구(OP

EC)를 창설하였다. 산유국의 석유자원민족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

이다.

  OPEC는 석유 메이저들의 일방적인 공시가격 변동을 억제하기 위해
고정 공

시가격 제도를 도입했고 추가로 회원국을 늘려 총 11개 회원국을 가진 국제기

구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OPEC에는 비아랍회원국들도 있어 때로는 입장 차이

를 보이기도 했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리비아 등 3개 아랍국은 19

68년 3월 별도의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를 결성했다.

  아랍 산유국들은 OPEC와 OAPEC결성 이후 석유자원의 이익보장을
위해 공

동보조를 취했다. 특히 사우디를 비롯한 4개 국은 1973년 석유자원의 25%를

국유화하였다. 이런 상황하에서 같은해 10월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

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불만을 품은 아랍산유국들은 황의표시로 석유 감

산을 결의하고 미국과 네들란드 등에 석유 수출 금지조치를 취햇다. 또한 나라

별 심사를 통해 친서방으로 분류된 국가에 대한 원유공급 제한 조치를 추가로

단행하여 제1차 석유위기를 가져왔다. 1974년 3월 석유금수가 해제되고 난 이

후에도 아랍산유국들은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진전시켜 1978년에 완전 국유화

를 이루어 석유주권을 되�았다.

 

제1차 석유위기의 여파가 진정되어 가던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를 주축으

로 하는 이슬람 성직자의 주도로 혁명이 일어나 필레비왕이 축출되고 이슬람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팔레비왕의 지나친 친미정책과 석유판매수입의 독점.

전횡이 사회불만의 씨앗이 된 것이다. 혁명과정에서 석유산업 근로자의 파업

에 이어 이란이 석유수출을 전면 중단하자 국제 석유시장의 가격이 폭등하여

이른바 제2차 석유위기가 닥쳤다.

걸프전 당시 도로에 버려진 차량들

산유국에서 기름을 못구해 대부분의

차량이 무용지물이 됐다.


  제2차 석유위기 이후 잠시 중동지역에 평화가 찾아 오는 듯 했으나 1990년

8월 이라크는 중동 지역의 맹주자리를 노리며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중동이

긴장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가운데 위기감을 느낀 사우디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걸프전)에 협력했다. 대부분의 중동 국가들은 지역의 패권을 한

국가가 가지는 상황을 경계하며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반대하거나 미국

의 이라크 제재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했다. 때문에 중동지역에 전쟁이 발발

했지만 석유공급에 차질이 빚어지지도 않았으며, 유가도 일시적 급변동으로

그쳤다.

  2001년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라크를 테러 지원 국가로 지목하고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다.

음은 이라크 차례였다. 대량살상무기 은닉을 이유로 후세인을 압박한 끝에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하여 후세인을 축출했다. 43일만에 일방적

승리로 끝난 이 전쟁에 대해 미국은 ‘테러 근절’ 또는‘민주주의 확산’을 표방

하고 있으나 이면에는 미국의 석유 이권 확장을 위한 전쟁이라는 견해가

배적이다. 이라크에 석유 이권을 갖고 있는 프랑스가 이 전쟁에 부정적 입장

을 견지한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이라크 석유의 매력은 매우 크다. 이라크의

매장량은 사우디, 이란에 이어 세계 3위이며 전세계 매장량의 약10%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또한 석유의 품질이 우수하며, 지표면에 근접하여 매장돼 있

어 생산비가 저렴한 잇점을 지니고 있다.

카블에서 바그다드까지:

테러와의 전쟁인가 아니면 석유 쟁탈전인가?

 

9.11테러는 적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공산주의를 대체하게 되었다.새로운

테러리스트는 세계 어디에나 있을 수 있으며 고맙게도 테르리스트들은 석유

매장지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는 이슬람 지역에서 대부분 출현하게 되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빈 라덴 만큼 고마운 인물이 없었다. 새로운 적을 �기에

고심하던 부시 행정부는 이슬람 테러 집단의 출현이 금상첨화였다. 대테러

전쟁을 선포한 부시 행정부는 일흔 줄에 접어든 럼스펠드 국방장관으로 하

여금 세계 권력 정치의 중심부에 서게 만들었다.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 밥 우드워드가 자신의 저서 <전쟁 중인 부시>에

서 설명한 바에 의하면,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진 다음 날인 2001년 9월

12일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폴 윌포위츠 국방차관은 이라크가 "테러와의 전

쟁 1차전 주요 표적"이 되어야 한다고 대통령을 설복하기 시작했다. 이는

테러 공격의 배후가 누구였는지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기도 전이었다. 

 

합동참모회의 의장으로서 제1차 걸프 전쟁을 책임졌던 '파월' 국무장관이

체니의 도움으로 "여론을 먼저 형성해야 이라크에 대한 조치가 가능해진다"

고 부시를 설득했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곧 시작될, 탈레반 정권을 제

거하기 위한 군사행동은 좀 더 큰 싸움을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했다. 우드워

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이제 막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부시는 이

미 이라크 침공을 위한 비밀 계획을 명령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슬람 원리주의자 탈레반이 이끄는 아프가니스탄은 빈 라덴이라는 한 사우

디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빈 라덴의 조직인 알카에다는 부시가 새롭게

선포한 테러와의 전쟁 � 번째 군사행동의 표적이 되었다. 

 

위싱턴 정부는 처음에는 탈레반 정권을 송유관로 사업의 가능한 파트너로

생각했다. 탈레반 대표들이 1997년 협상을 위해 '우노칼'사 초청으로 텍사

스를 방문햇으나 합의점을 �지 못하였고 비밀리에 부시와 체니와도 가까운

'엔론'사도 은밀히 탈레반과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하는 카스피 해의 석유와

가스 송유관로 혐상을 벌이고 있었다. 엔론은 2001년 11월 도산하여 미국

역사상 최대의 기업 파산자 사기극을 장식했던 회사였다.

 

엔론이 수십억 달러의 아프칸 송유관을 건설하도록 요구한 기업은 바로

체니의 옛 '핼리버턴'사였다. 체니 부통령과 부시의 재정 지원자였던 켄레

이 엔론 회장 사이의 비밀회담은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하는 엔론의 송유관

로에 대한 워싱턴의 지원과 연관이 있다는 징후가 있었다. 체니가 비밀회담

관련 문서를 하원 일반 회계국에 제공하길 거부하여 법정 대결로 끌고 갔다.

그 무렵 엔론의 모래성은 무너지고 있었다.

 

탈레반은 2001년 7월 워싱턴 측의 호의를 잃게 되었는데, 보도에 의하면 그

때 미국 측 협상가들은 "황금카펫 위에 앉아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이거나

융단폭격에 묻히거나 양자택일할 것" 을 강요하며 자신들의 송유관로 조건

들을 제시했다고 한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인프라를 재건하기 위해서

미국의 도움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송유관이 인도와 그 너머로 가는 수송로

될 뿐 아니라 아프간의 에너지 요구도 충족시켜주길 원햇다. 그러나 워

싱턴은 그러한 탈레반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래서 워싱턴은 2001년 9.11

사건으로 '카블'에 융단폭격을 가할 구실을 만들게 되었다. 

 

미 국방부는 아프간에 대한 '항구적 자유 작전'을 실행했다. 아프간에서

군사작전은 싱겁게 끝이 나,탈레반 정권은 2002년 초 붕괴되었으며 대부분

의 병사들이 미 중앙정보국의 후한 달러 보조금을 받은 후 순순히 항복했다. 

당시 부시의 아프간 및 중앙아시아 담당 국가안보 고문이었던 아프칸인 '잘

메이 칼릴자드'였는데 그는 우노칼사의 송유관 협상에도 관여 하였으며 이

라크 협상 대표로도 참여했다. 그는 전후 아프간의 임시 대통령으로 우노칼

사의 고문이었던 '하미드 카르자이'를 임명해줄 것을 권고했다. 

 

워싱턴은 아프간 침공으로 많은 것을 챙겼는데 국방에산을 연간 약 4천억

달러까지 대폭 증액하고, 옛 소련 영토 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우즈베키

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 이르는 상시 주둔 미군 기지망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군이 탈레반을 제거하자 옛 군벌들이 대량으로

아편을 재배하여 전세계에 헤로인이 대량으로 공급되게 되었다. 

 

미 정부가 카블에 카리자르를 앉히자마자 부시와 체니는 새로운 아돌프

히틀러인 후세인에 대한 전쟁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미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동의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부시 독트린을 적용하는

데 착수했으며 안전보장이사회는 동의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세계 석유지배

 

미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동의도 없이 유엔 헌장을 위반해가면서

영국,포르투칼,스페인,폴란드를 비롯한 소수의 우방을 제외하고 주요 동맹

국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2002년 바그다드에 대한 군사공격을 준비했다.

러시아,프랑스,중국,독일까지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려는 미국의 결정에

공공연히 반대했다. 특히 러시아는 반대가 심했는데, 루코일과 국영기업

두 곳이 23년간 이라크서쿠르나 유전을 개발하기로 계약을 맺고 있었다.

프랑스와 중국도 서부 이라크 지역에 석유 채굴권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

문에 반대했다. 이 세 강대국들은 모두 미국 측의 일방적인 전쟁이 이라크

석유에 대한 자신들의 꿈을 완전히 박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석유 수입국으로

부상하는 중이었다. 현 경제성장률대로라면 10년 내에 확실히 소비량의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세계 제1의 소비국이 될 전망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아직 국내 수요를 충족시킬 충분한 석유를 �지 못하고 있었으며

경제강국으로 자신들의 미래가 석유를 확보하는데 달렸다는 사실을 잘 알

고 있었다.

 

국제사회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 초읽기에 돌입하면

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문제는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

인가였다. 미국이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라고 알고 있던 세계의 많은 사람

들이 의아해 하고 있었으며 왜 전체 석유 생산업계에 불안을 일으키고 유

충격과 세계 경제불황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라크를 치려고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워싱턴의 공식적인 답변은 후세인

이 대량살상 무기를 갖고 있으며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과도 연관이 있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납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의심

이 결국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이미 13만 명의 미군 병력이 이라크에

서 후세인을 몰아내고 점령한 이후였다. 

 

예상한대로 이라크에 대한 군사공격 '충격과 공포 작전'은 몇 주 만에 끝

이 났다. 가공할 최신 무기가 총동원되었고 신형무기의 실험장이었으며

재고 군수물자를 처리하는 소모전장이었다. 이라크 군은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파죽지세로 밀려 수도 마그다드에서 부분적인 저항을 시도했

으나 대부분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정밀유도무기,엄청난 화력,공중공습,

신속한 기동,포위 기동,통신 마비,지휘통제시설 마비,전자전,야간작전,

정밀폭격 등 최신 군사무기의 경연장 같은 전장터였으며 역사적으로

그렇게 압도적인 화력과 참화로 조그만 땅덩어리가 초토화된 적은 없었

을 것이다. 그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CNN의 중계 방송화면은 미국을 우습게 보다가는 저런꼴을 당한다는

불안감을 전세계에 전파하였으며 부시의 "우리 편이 아니면 우리의 적

이다"라고 말한 것을 미국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미 정부가 이라크가 갖고 잇는 것으로 추정한 화학 무기, 생물학 무기,

핵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유엔 사찰단이 아무런 무기도 발견하지 못하

자 그들은 말을 바꾸어 진짜 이유는 후세인이 빈 라덴과 알카에다와 공모

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나중에 다시 독재자를 제거하고

민주 정체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으로 바뀌었다. 부시는 2004년

1월 연두교서에서 중동에서 자유 선거,자유 시장, 자유 언론, 자유 노동조

합을 개발하기 위해 전국민주주의재단 예산을 두 배로 늘릴 것을 요구했

다. 유고와 동유럽 소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동 지역 국가들에 대한 공

작을 확산하기 위한 예산 증액 요구였다. 영국의 블레어 총리는 미국의

봉 노릇을 하면서 사기전쟁에 함께 참여하였으며 전쟁의 명분에서 정치

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제일 뻔뻔스런 사람은 '윌포위츠' 국방차관으로서, 그는 예방 전쟁을 요

구한 1992년 백서의 작성자이며, 2000년 9월 새로운 미국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의 공동 필자이자 주요 주전론자였다. 그는 2003년 6월 싱가포르

안보회의 파견 대표들에게 "북한과 이라크가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경제

적으로 우리가 이라크에는 단지 선택권이 없다는 점이며 이 나라는 석유

의 바다에 떠 있는 셈이다"라고 하면서 북한이 핵탄두와 미사일을 개발하

도록 묵인되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2004년 '파월'은 미국이 이라크와 알카에다가 관련되었다는 어떠한 증거

도 �지 못했다고 시인하면서도 '그곳이 위험에 빠지면 미국도 위험에 빠

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라고 했으며 그러한 가능성은 있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통상적이면 전후 재건은 국무부가 맡아야 했으나 이라크 재건 사업은 국

방부가 맡았다. 국방부의 윌포위츠는 행정부의 좋은 친구들을 이라크 석

유사업에 우선권이 주어졌는데 체니의 핼리버턴사가 벡텔과 영-미 석유

기업들과 함께 그 명단의 우선순위에 올라 있었다. 미국은 유럽과 소련

그리고 모든 나라에 대해서 이라크의 부채를 탕감해줄 것을 요구했다.

외국군대에게 분담금을 부담하도록 요구한 반면 유엔 통제하의 평화 유

지를 허용하길 거부했다. 따라서 이러한 미 정부의 태도는 민주적이기보

다는 제국주의적인 속성를 드러내고 있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