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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신세계 질서의 강요

 

신세계 질서의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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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그다드로 진격하던 제3보병사단의 병사들이 무장한 용의자를 둘러싸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4일만에 이라크는 미국의 ‘힘’을 이미 실감하고 있었다.

 

 

볼커, 영국식 모델 차용

 

영국의 자유주의는 그들이 이름 붙인 상류계층과 하류계층으로 사회가 양극화 한다는 생각을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개념을 구상하기 전부터 발전시켜 왔다. 19세기 자유주의 무역의 결과 부는 상류계층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이러한 것을 영국식 자유주의 정치철학이었다. 미국 언론인으로 귀족주의자였던 '월터 프리만'은 이러한 계급사회를 현대적인 틀로 정의했는데, "사회는 대체적으로 무지한  다수의 대중과 책임있는 사람들인 특별계급 즉 엘리트 계급으로 나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국익을 결정하게 될 책임있는 사람들이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엘리트 계급은 사적인 부와  권력의 이해관계를 이해하지만 무지한 대중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반 대중이 실제로는 민주주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환상을 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을 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으로 묘사했다. 이는 레닌주의자들의 전위대 개념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전위대는 미래사회의 모델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요구했으며 두 모델 모두 다수 민중을 속이는데 근거를 하고 있다.

 

1957년 뉴욕에 집중된 소수의 국제은행들과 다국적 석유기업들의 거대한 권력은 영국 제국주의 모델을 토대로 미국의 자유주의 모델이 정의했는데, 명문 귀족보다는 돈에 의한 귀족으로 형성될 것으로 예측했다. 동부의 금융 귀족들에 의해 미국의 경제정책이 결정되면서 변질되어 해방과 자유라는 화려한 허울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더욱 급속히 변질되었다.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엄청난 오일 쇼크의 복합적인 충격과 초인플레이션은 미국에 새로운 토지귀족을 만들어 냈는데 하루밤 사이에 백만 장자가 된 것이다. 1979년 '볼커'가 미국에 강요한 통화 충격요법은 최종적인 완성을 초래했다.

 

1979년 '마가릿 대처'가 영국 총선에서 승리하여 수상에 취임했다. 그녀는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을 뿌리 뽑겠다는 강력한 후보 강령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대처는 취임 후 만성적인 정부 재정 적자 지출이 통화 과잉의 주요 요인이므로 인플레이션을 줄이기 위해 정부 지출을 대대적으로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은행은 고금리 정책으로 대출을 일제히 제한했다. 당연히 예상한 대로 그 결과는 불황이었다. 자르고 짜내고 한 것이 대처가 한 전부였다. 1979년 6월 대처의 재무장관 제프리 하우 경은 불과 12주 동안에 은행에 대한 기준 금리를 12%에서 17%로 무려 5%나 올리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산업과 주택 소유자들의 차입 비용이 전례 없이 42%나 증가하게 되었다. 국가 비상시를 제외하고 그토록 엄청난 금리 인상은 전례가 없었다. 동시에 잉글랜드은행은 금리가 높게 유지되도록 통화 공급을 대폭 줄이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차입 비용을 지불할 수가 없어 도산했고, 가계는 새로운 주택을 구입할 수가 없었다. 대처가 통화개혁을 단행하자 기간 산업과 시설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대처의 경제개혁은 그릇된 질병을 위해 그릇된 처방을 했다. 대처는 런던의 국제 금융계와 석유기업들이 내세운 도구에 불과했으며 식료품상의 딸에 불과했다. 대처가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정책들을 강요하면서 총리직 취임 당시 150만 명에 불과하던 실업자가 18개월이 지날 무렵에는 300만 명 수준으로 두 배나 증가했다. 노동조합들은 대처의 통화개혁 정책 추진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영국의 석유기업들은 고유가에 의한 막대한 이익을 바탕으로 해외투자에 아무런 제한이 없이 투자했다. 그들은 한마디도 대처의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건너가고 다른 세계로 확산되던 대처와 불커의 과격한 통화주의는 정부 지출 삭감과 세금 인하, 산업규제 완화, 조직화된 노조세력의 분쇄를 끓임없이 요구하면서 암처럼 퍼져나갔다. 전 세계적으로 금리가 상상을 초월하여 상승했다. 불커의 충격요법은 절망적이고도 무지한 '카터' 대통령에게 강요되었는데, 이에 카터는 기꺼이 관련 법안에 서명했다. 불커의 통화 충격과 그로 인한 미국의 경기 후퇴는 1980년 11월 카터가 선거에 패배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1981년 초 '레이건' 대통령은 공권력을 이용하여 항공 관제사 노동조합인 PATCO를 해체한 것이었다. 레이건은 영국의 모델을 그대로 수용하여 인플레이션에 대한 강력한 통치 수당을 강요했다. 경제정책 보좌관으로 프리드먼의 급진적인 통화주의는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가장 잔인한 정책중에 하나였다.

 

 

포클랜드 전쟁의 포함 외교와 멕시코 공세

 

대처와 불커의 급진적인 통화 충격 정책만 아니었다면 1980년대에 제3세계 외채 위기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 달러화로 표시된 제3세계의 석유 수입 평균 가격이 1979년 초 이란 오일 쇼크 이후 140%나 상승하면서 개발도상국은 자신들의 통화로 환산한 달러화가 미국의 높은 금리로 인하여 치솟고 있었다. 1980년 무렵에는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유로 달러화 차입금에 대한 날뛰는 금리였다. 석유 위기로 인한 석유수출국기구의 넘치는 달러는 런던과 뉴욕 금융시장으로 흘러들어 갔으며 갑작스런 공급 과잉으로 최대 규모의 무제한 대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개발도상국의 외채는 제1차 오일 쇼크가 일어나기 전인 1973년에는 1,300억 달러였으나 1981년에는 5,500억 달러, 1982년에는 6,120억 달러로 무려 다섯 배나 늘었다. 이러한 문제는 1979년 6월에 시작된 대처 정부의 금리 통화 충격요법과 그해 10월 볼커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똑같은 정책을 적용하자 런던 유로화 달러 시장에서 금리가 1978년 초 7%에서 1980년 초 거의 20%로 상승하면서 제3세계의 외채 이자 부담은 돌연 몇 배로 늘어났다.

 

그들의 외채 금리 부담이 1980년 이후 정점으로 치솟고 있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채무국들이 영-미의 주요 은행들에 대한 채무 불이행을 고려하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준비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영국의 대 '아르헨티나'와 벌인 '포클랜드 전쟁'이었다. 1982년 4월 대처는 하원에서 아르헨티나의 남대서양 연안 망망대해에 있는 '말비나스' 제도를 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몇 년에 걸친 협상이 결렬된후에 아르헨티나의 '길리티에' 정부가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재점령한 것이 그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 주변에 막대한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도 이유가 아니었다. 대처가 이르헨티나를 상대로 교전을 벌인 진짜 이유는 일종의 새로운 '포함 외교'에 의거하여 제3세계 채무 회수 원칙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 영국 함대의 3분지 2가 출동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외채 규모는 380억 달러로 국가 부도 사태 직전이었다. 미국은 영국의 포함 외교를 지지하도록  참모들로부터 레이건이 설득당했는데 이는 먼로주의에 역행하는 처사였다. 또 미 국무차관은 분쟁이 발발하기전 아르헨티나로 달려가서 미국은 이르헨티나의 행동에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갈리티에 정부에 통고했다. 아르헨티나는 어리석게도 미국의 이러한 통보에 자신들이 섬을 재점령하는 것에 미국의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미국은 아르헨티나를 교묘히 유도해 영국이 군사행동을 벌일 빌미를 제공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미의 결속된 행동을 감지하지 못한 나라가 바로 멕시코였다. '호세 로페스 포로티요' 멕시코 대통령은 눈부신 근대화 계획에 착수하여 자신들의 석유 재산을 사용하여 멕시코를 산업국가로 현대화 시키기로 결정했다. 항만,도로, 석유 화학단지,현대식 관개시설,핵발전 프로젝트 등을 설치하는 계획이 착수되었다.

 

1981년 볼커의 금리 충격요법 이후 뉴욕의 정책통들은 멕시코가 산업화되어 강국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멕시코가 터무니 없는 금리로 외채를 상환하도록 만들어 멕시코의 산업화 야망을 방해하는 데 개입하기로 했다.

 

먼저 그들은 언론 플레이를 시작했다.

미국의 언론들이 멕시코 패소화의 평가절하문제를 다루었다. 다국적 기업 자문 컨설턴트인 '윌리엄 콜비' 전 중앙정보국장이 자신의 고객들에게 대멕시코 투자에 대해 다음 해 총선 전까지 멕시코 화폐가 평가절하 될 것에 대비하라고 조언해주는 인터뷰 기사가 실리자 미국의 다른 모든 매스컴들에서 일제히 기사화 되었다. 그러자 멕시코 페소화에 대한 예금 인출 사태가 시작되었다. 멕시코 포르티요 대통령은 악의에 참 숨은 외국 세력에 대해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1982년 2월 멕시코 정부는 미국의 자본 유출을 안정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면서 긴축재정을 강요하는 수 밖에 없었다. 멕시코 정부는 환율 통제를 재실시 하지 않토록 압력을 받았는데 멕시코 정부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페소화가 일시에 30% 평가절하되었다. 그러자 멕시코 거대 민간기업들이 잇달아 도산하기 시작했다. 수입은 페소화로 벌여들였고, 부채 상환은 비싼 달러화로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페소화의 평가절하는 산업계획의 축소,인플레이션 유발을 초래했다.개도국 중에서 가장 급속하게 발전하던 멕시코가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멕시코는 문제의 채무국으로 위험도가 높은 나라로 지목되기 시작했으며 런던, 뉴욕, 취리히,프랑크푸르트 등지의 세계 각국의 은행들이 멕시코에 대출을 중단하고 만기 채무는 연장을 불허했으며 대규모 외채 상환 위기를 맞았다. 멕시코 포르티오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외채 상환에 대해 대국민연설을 세 시간에 걸쳐 방송하면서 채무 조건을 제멋대로 강요하는 채무국을 비난하면서 멕시코는 820억 달러나 되는 외채에 대해 지불 불능을 선언했다. 이에 레이건 행정부의 국무장관 '슐츠'는 고위층들과 협의 결과 채무국들의 채무 상환을 국제통화기금이 감독할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가장 큰 대가를 치른 회복이 될 것이였다.

 

슐츠의 운명적인 유엔에서의 발표는 포르티요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 정상들의 예견된 유엔 연설에 맞서 사전 세심하게 계획된 역공이었다. 포르티요의 유엔 연설은 라틴아메리카의 단결을 촉구하는 연설이었으나 실패하였는데, 그는 두달 후에 대통령에서 물러날 예정이었다. 브라질과 이르헨티나는 미 관리들의 방문을 받고 채무 위기의 공동 해결을 요구하는 멕시코에 동조하지 말도록 엄청난 협박과 압력을 받았다.

 

제3세계 채무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이 머리에 총구를 겨눈 상태에서 조직화된 약탈이 시작되었다. 소위 국제통화기금의 요구대로 '채무구조조정'에 그들은 서명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 단계로 그들의 부채를 사회화하는 조치였다. 국제통화기금의 처방, '융자 조건'이라는 치료약은 언제나 똑같은 것이었다. 채무국이 외국 은행 자금을 단 한푼이라도 맛보고 싶다면 국내 수입을 철저히 삭감하고, 식량과 생필품에 주는 보조금 등 국가 예산을 삭감하고, 자국의 수출품을 선진 산업국에 구미가 당기게 만드는 반면 동시에 선진 공업제품의 수입은 수입 가격이 비싸도록 자국 화폐를 평가절하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모든 것이 채무를 상환할 수 있는 경화를 확보하게 해줄 처방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같은 국제통화기금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오로지 1단계로서 다음의 제2단계 조치를 단행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들의 전체 외채 도는 상당 부분의 외채 상환 일정을 재조정키로 채권은행들과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은행들은 총 액면 채무액에 지연된 연체 이자를 더하므로 채무국들에 대한 막대한 미래 권리를 넘겨받는 계약을 하는 셈이었다.

 

1982년 이후 수많은 채무국들이 채무 재조정의 최종적인 결과는 그 채권은행들에서 신규 자금이 흘러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채무액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는 점이다. 개도국의 총외채 규모는 1982년 8,390억 달러에서 1987년 무렵에는 거의 1조 3천억 달러나 되었다. 이러한 동일한 과정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베네스엘라,잠비아,자이레,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부분 지역, 아시아 많은 지역에서 반복되었다. 국제통화기금은 가혹한 내핍을 강조하면서 고리대금적인 채무 상환을 종용하는 세계의 경찰이 되었다. 국제통화기금은 영-미가 주축이 되어 거의 모든 결정권를 쥐고 자신들의 통화 및 경제적인 이익을 전세계에 강요하는 수탈기관이 되었다.

 

1980년에서 1096년 사이에 109개 채무국이 외채에 대해 채권자들에게 지급한 이자만도 무려 3,260억 달러가 되었으며 동일한 채무애에 대한 원금 상환분도 3,260억 달러나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09개 국가들은 1986년도에도 여전히 총 8,820억 달러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채무의 악순환이었으며 경이로운 복리식 이자와 변동 금리는 그렇게 작용했다. 채무국들은 덫에 걸려들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석유 국가 독점권 같은 귀중한 그 나라의 자원에 대한 국가의 주권적 통제권을 넘겨주는 것으로 '만기 채무와 자신의 교환'이라는 방식으로 채무국들의 귀중한 자원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80년대 동안 개도국 지역의 전 국가들이 미국 한 나라에만 4천억 달러를 이전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덕분에 레이건 행정부는 세계 역사에서 평화시 최대의 재정적자를 해소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세계에서 가장 긴 평화시 회복'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고금리,달러 강세,미국 정부의 뒷받침이라는 안정성에 힘입어 1980년대 미국의 기록적인 재정 적자의 43%가 채무국으로부터 사실상 약탈한 자본으로 조달되었다.

 

오일 쇼크와 20% 고금리 충격과 1980년대의 산업 성장의 붕괴는 말 그대로 아프리카 대륙에 치명타를 날렸다. 아프리카는 개발에 필요한 자금의 90% 이상을 원자재 수출로 조달했다. 원자재의 달러 표시 가격은 계속 하락하였으며 1932년 수준만큼 떨어졌다. 1980년대 10년 동안 원자재 가격이 안정만 되었으도 아프리카 대륙은 1,500억 달러를 더 벌어 들였을 것이다. 1982년 아프리카 저개발 국가들은 미국,유럽,일본 등지의 채권은행들에게 대략 730억 달러의 채무가 있었으나 1980년대가 끝나갈 무렵 채무 재조정과 국제통화기금이 개입한 이래 그 채무액은 두배 이상인 1,600억 달러로 늘어났다.

 

 

'레이건'의 자업자득

 

'레이건'이 선거에서 승리했을 때 미국의 공.사적 부채는 모두 3조 8,730억 달러였으나 1980년대 말에는 10조 달러를 기록했다. 생산적인 경제의 채무 부담의 증가, 산업플랜트 및 노동력의 노후화 등 20년 동안 누적된 방만의 효과는 국가 공공 인프라의 전반적인 붕괴로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가 정기적인 유지 보수 미실시로 무너지고 교량은 균열이 가고 구조적 결함이 발생되었으며 상수체계가 오염되고 병원들이 황폐해지고 빈민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0년 부시 행정부는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자유시장 민간 주도를 제안했다. 극빈 생활 수준 이하로 살고 있는 사람 수에 대한 정부의 통계치가 1979년에는 2천 400만 명정도였으나 1988년에는 3천 200만 명으로 30% 이상 증가했다. 레이건-부시 조세정책은 미국 역사상 전례 없이 소수의 특권계층에게 부를 집중시켰다. 1980년 이후로 상위 20%의 실질 소득이 최대 32%나 증가했다. 미국의 의료비용은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고 영국의 두 배나 되었다. 3천 700만 명의 미국인에게는 어떤 의료보험도 해당되지 않는다. 실직 상태의 흑인과 히스패닉계의 가난한 빈민굴은 제3세계의 모습과 흡사하다.

 

영국도 11년 대처의 통치도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런던 시티의 금융 규제 철폐는 대처의 가장 자랑스런 업적이라고 하였으나 부동산 투기와 산업 투자와 공공 시설의 낙후를 초래했다. 금리는 두 자리로 상승했으며 불황으로 빠져들어 인플레이션은 1979년 대처가 임기를 시작했던 당시 수준으로 치솟았다.

 

 

우방들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헤쳐나갈수 있다

 

1987년 10월 29일 드디어 거품이 터졌다. 뉴욕 증권거래소 다우존스 지수가 역사상 하루에 최대 하락폭인 508포인트나 폭락했다. 그것은 1970년대 초 이후 영-미의 세기를 떠받쳐온, 규제가 철폐된 금융투기의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부시는 일본 수상 나카소네에게 압력을 넣어 일본은행으로부터 금리가 낮아져 미국의 부동산,주식,채권에 투자하여 일본의 자금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1988년 내낸 달러는 강세를 지속했고 부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듀카키스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시는 미-일 관계를 개선시키겠다면서 일본 관리들에게 언질을 주었다.

 

새로운 부시 행정부의 실질적인 계획은 미국의 막대한 채무 부담을 관리하기 위해 특정 우방국들에게 부담분담을 늘리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있고 그 결과 압도적인 군사적 힘과 규모를 가진 유일한 초강대국은 미국만이 남았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1989년 대통령 임기 ?해 크리스마스 기간 중 중남미의 약소국 파나마를 침공하기 위해 언론 플래이를 시작했다. 마약두목이라는 혐의를 씌워 파나마의 실질적  통치자 마누엘 노에리가 장군을 체포한다는 구실로 미국 특수부대와 폭격기를 동원하여 침공하였으며 그 와중에 6천 명 이상의 파나마인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대부분 가난한 시민들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중앙정보국은 소련의 붕괴로 새로운 적을 만들 필요성을 인식하고 주요 산업 동맹국들을 상대로 한 경제 첩보 활동 및 기타 활동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베르린 장벽 붕괴

 

1989년 11월 당시 동유럽 정세는 매우 극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호네커를 비롯한 동독의 극보수파 지도부외 비밀리에 회동하여 그해 봄부터 동독 전역을 휩쓸고 있는 자유를 요구하는 거대한 민중 운동에 항복할 것을 어느 정도 명령했다.  몇 주 동안 동독에서는 참된 민중혁명으로 구질서가 일소되었다. 계속적인 군비경쟁은 경제파탄을 몰고온 결과 결국 소련 자체가 붕괴 될 조짐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6년 세계 유가 폭락은 부패한 관료 조직을 개혁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소련에게 마지막 치명타가 되었다. 1970년대 초 이후 대 서방 석유 판매로 벌어들인 소련의 수출 소득은 1986년 이후 급감하였고, 바로 이때 국민들의 변화 요구로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연이어 일어난 경제적 혼란은 바르샤바 조약에 의한 동유럽 위성국가들과의 관계를 끓어버리도록 모스코바 수뇌부를 자극한 주요 요인이었다. 소련은 통일된 독일이 소련을 구원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