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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사담 후세인과 사막의 폭풍 작전

 

사담 후세인과 사막의 폭풍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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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그다드의 길 한복판에서 일어난 전투로 인해 쓰러져있는 한 시민을
     두명의 병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지 며칠 뒤인 1989년 11월 29일. 고도의 전문 암살범들이 콜 정부의 핵심 자문관인 '알프레드 헤르하우젠 도이치 은행 총재의 방탄차를 폭파했다. 그는 바로 며칠 전 <월스트리트 저널>지에 10년 내에 동독을 유럽의 가장 현대화된 경제 지역으로 재건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독일의 본 정부는 독일을 통일 하려는 계획과 독일 통일에 모스코바가 동의하는 조건의 일환으로 붕괴되고 있는 소련의 경제를 재건할 것을 돕는 방안 등에 관한 협의를 진행했다. 독일 총리는 그해 11월 말 대서양에서 우랄산맥까지 연결하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 계획을 국민들에게 발표했다.

 

이에 영국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통일 독일의 탄생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영국은 1914년 이전 시대의 오래된 이중 동맹을 은밀히 구축하여 독일의 위협에 맞서 새로운 화친 협상을 준비하기 시작햇다. 그런아 실질적인 전략적 격전지는 중부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개되었다.

 

1989년 어느 시기에 중동과 중동의 방대한 원유 매장지를 발판으로이용하기 위한 대담한 공격을 감행하려는 결정이 내려졌다.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영-미의 전략가들은 경제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유럽 대륙의 심각한 위협은 영-미의 석유 무기를 이용하여 대응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대웅책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대처와 부시 행정부의 고위 인사들은미국과 영국이 세계와 특히 중부 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을 틀어막을 수 있는 지점에 직접적인 군사 주둔을 허용해줄 날조된 구실을 만들어내기로 결심했다.

 

1990년대 초 영국과 미국 양측은 경제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어려운 국내 상황때문에 그 계획에 특별히 열중하게 되었다.1987년 10월 증권시장 폭락과 영국의 금리 상승 때문에 전후 시기 최악의부동산.산업.은행 위기가 닥친 이후 대처의 경제 개혁은 급속히 붕괴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부시가 통제 불능인 연방 예산 적자, 은행들의 도산, 치속는 실업률 등 1930년 대공황 이래 최악의 총체적인 불황에 직면했다.

 

 

사담 후세인

 

인구 1600만 명인 이라크는 8년간 이란과 성과 없는 전쟁에서 막 빠져나왔는데, 이 전쟁은 서방의 무기생산 업자들에게 중동에  무기를 판매할 방대한 시장을 제공했다는 것 외에는 성취한 것이 없었다. 미 정부는 1980년 사담 후세인에게 초반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잘못된 정부를 흘림으로써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도록 은근히 부추겼다. 1989년 무렵, 이라크 경제는 휘청거리고 잇었고 산업 및 농업에 대한 투자는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는 이란과의 전뱅을 치르는 동안 거의 중단 되었다. 그런대도 이라크의 후세인은 이란을 침공하여 8년간이라는 승산없는 전쟁을 치루었다. 후세인은 값비싼 이란과의 전쟁을 치른 후에 막대한 외채 부담을 안게 되었는데 1988년 당시 이라크는 여러 채권국들에게 650억 달러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이 부채 가운데 사우디와 쿠웨이트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도 많은 돈을 빌려주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라크의 원유로 상환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나머지 부채는 대객 프랑스.양국.미국 은행들에게 진 것이었으며 프랑스는 소련에 이어 이라크에 둘째로 큰 무기 공급국이었다.

 

영-미의 작전은 겉으로는 세계 석유 공급의 안전성을 확보한다는 미명 아래 군사 개입의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올가미로 후세인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1989년 미국의 비지니스 포럼 단체가 이라크를 방문했는데 후세인은 이라크의 현대화를 위한 미국의 투자 지원을 제안하였다. 이에 미국의 비지니스 단체의 기업가들은 후세인에게 먼저 외채를 구조조정해야하고 그 대가로 이라크의 국영 석유자원 상당 부분을 사유화하는 데 동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이라크는 지구 물리학자들이 소련을 제외하고 이라크에 가장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미개발 지역이다는 것이었다. 

 

예상한 대로, 후세인은 미래의 차관에 대한 막연한 보장을 대가로 석유 주권을 포기하라는 미국측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1989년 말 무렵,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란타 소재, 이탈리아 라보로 국립은행 지점을 통해 이라크로 흘러들어가던 23억 달러의 차관이 갑자기 중단되었는데 이는 부시 행정부가 승인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이라크가 그 돈을 전쟁 무기를 증강하는 데 은밀히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영국과 혈맹의 우호를 다져오던 쿠웨이트 왕이 등장한다.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영국은 쿠웨이트 왕을 이용하여 양쪽의 스캔들을 폭로하여 전쟁이 조기에 종결되지 않고 계속 지속되도록 하였는데 그 이유는 서구의 무기 수출을 대거 흡수하도록 충분히 긴장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쿠웨이트의 꼭두각시 놀음

 

1990년 봄 초 쿠웨이트의 임무가 바뀌었다. 1986-87년의 폭락 이후 세계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합의되었던 석유수출국기구의 생산 상한제를 어기고 자국의 석유를 석유 시장에 넘치게 공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90년 여름 쿠웨이트는 배럴당 19달러 정도의 가격을 13달러 이하로 유가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 이라크를 비롯한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은 경제적인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어 고의적인 석유 유가 하락을 획책하는 쿠웨이트에 대해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였다. 이라크는 옛 채무를 갚기는커녕 시급한 식량 조차도 수입할 수가 없었다.

 

요르단 암만에서 후세인은 두 나라 정상 외에 이집트,북에멘 등 아랍협력회의 동료 회원들에게 초강대국 미국의 출현과 함축적인 의미는 아랍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이 1년 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걸프 만에 주둔한 미군이 철수할 조짐이 전혀 없다는 시실을 걱정스럽게 지적했다. 후세인의 결론은 석유가 풍부한 아랍 세계가 한데 뭉쳐 석유 에너지를 이용하여 이득을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유럽,일본,소련과 관계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미의 고위층 세력들이 중동의 군사작전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후세인의 이러한 발언이었다. 유가를 둘러싼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기장이 최고조에 달한 1990년 7월 27일, '에이프릴 그리스피'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가 긴장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바그다드에서 후세인과 회담을 요청했다.  회담에서 글래스피는 후세인에게 미 정부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분쟁에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1주일이 못 되어 이라크 군대가 쿠웨이트를 침공, 점령했다. 쿠웨이트 '알사바' 왕가는 롤스로이스, 금,기타 귀중품들을 챙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도망쳤다. 미국의 중앙정보국이 미리 빠져나가라고 왕가에 알려주었기 때문이지만, 알사바 왕가는 쿠웨이트 군대에게 이라크의 침공 사실은 알리지도 않았다. 쿠웨이트가 점령된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은행과 미국 정부는 런던 소재 쿠웨이트 투자청에 유치되어 있는 쿠웨이트의 모든 자산을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곳의 총자산 규모는 대략 1000억 달러에서 1500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이라크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제재 조치를 강요하고 쿠웨이트 해방을 위해 무력 사용 권한을 승인받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주요 회원국들과 아랍 국가들, 터키와 다른 나라들을 매수하고 압력을 넣었다.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신세계질서'에 대해 선언했다.

 

1991년 1월 초, 이라크에 대한 공세적인 집중 폭격에 대비하여 사우디에서 베트남 전 이래 치대 규모의 전력 증강이 진행되면서 부시의 군사적 행동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다수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위싱턴 정가에서 중동 문제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던 제임스 에킨스는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다른 속셈이 있다고 기고했다. 당시 미국위 대외 정책은 키신저의 후배들과 그룹 사람들이 백악관을 점령하고 있었기에 키신저의 입김이 지속적으로 작용했다. 이시기 키신저는 언론을 통해 대이라크 전쟁을 촉구하는 글을 쓰면서 전쟁을 촉구하고 있었으며 그 반대의 목소리는 완전히 밀려나고 있었다.

 

 

전쟁 자금 모금 압력

 

부시는 후세인을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면서 석유 이외의 다른 속셈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도의 계산된 행동이었다. 독일의 첨단기술 산업이 동유럽과 소련을 재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부시는 독일의 이러한 첨단 기술을 수출하는 바람에 이라크로 흘러가 이스라엘을 목표로 수련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독일을 압박했다. 옛 동독을 재통합에 정신이 없던 독일은 깜짝놀라 재통합 비용의 대부분을 부시와 대처의 신세계질서에 대처하는 비용으로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1월 말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이른바 사막의 폭풍 작전 전쟁 비용을 지출하는데 총 545억 달러를 보증하겠다는 언약을 독일,일본,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받아내며 역사상 가장 강압적인 재정적 모금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이 종료되고 미국은 아마 190억 달러의 순익을 냈다고 보는 것이 자세한 정보에 근거한 추산 수치이다.미국의 무기들이 중동 지역에 대거 팔리게 되면서 계약이 성시를 이루고 서구 무기상들이 분노하였다. 부시 행정부는 미국이 가장 강력한 강대국 국가임을 스스로 입증했다고 승리에 찬 선언을 했다.

 

사막의 폭풍 작전과 1990년 후반 이라크에서 공급 받기로 한 삭유 협정의 와해로 국제 유가가 배럴당 30달러 이상 급등한 여파로 동유럽 경제는 황페해져 갔다. 원유를 수입하는 대금으로 자국의 농산물을 수출하였으나 전쟁후에는 원유를 사려면 서구의 달러가 필요했다. 이라크는 불가리아,헝가리 및 다른 동구 국가들로 부터 원유 대금 10억달러를 걸프전 결과로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사막의 폭풍 작전 결과 부시-대처의 걸프전은 이라크와 국민들, 쿠웨이트와 세계 경제에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을 입혔지만 부시와 대처의 신세계질서 속에 유럽 대륙을 다시 끼워 넣으려는 최우선 목표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있었다.

                                                             -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