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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오일 쇼크에 대한 반응

 

오일 쇼크에 대한 반응

 

 

 

 

 

석유달러 통화질서가 개발도상국을 유린하다

 

1974년 유가 인상이 세계 경제에 미친 막대한 경제적.금융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1975년 말 세계 특정 지역은 마치 치명타를 맞고도 회복하여 산업 발전을 재개하기 시작했다.영-미의 금융.석유 지도층들은 1차적인 이익추구의 목적은 달성되었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여건을 만들지는 못했으며 그들의 지속적인 전략적 지배는 아직 치명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다.

 

세계의 산업 발전의 측도는 철강 생산량에서 유추 판단 할 수 있는데, 오일 쇼크 당시 약 15% 정도 격감하였다가 다시 서서히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세계 해운 무역량도 오일 쇼크 당시에는 6% 정도 격감하였으나 1977-78년을 지나면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금융 및 통화 팽창의 충격에서 회복되지 못한 지역은 적도 이남의 약소국, 그리고 자생적 원유 공급 능력이 없는 나라들이었다. 개발도상국들은 대부분 석유 위기로 발전이 중단되었고, 산업 및 농업 발전에 자금을 조달할 능력을 상실하였으며 희망이 좌절되고 있었다. 석유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74-75년에는 수십 년 만에 세계 최악의 가뭄이 내습하여 아프리카,남아메리카,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심각한 수확량 감소를 초래했다. 식량이 부족한 저개발국가들은 오일 쇼크에 대처할 자금은 고사하고 늘어난 식량 수입 대금조차 제대로 조달이 불가능하여 기근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국제유가가 고공행진

키신저는 이러한 세계 정세속에서 주도면밀하게 행동했다. 키신저는 사우디의 막대한 석유수출 이익의 70%를 영-미의 은행에 투자토록 하였으며 그 570억 달러라는 막대한 금액 중 60% 이상을 영-미의 금융기관에 직접 흘러들어갔다. 키신저는 사우디와 비밀협정을 맺고 석유수출국기구가 석유 대금으로 오로지 미국의 달러화만 받아들이기로 한 배타적인 결정을 하였다.

 

이러한 협정은 미국 달러화와 뉴욕과 런던 유로달러 시장 금융기관들에게 엄청나게 귀중한 것임이 드러났다. 세계는 필수적인 에너지를 공급받기 위해서는 막대한 규모의 달러화를 사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달러화를 기반으로 한 유가 정책은 그후 10년이 넘게 달러가 오르내리면서 석유수출국기구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효력을 유지했다.

 

이렇게 석유달러가 런던과 뉴욕으로 환류되도록 조종된 결과 미국 은행들은 세계 은행계의 거물로 부상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고객인 세븐 시스트스와 다국적 석유기업들도 세계 산업계의 거물로 부상했다.

 

미-사우디간 비밀 협정 뿐만 아니라 석유수출국기구의 달러화 요구를 통해 워싱턴과 뉴욕의 은행들은 자신들의 취약한 금 태환체계를 석유에 기초한 달러화 체계로 바꾸었는데, 금 태환체계와는 달리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석유수출국기구를 실제로 통제한 사람은 누구일까? 내막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유수추국기구들의 독립성을 허용한 워싱턴 당국은 고유가를 원했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석유수출국기구가 뒤집어쓰길 원했던 것이다.

 

유가 인상으로 사경을 헤메던 개발도상국들에게 영-미 세력이 다음에는 값비싼 석유와 다른 중요한 수입품을 구입할 자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이러한 석유달러 자금을 빌린 저개발 국가들은 우선 국가 재정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재융자로만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콜롬보에서 정치적 지각변동이 시작되다

 

1975년 8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비동맹국 그룹 회원국인 85개국의 국가 원수와 고위각료들이 시리마보 반다라이케 총리의 스리랑카 정부 주최로 회동했다. 이 모임에는 인도의 인디라 간디, 알제리와 이라크를 비롯하여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 정부의 많은 국가 원수나 관리가 참석했다.

 

콜롬보 회의는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영-미 세력에 맞서 싸워온 백전노장 반다라나이케 총리는 8월 회의를 계기로 키신저의 석유 위기 여파로 악화되고 있던 개도국들의 경제 상황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회의 결과 선언문이 채택되었는데 이 선언문은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했다. 선언문에서 세계 무역 체제의 근본적인 개편과 세계 차원의 산업 생산 재편을 요구하면서 무질서하게 요동치는 환율과 기존 브레턴우즈 체제의 혼란을 강조하면서 투자자본이 개도국에 충분히 이전되도록 국제 통화체계의 근본적인 쇄신을 요구했다. 그리고 외채문제의 만족스러운 해결도 요구했다. 또 이들은 유엔회의에 참석하여 콜롬보 회의 결과를 선언하면서 두 강대국의 전횡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채무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이 충격은 즉각적이었다. 개도국에 대출을 추진하였던 은행들의 주가가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연방준비은행은 달러화 급락에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달러화 채무에 대한 개도국의 결집된 행동은 금융체계 전반에 그 충격파를 던졌다.이들 결합과 선언은 영-미의 브레턴우즈 체제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단호했다.

 

1976년 콜롬보 활동에 대한 미국의 정보부와 경제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키신저는 역공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유럽 공동체의 외무장관들이 비동맹 국가들의 요구에 따라 가능한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만났다. 이 자리에서 키신저는 은근히 유럽 국가들을 협박하면서 비동맹 그룹에 가장 우호적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를 각개격파하기로 마음먹고 미군을 본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 서독의 굴복을 받아냈다.

 

비동맹 그룹의 정치 지도자들이 하나하나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인도의 간디는 비동맹 그룹 유엔 선언 이후 채 여섯 달이 지나지 않아 3월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스리랑카에서는 반대당에 의해서 파업이 확산되면서 1977년 5월에는 반다라나이케가 물러났다. 이런식으로 비동맹 그룹의 맹주들이 하나하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키신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이러한 공작은 영-미의 지도층과 정보부들이 합동이 되어 은밀히 수행되었으며 영국은 미국이 굿은 일을 도맡아 하도록 하여 욕을 먹도록 내버려두면서도 자신들은 은밀한 수중에서 좀더 효과적으로 진행했다. 그 결과 개도국에 대한 자금 대출은 더욱 확산 되었으며 키신저에 의한 정치적인 승리가 확실해졌다.

 

 

원자력 문제에 제동을 걸다

 

콜롬보에서 제시된 폭넓은 공동 전선이 명목상으로는 분쇄되었지만 남-북반구 경제협력에 대한 구상은 점진적으로 실행되고 있었다.

 

1975년 후반 브라질 정부는 핵발전소와 핵연료 농축시설 및 기타 관련 기술의 복합단지를 구축하기로 슈미트 독일 정부와 중요한 협정을 맺었다. 독일의 지멘스사는 당시 단일 계약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핵발전 계약에 조인했다. 총비용 50억 달러에 상당하는 8기의 핵발전 원자로와 농축을 비롯한 핵연료 순환 전 과정을 위한 설비들이었다.  또한 프랑스와는 실험용 고속 증식로 건설을 위한 25억 달러 상당의 협력 협정에 조인했다. 이런 설비는 1990년까지 완공하기로 하였다.

 

브라질의 이러한 움직임에 미 정부는 독일과 브라질에 대해 협정을 취소하게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핵계획이 추진되면 부라질은 그들의 석유 공갈로부터 독립한 강대국이 될 것을 우려했다.

 

1970년대 초반에 멕시코는 일본 미쓰비시, 독일의 지멘스사와 핵발전소 계약을 맺었다. 멕시코는 앞으로 20년 동안 15기의 원자로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파키스탄 부토 정부는 프랑스와 협상하여 핵열료 농축시설을 1976년 완공하였다. 1976년 8월 키신저는 프랑스와 파키스탄 양측에 핵협상을 중단하도록 강하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으며 파키스탄에게는 '무서운 본보기를 보여줄것'이라고  협박했다. 1977년 부토는 지아 울 하크 장군이 이끄는 군사 쿠테타로 전복되었다.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 부토는 파키스탄 핵 프로그램에 대한 키신저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이란 국왕은 영-미의 지원하에 모사테크 정권을 전복하여 1953년 국왕에 오른 뒤 20년 간 영-미의 하수인 노릇을 했으나 석유 위기로 오일머니가 쌓이자 옛 꿈을 실현할 기회를 보았다.  1978년 이란은 핵발전소를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프랑스와 독일과 협력하여 1995년까지 20기의 핵발전소를 건설해 23,000메가와트의 전략을 공급한다는 계획이었다. 1974년 우선 5기의 원자로와 원자력 연구센터 한 곳을 건설하기로 프랑스와 협정을 잠정 체결햇다. 1975년에는 8기로 확대되어 총공사비는 86억 달러가 되었다. 이란은 프랑스의 우라늄 농축 시설 공사에 10% 지분을 매입하고 자본을 10억 달러나 투자했다. 1976년 독일 지멘스사와는 2기의 원자로와 기간 시설을 위해 76억 마르크를 계약하고, 1977년에는 190억 마르크 규모로 원자로 4기를 추가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란은 독일 및 프랑스에 지분을 인수하는 등 투자도 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은 독일과 프랑스의 거래를 봉쇄하려고 열심히 애썼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런 상황으로 원자력 기술은 서유럽이나 개도국 지역 모든 나라에 비석유 에너지 인프라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원천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란 팔레비국왕의 몰락

 

1978년 11월 카터 미 대통령은 3각 위원회의 또 다른 구성원인 빌데르베르크 그룹의 볼을 국가안보회의 브레진스키 휘하의 백악관 대이란 특별 대책본부 책임자로 임명했다. 볼은 워싱턴 당국이 이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원리주의 반대세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중앙정보국의 로보트 보이는 25년 전 자신들이 비밀 공작으로 권좌에 앉힌 바로 그 사람을 축출하기 위해 중앙정보국 주도로 새로운 쿠데타를 일으킨 고위 현지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53년 모사데크에 대한 쿠데타처럼 이란 국왕에 대한 쿠데타도 영미 정보부가 주도했는데, 이번에도 부패한 이란 국왕을 제거하는 공적은 허풍쟁이 미국이 부레진스키가 떠안게 한 반면 영국은 그들답게 안전하게 배후에 남아 있었다. 국왕은 1979년 1월 해외로 도피했고, 2월에는 호메이니가 국왕의 정권을 대체할 억압적인 신권국가 수립을 선포하기 위해 테해란에 입성했다.

 

1979년 말 영-미 금융 기득권 세력의 세계 경제 산업 잠재력에 대한 지배권은 다시 확고해졌다. 세계 석유 통제권은 다시 그들의 손에 들어가고 그들은 올림포스 산의 신들처람 행세했다. 그러나 불과 10년도 안 되어 그들의 드높은 산은 밑에서 들끓는 화산의 요동을 감지하게 된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