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1970년대 오일 쇼크는 누가 일으켰는가?

 

1970년대 오일 쇼크는 누가 일으켰는가?

  -세계 경제 역행 시키기-

 


★...미군의 이라크 침공 직전인 지난 2003년 3월17일 이라크 남부 바스라 유전지대의 원유관련 시설에서 검은 불꽃이 솟아오르고 있다. 이라크 최대 유전 지대인 이곳엔 앞으로 100년간 사용할 정도의 원유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바스라/ 한겨레자료사진

 

닉슨이 숨통을 끓다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해 말, 미국 경제는 다시 후퇴기에 접어들었다. 1970년 경기 침체에 대처하기 위해서 미국의 금리가 큰 폭으로 인하됐다. 그러자 투기적인 홧머니가 유럽과 기타 지역으로 좀더 단기 이익을 �아 기록적인 규모로 달러화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65억 달러에 이르는 자본이 해외로 순유출되고 미국의 경기는 여전히 후퇴가 지속되었다. 1971년 금리가 내려가고 통화 공급이 늘어나자 이러한 자본은 계속 늘어나 총 200억 달러나 되었다. 그해 5월에는 처음으로 월간 무역 적자를 기록하자 미국 달러화는 투매를 유발했으며 상황은 절망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미국의 공식 금 준비금은 공공 부채의 4분지 1도 못 되었다. 이론적으로 해외 모든 달러 보유자들이 금으로 바꿔줄 것을 요구한다면 미 정부는 극약 처방을 취하지 않고는 대안이 없었다. 

 

그해 8월 보좌관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닉슨은 달러의 금 태환을 공식적으로 중단하는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해 12월 워싱턴에서 '스미소니언 협정'으로 알려진 어슬픈 타협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미국은 공식적으로 금에 대한 달러화 가치를 우방국들은 100%를 요구하였으나 겨우 8%만 평가 절하하여 순금 온스당 가격을 오랫동안 고수해온 35달러 대신 38달러로 고정했다. 또한 통화가치의 변동 폭을 국제통화기금 브레턴우즈 규정의 1% 대신 2,25%로 확대 적용했다.

 

1968년 4월 금 문제와 브레턴우즈 규정 준수에 대한 미 정부에 맞선 드골의 도전은 미국을 궁지로 몰았다. 금 태환 중단과 그로인한 1970년대 초 널뛰는 국제환율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미국이 실질적인 수준으로 조정했더라면 매우 효과적인 해결책이 되었을 것이나 월스트리트가 내세운 명분이란 설령 경제 생산이나 미국의 번영을 희생해서라도 자신들의 금융 부문 권력은 손상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스미소니언 협정의 비효과적인 토대가 대규모 자본이 다시 일본과 유럽으로 달러화가 빠져나가자, 1973년 2월 12일 닉슨은 마침내 금에 대한 달러화의 가치를 10% 내리는 제2차 평가절하를 발표하여 오늘날까지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고수하고 있는 순금 1온스당 가격을 42,22달러로 고정했다.

 

 

키신저의 욤키푸르 오일 쇼크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욤키푸르 전쟁'으로 알려지게 된 사건에 불을 붙였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욤키푸르 전쟁은 오판이나 큰 실수 또는 이스라엘 국가를 상대로 군사 공격을 개시하기로 아랍이 결정한 데서 비롯된 단순한 결과가 아니었다. 10월 전쟁은 한마디로 닉슨의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인 키신저가 개발한 강력하고도 은밀한 외교 채널을 통해 미-영 정부가 비밀리에 기획한 것이었다. 키신저는 주미 이스라엘 대사 '심치 디니츠'와 이집트와 시리아측과도 외교 통로를 통해서 양측에 각각 상대의 민감한 사안을 거짓 설명해주어 전쟁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아랍의 '석유 금수 조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전쟁 준비에 대한 아랍 관리들의 도청 내용을 미 정보부 보고서는 키신저에 의해서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파렴치한 키신저의 왕복 외교는 전쟁이 일어나기전 대략 6개월 전인 전해 5월 살트셰바덴에서 열린 영-미 정치.금융.석유 최고 관계자들의 모임인 '빌데르베르크 협의'에서 나온 방침에 따라 워싱턴에서 입안된 것이었다. 아랍 산유국들은 세계의 거센 분노의 희생양이 되었던 반면 책임을 져야 할 영-미 관계자들은 막후에서 조용히 미소를 짖고 있었다.1973년 중순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주독 미국 대사에게 중동 분쟁에 자신들은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통보하였으나 그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은 중립이 천명되도록 허용되었고 그래서 아랍 석유 엠바고를 피할 수가 있었다. 석유수출기구가 유가를 400%나 인상하면서 빚어진 엄청난 결과는 영-미의 석유회사들이 다른 지역과 더불어 질이 낮던 북해 유전에 투자한 투자 수익성을 많은 이익을 남기면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해 10월 16일 석유수출국기구 빈에서 유가 회담 이후 베럴당 가격을 3,01달러에서 5.11달러로 70%나 올렸다. 같은 날 미국과 네들란드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 한다고 발표했다. 10월 17일 석유수출국기구는 생산량을 5% 감축할 것이며 "이스라엘이 1967년 점령한 아랍 땅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인민들이 법적인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달 5% 감산을 지속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오일 쇼크는 1973년 말 절정에 달했는데, 당시 닉슨은 '워트케이트 사건'으로 키신저가 실질적인 대통령으로 전권을 휘두르면서 석유 위기 동안 미국의 정책을 지휘하고 있었다.

 

닉슨의 1971년 8월 치명적인 달러화 추진 정책을 보좌한 인물인 '베넷'의 지휘 아래 미 재무부는 사우디아라비아 통화국과 비밀협정을 체결했는바, 그 협정 내용은 사우디아라비아가 횡재한 막대한 석유 수입의 상당 부분은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를 조달하는 데 투자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런던에 본사를 둔 유로채권 기업의 젊은 투자 은행가인 '데이비드 멀퍼드'가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어 영-미 주요 은행으로 투자되도록 현지에서 감독하면서 투자고문으로 활약했다.

 

키신저는 욤키푸르 전쟁이 발발하기 몇 주 전에 닉슨을 설득하여 국무장관에 임명되어 미국의 대외정책을 주도하고 있었다. 키신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의장이자 국무장관이라는 두 직함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어느 누그도 누리지 못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닉슨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어느 누구도 키신저처럼 그렇게 막강한 절대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그는 1973년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1974년 1월 1일 테헤란에서 회담 이후, 100%가 넘는 2차 유가 인상으로 석유수출국기구의 기준 유가는 11.65달러가 되었다. 이는 키신저에게 은밀히 압력을 받은 이란 국왕의 놀라운 요구로 성사되었는데, 이란 국왕은 처음에는 유가 인상을 반대하다가 다른 아랍권 국가들로 부터 지탄을 받았으나 키신저와 비밀 모의 후에 유가 인상을 지지하는180도 태도가 변화된 것이었다.

 

1949년에서 1970년 말까지 중동원유가는 평균 가격이 대략 베럴당 1.9달러 였던 것이 1973년 초에는 3.01달러, 1974년 1월 무렵에는 이제 400% 인상이 기정 사실화 되었다.

 

 

오일 쇼크의 경제적 충격

 

1973년 말 석유 엠바고가 미국 사회에 몰고 온 충격은 공황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1972-73년 엑슨사가 이끄는 거대한 다국적 석유회사들은 미국내 원유를 충분히 공급하지 않으면서 유가 인상을 부채질 했다. 1973년 석유 엠바고가 강타했을 때 그 충격은 극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1959년 미 무역협정법의 규정에 따라 당시 미국의 석유 수입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주체는 백악관이었다.

 

1973년 2월 닉슨은 백악관 특별에너지위원회로 알려지게 된 '에너지 삼두 정치'를 실시하도록 설득당했는데, 여기에는 재무장관 이며 경제 문제 담당 대통령 특별보좌관인 '슐츠', 백악관 참모 '존 에일리크먼', '키신저' 국가안보특별보좌관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어느누구도 모르게 빌데르베르크 계획을 조용히 추진하고 있었다. 미국내 석유 엠바고는 자동차가 대중 교통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은 자동차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생활환경이라 휘발유를 사려는 사람들이 주유소에 줄을 서서 장사진을 이루며 일종의 공황상태를 초래하고 있었다. 한편 소비제한 요구가 확산되고, 급격한 경기후퇴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장 충격이 큰 곳은 뉴욕으로 1974년 12월, '록펠러의 체이스맨해튼', '시티은행'이 이끄는 세계의 강력한 9대 은행가들과 런던-뉴욕 투자은행인 '라자드 프레레스' 등은 뉴욕 시장 '에이브러햄 빔'에게 뉴욕의 막대한 '연기금 관리'를 은행위원회, 즉 '자치제 원조공사'에 넘기지 않는다면 뉴욕을 재정적으로 파멸시킬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에 뉴욕 시장은 그 요구에 굴복했고 은행 채무를 갚기 위해서 도로,교량,병원,학교에 대한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시 공무원 수 만 명을 해고하는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가장 큰 도시 뉴욕이 쓰레기 더미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서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유가 인상과 석유 공급 제한의 충격은 극적이었다.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1930년대 이후로 최악의 경제위기 효과를 차례로 경험했다. 유럽 전역이 대량 실업과 기업의 줄도산으로 대공황에 버금가는 현상이 초래되고 있었다. 독일 정부는 석유 수입 비용을 줄이려고 일요일 차량 운행 금지 명령을 내렸다. 독일의 은행들이 파산하기 시작하였고 독일 마르크화의 위기가 이어졌다. 50만 명의 실업자가 쏟아지고 원유 수입비용이 170억 마르크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증가하자 물가는 8%나 치솟았다. 기초 에너지 원료 가격이 400%나 인상되자 그 충격은 산업.운송.농업에 파괴적인 충격으로 파급되었고, 철강.조선.화학 같은 핵심 산업은 깊은 위기에 빠졌다.

 

독일 '빌리 브란트' 총리는 그의 보좌관이 옛 동독 비밀경찰이었다는 사실과 석유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74년 5월 '브란트 하이네만'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대통령은 '헬무트 슈미트'를 총리로 지명했다. 이 시기 동안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의 내각이 실각되고 석유 위기가 경제에 미친 영향으로 인해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인도를 포함한 파키스탄,필리핀,태국과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모든 나라들이 1974년 연쇄적으로 점점 불어나는 국제수지 적자에 시달렸다. 당시 개발 도상국들의 무역 적자는 350억 달러였는데, 이는 그 전해인 1973년의 4배나 되었으며 세계 경제 전반에 걸친 산업 활동의 급격한 위축은 전후 어떠한 쇠퇴보다도 더 컸다.

 

그러나 키신저는 1973년 오일 쇼크가 세계 산업 성장에 막대한 충격을 가했던 반면 특정 기득권 세력, 즉 뉴욕과 런던의 주요 은행들, 미국과 영국의 세븐 시스터스 다국적 석유회사들에게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었다. 1974년 엑슨사는 순익면에서 미국내 최대 기업인 GE를 추월했다. 모빌,텍사코,셰브린,걸프를 비롯한 다른 석유회사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키신저가 명명한 '재순환되는 석유달러'인 석유수출국기구의 막대한 달러 수입은 국제 석유 거래는 물론 달러화를 취급하던 런던과 뉴욕의 주요 은행들에 예치되었다. 체이스맨해튼,매뉴펙처러스하노버,뱅크오브아메리카,바클레이스,로이즈,미들랜드은행 등이 석유 위기라는 뜻밖의 횡재로 생긴 이익을 향유했다.

 

 

핵장미의 만개를 열다

 

400% 유가 인상을 입안한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대체 에너지에 대한 즉, 핵발전소 건설을차단하고 저지하는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키신저가 하버드대 재학 당시 전 학장이자 키신저가 국가안보특별위원회에 자문관으로 잠시 근무했을 당시 그의 상관이었던 사람은 '맥조지 번디'였다. 번디는 최대 민간 재단인 '포드재단'의 총재로 미국의 국내 정책을 결정짓는 데 중대한 역활을 하기 위하여 1966년 백악관을 떠났다. 1971년 12월 번디는 새 프로젝트를 수립했는데 이는 에너지 정책 프로젝트로 400만 달러라는 놀라운 예산과 3년의 기한이 주어진 가운데 그 프로젝트는 '데이비드 프리먼'이 이끌었다. '선택의 시간: 미국의 에너지 위기'라는 제목이 붙은 번디의  포드재단 연구서가 1974년 석유 위기가 진행될 당시 논쟁이 한창이던 와중에 배포되었다. 그것은 석유 위기라는 중대한 시기에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리먼 연구서'는 풍력,태양 반사기와 태운 재생 쓰레기 같은 별스럽고 분명히 비효율적인 대체 에너지을 옹호했다. 포드 연구서는 핵에너지 관련 기술이 이론적으로 핵폭탄을 만드는 데 이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핵에너지 사용을 강하게 공격했다. " 연로 그 자체나 부산물인 플로토늄은 핵폭탄이나 폭발장치를 위한 재료로 처리되거나 직접적으로 핵폭탄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장래의 석유 지배권에 대한 주요 경쟁 상대는 핵에너지라는 사실을 제대로 지적했다. 미국 금융 기득권의 반핵 '녹색운동' 공세의 기본틀을 정의해온 것이 바로 번디의 프로젝트였다.

 

1970년대 초, 핵기술은 향후 석유나 석탄보다 훨씬 효율적인 발전설비로 선택받으며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오일 쇼크 당시 유럽 공동체는 이미 대규모 핵발전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었는데 그 계획에 따르면 1985년이 되면 유럽 대륙에 160기에서 200기에 달하는 새로운 핵발전소가 준공될 예정이었다. 독일은 45기가와트를 계획하였으며 프랑스,이탈리아도 20기의 핵발전소를 완공할 계획을 하고 있었고 스페인 조차도 20기의 핵발전 프로그램을 입안했다. 1기가와트의 핵설비는 100만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현대 산업 도시에 필요한 모든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이다. 

 

1974년 오리 쇼크의 직접적인 여파로 다음해 비공식적이고 비밀스런 '런던클럽'이라는 단체가 상립되었는데, 이 단체에는 영국,미국,캐나다,프랑스,독일,일본,소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핵 수출을 스스로 자제하려는 영-미국의 최초 노력이었다. 또 다른 비밀기구로 '우라늄 연구소'라는 비밀스런 단체가 런던에 설치되어 대영제국의 식민지 국가들이 동참하였다. 미국의 반핵주의자나 유럽지역의 반핵주의자 또는 환경단체들은 비밀리에 석유 그룹으로부터 막대한 지원 자금을 받으며 그들은 세계 각지에서 핵발전 설비 설치를 반대하는 환경 관련 시민단체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