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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석유 독점을 위한 영.미의 결속

 

석유 독점을 위한 영.미의 결속

 

 

 

 

제노바 회담

 

1922년 4월 16일 제노바의 빌라 데 알베르티에서 독일 사절단은 전후 국제경제 회의에서 그 충격파가 대서양 건너까지 미칠 엄청난 폭탄선언을 했다. 그것은 정치적 충격파였다. 발터 라테나우 독일 외무장관은 그곳에 모인 각국 장관들에게 독일과 소련은 쌍무조약을 맺었으며, 그 조약에 의거하여 러시아는 독일이 러시아에 산업기술을 파는 대가로 독일에 대한 전쟁 배상금을 탕감하기로 동의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라팔로 조약이라고 불린 독일과 러시아간에 맺은 이 조약의 발표로 그곳에 모여 있던 대표단을 경악하게 했다. 그 중에서도 영국과 프랑스가 매우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노바 회의는 1920년대 초 베르사유 이후 시기에 많은 전략적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한 영국 측의 요구로 소집된 것으로서, 우선 1914년 이전 런던이 중심이 된 국제 금본위제를 재확립할 기초를 다지기 위해 계획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불셰비키 러시아를 끌여들여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할 의도를 품고 있었다.

 

모스코바에 대한 영국의 이런 몸짖은 전쟁으로 파괴된 바쿠 유전을 장악하는 데 유리한 교역 협상의 문을 열도록 계획된 것이었다. 영국은 1918년에 시작된 백러시아의 반혁명 세력에 은밀히 자금을 제공하였으며 셸사의 헨리 디터딩은 러시아 바쿠 유전에 대한 혁명 이전의 원유 조차권을 사들였다.

 

디터딩과 영국이 1922년에 광대한 러시아의 유전을 개발하고 지배할 독점권을 확보하는 데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것처럼 미국의 록펠러 스탠더드 그룹을 비롯한 강력한 석유업계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수련의 원유 채굴권을 두고 다투는 영국의 주 경쟁 상대는 해리 싱클레어의 아메리칸싱클레어석유회사였다. 자신을 자수성가한 석유 독립주의자로 묘사하고 있었으나 실제는 스탠더드석유회사와 은행업계가 고용한 브로크였다.

 

싱클레어는 1920년대 초 런던 주재 소련 대표 레오니드 크라신을 만났다. 회담 결과 그는 미국 상원의원 앨버트 폴 및 아치볼드 루스벨트와 함께 모스코바로 갔다. 그곳에서 귀중한 바쿠 유전 개발권은 물론 사할린 섬의 석유 매장지 개발권을 얻어내고 소련 정부와 50:50의 합작회사를 설립해 그 회사의 원유 해외 판매에서 얻은 이익을 똑같이 분배한다는 협정을 교섭했다. 싱클레어 그룹은 그 프로젝트에 1억 1,500만 달러나 되는 거액을 투자하고 러시아 정부를 위해 미국에서 대규모 차관을 얻어내기로 동의했다. 모스코바는 싱클레어가 미국의 하딩 대통령과 워싱턴의 공화당 행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이 러시아에 차관을 제공하려면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승인해야 했으며 싱클레어는 동의했고 하딩 대통령은 소련 정권을 승인하라는 설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갑자기 와이오밍에서 한 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은 미국의 정부 재산으로부터 고수익의 원유 임차권 교부와 관련하여 터진 부정사건으로 싱클레어,폴,하딩 대통령까지 연루되는 사건이었다. 1922년 4월 14일 <월 스트리트 저널>의 전면을 장식한 이 사건은 하딩 대통령이 막 소련과 외교 및 무역관계를 재개한다고 발표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하딩 자신도 1년이 못되어 미묘한 상황에서 사망했다. 후임 캘빈 쿨리지 대통령 정권은 싱클레어와 바쿠 프로젝트, 그와 더불어 러시아를 승인하려는 어떠한 계획도 보류했다. 이럿듯 러시아 원유 개발을 지배하려는 미국의 기도를 방해하는데 영국 비밀정보부의 노련한 손길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었을 것으로 의심할 만한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독일이 영국의 허를 찌르려 하다

 

이는 제노바 회의가 열리게 된 배경으로서, 이 회의는 미국의 노력이 크게 후퇴한 틈을 타서 영국 기업들이 막대한 소련의 경제자원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승리를 거두도록 계획된 것이었다. 소련 외무장관은 영국.프랑스.미국 정부 모르게 독일과 맺어진 조약이었다. 독일 외무장관 라테나우는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 경제 재건 장관이라는 자격으로 영국과 연합국들에게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으로 전쟁 배상금을 상환하겠다며 우선 독일 경제를 회복하게 해 달라고 계속 청원해 왔었으나 그의 청원은 거절되었다. 이에 독일은 독일 경제를 살리는 길은 소련과 중공업 수출을 통해서 독일 산업을 재건한다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승리한 연합국들은 독일의 중요한 자원들을 체계적으로 빼앗았다. 독일의 모든 식민지,특히 탕카니카와 남서아프리카는 영국이 차지했다. 바그다드 신흥 경제시장은  사라지고 가장 귀중한 철광자원을 잃었다. 알자스로렌과 슐레지엔이 포함된 동쪽 지역을 빼앗김으로 가장 풍부한 광산자원과 농업자원도 함께 잃어버렸다. 독일의 철강자원의 75%, 아연자원의 68%, 석탄의 26%를 상실했다. 직물산업과 칼륨 광산도 사라졌다.모든 상선의 5분지 1, 어선의 4분지 1, 기관차 5천 대, 자동차 15만 대, 화물트럭 5천 대가 연합군에 몰수되었다. 연합군 배상위원회는 독일의 배상금으로 1,420억 골드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쟁 부채를 확정했는데, 이는 심지어 영국의 배상금 전문가도 독일이 상환할 수 있는 최대치의 3배가 넘는 금액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조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독일의 루르 산업 중심지를 점령하여 통치하겠다는 런던의 최후통첩에 독일 제국의회는 가혹한 요구조건을 승인했다.

 

독일과 소련의 라팔로 조약에 대한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독일 사절단은 연합국 측으로부터 배상위원회 등뒤에서 소련과 강화를 협상했다는 항의 각서를 받았다. 라팔로 조약이 체결되고 두 달이 약간 지난 6월 22일 라테나우는 베를린 그룬발트의 자택을 나서다가 암살되고 말았다.

 

영국은 프랑스 푸앵카레 정권과 막후 협상을 통해서 1916년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에서 제공된 모술 지역 영유권을 영국에 양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대가로 영국은 프랑스가 독일의 루르를 군사적으로 강점하는 것을 말로만 항의하고 프랑스에 비공식적으로 보장해 주었다. 벨기에와 이탈리아는 그저 상징적으로만 동참했다.

 

프랑스에 강점된 루르 산업 지역은 길이 100키로미터, 넓이 50키로미터지만 독일 전체 인구의 10%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독일 석탄,철강의 80%를 생산해내고 있었으며 화물 운송의 70%를 책임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프랑스의 강점으로 독일 산업 활동은 거의 정지 상태가 되었다.15만 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추방당하였으며 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2천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독일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독일의 다른 지방과 경제적으로 차단했다. 프랑스군은 독일 독일 은행들과 제국은행 지점의 자금,공장과 광산들을 모조리 빼앗았으며 자원을 송두리체 강탈해갔다.

 

그 결과 독일의 통화는 완전히 몰락했다. 전 인구의 저축이 사라졌으며 생활수준은 붕괴했다. 독일 국민 대다수는 빈곤에 허덕여야했다. 독일의 채권,담보,은행 예금 등 모든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었고 견실한 중간계층은 모조리 극빈자가 되었다.

 

 

영.미의 레드라인 협정

 

그 무렵 세계 금융과 경제 문제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영-미간의 각축은 해결되었다. 10년 넘게 세계를 흔들었던 석유 전쟁은 결국 '휴전'으로 해결을 보았는데, 이것은 나중에 '세븐 시스터스(일곱자매)로 불린 매우 강력한 영-미 석유 카르텔의 형성으로 귀결되었다. 1927년 셸사의 디터딩 경의 스코틀랜드 성아크나카리에서 평화협정이 공식화되었다. 영국 정부의 앵글로페르시아석유회사(브리티시석유회사)를 대표하는 존 캐드먼과 뉴저지 록펠러 스탠더드석유회사(엑슨) 회장인 월터 티글이 현대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카르텔을 맺기 위해 수렵 여행을 빙자하여 모였다. 세븐 시스터스는 실제로 하나였다.

 

1927년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인들을 중동에 들이기로 동의했고 이를 반영하기 위해 전시에 은밀하게 맺었던 협정을 변경했다. 다다넬스-팔레스타인-예멘-페르시아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레드라인이 그려졌다. 레드라인은 터키-시리아-레바논-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이라크-쿠웨이트를 둘러쌌다. 레드라인 안에서 세 나라의 석유업계는 오늘날까지도 대체로 유지되고 있는 완벽한 영토분활을 결정했다. 이라크 내에서는 록펠러 그룹,앵글로페르시아석유회사,로열더치셸 그룹,프랑스석유회사 등이 이라크 석유에 대해 75년 동안 독점적으로 채굴할 수 있는 '이권'을 얻었다. 쿠웨이트는 앵글로페르시아석유회사와 미국 멜런 가문의 걸프석유회사가 차지했다.

 

1932년 영-미권의 모든 7대 메이저사-엑슨(뉴저지 스탠더드석유회사), 모빌(뉴욕 스탠더드석유회사),걸프석유회사,텍사코,켈리포니아스탠더드석유회사(세브런)는 물론 로열더치셸과 앵글로페르시아석유회사(브리티시석유회사)-가 아크나카리 카르텔에 속해 있었다.

 

 

디터딩과 노먼, 샤흐트의 히틀러 프로젝트

 

베르사유 조약 이후 런던과 뉴욕 은행가들이 패배한 중부 유럽에 강요한 불안정한 국제통화 질서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1929년 갑작스럽게 끝이났다. 

 

당시 잉글랜드은행 총재로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핵심 은행가였던 노먼은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 증권시장의 붕괴를 재촉했다. 노먼은 조지 해리슨 뉴욕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게 미국의 이자율을 인상하도록 요구했는데, 해리슨은 그의 요구에 부응했고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미국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금융.경제 붕괴가 일어났다. 1931년 노먼과 영국 정부는 매우 놀라운 방법으로 중부 유럽에서 정치 동학을 바꿀 계획을 세웠다. 오스트리아의 가장 큰 금융기관은 빈의 크레디트안슈발트였다. 1920년대 경영난에 처한 작은 은행들을 합병하여 불건전한 과정을 통해 성장한 금융기관이었다. 당국은 취약한 증권시장의 불건전한 업체들을 합병토록 강요하는 등 점점 비대해진 크레디트안슈발트는 가장 강력한 세계 은행들 가운데 하나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가장 취약한 은행 가운데 하나였다. 오스트리아 경제는 제국의 해체와 분리로 귀중한 산업 지역과 원자재 생산지를 잃게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폐허위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1920년대 오스트리아의 정치 상황은 파산 상태에 있던 산업의 주요 부분을 점점 크져가는 크레디트안슈발트 손으로 넘어갔다.

 

1931년 초 오스트리아는 뉴욕 및 런던 은행가들과 협력하여 이룩한 불건전한 기초 아래에 세워진 국제금융망의 취약한 연결고리에 불과했다. 크레디트안슈발트는 침체된 오스트리아 경제로부터 자신의 영업에 필요한 자본을 충분히 확보할 수가 없어 런던과 뉴욕의 은행들로부터 초단기 차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중요한 대출고객이 되었다.

 

1931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점점 심각해져가는 세계 경제 불황에 뒤늦게나마 대처하려는 시도로 프랑스 정부는 독일-오스트리아 관세 동맹을 맺기 위해 양국이 발표한 협상 내용에 강력하게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정부는 오스트리아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해 크레디트안슈발트의 단기 대출을 중단할 것을 자국 은행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크레디트안슈발트의 예금 인출 사태 소문이 빈 언론에 보도되자 그해 5월 유럽을 뒤흔든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애타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 역사상 최대의 은행파산으로 이어졌다. 이는 런던과 뉴욕의 금융가 집단이 일부러 그렇게 되도록 획책한 것으로 1920년대 말부터 영국과 미국의 정치가들이 독일의 급진노선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과 미국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파쇼 정권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단기차관 향식의 대출을 통하여 정권을 지원하고 경제권을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사실 당시 중부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영국과 미국의 금융계가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뉴욕은 이러한 단기자금 공급원이었고 영국 외무성과 은행들은 정치적 노련미를 더하여 그 정책을 강행했다.

 

1920년대 앵글로색슨 집단은 이러한 노력을 독일에 가장 집중적으로 쏟아 부었는데, 1923년 독일 제국은행 총재에 취임한 샤흐트가 모건이 입안한 전쟁 배상금 상환에 대한 가혹한 도스안을 이행한 후부터 독일 경제는 런던과 뉴욕의 은행가들과 파리에 있는 그들의 협력자로부터 흘러들어온 단기 차관에 의존하게 되었다. 은행 측에서 보면, 독일에 대한 이러한 단기 대출은 그 당시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였다. 독일의 대부분 은행들이 이러한 단기대출로 그 기반이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불안정한 구조는 살짝만 흔들어도 전체가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역활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잉글랜드은행이 맡았는데 금리를 내리다가 1929년에는 대폭 올리자 예상했던 증권시장의 붕괴로 미국과 영국의 자금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시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1931년 5월 13일 불을 붙이기 위한 도화선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바로 그날, 거대 은행 빈 크레디트안슈발트가 파산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과 관세동맹 회담을 시작한 데 대해 제재를 가함으로써 오스트리아를 처벌하기로 했다.프랑스 자금이 오스트리아를 빠져 나가자 오스트리아는 독일 은행들이 갖고 잇던 자금들을 회수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산업의 70% 지분을 갖고 있던 크레디트안슈발트 은행은 붕괴되면서 중부 유럽 전역을 강타한 은행 연쇄 붕괴기 시작된 것이다.

 

잉글랜드은행의 노먼과 뉴욕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해리슨과 모건사와 월스트리트 친구들이 계속된 은행위기,경제공황,그와 관련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비극적인 사태 발전을 사실상 문자 그대로 지휘했다.사실 최소한의 올오버 조치만 취했더라도 이 위기를 통제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독일에 대한 모든 여신을 차단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빈의 크레디트안슈발트의 붕괴는 독일 다나트은행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다나트는 보유 예금액의 40%, 드레스드너은행은 10%, 도이치은행은 8%를 잃었다. 6월 말 무렵, 모건계 은행인 뱅커스트러스트는 도이치은행에 대한 대출을 끓어 버렸다. 해리슨은 루터 제국은행 총재에게 독일 자본시장에서 강력한 예금 긴축과 억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며 이것만이 해외자금의 이탈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 일어나 일은 독일 은행체계와 산업이 최악의 총체적인 붕괴로 이어졌다. 잇따른 은행위기와 산업 붕괴로 독일은 1931-1932년 이른바 백 년 만에 가장 혹독한 겨울을 겪었다. 이런 토양에서 과격한 나치스당과 같은 정치적 대안들이 자라나게 된 것이다.

 

1926년부터 샤흐트는 아돌프 히틀러의 급진적인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NSDAP) 또는 나치당을 은밀히 지지해왔다. 1930년 제국은행 총재직을 사임한 후 샤흐트는 독일의 산업 지도자들과 외국 금융지도자들, 특히 영국의 노먼 경 사이에서 연락관 역활을 수행했다. 

 

이 중대함 시기에 영국의 정책은 '히틀러 프로젝트'를 입안하는 것이었는데,그들은 이 프로젝트가 지정학적.군사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다. 이는 "영국이 범한 최대의 실수로 독일제국과 러시아제국이 서로 맞서게 하여 서로 죽을 때까지 피를 흘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고 영국의 특수공군부대 창설을 주도한 데이비드 스틸링 대령이 사석에서 말했다. 

 

1931년 런던에 도착한 알프레도 로젠버그였는데 그는 가장 영향력있는 영국 금융계의 대부 노먼을 샤흐트의 소개로 만나게 된다. 그는 뉴욕의 슈뢰더은행과 쾰른에 기반을 둔 민간은행과 제휴 관계인 런던 슈뤄더은행의 주요인물인 폰 슈뤄더 남작 슈타인과 만나는 등 중대한 런던 방문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후 폰 슈뤄더 남작과 사흐트가 독일 나치당의 정권 쟁취에 대단한 역활을 하게 되는데, 1932년 1월 4일, 폰 슈뢰더 남작의 쾰른 별장에서 히틀러,프란츠 폰 파펜,쾰른의 은행가 폰 슈뢰더는 히틀러가 예정대로 권력을 잡을 때까지 당시 막대한 부채로 사실상 파산 상태였던 히틀러의 나치당 재정을 은밀히 지원하기로 준비했다. 1933년 1월 히틀러는 폰 슈뢰더의 쾰른 별장에서 폰 파펜과 또다시 만났는데, 이 만남에서 슐라이허의 나약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우익 연합 정권을 세우기로 최종 결론을 내고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독일제국의 총리가 되었다.

 

노먼과 잉글랜드은행은 1931년 중대한 고비에 처한 독일에 단 한푼의 차관도 매몰차게 거절하면서 제공하지 않았으나, 1933년 초에는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무섭게 그 장본인 노먼은 잉글랜드은행의 차관 제공을 황급히 서둘렀다. 노먼은 새로운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추가 금융지원을 비밀리에 주선하기 위해 1934년 5월 베를린을 특별 방문했다. 히틀러는 노먼의 친구 샤흐트를 제국은행 총재 겸 경제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그에 보답했으며 샤흐트는 1939년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