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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로 인한 전쟁, 제1차 세계대전 본문
석유로 인한 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탱크
석유는 무기가 되고, 근동은 전쟁터가 되다.
파산한 영국이 전쟁을 일으키다.
1914-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영국이 독일제국에 선젖포고를 한 1914년 8월 전야에 영국 재무성과 대영제국의 재원이 사실상 파산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한 '세르비아'인에 의한 오스트리아-헝거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사건이었다. 1차 폭탄 테러에 살아난 대공 부부는 대공의 주장에 따라 부상자들이 치료받고 있는 병원을 2차로 방문하다가 현장에서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한달 동안 열딘 협상끝에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협상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자 7월 28일 선전을 포고했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지할 경우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무한 지원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다음날인 7월 29일 이미 동원령이 내려졌다.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 양쪽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온 독일 총참모부는 <슐리펜 계획>을 실행했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했으므로 독일은 군대를 동원하는 데 러시아가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먼저 서부 전선의 프랑스를 신속히 침공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 예상은 적중하였으며 1914년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고 곧바로 벨기에로 진격했다.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지 8일째 되던 8월 4일, 영국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다.
전쟁 기간 동안 석유는 군사전략을 성공적으로 변혁시키는 공인된 해결책으로 부상했다. 공중전, 기동성 있는 탱크전, 훨씬 빨라진 해전의 시대에는 새로운 연료도 풍부하고도 안전하게 보급하는 일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었다.
1914년 이전에 영국의 전략적.지정학적 목표는 최대의 산업 경쟁국인 독일을 분쇄하는 것뿐 아니라 전쟁의 전리품을 통하여 귀중한 자원을 아무도 대적하지 못하게 영국이 확고히 장악하는 일도 포함하고 있었다. 1919년 무렵 그 귀중한 자원인 석유는 향후 경제발전의 전략적 원자재로서 그 존재 가치가 입증되었다. 이것은 20세기 나머지 기간 동안 도전받지 않는 헤게모니를 장악할 전 지구적 신 대영제국의 창설, 즉 영국 주도의 신세계질서를 겨냥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다.
1918년 러시아 '카스피' 해 '바쿠' 유전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영국 측에서도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큰 노력을 기울이는 목표였다. 영국은 1918년 8월 중요한 몇 주 동안 우선적으로 그곳을 점령하여 독일 총참모부에 중요한 원유 공급원이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바쿠 유전을 차단당한 것이 독일에게는 결정적인 치명타로서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독일이 연합군을 이길 것 같았던 상황에서 바쿠 유전을 차단당한 지 몇 주 만에 독일은 강화를 청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석유가 지정학의 중심에 있음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향후 군사적.경제적 안정에 새로운 연료인 석유의 전략적 중요성이 크다는 사실을 모르는 강대국은 없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 전함의 40%가 석유 동력으로 바꾸었다. 서부 전선에서 영-프-미 연합군의 마지막 총공세 때에는 하루 1만 2천 배럴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석유가 소비되었다. 1917년 12월, 프랑스는 원유 공급이 매우 부족해지자 '포슈 '장군은 '클레망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긴급한 간청의 급전을 보내게 하여 미국은 '록펠러'의 '스탠더스석유회사'로 하여금 클레망소의 간청에 응답하여 포슈 장군의 프랑스 군대에게 절대 필요한 원유를 공급해 주었다. 바쿠 유전의 차단과 루마니아의 원유 공급조차 충분하지 않았고 원유를 운반할 트럭의 연료조차 확보하지 못한 독일은 1918년 마지막 공격을 성공적으로 준비할 수가 없었다.
전쟁에서 급부상한 석유의 이러한 역활과 함께, 영국의 목적에 특별히 주목하면서 전후 '베르사유 재편'의 맥락을 추적해 봐야 할 것이다. '베르사이유 평화회담'을 통해 '국제연맹'을 창설할 것은 노골적인 제국의 영토 강탈에 국제적 정당성이라는 허울을 부여한 수단이 되었다. 런던 시티의 금융기관들을 위해 수십만 영국인의 목숨을 희생한 일은 원자재, 특히 새로운 자원의 장악을 통해 향후 세계 경제발전을 지배하기 위한 치러야 할 작은 대가에 불과한 것 같았다.
영국의 은밀한 동방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 최고조에 도달하고 있을 동안인 1916년에 조인된 외교 비밀 협정이었다. 조인국은 영국과 프랑스 였으며 이탈리아와 러시아가 나중에 합류했다. 이 협정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라 불리며 내용은 전쟁 이후 아리비아 만의 미개발 석유 매장지에 대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영국의 목적과 배반을 상세히 드러냈다.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따라 독일과 아무런 성과 없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몰두하는 동안 영국은 놀라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인 140만 명 이상의 자국 군대를 지중해와 페르시아 만 일대로 이동시켰다. 이유는 러시아 전선을 도우며 러시아 곡물이 다다넬스 해협을 통해 서구 유럽으로 이동로를 확보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실상은 중동 지역의 장악이었다. 그러는 사이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는 거의 150만 명의 병사를 잃었고, 260만 명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사이코스-피코 협정으로 중동 지역이 나누어 졌는데, 프랑스는 주요 내륙 도시인 알레포.하마.다마스쿠스를 비롯하여 시리아.레바논을 애워싼 이른바 'A 지역'이라 불리는 곳뿐 아니라 당시 터키 석유회사에 도이치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석유 채굴권을 포함하여 북족으로는 석유가 풍부한 모술에 대한 통제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 권역의 남동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요르단에서 동족으로는 바스라와 바그다드가 포함된 이라크와 쿠웨이트 대부분에 해당하는 이른바 'B 지역'을 손에 넣게 될 것이었다. 나아가 프랑스 지역을 관통하여 하이파를 연결하는 철도를 부설하여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탈리아는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 산악 지역 해안선과 도데카니소스 제도의 상당 부분을 약속 받았고, 제정 러시아는 오스만령 아르메니아와 예레반 남서쪽의 쿠르디스탄 지역을 받기로 하였다.
이 은밀한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영국은 시리아와 레바론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고 트란스 요르단, 팔레스타인,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영국령으로 하는 것을 비롯하여 오늘날 지속되고 있는 현상대로 제멋대로 아랍 지역을 분할하였다. 이미 페르시아는 1905년부터 사실상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사우디아라비아는 그당시 영국의 전략적 이해에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영국의 몇 안되는 큰다란 실책 가운데 하나였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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