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석유 장악의 세계 다툼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석유 장악의 세계 다툼

두바퀴인생 2008. 1. 28. 10:10

 

 석유를 장악하기 위한 세계의 다툼

 


  
석유의 분출 :
유전굴착시 석유 광상을 덮고 있는 덮개암을 뚫으면 광상내 압력으로 인해 석유는 지상으로 분출된다.

 

* 등유를 초월하여 앞을 내다본 영국의 사령관

오늘날 석유로 알려진 검고 끈적끈적한 침전물(슬러지)이 1882년 당시에는 독일의 등불 제조업자 '슈토봐서'가 1853년 베를린에서 개발한 기술인 새로운 광물성 기름으로 등불을 밝히기 위한 연료라는 것 외에는 상업적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당시 그 연료는 '타이트스빌', '펜실베니아', 러시아 '바쿠', 폴란드 지역의 '갈리치아' 같은 특정 유전 지역에서 바위들 틈새를 통해 스며 나왔기 때문에 '석유'라 불렀다. 1870년대에 미국의 '존 록펠러'는 등유와 기름을 이용하여 다양한 '치료제' 시장을 개척하기 위하여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세웠다. 내연 엔진이 개발되었으나 아직 획기적으로 산업계를 바꾸지 못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러나 한사람, 영국의 함장이었던 제독 '피셔' 경은 부피가 큰 석탄 추진형 군함에서 새로운 석유 연료형 군함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향후 영국이 세계 바다를 장악하는 데 석유의 힘이 결정적인 전략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셔 제독은 석유가 석탄보다 질적으로 월등하다는 점에 대한 조사를 하였는데, 석유를 때는 디젤 모터로 동력을 얻는 전함은 연기를 전혀 내지 않아 적에게 들킬 염려가 없는 반면 석탄을 때는 군함은 그 내뿜는 연기가 10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였다. 그리고 석탄을 때는 모터는 대략 4-9시간이 되어야 완전 가동이 되지만 석유 모터는 30분 정도만 경과하면 완전 가동되고 5분 이내에 최대 동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함 한척에 기름을 공급하려면 12명의 인원이 12시간 정도 작업하면 되었으나 석탄 전함은 5백명의 인원이 5일 동안 작업해야 했다. 동일한 마력의 추진을 얻는데 석유 엔진은 석탄 엔진에 비해 3분지 1이면 됨었으며 하루 연료 소비량도 4분지 1이면 가능하였다.

 

* 불타는 바위의 비밀을 알아낸 '윌리엄 녹스 다시'

1905년 영국 비밀 정보부와 영국 정부는 마침내 새로운 연료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영국에는 그러한 석유가 생산되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1904년 영국 해군 최고사령관이 된 피셔 제독은 즉각 '영국 해군의 석유 공급 안정화 추진 위원회'를 설립했다.

 

당시 영국 해군은 페르시아 만과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아라비아 만에 극히 제한적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페르시아는 아직 정식으로 대영제국에 편입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몇 년 동안 '부시르'와 '반다아르바스'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인도에 인접한 바다에 다른 열강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전략적으로 인접한 걸프 만에 주둔하고 있는 상태였다.

 

1905년 영국 정부는 악명 높은 '노련한 간첩'인 '시드니 라일라(러시아인, 본명 지그문트 게오르게비치다)'의 중재로 그 당시 중동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으며 아직 거의 개발되지 않은 광활한 지역을 손에 넣었다. 그해 영국 비밀정보부는 라일리에게 호주의 지리학자이며 엔지니어인 '윌리엄 녹스 다시'로부터 페르시아만의 광산 탐사 독접권을 빼았아 오라는 임무를 주어 파견했다.

 

역사에 조예가 깊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다시는 고대 페르시아의 불의 신 오르마즈드의 성소에 있는 불기둥에 대한 설명이 그러한 특정 성소에 있는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나프타(석유)에 불을 붙이는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석유를 �아 고대 페르시아 지역의 그 장소를 �아내기 위해 수년 동안 뒤지고 다니고 있었다. 영국 은행들로 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그는 런던도 수차례 방문하였다.

 

1890년대의 페르시아의 새 군주 '무자파르 알딘' 왕은 당시 페르시아를 잘 알고 있으며 페르시아 왕족에게도 친근하던 다시에게 페르시아를 현대화시키기 위한 철도를 건설하고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 자문을 구했다. 1901년 이란 왕은 다시에게 상당한 액수의 현금 선납의 댓가로 칙령을 발표하여 이권을 내 주었는데, 60년 동안 페르시아 영토안의 모든 탐사와 시추권을 허용하며, 그 결과 발견된 모든 지하 생산물은 예외 없이 박탈할 수 없는 그의 자산으로 귀속됨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다시는 2만 달러에 상당하는 현금을 지급했고, 발굴한 모든 석유 판매액의 16%를 로열티로 지급하기로 동의했다. 그렇게 하여 이 호주인은 1961년까지 본인은 물론 자신의 모든 상속인과 양수인과 친ㄷ구들까지 페르시아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독점권을 인정받아 당시로서는 가장 귀중한 법적인 서류를 손에 넣었다. 다시가 최초로 석유를 �아낸는데 성공한 지역은 페르시아 만 북쪽 '슈슈타르 '지역이었다.

 

영국 비밀정보부의 사주를 받은 라일리는 1905년 다시를 추적하였다. 다시는 당시 은퇴하여 고향인 호주로 돌아가기 전에 파리 로스차일드 은행 그룹을 통해 프랑스인과 석유 합작 탐사를 벌이기로 서명하기 직전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파악한 라일리는 다시의 종교적 성향을 이용하여 성직자로 위장한 후 훌륭한 기독교계 기업이라고 소개한 영국 회사 앵글로페르시아석유회사와 계약하여 페르시아 석유자원 독점권을 넘기도록 다시를 설득했다. 영국 정부는 스코틀랜드 금융가 스트래스코 경을 그 회사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종교적 성향이 강한 다시는 가짜 성직자 라일리의 이야기에 결국 프랑스인과의 계약을 포기하고 라일리가 소개한 앵글로페르시아석유회사와 독점권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래서 영국은 자신들의 의도대로 페르시아의 석유 독점권을 교묘한 비밀공작을 전개하여 최초의 대규모 석유 공급원을 확보하게 된다.

 

* 영국, 독일의 중동 진출을 방해하다

1889년 도이치은행이 이끄는 독일 산업가와 은행가 집단은 오스만 정부로부터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아나톨리아 고원을 관통하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한 이권을 따냈다. 이 협정은 10년 뒤인 1899년 오스만 정부가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프로젝트로 알려지게 된 다음 단계를 독일 그룹에 승인하였을 때 더욱 확대되었다. 두 번째 협정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1898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독일은 자국 공산품을 수출하기 위해 동방과 시장 개척의 일환으로 터키와 강력한 동맹관계를 구축하기로 결정허고 1890년대부터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그 프로젝트 이면에는 잠재적으로 석유를 공급받을 목적이 깔려 있으므로 영국의 반발을 샀다. 199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중동에서 비극적으로 벌어지고 잇는 원한의 씨앗은 바로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후 20년 동안 유럽 대륙과 바그다드를 잇는 근대적인 철도 건설 문제는 독일-영국 관계에 알력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요인이었다. 1888년 도이치은행이 주간사인아나톨리아철도회사로 불리는 컨소시엄이 콘스탄티노플 외곽의 하이다르파샤와 앙골라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 이권을 따냈다. 8년 동안 공사 끝에 1896년에는, 경제적으로 황무지에 불과했던 지역에 총연장 1천 키로미터에 달하는 베를린에서 아나톨리아 고원의 코니아까지 철길이 뚫렸다. 철도 덕분에 콘스탄티노플과 오스만 제국은 사상 최초로 근대적인 의미에서 자국의 아시아 내륙 전역과 결정적인 경제적 연결을 이룰 수가 있었다.

 

영국 측에서 보면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영국의 해군력으로 공격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거대한 경제적 지역 블록이 독일의 지배하에 결속될 것이다. 이러한 장벽으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전략적으로 단절될 것이다. 세르비아 군사 고문이었던 라판은 베를린-바그다드 노선을 방해하기 위해서 영국의 전략을 넌지시 제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르비아는 영국의 동쪽 소유지를 방어하는 최전선이다. 만일 세르비아가 격파되거나 베를린-바그다드 체제에 편입된다면 광활하면서도 방어가 견고하지 못한 대영제국은

 곧 동진하는 독일의 충격파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1914년 이전 10년 동안 터키 전쟁, 불가리아 전쟁 등 끓임없는 정세 불안을 비롯하여 발칸 반도 전역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였다. 영국은 베를린-바그다드 동맹을 약화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하였으며 그 결과 걸림돌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프로젝트를 독일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였던 것이 아니라 영국의 동참과 협력을 구했으나 영국은 무시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1899년 11월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후에 영국을 방문하여 윈저성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 바그다드 프로젝트에 비중있게 영국이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후 15년 동안 영국 측에서는 언제나 독일 측이 쩔쩔매게 최종적인 협정이 성사될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면서 내부적으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철도 프로젝트를 지연시키고 방해할 궁리만 했다. 이러한 책략은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영국은 독일과의 협상 마지막 단계에서 비장의 카드를 만들었는데 바로 쿠웨이트 토후와의 동맹이었다. 영국 전함들은 토후 '무바라크 알사바의 아나사 족이 통제하는 샤트알이라는 수로 바로 아래에 위치한 걸프 항구를 터키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영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영국은 쿠웨이트를 손에 넣음므로 독일이 바그다드 프로젝트가 완성된 이후에 페르시아만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할 수가 있었다.

 

1912년 도이치은행은 바그다드 철도 연결 사업에 융자해주는 조건으로 오스만 황제로부터 철로 양쪽의 20키로미터 안에 잇는 모든 석유와 광물에 대한 전면적인 권리를 협상을 통해서 양도 받았다. 오늘날 그 철도 노선은 이라크령인 모술까지 뻗어 있다.

 

이당시 독일은 석유가 앞으로 산업과 군사면에서 엄청난 연료임을 깨닫게 되었다. 독일은 미국의 거대기업 록펠러 스탠다드석유회사의 트러스트에 묶여 독일 총 석유 판매량의 91%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도이치 은행은 9%의 지분만을 갖고 있어 결정권이 없었다. 이 당시 독일은 안정적인 석유 공급원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