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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협력과 갈등의 목표

두바퀴인생 2008. 1. 31. 18:29

 

 

석유,협력과 갈등의 목표

 

그림:Baghdad etm 2003092 lrg.jpg
                                      바그다드 폭격 장면

 

미국과 영국의 힘 겨루기

 

모건, 영국을 지원하다

영국은 1919년 베르사유 회담에서 가장 확실하게 세계의 지배적인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월스트리트 증권가의 제이피모건사가 조직한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의 예금이 영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1919년 영구은 미국에 47억 달러나 되는 막대한 자금을 빌린 반면, 국내 경제는 전후 불황에 빠졌고 산업은 휘청거렸으며 국내 물가 상승률은 4년에 걸친 전쟁이 끝난 후 300%나 상승했다. 또한 국가 부채는 924%나 증가하였으며 액수로는 당시 어마어마한 74억 파운드나 되었다.

 

1920년대 초 무렵, 대영제국의 원동력의 세 기둥인 세계 해상로 장악, 세계 은행과 긍융 지배, 전략적 원자재 통제는 새롭게 형성된 미국 '국제주의자' 체제로부터 각기 위협을 받고 있었다. 런던에 의해 수십 년 동안 훈련받았고 한때 친영파였던 이 미국인 집단은 이제 더 영국과 미국의 공통되면서도 모순된 목표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씨앗은 바로 이러한 갈등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870년대부터 영국의 가장 중요한 해외 투자시장은 미국이었는데, 이는 뉴욕의 몇몇 금융가와의 관계를 통해서 가능했다. 따라서 1914년 영국 전쟁성은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 구입을 위해 미국에 특별 사절단을 파견했다.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4개월째 접어들던 1915년 1월 무렵, 영국 정부는 미국의 민간기업인 뉴욕 금융회사 '제에피모건사'를 미국에서 구매하는 모든 군수물자의 단독 구매 대행사로 지명했다. 영국의 전쟁 부채의 독점적 금융 대행사로도 지정되었으며 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의 군수물자나 차관의 보증인 역활도 맡았다. 머간사가 꼭대기에 있는 거대한 금융 피라미드였으며 단일 금융사로 이렇게 거창하고 위험스러운 세계의 이권을 두고 도박을 한 적은 없었다.

 

제이피모건과 뉴욕 금융계의 역활은 연합국들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곡물과 식량 공급은 물론 미국의 모든 군수품과 전쟁물자 구입은 제이피모건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모건은 런던의 자회사인 '모건그렌펠사'를 활용했는데 파리 사무소인 '모건아르제사'가 업무를 대행하고 있었다.

 

1917년 1월, 전쟁 수행으로 탈진한 러시아가 무너진 후 영국과 프랑스가 붕괴될 위험 때문에 모건과 그의 뉴욕 금융신디케이트는 자신들의 선전 및 기타 자원을 동원해야 할 동기가 더욱 커졌다. 그들은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만이 모건과 모건의 유럽 고객들이 유럽에서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참패를 모면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자,영국 최고위 정부 당국자들과 우호적인 미 언론기관들의 신중한 도움을 받아 이 일을 수행했다. 그들은 미국이 정의로운 편에 서서 유럽 전쟁에 참전하도록 부추겼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미국의 참전을 결정적으로결심하게 만든 사건이 독일에 의해 발생되었다. 바로 1917년 2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의 선언이었다. 독일 잠수함에 의한 미국 유조선의 침몰은 미국이 중립을 끝내라는 언론의 집중적인 여론을 형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917년 4월, 미국 의회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자 모건을 포함한 미국 뉴욕의 금융계는 야심 찬 금융작전을 전개했다.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은 미국 정부의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자유공채와 채권 판매에 돌입했다. 미 재무부 발행의 채권은 모건사와 뉴욕의 다른 유수의 투자회사를 통해 판매되었다. 이러한 자유공채와 채권의 총발행액은 1919년 6월 30일까지 214억 7,800만 달러라는 경이적인 액수를 기록했다. 전후 베르사유 비밀회의에 참석한 미국의 금융계는 청구서를 작성하여 독일이 연합국에 배상해야할 정확한 액수와 수단을 궁리하기 위하여 영구적인 '특별배상위원회'를 설치했다. 영국 정부와 연합국들은 미국이 전쟁 부채를 탕감해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모건을 포함한 미국의 금융계는 허용하지 않았다. 모건사는 미국이 참전하자마자 자신들의 대영 민간 차관을 미 재무부의 일반 부채로 은밀히 떠넘겨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의 부채를 사실상 미국의 납세자들의 부담으로 돌려 놓았던 것이다. 미국 정부는 단순히 뉴욕 국제금융가들의 새로운 힘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점점 전락하고 있었다.

 

 

영국, 세계 석유 이권을 독차지 하다.

1920년 4월, 미국이 불참한 가운데 연합국 최고회의 장관들은 옛 오스만 제국의 중동에서 어느 나라가 어떤 석유 이권을 가질 것인지 세부 사항을 결정하기 위해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만났다.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와 '알렉상드르 밀레랑' 프랑스 총리는 '산레모 협정'을 맺었는데, 이 협정으로 프랑스는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영국이 개발하는 석유 지분의 25%를 받은 반면 메소포타미아는 신설 국제연맹의 보호를 받는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기로 합의되었다.

 

산레모 석유 협정으로 영국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채굴한 모든 석유의 25%를 프랑스에 주었다. 그 대가로 프랑스는 영국의 정유회사들이 프랑스령 시리아를 통해 지중해의 한 석유 항구까지 송유관을 운영하는 권리를 승인했다. 산레모 협정은 그 지역의 채굴권이 다른 나라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영국이 차단할 수 있는 조항을 삽입했다. 전쟁으로 프랑스가 영국보다 경제적으로 약화되면서 옛 오스만 제국의 아랍 중동의 풍부한 석유를 중심으로 세계 석유 지배권에 대한 프랑스의 지지를 확보한 영국의 대성공으로 드러났다.

 

1921년 3월, 영국의 식민장관인 '윈스턴 처칠'은 새롭게 획득된 근동 지역을 정치적으로 최종 분할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의 근동 전문가 40여 명을 '카이로'에 소집했다. 카이로 합의한 계획에 따라 메소포타미아는 '이라크'로 개명되어 메카의 하심가 후사인 '이븐 알리'의 아들인 '파이살 이븐 후사인'에게 주어졌다. 영국 공군 항공대가 이라크에 영구적으로 주둔하고 그 관리는 '앵글로페르시아석유회사' 관리들의 효율적인 통제에 맡겼다.

 

1921년 4월,미 국무부가 중동에서 채굴권 공유를 열망하는 미국의 '스탠더드석유회사'들을 대신해 공식적으로 항의하자 영국 외무장관 '커즌' 경은 영국의 중동령에서 미국계 회사에게 어떠한 채굴권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짤막한 답신을 위싱턴 주재 영국 대사에게 보냈다.

 

이처럼 산레모 협정은 세계 석유 지배권을 두고 영국과 미국의 기업들 사이에 맹렬한 각축전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각축전은 1920년대 내내 벌어졌으며 미국과 영국이 '레닌'과 '스탈린' 치하의 신생 '볼셰비키 정권'과 외교 및 무역관계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미국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로열더치셸'은 네들란드령 동인도,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전후 중동의 대부분 지역에서 방대한 석유 채굴권을 굳건히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영국과 미국의 석유 각축전이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멕시코 석유 분쟁

1910년 멕시코 만의 작은 연안 도시 '탐피코'에서 석유가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는 것이 발견된 직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미군을 멕시코에 파견했다. 진짜 목표는 멕시코 정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버티고 잇는 영국의 이권이었다. 1912년 탐피코 항구에 머물던 중 미 해병들이 억류된 사소한 사건을 구실삼아 윌슨 대통령은 미 해군 함대에 '베라크루스'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포격을 퍼부으며 상륙한 미 해병대는 멕시코 세관을 점거했고 그 와중에 20명의 미국인과 200명의 멕시코인이 사망했다.

 

미국의 목적은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의 정권을 몰아내는 것이었는데, '우에르타' 장군은 영국의 '멕시칸이글석유회사'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았고 재정적인 지원도 받고 있었다. 멕시칸이글의 사장으로 후에 '코우드레이' 경이 된 '위트먼 피어슨'은 영국 정부가 고용한 석유 프로모터로서 영국 기업들을 위하여 멕시코의 잠재적 석유 매장지를 분할하는 데 '디터딩'과 '셸사'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멕시칸이글은 윌슨의 미군이 칩입할 무렵 멕시코 석유 절반에 대한 채굴권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독일과 전쟁이 임박했다고 예상한 영국은 약삭빠르게 우에르타 정권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했으므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장군을 즉시 합법적인 정권으로 승인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석유회사는 현금으로 10만 달러와 막대한 연료 차관을 포함해 총과 돈을 카란사에게 쏟아부었다. 미국의 석유업계가 영국의 석유업계로부터 멕시코를 빼았은 것이었다. 그 당시 탐피코 유전은 세계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한 유정에서 하루 20만 배럴이라는 막대한 원유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후 카란사가 미국 석유회사들의 이익보다는 멕시코 경제의 국익을 보호하는 쪽으로 기울자 1916년 스탠더드석유회사는 카란사에게 맞서도록 떠돌이 도적떼 '판초 비야'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카란사를 집중공격토록 하였다.

 

미국이 유럽 전쟁에 뛰어들기 직전에 퍼싱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잠시 동안 멕시코에 파병되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유럽 전쟁으로 인하여 카란사 문제는 일단 보류된체 대통령직을 유지하던 카란사는 1920년 베르사유 회담 직후 암살되었다.

 

영국 석유 지배권의 비결

1910년대와 1920년대 중반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 시기에 피어슨 회장이 이끄는 영국계 회사인 멕시칸이글석유회사는 멕시코 원유시추에서 강력한 입지를 유지하면서 미국의 록펠러 석유회사들의 견제 대상이 되었다. 피어슨 그룹은 영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집단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언론과 주요 기업에 상당한 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영국은 전 세계의 주요 원유 매장지를 �아내기 위해 영국 외무성의 정책,비밀정보부,영국 석유업계는 은밀하면서도 매우 효율적인 방식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는데, 다른 나라들은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1920년대 초 영국 정부는 외관상 민간기업을 내세워 석유 매장지로 추정되는 주요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서 로열더치셸,디터딩,앵글로페르시아석유회사, 그리고 영국통제유전이라 불리는 명목상 캐나다회사 등 네 개의 회사가 그 역활을 하였는데 비밀정보부 활동을 벌였다.

 

1918년 '코스타리카'의 '티노코' 정권에 대한 영국 측의 승인을 이끌어냈는데, 그 대가로 영국은 파나마 국경과 중요한 운하지역 부근 700만 에이커나 되는 지역의 석유 채굴권을 얻어냈다. 1921년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재빨리 코스타리카 정권을 위해 개입했다. 새로운 정권은 이전의 티노코 정권이 인정한 모든 채굴권을 무효로 선언하고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즉시 대규모의 채굴권을 얻게 된다.

 

그 시기에 '영국통제유전'은 남쪽으로 '베네수엘라'의 '마라카이보'로 옮겨 갔는데, 1922년 그곳의 '오리노코 강' 어귀 근처에서 풍부한 새로운 유정이 발견되었다. 그러자 로열더치셸,록펠러의 스탠더드석유회사 등이 서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정부의 은밀한 지원에 의지하여 전 세계의 비밀 정보망을 활용할 수 있었던 영국인들이 거둔 성공은 대단했다. 영국은 세계대전 직전인 1912년에 전 세계 석유의 12%, 1925년 무렵에는 세계의 향후 석유 공급을 대부분을 장악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