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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브레턴우즈'의 신세계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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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세계를 누비며 활동하고 있는 뉴욕의 대형 금융회사들은 미국내 지역재투자법 관련 실적 발표에 해마다 촉각을 곤두세운다. 금융회사들이 몰려 있는 뉴욕 월가. <한겨레> 자료사진. |
전쟁의 페허위에서 새로운 제국이 탄생하다
전 세계를 강타하여 5천 5백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6년 동안의 전쟁이 끝난 1945년, 세계는 여러면에서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세계의 방대한 지역, 특히 동유럽 대부분의 지역과 남반구의 저개발 지역들에게 1945년은 단지 새로운 만성적인 경제전쟁으로 이행한 시점에 불과했다.
1919년 베르사유 평화조약 이후 대영제국은 최대로 확장되어 그 통치권이 지구 전체 표면의 4분지 1에 걸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었다. 그런데 겨우 30년이 지난 1949년에는 억압적인 영국에 대항하는 식민지의 독립요구가 이어지면서 대영제국은 모든 지역에서 와해되고 있었으며 역사상 최대의 동란기에 처해있었다.
1946년 2월 인도 주둔 영국 해군의 반란 이후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전후 영국 노동당 정부는 '미얀마'의 '마운트배튼' 자작을 인도의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영국군과 정부 행정을 철수시키는 임무가 주어졌다. 마운트배튼이 광활한 인도를 분할하여 무슬림이 주 인구인 동.서파키스탄을 분리하였고 이러한 그의 작업은 1947년 8월 15일 끝이 났다. 그로부터 몇 년 안에 영국은 아프리카, 태평양, 지중해에서 제국의 대다수 지역에서 공식적인 식민통치를 끝냈다. 그것은 영국의 배려나 식민지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정이라기 보다 1950년대 초 전후 지배권 형태를 바꾸지 않으면 안될 주요한 사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결과로 영국은 금융파워를 기초로 형성했던 자국의 무역 메커니즘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막대한 해외 투자는 전쟁 비용을 지출하기 위해 이미 팔린 상태였으며 국가 부채는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치솟았다. 내부적으로 산업 설비와 장비는 낡아 부식되고 심지어 전기조차 제대로 공급이 어려운 실정이 되었으며 가계는 헐어빠지고 국민들은 기진했다. 전쟁 후 영국의 수출은 전쟁 전의 31% 수준이었다.
전후 영국은 미국에 의존하여 존속하면서 유럽 동부지역을 포한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미국의 참여를 허용하고 그들의 지배지역에 동참시켰다. 이러한 특별한 관계는 영국 왕립 국제문제연구소와 뉴욕 외교협의회가 베르샤유 조약 이후 조심스럽게 공조체제를 이루고 있었으며 석유에 대한 카르텔도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영국의 특수공작집행부는 미국의 전략사무국을 훈련시켜 전후 미국의 중앙정보국의 출현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진용은 이후 미국의 정책에 끼친 영향은 비극적인 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전쟁 직후 미국의 정책 방향을 재정립할 중요한 전환점에서 영국의 '처칠'이 개입하여 새로운 영-미 관계를 설정하고 세계 지배를 위한 '철의 장막'이론을 제창하게 만들었다. 처칠은 '트루만'과의 회담에서 영국에 확실히 유리하게 정세를 돌려 놓았다. 미국의 중앙정보국은 런던에서 훈련받은 전략사무국의 전시 조직망을 기반으로 설립되었으며 미국의 국방정책은 미.영이 공유하는 정보와 군사방위 기밀을 토대로 수립됐다.
달러화 본위, 거대 석유회사, 뉴욕 은행들
영-미 석유기업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엄청난 파워로 부상하게 되었다. 1944년 뉴햄프셔 '브레턴우즈'에서 영국과 미국의 협상가들 사이에 타결된 통화 및 경제 문제에 대한 전후 '신세계질서'를 위한 최종 합의에서 영-미의 세계 지배는 영국의 '케인즈 '경과 미국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 재무차관보 사이에서 결정되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세 기둥'을 중심으로 수립되었는데, 세 기둥이란 회원국의 분담금으로 국제수지 균형이 위기에 처할 경우 사용할 수 있는 긴급 준비금을 조성하는 '국제통화기금(IMF)',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를 위해 회원국 정부에 차관을 공여하게 될 '세계은행(World Bank)', '자유무역'의 조정된 의제들을 만들어내는 임무를 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말한다.
그러나 전쟁 후 영-미의 세계 통화 및 무역 지배를 공공히 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기획한 몇몇 조항들이 있었는데, �째,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내에서 실질적인 표결 통제권은 미국과 영국에 주어졌다. 둘째, '브레턴우즈 체제'는 이른바 '금본위제'를 출범시켰다. 이 체제하에서는 각 회원국의 자국 통화가 미국 달러화와의 연동되었다. 미국 달러화는 거꾸로 순금 1온스당 35달러라는 공식 환율로 고정되었는데, 이 환율은 1934년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대공황이 한창일 때 '루즈벨트' 대통령이 정한 환율이었다.
뉴욕의 연방준비은행이 전쟁 기간 세계의 공식 금 준비금의 대부분을 축적했기 때문에,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경제에 힘입어 미국 달러화가 전쟁의 폐허위에서 세계의 가장 강력한 통화로 등장했기 때문에 전후 미국의 달러화 본위제나 다름없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위치에 있는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한편 미국의 석유기업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채굴권에 큰 몫을 확보했다. 이는 루즈벨트의 영리한 외교술과 처칠의 서투른 판단에 미국이 독차지한 예이다. 전쟁중 사우디는 영국의 지배를 벗어났는데, 이때 루즈벨트는 사우디 국왕 '압둘 아지즈'에게 유례없는 군수물자 대여 협정을 맺고 미국의 석유기업들이 사우디의 호의와 보증을 받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마샬 플랜'이 전후 석유 패권을 형성하다.
전후 유럽 부흥계획으로 미 국무장관의 '죠지 마셜'의 이름을 붙인 이 계획은 석유의 역활에 대해서는 주목받지 못했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 계획의 자금으로 제일 먼저 구입하게 된 것은 석유였는데, 이 석유는 대부분 미국계 석유회사들이 공급하는 석유였다. 총 예산의 10% 이상이 석유 구입대금으로 소비되었다. 미국의 '빅오일' 5대 석유 재벌은 '베네즈엘라'와 '멕시코', '중동',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석유를 시추하고 개발하는 다국적 기업으로 이미 세계화가 되어 있었으며 전후 세계 석유 시장을 거의 석권하고 있었다.
미국 회사들은 워싱턴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마셜 플랜 자금이 유럽의 자생적인 정유 시설을 건설하는데 사용되지 못하도록 막아 전후 유럽에 대한 미국의 석유회사들의 목조르기를 더욱 강화했다. 미국의 5대 석유회사와 영국의 2대 석유회사들이 세계의 석유시장을 분활하여 세계 석유시장을 공고하게 지배하기 시작했다.
미국 석유와 결합한 뉴욕 은행들의 힘
전후 거대 석유회사들이 비정상적으로 세계 시장을 지배함에 따라 석유와 관련된 뉴욕의 은행 그룹들도 나란히 세계 시장을 지배할 정도로 부상하였다. 1950년대 초 뉴욕의 은행들이 연이은 합병으로 은행들은 미국 국내 정책에 이미 막강한 정치적.긍융적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은행을 지배하는 자가 석유회사의 고문 내지는 관련 인사들로 연계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영국의 은행과 석유회사들과도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금융 및 경제력의 집중현상이 더욱 강화되어 세계 금융계를 좌우할 수 있는 강력한 구룹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영.미 석유회사들을 몰수하다
영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세계의 석유 및 전략적 원자재를 지배하는 수익성 높은 제국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란을 포함한 중동 걸프 만 산유국들에게 영국의 이익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 막대한 중동의 석유가 유럽으로 유입되는 관문인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가 전략적인 우선순위가 되었다.
영국은 1941년 8월, 제2차 대전 중 독일의 소수 엔지니어들이 상주한다는 구실로 소련과 같이 이란을 침공하였는데, 이란을 점령한 지 한 달 후 이란 국왕은 아들인 '무하마드 리자 팔레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팔레비는 영-러의 점령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다.
10만 명의 러시아군과 7만 명의 영국 및 인도군이 식량 우선권을 가진 동안 이란인들은 굶어 주고 있었으며 러시아군은 이란 북부지역을 강탈해 갔다. 1944-1945년의 겨울 동안 영-미의 대여 군수물자를 이란 철도를 이용하여 러시아 본토에 운송하려고 석유 보급을 전용하는 바람에 혹독한 겨울 난방유 부족으로 수천 명이 얼어 죽었다.
제3자의 도움을 구하려고 안감힘을 쓰던 이란 정부는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고, 1942년 미국의 한 군사 장교,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1990-91년 미군이 감행한 사막의 폭풍 작전 지휘관의 아버지)은 이란에서 1948년까지 6년 동안 국립 경찰부대를 훈련시켰다. 1944년 12월 이란 영토에 대한 외국 군대의 점령과 갈취가 판을 치는 가운데 이란의 민족주의 지도자 모사데크 박사는 이란 의회에 외국과 석유 협상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모사데크는 영국의 <런던 타임지>의 1944년 11월 2일자 사설을 인용하여 영국-러시아-미국이 이란을 나누어 가질 것을 제안한 내용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결의안이 통과 시켰다. 그러나 1901년부터 다시의 옛 채굴권인 남부 이란의 앵글로이란석유회사의 채굴권에 대해서는 이후 논의하기로 하고 일단 보류하였다.
1948년, 새로운 유엔에 이 사안을 제소한 것을 비롯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인 끝에 이란은 자국 영토에서 외국군을 강제로 찰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란은 석유회사를 통해 영국 정부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란 정부는 영국의 불합리한 석유 이윤 배당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가장 품질 높은 석유를 채굴하면서도 이란 정부에 8%의 노열티만 지불하고 있는 점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란 정부는 추가적인 유정의 채굴에 대해서 거부하고 제출된 자료에 근거하여 채굴권의 정의와 양심의 원칙에서 다시 협상해야 한다고 영국에 주장했다.
1949년 말 이란 모사데크 박사의 '국민전선당'이 소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석유 문제를 집중적으로 의제로 제기하면서 영향력을 넓힌 그는 결국 1951년 4월 총리로 선출되었다. 모시데크는 본격적으로 석유 국유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는데, 1951년 4월 자신의 내각을 구성하면서 이란 의회의 동의를 얻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은 즉시 보복을 하겠다고 위협했고 며칠안에 영국 해군이 '아바단'에 도착했다. 모사데크가 총리로 있는 28개월 동안 영국은 압도적인 걸림돌 아래서 고민해야 했다. 1951년 9월 영국은 해외에 있는 영국 은행들에게 이란의 모든 자산을 동결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이란산 원유 선적의 금지를 포함한 이란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제재를 선언했다. 영국 군함들이 이란 연해 바로 밖에 주둔했고, 육군과 공군은 아바단 정유 시설에 가까운 영국 통치령 '이라크'의' 바스라'에 급파되었다. 영국의 행동에 미국의 석유 메이저들도 동참하였으며 경제제재는 런던과 뉴욕의 지도층이 자신들의 자산을 민족주권을 내세우며 실행한 대응책이었다. 이란 석유를 살 가능성이 있는 다른 나라 구매자들도 위협을 받고 구매를 단념토록 조치했으며, 이로한 이련의 조치로 이란의 취약한 경제는 엠바고 현상이 바로 나타나기 시작했을뿐만 아니라 모사데크 정권을 괴롭히는 경제난을 증폭시켰다.
모시데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하기 위해서 그해 9월 직접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안전보장 이사회는 비겁하게도 그 문제 처리를 유보했다. 이런 행위에 대한 평가는 모사데크가 영-미의 석유 카르텔을 우습게 보았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용기있는 약소국 지도자는 보기드문 유형이지만 모시데크 정권의 붕괴는 얼나가지 않아 실현되고 말았다.
모사데크 몰락과 석유 카르텔의 공작
1953년 미국의 '슈워츠코프' 장군이 5년 만에 이란에 나타났다. 옛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그는 이란 군대의 핵심 장성들을 만나 쿠테타를 선동하였으며 성공시 그들은 권력을 약속받았다. 이란내 왕당파 분자들의 도움과 미국 중안정보국은 'AJAX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1953년 영국의 비밀정보부와 전격적으로 협력하여 모사데크를 전복했다. 영국과 미국은 왕세자 '팔레비'를 지원하여 모사데크에 맞서게 했다. 왕세자가 돌아오자 경제제재가 풀렸다. 결국 영미의 석유기업들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들은 그들의 권한에 도전하려는 어떠한 세력에게도 본떼를 보여주는 것을 실행했던 것이다. 바로 그 영-미 석유 기업들이 25년 후에는 팔레비에게도 등을 돌리게 된다.
전후 미-소 냉전 기간은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에게 놀라운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데, 그들이 지목한 친공산주의자는 반드시 징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올가미를 씌우는 대로 그들은 권한을 마음대로 행사하면서 그들이 지목한 상대를 쓰러뜨릴 수가 있었으며 그러한 친공산주의자로 몰려 개도국의 정치 권력자들이 수없이 권좌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그 나라의 중요 원자재와 석유 자원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가 있었다. 1960년대 이탈리아의 '마테이'가 이란과 러시아와 협력하여 석유 자립화를 꾀하다가 1962년 10월 27일 타고가던 전용기가 시칠리아에서 이륙하여 밀라노로 가던 도중 공중 폭발하여 사망한 사건 등도 영-미의 중앙정보국과 비밀 정보부에 의한 공작이었다는 사실이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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