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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스털링화 위기와 아데나워-드골 위협

 

스털링화 위기와 아데나워-드골 위협

 

 

 

                           드골                                                                   아데나워

 

유럽 대륙, 전쟁의 폐허에서 빠져 나오다

 

1957년 로마 조약의 체결로 프랑스.서독.이탈리아가 주축이 된 '유럽 경제공동체'라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협력체가 형성되었다. 1959년 1월에는 그 조약의 조건에 따라 유럽 경제공동체가 공식 발족했다. 독일 연방 공화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회복되기 시작했고, 프랑스는 1958년 '드골'이 집권하면서 경제 고문인 '자크 뢰프'가 입안한 긴급 재건계획 지침에 따라 국가의 경제 재건과 재정적인 안정을 회복하기 위한 강력한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었다. 이탈리아도 1950년대 말 '탄화수소공사'의 '마테이'가 추진한 경제번영의 결실을 누리고 있었다. 대전 후 20년도 안되어 유럽 대륙은 전례 없는 산업과 농업 성장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교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제조업과 생산량의 성장으로 교역량이 계속 늘어나면서 1953년에는 세계 교역량의 19%, 1960년에는 미국의 수출액을 능가하였으며 전 세계 수출액의 26%로 약 300억 달러에 육박했다.

 

1958년 드골이 프랑스에서 다시 권력을 잡자, 이것을 계기로 경제적으로 확장일로에 있던 유럽 대륙은 새롭고 강력한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노련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드골은 유럽에 대한 영국의 궁극적인 의도를 제대로 꿰뚫고 있었으며 미국의 전후 속셈 역시 영국의 속셈만큼 위험한 것으로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드골은 1958년 대통령에 오르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핵무기 사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개혁에 관하여 수차례 의견을 교환하였으나 미국의 반응이 없자, 프랑스는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고 프랑스 지중해 함대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지휘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60년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에서 최초로 '원폭 실험'에 성공하였고 유럽 대륙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나섰다.

 

1958년 드골은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를 자신의 개인 휴양지로 초대하여 만났다. 적대국 간의 정치적 화해의 시작뿐만 아니라 노련한 두 정치가가 개인적으로 친밀한 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흘러 1963년 1월 22일 드골과 아데나워는 다양한 형태의 경제 및 산업 정책 조정을 포함한 국가 원수 차원의 긴밀한 협력 과정을 구체화한 프랑스-독일 협정에 조인했다.

 

드골과 아데나워 협정으로 워싱턴과 런던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가 주동이 된 유럽 대륙이 독자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관할 수만 없는 워싱턴과 런던은 고심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유럽에 대한 영-미의 원대한 구상

 

1962년 초 케네디 행정부의 정치 집단은 은밀히 드골과 아데나워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케네디 행정부는 드골 -아데나워 협정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으며 본 주재 미국 대사를 통하여 독일 야당에 대한 공작으로 아데나워를 목조이기 시작했다. 후임 총리로 반드골주의자인 에르하르트가 선출되고 드골-아제나워 협정은  비준은 거쳤으나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은 영국과 미국의 정치 기득권층에 의해서 결국 도둑맞고 말았다. 

 

영-미는 유럽 대륙의 강력한 블록화를 봉쇄하면서 영국의 조종에 의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유럽 대륙의 균형을 재확립했다. 이제는 드골의 처리 문제만 남았으나 쉽지는 않았다.

 

 

베트남 옵션

 

'케네디'가 달라스 딜리플라자에서 그 운명적인 카퍼레이드를 시작하기 두 해전인 1961년 5월 파리로 가서 드골을 만났다. 케네디는 드골에게 남베트남에서 '고딘디엠' 정권을 후원하고 동남아시아 국가 경제원조를 위장한 미군 원정대를 주둔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미국의 논리를 제시했으며 이것은 인도차이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데 중요한 사안임을 케네디는 강조했다. 그래서 드골은 케네디의 의견을 조용히 경청한 후에 그의 의견에 동조해주면서 케네디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드골은 케네디에게 동남아 지역은 수렁과 같아 잘못 개입하면 끝없는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케네디는 드골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젊은 나이의 케네디는 자신의 정당한 야망이 커다란 희망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에 찬 모습으로 파리를 떠났다. 케네디는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드골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면서 좋은 충고자이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1963년 11월 케네디는 텍사스 달라스에서 운명적인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뉴올리언즈 지방검사 자격으로 암살 과정을 조사하는데 관여하였던 뉴올리언스 판사 '짐 게리슨'은 나중에 그 암살이 '카를로스 마르첼로'를 비롯한 몇몇 범죄조직원들의 도움으로 미 중앙정보국이 자행한 짓이라고 거듭 주장햇다. 무엇보다도 케네디는 퇴역 장성 '더글라스 맥아더'와 회담을 한 뒤 베트남에서 막 발을 빼려는 시점에 있었다. 문제는 케네디의 정책 방향의 전환에 대해서 동부의 금융.정치계와 많은 불화를 빚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미 세계의 특정 이해 집단들은 케네디의 정책 방향 전환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었으나 케네디 암살 후 1963년 11월 22일 후임 대통령이 된 '린든 존슨'은 비난을 무릅쓰고 케네디의 정책을 추진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바로 강력한 월스트리트 집단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존슨은  곧 베트남 전쟁을 기술적인 자문 수준에서 전면적인 군사충돌로 확대하여 수백억 달러와 50만 명의 군인들을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자멸적인 전쟁에 쏟아부었다. 전쟁으로 월스트리트 증권시장은 기록적인 수준의 재무부 부채에 자금을 조달하느라 바빴던 반면 몇몇 방위 관련 미국 기업들만 이익을 얻고 있었다. 존슨이 우려했던 지속적인 미국 경제의 침체는 전비 지출 급등으로 해결된 것처럼 보였으므로,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베리 골드워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엄청난 비용과 생명을 지불하고 그 승리를 샀다고 볼 수 있다.

 

스털링화의 평가 절하

 

존슨 행정부는 월스트리트의 탈산업 정책을 채택하면서 과학 및 산업 발전에 대해 소홀히 전개한 결과 미국의 일류 대학들을 필두로 개인적인 쾌락에 몰두하고 국가의 목적에는 냉소적인 젊은 엘리트 집단들이 미 대학 캠퍼스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반전운동이 전개되었다. 무모한 젊은 생명들이 명분없는 전장터에 보내지고 비젼없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항거였다.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승리할 조짐을 보이자 로스엔젤레스에서 단독 암살범에 살해된 1968년, 인권 운동 지도자 '마틴 투서 킹' 목사 역시 '멤피스'의 모텔 방 밖에서 암살 당했다. 그는 흑인 노동자들의 단결과 노동조합 결성 그리고 파업을 역설하면서 대중들의 바람몰이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미국의 북부 산업도시들은 빈민가,마약 중독, 실업이 유행처럼 번지고 기존의 미국 산업에 투자하지 않은 월스트리트의 정책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 뉴욕과 런던을 지배하는 금융계가 직면하고 있던 큰 문제는 드골의 독자적인 정책 주도만이 아니었다. 1959년 미국의 대외 부채는 금 준비금과 비슷한 200억 달러 정도였다.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화 위기로 전체 브레턴우즈 조직이 와해될 위기에 처한 1967년 무렵, 미국의 대외 부채는 360억 달러로 치솟았지만 금 준비금은 채무액의 3분지 1에 불과한 120억 달러로 격감했다. 

 

전후 미 달러화와 축을 이루고 있던 영국 파운드 스털링화에 대한 신뢰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는데, 이는 제국의 해외 잔재를 유지하기 위한 공식 개입의 증가, 쇠퇴해가는 산업 기반과 불충분한 준비금 등으로 영국의 대외무역 수지와 전반적인 경제 상황은 불안해지면서, 1964년 10월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고질화 되었다.

 

1967년 영국은 파운드화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몇 번이나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막대한 긴급 자금을 차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외 채무는 계속 증가하였으며 그래서 악화일로에 있던 파운화의 평가 절하를 단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국 경제와 스털링화가 계속 하락하면서 상황은 만성적이 되었다. 드골은 밑 빠진 독에 계속 쏟아 부어 더는 프랑스 중앙은행 금 준비금을 잃고 싶지 않으므로 금 풀에서 탈퇴했다.

 

1968년에 접어들면서 위기는 가속되었다. 런던의 금 풀은 금 값을 잡기 위해서 거의 1천 톤의 금을 공급해야 했다. 그해 4월, 워싱톤의 요구로 G10 특별회의가 '스톨홀름'에서 소집되었다. 미국은 이 모임에서 국제통화기금을 통한 금 대체 화폐, 즉 이른바 '특별인출권'의 창설을 계획했다. 이에 프랑스는 만장일치제에서 반대했다.

 

 

드골의 실각

 

그런 가운데, 이번에는 불행하게도 프랑스가 극심한 정치적 불안 상태가 되었는데, 보이지 않는 지원에 힘을 얻은 '스트라부르' 대학의 급진적인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폭동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프랑스 전역이 혼란에 휩싸였다. 정치 불안에 발맞추어 영-미 투자가들은 공황에 빠진 프랑화를 인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사실이 영-미 금융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들은 프랑화를 금으로 바꾸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금 준비금이 30%나 고갈되어 본격적인 위기를 몰고왔다. 그러자 일년이 안 되어 드골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듯 영-미의 금융 집단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반항하는 국가에 대해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경제를 마비시키고 정권을 전복시키는 수법을 사용해 왔다. 세계 최대 금 생산국인 남아공화국도 영-미의 금융세력에 맞서다가 불운하게도 엄청난 피해를 본 경우도 프랑스와 같은 경우였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