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동 지역 석유 역사의 개요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중동 지역 석유 역사의 개요

두바퀴인생 2008. 1. 28. 10:04

 

중동 지역 석유의 역사 개요

 

                                      중동 지역 항공 사진

 

 

중동에서 석유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의 역사는 1908년 이란의 서남부

술라이만에서 뉴질랜드인(당시 영국의 식민지) 윌리엄 다아시에 의해 중동

지역 최초로 유전이 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란에서 석유의 발견이 알려

지자, 당시 영국의 ‘3C정책’ (케이프타운, 카이로, 캘커타를 잇는 지역을 영국

의 패권 아래에 두려는 정책)에 맞서 ‘3B’(베를린,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축으

로 패권을 장악하려는 독일의 제국주의 정책은 중동지역에서 대립의 각을 세

우게 되었다. 다아시는 1908년 5월 영국·페르시아석유회사 (후에 영국·이란

석유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다아시는 1914년 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앞두고 소유 주식을 매각하였는데, 독일과 치열한 군비경쟁에 돌입한 영국은

해군성으로 하여금 다아시의 지분을 매입하고 함정연료를 석유로 전환하여

재래식 연료인 석탄을 사용하는 독일 해군 함정과 비교하여 월등한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란 석유의 안전 공급을 보장하려는 영국과

이를 봉쇄하려는 독일 간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결과적으로 석유라는 신종

전략자원때문에 유럽국가들 간의 전장이 중동지역까지 확대된 것이다. 제1차

대전의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전후 처리의 일환으로 이라크와 시리아를

각각 나누어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영국은 패전국 독일로부터

접수한 당시 중동 석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터기석유회사(후에 이라크

석유회사로 개칭)의 지분25%를 프랑스에 넘겨주는 대신 프랑스 통치 지역인

시리아를 관통하는 송유관 설치를 양해받았다. 그러나 미국이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미국은 중동 석유이권에 대한 문호개방을 끈질기게

요구한 끝에 1928년 터키석유회사에 대한 경영 참여권을 획득하였다.

적선협정으로 불리는 새로운 합의에 의해 영국의 터키석유회사 지배는

끝이나고 메이저들을 앞세운 앞세운 영, 프, 미 열강의 중동석유에 대한

배타적 균점체제가형성되었다.

  그 후 석유경쟁은 중동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활발한 유전 개발활동 결과

1932년 바레인, 1938년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각각 유전이 발견됐다.

제 2차 세계대전을 맞아 중동의 석유는 더욱 절대적인 전략자원으로 평가됐다.

이미 석유가 석탄의 대체연료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나 석유 생산은 늘어도

 서구의 석유 메이저의 몫만 커지는 상황에서 산유국의 불만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1950년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사데크는 영국·이란 석유회사의

국유화를 선포하고 국영 이란석유회사(NIOC)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이란에서 물러난 영국은 석유재벌을 동원, 이란산 석유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여 이란경제를 마비시켰다.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됨을 틈타 미국은 쿠데타를 도와 모사데크를 실각시키고

팔레비 왕을 복귀시겼다. 자원민족주의 운동이 석유메이저의 힘에 굴복한

것이다.

  메이저들에 의한 석유 과잉생산으로 유가가 폭락하고 산유국의 수입이

줄어들자 중동 산유국들은 공동대처에 나섰다. 전 세계 석유 수출 물량의

85% 이상을 점유하고 있던 5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

이트, 이란, 베네수엘라는 1960년 회합을 갖고 산유국의 이익옹호를 위한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창설하였다. 산유국의 석유자원민족주의 운동

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OPEC는 석유 메이저들의 일방적인 공시가격 변동을 억제하기 위해

고정 공시가격 제도를 도입했고 추가로 회원국을 늘려 총 11개 회원국을

가진 국제기구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OPEC에는 비아랍회원국들도 있어

 때로는 입장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리비아 등 3개 아랍국은 1968년 3월 별도의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

를 결성했다.

  아랍 산유국들은 OPEC와 OAPEC결성 이후 석유자원의 이익보장을

위해 공동보조를 취했다. 특히 사우디를 비

롯한 4개국은 1973년 석유자원의 25%를 국유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해 10월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불만을 품은 아랍산유국들은 항의표시로 석유 감산을결의하고 미국과 네덜란드 등에석유 수출금지 조치를 취했다. 또한 국별 심사를 통해 친서방으로분류된 국가에 대한 원유공급 제한 조치를 추가로 단행하여 제1차석유위기를 가져왔다. 1974년 3월 석유금수가 해제되고 난 이후에도 아랍산유국들은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진전시켜 1978년에 완전 국유화를 이루어 석유주권을되찾았다.

  제1차 석유위기의 여파가 진정되어 가던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를 주축으로 한 이슬람 성직자의 주도로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왕이 축출되고 이슬람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팔레비왕의 지나친 친미정책과 석유판매수입의 독점·전횡이 사회불만의 씨앗이 된 것이다. 혁명과정에서 석유산업 근로자의 파업에 이어 이란이 석유수출을 전면 중단하자국제 석유시장의 가격이 폭등하여 이른바 제2차 석유위기가 닥쳤다.


  제2차 석유위기 이후 잠시 중동지역에 평화가 찾아 오는 듯 했으나 1990년

8월 이라크는 중동 지역의 맹주자리를 노리며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중동이

긴장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가운데 위기감을 느낀 사우디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걸프전)에 협력했다. 대부분의 중동국가들은 지역의 패권을 한

국가가 가지는 상황을 경계하며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반대하거나 미국

의 이라크 제재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했다. 때문에 중동지역에 전쟁이 발발

했지만 석유공급에 차질이 빚어지지도 않았으며, 유가도 일시적급변동으로

그쳤다.

  2001년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테러 지원 국가로 지목하고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다.

다음은 이라크 차례였다. 대량살상무기 은닉을 이유로 후세인을 압박한 끝에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하여 후세인을 축출했다. 43일만에 일방적

승리로 끝난 이 전쟁에 대해 미국은 ‘테러 근절’ 또는‘민주주의 확산’을 표방

하고 있으나 이면에는 미국의 석유 이권 확장을 위한 전쟁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라크에 석유 이권을 갖고 있는 프랑스가 이 전쟁에 부정적

입장을 견지한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이라크 석유의 매력은 매우 크다.

이라크의 매장량은 사우디, 이란에 이어 세계 3위이며 전세계 매장량의

약10%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또한 석유의 품질이 우수하며, 지표면에

근접하여 매장돼 있어 생산비가 저렴한 잇점을지니고 있다.

걸프전 당시 도로에 버려진 차량들 산유국에서 기름을 못구해 대부분의 차량이 무용지물이 됐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