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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악의 제국'에서 '악의 축'으로

 

 

'악의 제국'에서 '악의 축'으로

 

 


△ 오사마 빈 라덴의 껍질을 쓴 부시(왼쪽)와 부시의 껍질을 쓴 오사마 빈 라덴(오른쪽).

 이들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근본주의와 이슬람의 종교적 근본주의 모두를 양면 비판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끈 합성사진이다.

 

 

새로운 '악의 세력' �기

 

1990년대 초반 소련이 붕괴하면서 많은 지역에서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드높았다. 그러나 이어진 10년은 그렇지 못하였다. 새로운 강대국 미국이 새로운 '신세계 질서'를 실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 냉전이 종식되고 로널드 레이건이 지칭한 '악의 제국'인 소련에서 조지 부시 2세의 '악의 축'으로 바뀌었는데, 이 악의 축은 이라크와 이란에서 북한에 이르기까지 편리하게도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막연한 지역을 지칭했다. 이는 석유와 달러가 바로 그러한 변화에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종식되자 미국은 주요 군사 동맹국들에 대한 억제력이 없어졌다. 이제 동맹국들이 경제적인 라이벌이었다. 일본과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연합이 미국의 지배권에 대한 주요 경제적 도전자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경제적 도전은 1990년 이후 미국 지정학의 중심이 되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자유시장의 개혁, 사유화, 달러 민주화'라는 북음으로 무장하고 강력한 월스트리트 금융기업들의 지원을 받아 달러화와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소련 및 동유럽 지역을 포함하여 거의 종교적인 조직적 활동으로 편입시키려고 했다. 독자적으로 자원을 개발하려거나 국제통화기금의 명령과 달러권에 저항해온 지역은 모두 망라되었다. 그 지역은 카스피 해에서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서아프리카에서 콜롬비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요 원유 지역을 미국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두는 것이 목적이었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제국이라 부른 반면 클린턴 행정부는 '시장 경제와 인권의 확대'라고 불렀다. 그것은 냉전 종식 후 세계가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

 

클린턴 행정부와 월스트리트 동지들은 자유시장이 부와 번영의 길에 이르는 길이라는 약속으로 한 지역씩 차례로 자신들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으로 끌여 들였다. 그들이 내건 구호는 '지구화'였는데, 실제로는 미극의 금융과 은행 및 기업의 힘을 통해 강화되는 '미국 힘의 지구화'였다.

 

1990년 이후 미 정부는 중요한 문제에 봉착했는데,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 새로운 악의 세략을 �을 수가 없었다는데 있었다. 그러나 미 정부는 그 악의 세력을 새로 만들어 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카터 전 대통령의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이자 지정학 전략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 제국의 지정학적 전략의 3대 명령은 제후들 사이에 공모를 방지하고 안보를 종속시킬 것, 예속국가들이 계속해서 유순하고 피보호 상태에 머물게 할 것, 그리고 그들을 미개인들이 서로 결속하지 못하게 만들것"이라고 했다. 

 

 

선도 거위, 일본 해치우기

 

냉전 이후 세계에서 미국의 역활에 가장 압박을 가한 도전은 세계 무역과 은행계에 미치는 일본의 막강한 경제력이었다. 일본은 언제나 군사적 보호자인 워싱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경제적인 막대한 성장을 구축해왔다.1980년대 말 일본은 세계 최고의 경제 및 금융 강국으로 평가되었으며 사람들은 일본과 일본 경제의 도전에 대해 떠들었다. 반면 당시 미국은 은행과 산업 등 모든 부분에 과도한 부채에 허득이고 경쟁력도 잃고 있었다. 이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기초로는 빈약했고 부시 행정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80년대 미국의 재정 적자와 세출 초과를 충성스럽고도 정력적으로 지원한 일본만한 나라는 없었다. 독일도 일본만큼은 못했다. 일본은 총성과 미 재무부 채권, 부동산 및 다른 자산의 후한 매입은 1990년대가 되면서 세계 역사상 가장 끔직한 금융붕괴로 보답받았다. 많은 일본인들은 이것은 세계에 미치는 일본 경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워싱턴의 계획적인 정책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1985년 9월 G7 산업국가들의 플라자 호텔 협정은 과대평가된 달러화를 좀더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공식적으로 평가절하할 계획이었다. 이에 미 정부는 일본에게 미 달러화에 대한 엔화를 평가절상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한 달 후에 베이커-미야자와 합의 및 1987년 2월 루브르 협정 사이에 일본은 통화정책 및 재정 정책을 따르기로 합의했다.

 

일본의 가장 중요한 수출 시장은 미국이었으므로 미 정부는 일본을 강하게 몰아 붙일 수가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1988년 '무역 및 경제 종합법' 즉 '슈퍼 301조'로 불리는 법을 근거로 미 정부는 일본을 적대적 무역관행 국가 명단에 올리고 많은 양보를 요구했다.

 

일본은행은 1987년 금리를 2.5%로 인하했고 이것은 1989년 5월까지 유지되었다. 일본이 미국산 상품의 구매를 자극하려고 금리를 낮춘 것이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오히려 저금리 자금은 치솟는 도쿄의 증권시장에사 빠른 수익을 낼 수 있는 길을 �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거품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내수 경기가 활발해지긴 했지만 니케이 증권시장과 도쿄의 부동산 가격의 급상승이었다. 도쿄의 주식가격이 연간 40% 오르는 동안 도쿄와 인근 부동산 가격도 급등했는데 새로운 골드러시 열풍이 일본 열도를 휩쓸면서 90%나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플라자 협정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엔화 가치는 극적으로 올랐다. 1달러 대 250엔에서 무려 149엔으로 올랐으며 일본의 수출기업들은 수출에서 입은 환차손을 보전하기 위하여 금융투그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본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은행주식의 장부상 가치가 상승하면서 은행의 자본금도 따라서 증가했다. 

 

1988년 무렵 주식 거품이 먼저 치솟자 세계 10대 은행들은 모두 일본이 차지했다. 일본 자산은 미국의 부동산,골프장,호화 리조트로 흘러들었고, 미국의 채권과 심지어 리스크가 큰 미국 주식에까지 유입되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팽창된 엔화를 부지런히 달러 자산으로 재순환시켰고, 그럼으로써 1988년 레이건을 계승한 부시의 야망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먹구름은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일본의 도취감은 오래가지 못햇다. 일본의 금융시스템은 넘쳐나는 돈으로 은행과 불과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300%나 오르면서 세계 최대 규모의 주식 및 부동산 거품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거품이 절정에 달했을 때, 달러로 환산한 도쿄의 부동산 가치는 미국 전체의 부동산 가치보다도 컸다. 도쿄 니케이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모든 주식의 장부가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세계 증권 가치의 42%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조짐이 보이던 1989년 말, 일본 은행과 대장성은 니케이 증권의 거품을 빼기 위한 조심스런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자 월스트리트 주요 투자 은행들은 색다른 파생상품과 새로운 금융기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격적인 개입으로 도쿄 시장의 완만한 하락은 거의 공황에 가까운 투매로 변질되고 말았다.

 

1990년 3월, 니케이 증권시장은 그 절정기에 비해 무려 23%, 즉 1조 달러가 넘는 손실을 입었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에 대해 많은 국가들이 미국의 자유시장 모델보다 훌륭한 대안으로 보기시작하자 경계심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의  공산권 경제재건에 투자를 적극 막았다. 일본의 대 러시아 경제불록 창설도 달가와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논점을 효과적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부시는 일본의 군사안보 불안감을 일으키도록 의도한 주제인 환태평양-아시아 주둔 미군의 급격한 감축을 논의하기 위해 1990년 초 '닉 체니' 국방장관을 도쿄로 보냈다. 체니의 숨김없는 공갈 임무는 '위싱턴에서 시키는 대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히 방위를 약화시키겠다' 였다.

 

그해 3월 팜스프링스에서 미국 대통령 부시와 만난 일본 총리는 미국이 원하는 요점을 파악하고 동유럽에서 미 달러화와 경쟁 하지 않기로 했다. 몇 달 안에 일본 주식은 장부가로 거의 5조 달러에 가까운 손실을 입으면서 치명타를 입었다. 일본이 선두에 서서 날아가던 거위였다면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그를 따르는 다른 거위들이었다. 선두 거위가 미국에 의해 치명타를 입자 신달러질서의 두 번째 단계를 위해 뒤따르는 거위떼, 즉 '아시아 호랑이'라 불리는 경제권으로 관심을 돌렸다.

 

 

아시아 호랑이들이 쓰러지다

 

일본식 모델을 분쇄하는 두 번째 단계는 미국의 명령에 도전한 고도의 성공적 모델인 동아시아 경제권 파괴였다. 일본식 모델은 동아시아 한국,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홍콩,싱가포르,대만 등 아시아 지역에서 육성되었다. 1980년대 이렇게 급속히 성장한 경제권을 '호랑이 국가'로 불렀다.

 

동아시아는 1970-80년대 일본의 정부 개발 원조,대규모의 민간 투자와 통상산업성의 지원에 의해 구축되었다.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햇으나 1980년대에 폭발적으로 발전한 동아시아 경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역내 노동분업과 제조업의 배치로 이웃소싱하는 일본 기업들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들은 일본 경제와 밀접한 관계 때문에 아시아 기업계 인사들 사이에 '엔 블록 국가'들로 불렸다.

 

호랑이 국가 경제는 국제통화기금 시장 모델에 크다란 골치거리였다. 그들이 사기업과 국가의 강력한 경제적 역활을 혼합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국제통화기금의 자유시장 명제에 위협이 되었다. 호랑이 국가들이 강력한 국가 역활에 기초한 모델로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이는 한, 옛 공산국가들을 비롯한 나머지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이 제시한 극단적인 과정을 밟는 데 반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동아시아에서는 년간 7-8%에 이르는 경제성장률, 사회 보장 제도의 향상,보편적인 교육 및 높은 노동생산성 등의 시장경제에도 불구하고 모두 국가의 지도와 계획에 의해 뒷 받침 되어왔다.  1990년대에 미 정부가 달러화 자유시장 체제를 세계로 퍼뜨리는데 자급자족적인 동아시아 호랑이 경제권 국가들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 은행들이 자국의 증권 및 부동산 시장 폭락에 맞서 고투를 벌이고 있을 때 1993년에 개막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에서 워싱턴 관리들은 동일한 경쟁 조건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동아시아 경제권들에 통제되고 있는 금융시장을 자유로운 자본 흐름에 개방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그동안 자력으로 성장가도를 달리면서 국제통화기금을 피해왔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의 동일한 경쟁 조건이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데는 얼마걸리지 않았다.

 

일단 미국의 요구대로 자본의 입출금이 자유로워 지자 한국과 다른 호랑이 경제권 국가들은 해와 달러의 갑작스런 유입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 결과 1994년-97년 사이 태국 바트화에 대한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호화 부동산, 국내 주식 가치 및 다른 자산들에 투기적인 거품이 일어났다. 즉 국가가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갖추기도 전에 해지펀드들의 공격이 감행되었다. 이들 비밀 펀드들은 먼저 제일 취약한 경제권인 태국을 표적으로 삼았다. 미국의 투기꾼 소로스는 시티그룹을 비롯한 국제은행 그룹으로부터 받은 드러나지 않은 여신 한도로 무장하고 비밀리에 움직였다. 그들은 태국 바트화를 평가절하하고 달러화에 대한 고정환율제를 폐기하도록 투기를 집중했다. 소로스, 타이거펀드,장기자금관리 등 투기적인 미국의 투기세력이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이에 굴복한 태국은 통화와 증권에 대한 변동환율제로 바꾸고 국제통화기금에 구제를 요청할 수 밖에 없게 되었으며, 그러자 그 해지펀드들은 재빨리 필리핀,인도네시아,한국을 차례로 무차별 강타했다. 많은 주민들이 경제적 혼란과 빈곤으로 빠져들 동안 그들은 수십억 달러를 챙겼다.

 

펀드들은 그들 국가를 강타한 후에 떨고 잇는 그 국가들을 국제통화기금에 넘겨주었는데, 이는 그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폐해진 국가에서 채무 불이행 차관에 집착할 서방 은행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였다.

 

달러화에 미친 아시아 위기의 영향은 두드러졌다. 국제결제은행의 총지배인 '앤드류 크로켓'은 1998-99년에 유입된 단기 투기자금으로 경상수지가 870억 달러의흑자로 올라서는 동안 동아시아 국가들은 1996년 총 330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2002년 무렵에는 경상수지 흑자가 2천억 달러로 정점에 달했다. 흑자의 대부분은 아시아 중앙은행이 미국 재무부 채권을 구입하는데 재투자되어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일본의 대장성은 300억 달러에 달하는 아시아 통화기금을 제안함으로써 아시아 위기를 막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위싱턴의 노여움을 사자 즉시 철회되었다. 아시아는 국제통화기금의 통해 달러화 지배를 받는 또 다른 지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미국은 그것을 강력한 달러 정책이라 불렀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