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발칸 반도에 대한 미국의 석유 지정학

 

발칸 반도에 대한 미국의 석유 지정학

 

 

                                 코소보

 

1990년대 일본식 경제모델이 붕괴되고 동아시아 국가가 미국의 이익에 맞게 재편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은 소련의 붕괴에 따른 무장 해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기타 위성국가들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지 냉정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미국은 그들에게 시장경제를 강요하여 미국 경제권으로 편입시킬 계획이었다. 그것은 달러화로의 전환이며 수단은 국제통화기금이었다.

 

동시에 소련은 동쪽으로 확장되는 미국과 나토의 군사기지들에 의하여 둘러싸이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유럽이나 소련의 어떠한 군사동맹도 맺지 못하게 막을 수가 있게 될 것이며 소련 군사력의 완전한 와해를 수반하도록 하는 것이 워싱턴의 책략이었다.

 

워싱턴의 정책은 1세기 전에 '핼퍼드 매킨더' 경이 개관하였듯 고전적인 지정학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매킨더는 "중부 유럽을 지배하는 자가 심장지역을 손에 넣는다.심장지역을 지배하는 자가 월드 아일랜드를 손에 넣으며 월드 아일랜드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고 했다. 즉 유럽의 독일과 프랑스 주변 국가들이 매킨더가 말한 러시아가 중심이 된 유라시아의 심장지역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러한 연합은 전 세계를 지배할 잠재력,자원,지리적 우위를 점할 것으로 보았다.

 

특히 미 워싱턴 정가의 '브레진스키' 같은 경우는 그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그럼으로써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어떠한 유라시아 도전자도 등장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세력 균형을 뒤집을 수 있는 어떠한 잠재적인 세력을 상쇄하거나 흡수하거나 통제하는 미국의 특별한 정책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라고 했다. 그가 지도를 그렸듯이, 유라시아는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풍부한 석유, 유럽과 일본의 산업 잠재력, 중국.인도.러시아의 자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유라시아 지배는 서반구와 오세아니아를 지리적으로 세계 중심 대륙의 주변부로 만들고 거의 자동적으로 아프리카의 종속화를 수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가 국제통화기금의 구제책을 받다.

 

1990년 7월 텍사스 휴스턴에서 열린 G7 산업국 회의에서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소련의 미래와 관련해 정책적으로 중요한 발언을 했는데, 미국은 국제통화기금에 의해 실행될 소련 경제개혁에서 중심적인 역활을 하기를 원한다면서 소련의 개방화와 민주적.다원적 사회를 건설하고 시장 지향적인 경제로 진입하려는 노력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의 충격요법으로 무장한 하바드대의 경제학자들이 모스코바로 날아갔다. 국제통화기금의 전문 관료들은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알루미늄,마그네슘,기타 원자재들이 시장 가격에 판매될 것과 식량,건강,기타 필수품에 대해서 국가 보조금을 없애야 하며, 러시아산업을 사유화할 것을 요구했다.

 

1992년 국제통화기금은 시장 지향적인 개혁의 일환으로 러시아 루불화의 자유로운 변동환율제를 요구했다. 루불화의 변동환률제로 소비자 물가는 1년이 못 되어 9,900%나 인상되었고 실질 소득은 84%나 폭락했다. 대다수 러시아인들이 실존적 빈곤으로 내동댕이 쳐졌으며 그것은 단지 국제통화기금 식의 자본주의 출발에 불과했다.

 

국제통화기금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 산업이 조정되었으며 세계 시장의 명령이 전 소련 지역에 하달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옛 소련의 풍부한 석유 및 가스 자원이 미국과 영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시야에 들어왔으며 알짜배기 기업이 헐값에 지배층에게 넘어갔다. 러시아 산업단지는 대체로 해체되었으며 주민들은 개혁에 의해 빈곤해 졌으며 국력은 쇠퇴해 졌다. 1998년 여름 러시아의 달러화 전환은 거의 통제를 벗어났다. 8월 15일 러시아는 자국의 달러 부채 불이행을 선언해 버렸다. 뉴욕과 다른 주요 은행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초초한 몇 주 동안 전체 달러 구조물이 기초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의 분주한 구제책이 강구되고 전략적으로 너무나도 귀중했던 러시아는 채무 불이행을 조용히 용서 받았고 곧이어 기세가 한풀 꺽이긴 했지만 달러화로 전환이 다시 재개되었다.

 

 

유고슬라비아가 충격요법을 받다

 

소련이 미국산 경제적 충격 요법을 받기 훨씬 전에 이미 발칸 반도 국가들이 미국 개입의 표적이 되었다.워싱턴이 유고슬라비아를 주목하게 된 것은 중앙아시아의 잠재적인 석유 공급원에 대한 유고슬라비아의 전략적 위치가 그 중요성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훨씬 전 미 정부는 당시의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국제통화기금과 공작을 꾸미고 있었는데, 즉 그것은 다시말해 발칸 반도의 민족주의가 외부의 지원으로 조종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미국은 유고슬라비아를 군소국가들로 조각내어 유럽과 중앙아시아 사이의 교차로에 나토와 미국의 거점을 개척하는 것이워싱턴의 목표였다.

 

나토는 소련 붕괴와 바르사바 조약기구의 해체로 나토도 해체되어야 할 것이나 미국은 나토의 새로운 임무를 구상했다. 나토의 새로운 임무는 탈 나토 지역 배치를 말하며 발칸 사태 발발로 나토의 지역외 투입의 명분을 얻게 되었다.

 

40년이 넘는 동안 워싱턴은 소련에 맞설 완충지대로 유고슬라비아와 혼합된 사회주의인 '티토 '모델을 은밀히 지원해 왔다. 그런데 소련이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완충지대의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티토'에 의해 경제적으로 성공한 유고의 민족주의적 완충지대는 더구나 필요가 없었다. 워싱턴의 입장은 이와같은 이유만으로도 유고의 모델은 분쇄되어야 했다. 또한 유고가 중앙아시아의 잠재적인 석유자원에 접근하는 중요한 통로에 위치해 있다는 시실은 그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유고를 어르고 협박하여 국제통화기금 방식의 자유시장 개혁으로 끌어내어야 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토의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1988년 소련 붕괴가 거의 확실해지자 워싱턴은 민간 비영리 기구의 자문관들을 유고에 파견했다. 그 민간 기구 자문관들은 야당세력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새로운 삶을 원하는 배고픈 젊은 기자들을 매수하고, 노조 반대 세력과 국제통화기금을 찬성하는 반체제 경제학자들, 그리고 NGO 인권단체에 자금을 대는 등 유고의 구석구석에 달러를 대량으로 살포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나토가 '베오그라드'를 폭격하기 1년 전인 1998년 '폴 메카시' 전국민주주의재단 회장은 소로스 재단과 일부 유럽 재단들과 더불어 유고연방공화국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비정부조직들의 독립적인 현지 언론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자신들의 단체를 자랑하였으며 민주주의 육성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그 결과로 세르비아인,코소보인들,보스니아인들,크로아티아인들의 생활수준은 끔찍해졌다.

 

1990년 이후 유고에서 벌어진 일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소수의 내부자 외에는 거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 워싱턴은 전국민주주의 재단,소로스의 열린사회재단,국제통화기금을 이용하여 유고에 정치적,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유고는 국제통화기금 정책 아래서, 국민 총생산은 1990년 7.5% 감소했으며 1991년에는 다시 15%가 감소했다. 산업생산은 21%나 떨어졌다. 국유기업들의 대대적인 사유화를 요구했으며 1,100개 이상의 기업이 도산했고 실업률은 20%나 되었다. 충분히 예상했듯이,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자 각 지역은 생존을 위해 인근 지역들과 서로 투쟁했다. 모든 임금은 1989년 수준으로 동결하고 실질소득은 41%나 감소했으며 인플레이션은 140%가 넘었다. 유고 통화 디나르화의 완전 태환성과 금리 자유화를 명령했다. 사회 및 기타 프로그램을 재정 지원하려는 중앙 정부의 지원을 막았다. 이러한 동결은 1991년 6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연방을 탈퇴하고 독립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0년 11월 부시는 미 의회의 해외 공작 예산법을 통과시켜 6개월 이내에 유고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지 않는 유고 지역은 미국의 재정 지원을 잃게 될 상황이었다. 미국은 6개의 유고 공화국이 미 국무부가 감독하는 가운데 분리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으며 모든 원조는 각 공화국에 직접 지원될 것임을 통고했다. 이는 결국 미국에 의해 유고연방의 자진해체였으며 발칸의 화약고에 불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 정부는 민간 단체를 이용하여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나 옛 파시스트 조직에 대체로 집중되었다. 이러한 국제통화기금의 충격 요법과 미 정부의 직접적인 불안 조성 정책에 반발하여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인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유고 대통령은 1990년 11월 새로운 공산당을 창당하여 유고공화국의 와해를 막는 데 전념했다. 10년 동안 20만 명 이상의 인종청소 전쟁의 배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1992년 미 정부는 유고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제재를 단행하여 모든 무역을 동결시키자 그 결과 인플레이션과 70%의 실업률로 경제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미 언론들은 그 모든 문제를 베오그라드 정권의 부패한 독재로 빚어진 결과라고 떠들어댔으며 미국의 불온한 대외 정책이나 국제통화기금의 만행에 대해서는 언론들은 일절 말은 없었다.

 

1995년 보스니아 내전은 종식되었다. 이는 미국과 유럽 공동체가 발칸 반도의 안정이 필요한 시점과 맞아 떨어졌다.  미 정부는 카스피 해에서 유럽으로 가는 석유 공급로를 개발하려면 그 지역에 평화가 필요하다고 확실히 결정했기 때문이며 그것은 미 정부의 조건에 입각한 평화이어야 했다.

 

한때 다민족국가였던 '보스니아'는 사실상 무슬림 국가이자 실제로는 국제통화기금과 나토의 통제를 받는 종속국가로 수립되었다. 국제 언론에 묘사된 보스니아 내전은 유럽 연합이 해결하기에는 미국의 개입없이 어려운 것으로 묘사했다. 그에 따라 미 정부는 나토의 영향력을 동쪽으로 확대하자는 주장을 유럽 연합에 강요했으며 수 년 전에만 해도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헝가리,폴란드 체코 공화국을 나토에 합류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미 클린턴 행정부는 발칸 반도에 대해  민족주의 잔존 세력을 와해시키는 다음 단계 작업에 착수했다. 카스피 해 연안 '바쿠' 지역과 그 해저, 그리고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접경 지역에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잠재적인 막대한 석유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거대 석유기업들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지역은 2천억 배럴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며 수 십년 만에 발견되  세계 최대의 매장지라며 지질학자들은 그곳을 새로운 쿠웨이트 또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들었다. 브레진스키는 영-미의 거대 석유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발칸 반도 경략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발칸 지역에서의 미국의 석유 지정학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프랑스,이탈리아,네들란드의 지원을 받은 유럽 연합은 핵심 에너지 안보 전략을 발표했다.  그 핵심은 발칸 반도의 안정이었다.1990년 6월 유럽 연합 정상회담에서 유럽 공동체 국가들은 소련과 중부 유럽 및 동부 유럽 국가들과 연대하여 유럽 에너지 공동체 계획을 발표했다. 유럽 연합은 소련의 석유와 에너지 매장지에 대해 유럽 연합의 법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에너지 헌장 조약을 만들었다. 카스피 해 연안 지역 국가들인 '아제르바이젠'과 '카자흐스탄'은 유럽 연합의 향후 에너지 안보를 위한 우선순위 목록에 수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 당시 미 클린턴 정부는 다른 문제로 카스피 해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유럽 연합이 미국과 소련이 포함된 49개국이 참여한 에너지헌장의 비준을 희망하고 있던 위싱턴은 돌연 1994년 12월 빈약한 기술적 근거를 들어 비준을 거부했다. 그러자 유럽 연합은 미국의 비준없이 추진해나갔고, 1998년 12월 실무단을 설립했다.

 

유럽 연합이 카스피 해 동쪽에서 매일 50만 배럴의 원유를 선적할 수 있도록 '바쿠' 근처의 '아제르바이젠'의 항구 개선을 위한 원조를 비롯하여 일련의 계획들을 조용히 추진하고 있을 때, 미국이 주축이 된 나토의 베오그라드 침공이었다. 미국은 1996년 7월 불가리아,마케도니아,알바니아와 송유관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남부 발칸 계획을 작성했다. 그것은 바쿠에서 '그루지아'를 통해 터키의 '제이한' 항구까지 연결되는 송유관 건설이었다. 미국은 카스피 해와 서구 유럽 시장의 중간 지점인 그루지아와 강력한 정치,경제,문화적 유대관계가 미국의 이익에 절대적이며 오늘날 중동의 석유만큼 중요해질 수 있다고 당시 브리티시석유회사-아모코사의 바쿠 사업 대리인이었던 '베이커'가 칼럼에 기고했던 이야기다. 미 정부와 보스턴제일은행이 지원하는 두 번째 송유관인 알바니아,마케도니아,불가리아 송유관회사(AMBO)는 몇 년 동안 송유관 건설 사업이 보류되어 왔던바, 미 정부는 그 사업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밀로셰비치' 정권이라는 방해물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한때 전직 은행가 출신인 유고 대통령 '밀로셰비치'는 국제 통화기금을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생각하던 시절에는 워싱턴의 지지도 받기도 했으나, 이제는 미국의 언론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되었다. 미 정부와 나토가 검열하는 언론 기사들은 오로지 반항적인 밀로셰비치 대통령에게만 집중되었다. 

 

1999년 초, 클린턴 행정부는그 모든 것을 뒤바꿀 적절한 시점이 되었다고 결정했다. 코소보와 세르비아에 나토 군대가 점령하는 것을 거부해온 미로셰비치에 대해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미 정부는국제법,유엔 헌장,나토 헌장,헬싱키 협정,미국 헌법 등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인도적인 이유를 들어 인종청소 위협을 들먹이며 세르비아 민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이 실시되었다. 수천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세르비아 경제와 인프라를 파괴한 후 펜타곤은 미군 기지 건설을 시작했는데, 남동 코소보 '그닐라네 '근처에 3천의 병력, 비행장과 최첨단 통신시설을 갖춘 '본드 스틸' 기지가 건설되었으며 카스피 해 가까이 전략적인 발칸 반도의 유리한 곳에 미군을 상주시킬 수 있게 되었다. 

 

유럽 연합은 석유 공급의 다원화 계획에 차질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미국의 발칸 반도를 경유하는 모든 송유관을 장악하자 사태는 미국 일변도로 바꾸어 버렸다. 미국의 유라시아 대륙의 군사적 장악은 진일보해졌고 달러 민주화는 다시 한 번 전진했고, 패배한 유고는 자유시장이라는 깃발이 단단히 꼿혓다. 2001년 무렵 미국을 상대할 국가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으며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위싱턴은 군사 지배와 더불어 경제 분야에서도 대적할 나라가 없는 세계 초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러한 역활은 극적으로 뒤바뀌었는데 월스트리트 주식시장의 폭락, 경기 휴퇴, 워싱턴과 뉴욕에서 믿을 수 없는 사건의 발생 등이 그러한 변화를 초래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