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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석유 지정학을 향한 새천년

 

석유 지정학을 향한 새천년

 

 
부시, 워싱턴으로 거대 석유기업을 불러들이다.


 

미 대통령 '클린턴'의 임기는 탄핵 스캔들과 세계 최대 금융버블인 뉴욕 증권시장의 거품이 빠지면서 끝이났다. 장부가로 7조 달러가 넘는 금액이 몇 달 만에 사라졌으며 수백만 미국인의 연금 기대와 환상적인 이익의 꿈에 부풀어 있던 해외 투자가들의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과 함께 신 경제 신화는 무너지고 말았다.

 

'조지 부시'는 근대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선거전을 치르고 200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의 라이벌인 '엘 고어'가 전체 국민 득표수로는 확실한 지지 기반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리다' 주 선거인단 투표에 대해 대법원의 5:4라는 특이한 개입을 기반으로 선거에 승리했다.

 

부시의 각료 선임은 타임머신을 타고 12년 전 아버지 '부시' 시대로 되돌아간 것으로 착각을 했을 정도로 각료들을 선임했는데, '딕 체니' 부통령,'도널드 럼스필드' 국방장관,'콜린 파월'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국가안보 특별보좌관까지 대부분 옛 부시 대통령 시절의 오랜 측근들이 차지했다. 실제적으로는 '제임스 베이커'와 '체니'에 의해서 대부분 인선이 거의 결정되었다. 부시의 측근 그룹이 석유업계의 배경을 갖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체니는 세계 최고의 지구물리학 및 석유 부문 기업인 '핼리버턴'사의 최고 경영자였으며 라이스는 '셰브런석유회사'의 이사로 근무했다. 부시 자신은 석유업계의 폭넓은 경험을 쌓았으며, '돈 에번스' 상무장관 또한 석유기업가 출신이었다. 다시말해 2001년 취임한 부시 행정부의 각료들은 과거 그 어느 행정부보다 석유 및 에너지 문제에 열중하는 전문 관료들로 채워졌으며 석유와 지정학이 위싱턴 중심 무대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클린턴' 시대는 월스트리트 투자은행가였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그의 강한 달러 정책으로 대변된다. 다자간 협력, 자유시장 정책, 국제통화기금을 강조하면서 기업의 지구화라는 무자비한 계획을 미국에 유리하게 밀어붙였다. 클린턴 시대의 재무부가 권력의 상징이었다면 부시 시대는 국방부가 초점이 되었다. 대부분의 어젠다는 석유 지정학과 직접 관련이 되어 있었으며 부시 정권의 체니는 부통령으로서 � 번째 임무는 미국 에너지 정책을 포괄적으로 재고하는 것이었다. 신참 대통령을 위해 체니는 역사상 어느 부통령보다도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체니는 오랜 친구이자 스승인 '제임스 베이커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992년 워싱턴을 떠난 베이커는 휴스턴의 '라이스' 대학 두뇌집단인 '베이커 연구소'에 기금을 기부하고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베이커 연구소에는 '엔론'사의 회장 '케네스 레이', '셸'의 이사, '브리티시석유회사' 사장,'셰브런텍사코' 회장,'쿠웨이트' 전 석유장관 '셰이크 사우드 나시르 알사비'도 등 막강한 전현직 석유관련 브레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시는 체니에게 캘리포니아 전력 위기, 치솟는 천연가스와 석유 가격,혼란스러운 미국 송전망 등에 대해서 국가 에너지 계획을 세우라고 요구였는데, 이것은 겉으로 내세운 이유였다. 체니의 '국가 에너지 정책 연구 보고서'는 새 행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분명히 보여주는 신호탄이었다.

 

체니의 '태스크 포스'가 부시 대통령에게 제출한 공식적인 정책 건의서인 2001년 4월 '국가 에너지 정책 보고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베이커연구소의 '에너지 보고서'였다. 베이커와 체니의 정책 보고서는 모두 다가올 미래 20년 동안 미국의 수입 원유 의존도가 급격히 상승할 것이며 세계 석유가 점점 부족해지고 있음을 확인하며 주목할 대상으로는 이라크를 꼽았다. "이라크는 중동에서 국제시장으로 들어가는 원유 흐름에 불안한 영향력을 여전히 미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이 단지 이라크에 대한 정책과 관련된 목표를 수정할 것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베이커 연구소 보고서는 체니의 에너지 정책 집단에 국방부 대표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권고했으며, 군사전략과 에너지 전략이 사실상 하나가 돠도록 요구했다. "미국의 국제정세의 새로운 규칙을 형성하는 데 선도자 역활을 하지 않는다면 미국 기업들과 소비자들과 정부가 불리한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체니의 보고서는 미국 경제의 심화되는 수입 원유 의존도를 강조하고 미래를 충분히 내다보았다. 국내 대체 에너지에 대해 잠깐 언급한 후 미국이 어떻게 새로운 해외 석유 공급원을 확보할 것인지를 다루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석유 매장지가 있는 지역은 대게 그 나라 정부가 통제하고 있는데, 그 정부들이 반드시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순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즉 민족주의 정부는 미국과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워싱턴의 최고 정책집단 인물들은 세계 원유 공급 상태에 대해 놀라고 있었으며 남아 있는 원유 매장지에 어떻게 손을 뻗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2010년쯤에는 하루 5천 배럴이라는 엄청난 석유가 필요한 미국의 상황 예측은 당시 세계 석유 생산량의 3분지 2에 해당하는 물량이며 사우디 석유 생산량의 6배가 넘는 양이었다. 체니는 산유국들이 석유 자원을 정부가 직접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체니와 부시 행정부는 사우디 보다 석유 매장량이 훨씬 더 많은 미개발된 석유 매장지가 있는 이라크를 아주 일찍부터 주목하고 있었다.부시 내각의 일원이었다가 조직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02년 말 해임된 '폴 오닐'이 나중에 폭로한 바에 의하면 부시는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이 있기 훨씬 전부터 이라크 정권 교체를 최고 목표로 삼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오닐은 부시 행정부가 출범시부터 이라크를 어떻게 쓰러뜨릴지가 최대 관심사였으며 취임한 지 열흘 후 화제의 최우선 순위는 이라크 문제 였다고 하였다.

 

'오사마 빈 라덴'과 테러에 대한 전쟁이 전면에 부각되기 8개월 전 이미 부시와 체니와 내각은 후세인을 제거할 군사적 선택을 고려하고 있었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기 몇 주 전, 그리고 9.11테러가 있기 1년 전인 2000년 9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워싱턴의 한 두뇌집단이 정책 보고서를 발간했다. '미국 방위력 재건'이라는 제목의 그 보고서는 차기 행정부의 정책 구상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했다. 그 보고서는 자칭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 또는 약어로 'PNAC'이라  부르는 영향력 있는 공화당 집단에 의해 준비되었다.

 

PANC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다...... 현재로서는 어떠한 경쟁자도 없다....미국의 웅대한 전략은 이러한 유리한 상황을 유지하고 되도록 미래까지 멀리 연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현 상황에 불만을 품고 할 수만 있다면 상황을 바꾸고 싶어하는, 잠재적 강대국들도 있다." 라고 보고서는 시작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세계 지배를 획책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발상을 기본 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뛴다.

 

고대 로마가 세계 대국을 건설할 때와 같은 이론을 내세우며 소아시아와 그토록 패권 경쟁을 하였던 것이나 지금의 미국이 중동에 대한 석유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이용하여 현지 정구너을 전복하고 친미적인 정권을 새로 세우는 등 석유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경제,군사,금융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배력을 확산하려고 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이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조사 기구인 '이라크 연구그룹'(제임스 베이커 전 미 국무장관과 해밀튼 전의원)이 12월 6일 아침(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나 이라크 주둔 미군의 전투병을 오는 2008년초까지 철수하고 이라크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도록하는 방안을 부시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 적극 개입해 중동분쟁 해결에 나서도록 요구하였다.

              

 


                  로마제국의 문양과 현재 미국의 문양인 "독수리".  로마제국이 조그마한 반도의
                  도시국가에서 지중해를 내해로 하는 "천년왕국" 이 가능했던 것은 자신의 권리를
                  일부 포기하고 피정복민과 공유할 수 있었던 피정복민족과 주변민족들에 대한
                  "포용력" 때문이라고 한다.

 PNAC은 월포워츠가 체니를 위해 작성한 1992년 전략 백서를 칭찬했는데, 당시 제1차 이라크 전쟁 시기 국방장관이었던 체니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92년 초에 작성된 방위정책 지침은 미국의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고 강력한 경쟁 상대국의 등장을 막으며 국제 안보질서를 미국의 원칙과 이익에 맞게 구현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공했다." 부시는 1992년의 그 정책 보고서를 숨길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사본이 <뉴욕 타임즈>에 유출되어 논쟁이 가열되었다. 2002년 부시가 미국 국가안보 전략으로 부시 독트린을 공표한 것은 강력한 경쟁 상대를 방지하기 위해 일종의 예방 전쟁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체니와 그 일당은 탈냉전시대에 미국을 위한 제국주의 전략을 다른 말로 바꿔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 선진 산업국들이 우리의 지도력에 도전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속한 지역이나 사계에서 좀더 큰 역활을 하겠다는 포부조차 품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PNAC그룹은 단지 세계를 지배하는데 반족하지 않고 워싱턴이 전세계 지휘 통제 시스템을 만들어 낼 것을 제안했다. 그들은 또한 우주 공간을 지배할 미국의 우주 군사력, 사이버 공간의 완전한 장악, 특정 유전자형을 표적으로 삼을 수 있어 생물학적 전쟁을 테러의 영역에서 정치적으로 유용한 수단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생물학적 무기의 개발 등을 요구했다. 2000년 9월 PNAC보고서는 나중에 부시에 의해 '악의 축'으로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될 세력을 규정하였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로 나아가는 데 특별히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세 정권, 즉 북한-이란-이라크를 꼽았다. 체니는 미국의 정책이 아리비아 만을 군사적으로 직접 장악해야 한다고 오만하게 말하면서 특별히 다루어야 할 상대로 후세인을 지목했다. 걸프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미군이 주둔해야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라크의 대량살살 무기나 테러리스트와의 연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카블에서 바그다드까지: 테러와의 전쟁인가 아니면 석유 쟁탈전인가?

 

9.11테러는 적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공산주의를 대체하게 되었다.새로운 테러리스트는 세계 어디에나 있을 수 있으며 고맙게도 테르리스트들은 석유 매장지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는 이슬람 지역에서 대부분 출현하게 되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빈 라덴 만큼 고마운 인물이 없었다. 새로운 적을 �기에 고심하던 부시 행정부는 이슬람 테러 집단의 출현이 금상첨화였다. 대테러 전쟁을 선포한 부시 행정부는 일흔 줄에 접어든 럼스펠드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세계 권력 정치의 중심부에 서게 만들었다.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 밥 우드워드가 자신의 저서 <전쟁 중인 부시>에서 설명한 바에 의하면,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진 다음 날인 2001년 9월 12일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폴 윌포위츠 국방차관은 이라크가 "테러와의 전쟁 1차전 주요 표적"이 되;아야 한다고 대통령을 설복하기 시작했다. 이는 테러 공격의 배후가 누구였는지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기도 전이었다. 

 

합동참모회의 의장으로서 제1차 걸프 전쟁을 책임졌던 '파월' 국무장관이 체니의 도움으로 "여론을 먼저 형성해야 이라크에 대한 조치가 가능해진다"고 부시를 설득했다고 한다.아프가니스탄에서 곧 시작될, 탈레반 정권을 제거하기 위한 군사행동은 좀 더 큰 싸움을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했다. 우드워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이제 막 벌어지고 잇던 바로 그 시간에 부시는 이미 이라크 침공을 위한 비밀 게획을 명령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슬람 원리주의자 탈레반이 이끄는 아프가니스탄은 빈 라덴이라는 한 사우디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빈 라덴의 조직인 알카에다는 부시가 새롭게 선포한 테러와의 �쟁 � 번째 군사행동의 표적이 되었다. 

 

위싱턴 정부는 처음에는 탈레반 정권을 송유관로 사업의 가능한 파트너로 생각했다. 탈레반 대표들이 1997년 협상을 위해 '우노칼'사 초청으로 텍사스를 방문햇으나 합의점을 �지 못하였고 비밀리에 부시와 체니와도 가까운 '엔론'사도 은밀히 탈레반과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하는 카스피 해의 석유와 가스 송유관로 혐상을 벌이고 있었다. 엔론은 2001년 11월 도산하여 미국 역사상 최대의 기업 파산자 사기극을 장식했던 회사였다.

 

엔론이 수십억 달러의 아프칸 송유관을 건설하도록 요구한 기업은 바로 체니의 옛 '핼리버턴'사였다. 체니 부통령과 부시의 재정 지원자였던 켄레이 엔론 회장 사이의 비밀회담은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하는 엔론의 송유관로에 대한 워싱턴의 지원과 연관이 있다는 징후가 있다. 체니가 비밀회담 관련 문서를 하원 일반 회계국에 제공하길 거부하여 법정 대결로 끌고 갔다. 그 무렵 엔론의 모래성은 무너지고 있었다.

 

탈레반은 2001년 7월 워싱턴 측의 호의를 잃게 되었는데, 보도에 의하면 그때 미국 측 협상가들은 "황금카펫 위에 앉아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이거나 융단폭격에 묻히거나 양자택일할 것" 을 강요하며 자신들의 송유관로 조건들을 제시했다고 한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인프라를 재건하기 위해서 미국의 도움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송유관이 인도와 그 너머로 가는 수송로가 될 뿐 아니라 아프간의 에너지 요구도 충족시켜주길 원햇다.그러나 워싱턴은 그러한 탈레반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래서 워싱턴은 2001년 9.11 사건으로 '카블'에 융단폭격을 가할 구실을 만들게 되었다. 

 

미 국방부는 아프간에 대한 '항구적 자유 작전'을 실행했다. 아프간에서 군사작전은 싱겁게 끝이 나, 탈레반 정권은 2002년 초 붕괴되었으며 대부분의 병사들이 미 중앙정보국의 후한 달러 보조금을 받은 후 순순히 항복했다.  당시 부시의 아프간 및 중앙아시아 담당 국가안보 고문이었던 아프간인 '잘메이 칼릴자드'였는데 그는 우노칼사의 송유관 협상에도 관여 하였으며 이라크 협상 대표로도 참여했다. 그는 전후 아프간의 임시 대통령으로 우노칼사의 고문이었던 '하미드 카르자이'를 임명해줄 것을 권고했다. 

 

워싱턴은 아프간 침공으로 많은 것을 챙겼는데 국방에산을 연간 약 4천억 달러까지 대폭 증액하고, 옛 소련 영토 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우즈베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 이르는 상시 주둔 미군 기지망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군이 탈레반을 제거하자 옛 군벌들이 대량으로 아편을 재배하여 전세게에 헤로인이 대량으로 공급되게 되었다. 

 

미 정부가 카블에 카리자르를 앉히자마자 부시와 체니는 새로운 아돌프 히틀러인 후세인에 대한 전쟁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햇다. 미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동의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부시 독트린을 적용하는 데 착수했으며 안전보장이사회는 동의하지도 않았다.

 

 

석유가 있는 곳이면 어디던지 간다

 

미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동의도 없이 유엔 헌장을 위반해가면서 영국,포르투칼,스페인,폴란드를 비롯한 소수의 우방을 제외하고 주요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2002년 바그다드에 대한 군사공격을 준비했다. 러시아,프랑스,중국,독일까지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려는 미국의 결정에 공공연히 반대했다. 특히 러시아는 반대가 심했는데, 루코일과 국영기업 두 곳이 23년간 이라크 서쿠르나 유전을 개발하기로 계약을 맺고 있었다. 프랑스와 중국도 서부 이라크 지역에 석유 채굴권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했다. 이 세 강대국들은 모두 미국 측의 일방적인 전쟁이 이라크 석유에 대한 자신들의 꿈을 완전히 박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석유 수입국으로 부상하는 중이었다. 현 경제 성장률대로라면 10년 내에 확실히 소비량의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세계 제1의 소비국이 될 전망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아직 국내 수요를 충족시킬 충분한 석유를 �지 못하고 있었으며 경제강국으로 자신들의 미래가 석유를 확보하는데 달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국제사회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 초읽기에 돌입하면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문제는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였다. 미국이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라고 알고 있던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 있었으며 왜 전체 석유 생산업계에 불안을 일으키고 유가 충격과 세계 경제불황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라크를 치려고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워싱턴의 공식적인 답변은 후세인이 대량살상 무기를 갖고 있으며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납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의심이 결국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이미 13만 명의 미군 병력이 이라크에서 후세인을 몰아내고 점령한 이후였다. 

 

예상한대로 이라크에 대한 군사공격 '충격과 공포 작전'은 몇 주 만에 끝이 났다. 가공할 최신 무기가 총동원되었으며 신형무기의 실험장이었으며 재고 군수물자를 처리하는 소모전장이었다. 이라크 군은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파죽지세로 밀려 수도 마그다드에서 부분적인 저항을 시도했으나 대부분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정밀유도무기,엄청난 화력,공중공습,신속한 기동,포위 기동,통신 마비,지휘통제시설마비,전자전,야간작전,정밀폭격 등 최신 군사무기의 경연장 같은 전장터였으며 역사적으로 그렇게 압도적인 화력과 참화로 조그만 땅덩어리가 초토화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CNN의 중계 방송화면은 미국을 우습게 보다가는 저런꼴을 당한다는불안감을 전세계에 전파하였으며 부시의 "우리 편이 아니면 우리의 적이다"라고 말한 것을 미국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미 정부가 이라크가 갖고 잇는 것으로 추정한 화학 무기, 생물학 무기,핵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유엔 사찰단이 아무런 무기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들은 말을 바꾸어 진짜 이유는 후세인이 빈 라덴과 알카에다와 공모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나중에 다시 독재자를 제거하고 민주 정체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으로 바뀌었다. 부시는 2004년 1월 연두교서에서 중동에서 자유 선거, 자유 시장, 자유 언론, 자유 노동조합을 개발하기 위해 전국민주주의재단 예산을 두 배로 늘릴 것을 요구했다. 유고와 동유럽 소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동 지역 국가들에 대한 공작을 확산하기 위한 예산 증액 요구였다. 영국의 블레어 총리는 미국의 봉 노릇을 하면서 사기전쟁에 함께 참여하였으며 전쟁의 명분에서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제일 뻔뻔스런 사람은 '윌포위츠' 국방차관으로서, 그는 예방 전쟁을 요구한 1992년 백서의 작성자이며, 2000년 9월 새로운 미국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의 공동 필자이자 주요 주전론자였다. 그는 2003년 6월 싱가포르 안보회의 파견 대표들에게 "북한과 이라크가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경제적으로 우리가 이라크에는 단지 선택권이 없다는 점이며 이 나라는 석유의 바다에 떠 있는 셈이다"라고 하면서 북한이 핵탄두와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묵인되었다는 시실은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2004년 '파월'은 미국이 이라크와 알카에다가 관련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지 못했다고 시인하면서도 그곳이 위험에 빠지면 미국도 위험에 빠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며 그러한 가능성은 있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통상적이면 전후 재건은 국무부가 맡아야 했으나 이라크 재건 사업은 국방부가 맡았다. 국방부의 윌포위츠는 행정부의 좋은 친구들을 이라크 석유사업에 우선권이 주어졌는데 체니의 핼리버턴사가 벡텔과 영-미 석유기업들과 함게 그 명단의 우선순위에 올라 있엇다. 미국은 유럽과 소련 그리고 모든 나라에 대해서 이라크의 부채를 탕감해줄 것을 요구했다. 외국군대에게 분담금을 부담하도록 요구한 반면 유엔 통제하의 평화 유지를 허용하길 거부했다. 따라서 이러한 미 정부의 태도는 민주적이기보다는 지국주의적인 속성를드러내고 있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