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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21세기 한.중.일 삼국지' 17

 

'21세기 한.중.일 삼국지' 17

 


동북아역사재단 '동해 당위성 설파' 국제학술대회

 

 

 

4. 한.중.일 사회 삼국지

 

지역감정

 

한국의 지역감정

한국의 지역감정. 특히나 정계에 꽈리를 틀고 앉아 두루두루, 고루고루 눈살 찌푸리게 하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 한국의 지역감정을 대표하는 영남과 호남의 지역감정은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전라.충청도 지역의 후백제의 견훤과 추종세력인 잔여 세력의 토벌과 '왕규의 난'을 계기로 믿지못할 지역의 사람은 전라.충청도 지역 사람이라는 편견이 내재되어 후손에게 남긴 '훈요십조'에 명시된 이래 '호남차별 정책'은 강화되어 왔으며, 이는 이조 시대까지 연결되어 과거의 등용이나 각종 반정/반역 사건이나 사색당쟁과 연계되어 심화되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고려 시대 천민이던 '망소.망이'의 난이 공주지역에서 발생하여 충청권 일대가 초토화 되었으며 지역 편견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이조 선조 시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발생되어 추국과정에서 정여립의 추종 세력 등 천여 명 이상이 참수,처형,유배되었으며, 또 각종 유배지로 전라도 지역이 선정되어 많은 선비들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낳은 후손들이나 주변 백성들이 그들 선비들로부터 높은 학문과 사상을  배우며  자라고 지식이 깨이면서 점점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는 바, 서출과 지역 차별로 출세의 길은 멀고 등용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전라도 지방은 넓은 평야에 먹고 살기에는 넉넉한 지방으로 모자람이 없으며 부족함이 없으면 없을수록 출세에 대한 욕망은 분출되는 것이 인간인지라, 그 결과 불평 분자들이 더욱 양산되면서 기존 정치권에 대한 뿌리깊은 반항심은 심화되어 갔으며, 조선 말엽 '동학 민란'의 발생으로 전라도 지방이 관군과 일본군에 토벌되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민란 동조자로 잡혀 처형되고 가족과 자손들까지 숙청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 발발과 처리과정에서 전라도 지방은 기존세력의 차별화는 더욱 심화되었으며 지방민들의 마음속에는 피맺힌 한은 더욱 깊어만 갔던 것이다.

 

또 해방 후에 한국 사회는 '공산당 푸락치' 섬멸이라는 미명하에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던 그 시기에 '여순 반란사건', '제주 4.3 폭동 사건'이 발생하고 진압되는 과정에서 전라도 지역에 대한 배타적인 편견은 한국 사회에 더욱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였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인민군이 진입하자 부농과 지도층이 수없이 숙청당하였던 지역 또한 전라도 지역이었으며 또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후퇴시 일부 북한군이 지리산에 은거하면서 벌인 빨치산 투쟁시에는 주력 세력인 '남부군'에 편승해 지리산 빨지산 투쟁을 벌이면서 결과작으로 많은 지방민이 끌려가서 동조하게 됨에 이러한 사실 또한 지역편견을 부채질 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

 

전후 '박정희'의 5.16 군사 쿠테타를 기점으로 기존 정치권에 대거 영남지역 사람들이 진입하면서 호남지역 사람들은 더욱 차별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개발 과정에서 영남지방 위주로 정치적인 투자가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전라도 지방은 소외되고 있다는 강한 불만감은 지역감정을 더욱 골수깊게 만들기도 하였다. 가난을 이기지 못한 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대도시로 몰려들면서 서울 변두리 지역 달동네는 그들의 비참한 생활의 터전이었으며 밤무대를 주름잡는 세력들은 그들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런 지역차별 양극화는 그후 영남지역과 호남지역간의 지역감정을 더욱 부채질하였으며 그 강도는 더욱 심화시켜만 갔다. 10.26 사건 이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노태우' 정권은 군인과 민간인들 중에서도 영남지역 출신 인사들을 대거 권력층에 포진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선택에서 배제된 전라도 지역 사람들의 사회적 불만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그후 광주 5.18을 계기로 군사 정권이 물러나고 문민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동안 차별받으며 숨죽이고 살아오던 그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면서 사회 곳곳에서 당당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정치권에 입성하거나 권력층에 포진하면서 권력의 맛을 향유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그동안 권력을 향유하던 부패했던 경상도 권력층은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군부에서는 당시 군부 실세였으며 경상도 출신 장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음성적인 사조직인 '하나회 사건' 이 터지면서 이를 계기로 군부 숙청 또한 과감하게 단행되었고 그 선두에 선 사람이 바로 당시 군에서 비하나회로 음지에서 자라다가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K'씨라는 국방부 장관이었다.  K 장관은 하나회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본인이 경험하였던 당사자로 이 사건을 강도높게 처리함과 동시에 관련자들은 대부분 군복을 벗거나 부군단장,부사단장,부사령관 등 전방부대나 한직으로 �겨 갔으며 그후 계급별 진급 심사에서도 하나회 출신들은 대부분 배제 되었다. K 장관은 지휘관 시절 실제로 부하들로부터 매우 존경받던 군인으로 성격이 온후하고 정리가 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가지 실화로, 대규모 사단시범을 보이는 예하 대대장이 시범 준비간 사단장의 세심한 조언을 받아 모든 것을 준비하여, 당일 시범을 성공적으로 보이자, 사단장은 마지막 훈시에서 "오늘 시범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는 세세한 부분까지 착안하여 성공적인 시범을 보인 대대장의 우수성을 보고 놀랐다"라며 극구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부하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도와주면서도 모든 공과를 부하에게 돌리는 덕(德)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장관, 안기부장 재직 기간을 통해 자신이 사단장 시절  같이 근무했던 사단의 각 연대장들, 사단 참모들, 사단 직할 대장들을 병과에 관계없이 장군 심사 대상자는 거의 대부분 장군으로 진급시켰다. 그중에는 동기생들로부터 별로 신임을 받지 못하였거나 진급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소문났던 사람, 경력상의 문제나 기타 문제로 수 차례 장군 진급에 누락되었다가 마지막에 장군으로 진급한 사람 등 이들은 대기만성형 장교들로 그중에는 3성 장군까지 승진하기도 하였다. 하나회 대부가 하나회 후배들을 줄줄이 진급시키고 주요 보직에 보직시키는 것과 같은 형태였다. 권력을 가진 누구나 비록 능력과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가까운 또 믿을만한 사람을 승진시키고 요직에 앉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세상은 문민정부이후 국민의 정부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면서 군부를 포함하여 전라도 출신들이 대거 진출하였는데, 군은 '하나회'가 된서리를 맞자 이제는 그 공백을 긴 세월동안 음지에서 표시 안내고 눈치보며 열심히 근무하던 전라도 사람들이 대거 장군으로 진급하거나 사단장,군단장 등 주요보직으로 승진.발령되었으며 정치권.경제계 할 것 없이 전라도 출신들이 대거 입성.포진하게 되었다. 그러자 경상도 출신 사람들은 군부를 포함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된서리를 맞고 대부분 권력층에서 물러나거나 승진에서 탈락되었으며 그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던 영광스런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편 경상도 지역 대부분의 기업체는 세무 조사와 검찰 조사를 받고 장부가 압수되고 불법과 부정이 드러난 대부분의 기업체는 고소.고발, 형사입건, 은행 대출 중단 등 경제적인 제재조치로 먹구름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때마침 한국을 포함 아시아 일대에  �아온 IMF 태풍은 더욱 숨통을 조이면서 경상도 지역을 포함한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경상도 사람들은 시운을 한탄하며 불평분자로 전락하거나 또는 자괴심에 빠져 초야에서 뭍혀 숨죽이고 살아가고 있거나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러한 지역감정은 선거철이면 그 절정을 표출하는데 대선에서 전라도 지방이 그 지역 출신 특정후보에 대하여 100% 찬성의 힘은 바로 그동안 억눌렸던 그들의 에너지가 분출되어 표출된 것이리라고 볼 수 있다. 공산권 국가의 투표도 아닌 민주국가 투표에서 100% 찬성표는 인류 역사 이래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떤 한 지방이 한 후보자에게 몰표를 준 예는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그들 또한 간과하고 있는 것은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진실이다. 뿌린대로 거두고 한대로 당하게 된다는 인간들의 속성을 안다면 넓은 포용력으로 서로 친화를 도모하고 화합을 추구해야 했었다. 역사의 반복을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한은 한을 부르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는 점이다. 누구나 시키면 다 할 수 있다. 가리지말고 계산하지 말고 폭넓게 포용하면 다같이 잘 살아 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가 있다. 앙갚음의 연속은 스스로를 멍들게 만들고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나면 그 과정은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긍정적인 역활도 할 수 있으나 한국이라는 좁은 땅에서 지금 반목과 질시로 서로를 비난하고 깍아내려서 나라에 도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민족의 에너지를 뭉쳐 남북의 통일이 급선무인 이 시점에 영.호남이 무엇이 문제인가? 앞으로 통일 후에는 남.북이 사상과 지역감정 문제로 심각하게 갈등이 분출될 지도 모른다. 지역감정에 볼모로 잡히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는 불쌍한 민족이 바로 이땅의 백성이다.

 

그러면 이 지역감정이란 눔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아니면 우리만 고유한 것일까?

 

먼자 일본을 보자.

일본은 홋카이도,혼슈,시코루,규슈 등 주요 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총면적은 남한보다 4배 정도 넓다. 인구 또한 남한의 3배에 해당하여 1억 2,000만 명을 훌쩍 넘는다. 그런데 그들보다 인구나 영토가 좁은 우리나라에도 지역감정이 있는데 일본도 마찬가지이다.일본의 지역감정은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 지방과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방 간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오사카 사람들은 도쿄의 간토 지방 사람들을 절난 체에 점잖은 척하는 새침데기'로 폄하하고 있으며, 도쿄 지방 사람들은 오사카 사람들을 '돈만 밝히고 거치고 경망스런 자들'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양지방은 사용하는 언어나 음식,문화,생활 습관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오사카 등 일본 역사 속에서 오랜 기간 중심지 역활을 해 온 간사이 지역 사람들은 에도 시대 이전까지는 역사의 음지에 불과했던 도쿄를 포함한 촌구석 간토 지방 사람들을 깔본다.

 

이러한 지방 간의 길등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1600년 일본이 통일되기 전 동군과 서군으로 나눠 치열한 접전을 전개했던 '세키가하라' 전투를 들 수 있으며, 다음으로 1867년 메이지 유신을 들수 있으며, 1945년 일본의 패전이다.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군과 '도요도미 히데요시' 추종 세력인 서군간의패권을 다툰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고 서군이 패전하게 된다. 이후 집권한 동군 세력은 통일 국가 일본의 중심을 오사카, 즉 간사이에서 에도에 막부를 열고(에도 막부 1603-1867), 메이지 유신이 때까지일본의 전국을 통치하게 된다. 이에 반해 패자인 서군 세력은 하급 사무라이로 전락하여 대부분 조슈번(현재 야마구치현), 샤쓰마번(가고시마현),도사번(고지현) 등의 일본 열도의 서쪽 변방지대로 밀려난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 '에도막부 타도'를 부르짖으며 메이지 유신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할 때까지 약 300년간의 세월을 역사의 음지에서 보내게 된다. 여하튼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성공한 이들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새로운 시대를 그려 나간다. 밀려난 동군 세력은 서군과 마찬가지로 음지에서 절치부심하며 지역감정의 골은 깊어만 갔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감정는 2차대전 후 진주한 연합군에 의해 어느 정도 개선되기 시작하였으나 뿌리깊은 동.서간의 지역감정은 20세기 중반들어 조금씩 완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중국은 어떤가?

중국 대륙은 워낙 방대한 대륙이다 보니 각 지역의 고유 관습, 전통, 언어 등이 천차만별이고, 또 여러 가지 요인에 기인한 생활수준의 차이 등이 중국의 지역감정을 유발하고 있다.중국도 일본처럼 양대 도시간의 지역 감정이 존재하는데 바로 베이징과 상하이다.베이징은 수도이고 상하이는 경제의 수도가 아닌가? 그래서 그들의 자존심 싸움은 지역간정으로 비화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중국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두 곳 사람들이 바라보는 대립적 시각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베이징 사람들은 상하이 사람들을 '돈만 밝히는 천박한 것들'이라고 비난하고, 상하이 사람들은 베이징 사람들을 '아무것도 없이 허세만 피우는 위선자들'이라고 서로 비하하고 있다. 베이징 사람들은 베이징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지방이라고 하고 상하이 사람들은 상하이 외 다른 지역은 모두 지방이라고 한다. 베이징 사람들은 착실히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하는데 주안점을 두지만, 상하이 사람들은 자동차를 구입하고 자기집을 호화롭게 구미는 것을 자랑하는 삶의 방식, 문화양식 그리고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지역감정이다.

 

중국은 처음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습관적으로 출신지역을 묻는다. 산악지역,하천지역,내륙지역,사막지역, 그리고 해안지역 등과 같이 저마다 뚜렸한 다른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수천 년을 지내 온 탓에 중국에는 도저히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을 수 없는 각 지방의 고유색이 상당히 강하다.  이로 인해 각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환경, 거주환경 등의 영향을 받아 저마다 독특한 의식주 문화와 기질, 성향과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이처럼 천차만별의 지방색이 다른 만큼 중국인들이 처음만나 먼저 물어보는 출신지는 상대방의 일반적인 기질,성향 등에 감을 잡고 그와 앞으로 관계 설정에 있어 참고로 하기 위함이다.

 

중국에는 타 지방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 상하이 토박이는 타 지역 사람들에게 대하는 태도는 외국인들로 놀라게 한다고 한다. 외지인에 대한 이러한 차별에 중국인들은 담담하게 받아 들인다. 그것은 중국 내 지역 차별이 그만큼 뿌리 깊게 고착되어 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의 '허난성'은 역사적인 유서깊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가장 개발이 지연되고 있는 천대받는 곳이다. 농촌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이 바로 '허난성'이며 가장 낙후된 지역이다. 외국인 투자나 대기업의 투자도 없으며 다만 짝퉁 생산의 공급기지로 오명만 남아 있다. 그동안 각종 부정과 불법 사건들이 빈번하게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허난성의 병리 현상에 대해 토론회도 벌이고 '중원을 해부한다' 등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움직임은 모두 동일하다. 다름 아닌 '우리는 모두 중화민족이요, 같은 중국인이다'라는 것이며 허난성 문제의 이면에는 이를 통해 중국 사회의 지역감정, 지역 차별을 인정하고 그것을 널리 알려 사회 문제화 시킴과 동시에 사회통합의 이데올로기의 한 소재로 삼으려는 중국 당국의 의중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