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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8

 

'뜻으로 본 한국역사' 8

 

깨어진 꿈

 

거란의 침입 

밀물 때가 지나가자 역사는 썰물 때로 들어갔다. 혜종.정종 두 임금을 지나 광종 때에 이르러 대세는 아주 유교파로 기울어졌다. 이 임금은 중국 것을 매우 좋아하였던 이로서, 중국에서 온 사람 '쌍기' 를 들어 쓰고 ,그 의견에 따라 '과거법'을 시행하였고, 신하들의 집을 빼았아까지 가며 이 귀화인을 대접하였다.

 

그 다음 한 시대를 지나 성종 때에 이르면 점점 유교는 더욱 고려 조정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불교를 몰아내고, '국자감'을 세우고, '문선왕묘도'를 가져오는 등 유교가 완전히 국교가 된 것이다. 관제를 배우고 교육을 배우고 종교를 배우고, 겉으로부터 속에 이르기까지 중국이 되려 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모화사상'과 '사대주의'가 생기고 '현상주의'가 생기게 되었다. 현상유지는 자기네 권력을 영원한 것으로 박아놓으려는 수작이었다. 나라야 어찌되건, 민중이야 어찌되건, 이대로 영원히 해 먹자는 것이다. 

 

이때 썰물시기, 자기를 잊고 거짖에 취하는 때에, 커다란 몽둥이가 머리통을 때렸다. 그것은 거란이 쳐들어온 것이다. 거란은 고려 건국 무렵 만주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를 쳐없앤 사나운 민족이다. 태조가 거란을 배척하면서 북벌을 생각하였듯이 후대 임금들이 거란을 쳐 없앴다면 거란은 자라지도 못하였을 것이나, 유교를 높이고, 군자국 노릇 한답시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정책을 버리고, 현상유지를 일삼아 모험하기를 싫어하게 되자, 거란은 그 틈을 타서 가만히 힘을 길러 가지고 북에 꽉 눌러 서게 되었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공자가 다 된 줄 알았을 때에는 좋았으나 갑자기 난을 만나고 나니 그 공자도 어쩔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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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장군 동상 이전 고유제

뉴시스|기사입력 2007-10-23 17:02

강감찬장군 동상 이전 고유제
강감찬장군 동상 이전 고유제

【수원=뉴시스】

23일 경기 수원 팔달산에 세워진 강감찬장군 동상 이전을 위해 고유제를 지내고 있다.

수원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지키는 신(神)을 모신 사당인 성신사를 내년 10월까지 동상자리에 복원할 계획이다. /강종민기자 ppkjm@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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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치 혀로 적진에 들어가 당당히 담판을 하던 서희의 용맹과 의기로 나라의 체면을 겨우 꿰매기는 하였으나 구차하기 짝이 없는 일이요, 한줌 되는 군사를 거느리고 대적의 큰 군대를 가로막아 하루 온종일 죽도록 싸우다가 죽은 김숙홍.양규 같은 위대한 혼이 남아 있고, 강감찬 같은 용한 장수가 있어 힘써 싸움으로써 겨우 적병을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태조의 큰 뜻은 이미 안개속으로 사라진듯 하였다. 

 

거란이 고려에게 깨어나도록 종울림을 한 후에 수십년 동안 고려는 불교와 유교의 꽃을 피웠는데 불교의 '대각국사'와 유교의 '해동공자 최충'이 나타난 것이 그것이다.

 

윤관의 원정  

역사는 이제 두번째 밀물 때로 들어간다. 만주에서 거란이 쇠하여 가고 여진이 나타났다. 여진이란 본래 말갈의 한 종자로, 고구려 때에는 그 밑에 속하였다가 후에는 발해에 붙었고, 발해가 망한 뒤에는 거란의 다스림을 받았다. 그러나 그 문화 정도가 낮고 더구나 조선에 대해서는 그 추장의 조상이 조선 사람이라 하여 부모의 나라로 섬겨오던 터이였으니, 누가 보아도 고려가 위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주 땅이 애타게 고려를 부르고 있던 시기였다. 숙종 때에는 북으로 가자는 소리가 또 일어났다. 그때 동북 방면에 여진의 장난이 자주하므로 이때 철저한 토벌로 아주 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숙종 9년 윤관을 시켜 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듬해 숙종은 한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다음 예종이 계획하여 2년과 3년에 이르는 동안 몇 차례 정벌을 하였다. 윤관을 도원수로 17만 대군으로 떠났다. 이 역사적 대사건은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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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산송 시비 윤관 장군 묘역

연합뉴스|기사입력 2006-04-10 17:28 |최종수정2006-04-10 17:28


지난 400년 동안 파평윤씨와 청송심씨가 묘지 다툼을 벌였던 사적 제323호 윤관 장군 묘역. 윤관 장군 묘(앞쪽) 바로 뒤편에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 아버지의 묘가 조성돼 있다./파주시청 제공/지방/-지방기사 참조- 2006.4.10 (파주=연합뉴스) wy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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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은 함북 지방을 평정하여 아홉 성을 쌓고 남쪽 지방 6만 호를 옮겨 식민을 하고,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간도 지방까지 쫓고 돌아왔다. 역사의 바늘은 대조선의 부흥 쪽으로 놓인듯 하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조정안에서 윤관의 성공을 시기하는 썩은 선비 무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의 주장은 압록강 이남에 그냥 온순하게 가만히 있자는 주장이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며, 내세우는 것이 사대주의요, 속셈은 될수록 현상유지를 하여 자기네의 지위를 잃지를 말자는 이야기다.

 

때마침 동북으로 쫓겨갔던 여진이 살길이 없어 "하늘에 맹세코 다대대자손에 이르기까지 조공을 지키고 국경 위에 감히 기왓장 조각하나라도 던지지 않을 터이니" 앞서 빼았은 아홉 성을 돌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조정에서는 선비들이 돌려주자는 의견이었다. 이때 유신파들은 윤관을 포함하여 일파를 거꾸려뜨리자는 방향으로 중론을 밀고나가면서 임금인 예종을 어루고 협박했다. 조정 대신들이 종일토록 대전으로 몰려가서 단체로 연좌 농성하며 상소를 올리면서 임금을 졸랐다. 그래도 예종이 말을 듣지않자, 대신들은 동맹파업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조정에는 출근하는 눔이 없었다. 외적 토벌에는 몸을 사리지만 세치 혀로 공신토벌에는 물불을 안가리는 선비들인지라, 결국 윤관은 벼슬이 깍이고 아홉 성은 다시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예종의 슬픔

 이리하여 꿈틀대던 북진여망은 그만 서리를 맞고 말았다. 예종 11년 만주에서는 발해 왕의 후손 '고영창'이 황제라 칭하고 나라이름을 '대원',연호를 '융기'라 하고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었건만 고려는 유신 권력가들의 농간에 의해 반도속에 영원히 갇히고 말았다. 예종 12년에는 여진이 장성하여 '금'이라 하고 제(帝)라 칭하며 화친을 청해왔다.

 

꿈은 깨졌다. 흩어져 다니던 여진의 무리가 통일을 이루기 전에 한번 크게 거리낌없이 나아가 동만주 일대를 먼저 차지해놓고 그다음 거란의 남은 시체를 몰아냈다면 만주.몽고 얻기를 주머니 속에 물건 집어내듯 하였을 것이요, 만주 몽고만 얻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인순고식(因循故息) 속에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그 꿈은 다 깨져 안개로 사라지고 고려 사람들은 자기네가 짐승들이라고 업신여기던 여진이 그 꿈을 그대로를 사실로 만들어 가지고 나서는 것을 보고 놀라고 분한 생각만 금할 길이 없었다. 예종이 거하고 인종이 들어서니 나이 15세 소년이라, 이제부터 역사는 썰물로 들어간다.  그래도 캄캄한 어둠에 빠지기전에 그 흐름을 한번 타보려고 최후의 건너뜀을 시도해 보았건만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이른바 인종13년 '묘청의 난'이었다.

 

대위국의 꿈

정지상.백수한.김안.윤언이라는 사람들이 인종을 보고 우리도 황제라 칭하고 중국 연호를 쓰지 말고 새로 건원이라 하고, 북으로 한번 쳐들어가자고 주장하고 나섰으나 쥐죽은 듯 하던 나라에 한번 북벌론이 나오니, 민심은 벌집을 쑤신 듯 뒤숭숭해졌다.

 

유신들은 물론 거기에 반대를 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금이 하는 일은 되지 못한 오랑캐의 짓으로만 보였으며 칭제라니 그런 어리석고 건방진 생각이 어디있느냐? 천벌을 받을 생각이지, 제(帝)란 중국의 천자님만이 홀로 일컬을 수 있는 것이지,우리 같이 변방의 오랑캐 나라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모르는 무부(武夫)눔들이라 어쩔 수가 없는거야... 그렇게 호통치고 있었다. 

 

이리하여 두 파간에 서로 당위성과 명분론을 내세우는데 가관이라! 하나는 쓸데없는 모험을 말고 현상 이대로를 지켜 반도 안에 가만히 있자는 쪽이요, 하나는 일을 한번 일으켜 만주로 가자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던 암투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양파간에 적개심을 드러내게 되었는바, 바로 '서경천도' 사건이다. 

 

서경천도라는 것은, 본래 건국 시초부터 나라서울을 평양 '임원역'으로 옮기자는 말이 있었다. 그러면 그 자리가 명당 자리이기 때문에 나라가 성하게 되어 36국이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 마지막 무렵부터 많이 유행하던 '도참설'이라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물론 미신이며 허황된 수작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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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만 알아서 되겠나` 서문부터 자주성 내비쳐 기록 입증되며 신빙성↑ [중앙일보]
키워드로 푸는 역시 <5> `삼국사기`는 사대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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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 23년(1145) 김부식이 주관해 편찬한 '삼국사기'는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그 책과 편찬자는 여러 비판에 시달려왔다. 대표적인 비판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물든 역사서라는 것이었다.

그런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단재 신채호(申采浩)다. 단재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1135)을 "조선 역사 1000년에서 가장 중요한 자주적 사건"으로 평가하면서, 그것을 진압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강하게 비판했다. 이런 견해는 그의 강직한 지사적 이미지와 맞물리면서 너른 공감대를 형성해 갔다. 또 다른 중요한 역사서인 '삼국유사'에는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단군신화가 수록되었지만, '삼국사기'에는 그것이 빠져있다는 대조적 사실도 그 사대성을 보강하는 논거로 작용했다.

'삼국사기'는 그 실증성에 대해서도 도전을 받았다. 일제시대의 관학자(官學者)들은 실증적 관점에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믿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서로 적대적 관계였던 이들이, 비판의 논점은 달랐지만,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퍽 역설적이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먼저 사대성과 관련해 '삼국사기'는 당시로서는 자국사의 독자성을 깊이 인식한 역사서였다고 재평가됐다. 당시 중국에 대한 사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전제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그것을 현재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중국사만 잘 알고 우리 역사는 거의 모르는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했다는 '서문'의 내용이나 중국과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삼국을 '우리(我)'라고 표현한 사례 등은 매우 주목된다. 특히 성리학적 역사해석이 적용된 조선시대의 사서들이 오히려 '삼국사기'의 '자주성'을 비판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초기 기록에 대한 신빙성 또한 여러 고고학적 발굴의 뒷받침을 받으며 매우 높아지는 추세다. 한국사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실증적 서술을 담은 수준높은 역사서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사대와 자주'라는 대립적 관점보다는 상호 보완적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범(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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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런 미신이 떠돌게 되는 그럴만한 사회적 조건이 있었다. 비록 표현은 음양설을 빌려서 되었었을 지라도 실은 그것은 민중의 기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썩은 정치에 대한 불만, 나라 옛 땅에 대한 그리움, 민족의 운명이 시들어버린 데 대한 분과 탄식, 미래에 대하여 막연히 가지는 희망, 이러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을 이용해보려고 한 것이 북벌론자들이었다. 평양 중 묘청을 중심으로 이 도참설을 이용하여 민심을 움직이고 왕을 권하여 서울을 평양으로 옮겨 놓고, 북진을 한번 실행해보려 하였다. 인종도 묘청의 설득으로 얼마쯤 그리로 기울어져 임원에다 새 궁궐까지 지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필사적으로 반대한 것은 유신들이다. 그들은 서울을 평양으로 옮겨만 놓으면 자기네는 아주 세력터를 잃어버릴 것이요, 더구나 만주를 쳐서 정말 이기는 날에는 자기네 선비 따위는 목숨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서경천도를 못하도록 방해하였는데, 그 중심 인물이 저 <삼국사기>를 쓴 것으로 유명한 김부식이였다.

 

묘청파는 어떻게 해서든지 임금을 평양으로 끌어오려고 하였으나 그 하는 방법이 너무 요사한 수단과 미신적인 것이 많으므로 선비들의 비난을 샀고, 임금도 그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는 즈음 인조 13년 묘청은 서경천도가 불가함을 감지하고 혁명을 일으켰는데 나라이름을 '대위'라 하고 원호를 '천개'라 하여 한동안 황.평 지방을 차지해가지고 버티어었으나, 마침내 김부식에 의하여 토벌되고 말았다. 정지상.백수한.김안은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오자마자 서울에서 잡혀 죽고 말았다.

 

묘청의 난을 신채호 선생은 '조선 역사 1천 년 이래 제일 큰 사건'이라고 하였다. 이 난은 보통난이 아닌바, 유파대 불파, 한학파대 국풍파의 싸움으로 보는 것은 꿰뚫어본 관찰이요.이 난이 실패하자 한국 역사가 보수적.속박적 사상에 정복된 원인이라고 보는 것도 옳은 말이다.

 

묘청은 이미 혁명시기를 놓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때는 벌써 금이 요를 멸한 지 20년이 넘었다. 북벌의 시기는 그 전에 이미 놓친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북벌은 못해도 묘청이 성공하였더라면 적어도 사상적 종살이는 좀 면했을 것이다.

 

전하는 말에 김부식이 한때의 문장은 자기라고 저나 남이나 다 그렇게 아는데, 정지상이 글을 잘하여 그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시기하여 그것을 마음속에 새겨 두었다가 난을 계기로 반대파인 정지상을 살륙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고, 묘청.정지상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는 수수께끼라 했던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