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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6

 

 

'뜻으로 본 한국역사 6'

 

풀무 속의 삼국시대

 

뽑힌 세 후보

천 년에 뻗치는 모판시대를 지나는 동안에 몇백이 되던 나라들은 다 없어지고, 그 중에서 한국 문화를 크게 이루어 민족의 사명을 다할 자격자로 뽑힌 후보는 셋이었다. 고구려와 신라와 벽제다. 이 셋이 뽑히게 된것은 우연이 아니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서 된 것이다.

 

우선 지리적으로 나누어 졌는바, 북쪽의 고원지대와 험준한 산악지역 및 압록.두만.청천.대동.에성.성천 의 강들이 펼쳐진 주변 평야지대, 서남부의 한강.금강.만경.영산의 강들이 흘러가면서 펼쳐진 평야지대, 소백준령을 경계로 동쪽의 경상도 낙동강 일대 김해평야까지 펼쳐진 영역으로 구분되었다.

 

 

▲ SBS '왕과 나', MBC '태왕사신기' '이산'(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신라

역사상 연대로 보면 가장 먼저이나 인문의 발달이 가장 늦은 나라였다. 진한 시대 이후로 마한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남쪽의 왜구들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분투 정신과 끈질긴 의지의 힘을 길러 후에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반도의 주인공이 되었다.

 


불국사 석가탑

 

백제

백제는 기름진 땅을 가졌고, 거기다 마한 이래 긴 문화의 역사를 가졌으며 산업이 발달하여 경제가 넉넉하였다. 서남부 해안의 다도해를 끼고 바다 교통이 발달하여 중국.왜와 무역이 활발하였다. 정의 나라요, 문의 나라였다. 부흥기를 누리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주변에 충신을 모두 버리고 간신들을 총애하니 나라 방비는 소홀하다가 나.당연합군의 백강과 황산벌 방향으로 기습을 받고 계백의 투혼에도 불구하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할 수는 없었다.

 

충남]깨어난 ‘700년 대백제의 혼불’ 다시 타오르다
개막식 행사장면...화려한 개막식 행사...외교사절, 시민 등 4만여명 참여
2007-10-12 13:27:41 휴대폰전송기사돌려보기인쇄하기

◇ 대백제 기마군단의 위용 ⓒ데일리안 대전충남

대백제 기마군단의 말발굽 소리로 700년 백제의 혼이 깨어났다.

◇ 충화면 천등산 채화단에서 채화된 백제혼불 ⓒ데일리안 대전충남
11일 오후4시 충남 공주시 공산성 주무대에서는 옛 백제의 주요교역국 이었던 중국, 캄보디아, 일본, 프랑스 등에서 건너온 해외 공연단과 시민 등 4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53회 백제문화제의 화려한 막을 올렸다.

식전행사로 시작된 기마행렬에 이어 캄보디아 씨엡립 주 공연단의 압살라 춤 공연과 백제옷으로 분장한 주민들이 함께 참여한 ‘백제문화환타지’ 행렬이 공산성 주무대에 등장했다.

대전 계족산 봉수대에서 시작된 봉화가 밤하늘을 가르며 공주 우산봉과 월성산 봉수대를 거쳐 주무대에 마련된 공산성 성화대에 ‘백제의 혼불’이 점화됐다.

이어진 개막행사에서는 60여개 대형 북공연을 시작으로 백제의상과 춤사위가 한데 아우러진 백제문양패션쇼, 계백장군가 오천결사대의 훈련무 공연 등이 이어져 관람객들의 눈길을 한 곳으로 모았다.



◇ 백제의 혼을 깨울 혼불이 이완구 충남지사에게 건네졌다 ⓒ데일리안 대전충남

◇ 대백제국의 왕과 왕비 ⓒ데일리안 대전충남

◇ 개막식 첫번째 춤 공연 ⓒ데일리안 대전충남

이날 개막식을 시작으로 오는 11일까지 공주, 부여 일원에서 펼쳐지는 백제문화제는 찾는이 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의 계통을 이은 나라로 예로부터 오는 조상의 씩씩한 모습을 전하였다. 고구려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고구려 민중이 위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도리어 그들의 좋지 못한 환경이었다. 땅이 파리하여 먹을 것도 잘 내주지 않고, 옆에 강한 나라가 있어 밤낮 시달림을 받았기에 그들은 반발한 것이었다. 정신을 반발하고, 버티고 나서며,머리를 들고 일어서며, 운명에 대하여 대드는 것이 정신이며 뜻을 ?는 것이 정신이다. 주몽이 활 잘 쏜다는 뜻이지만, 그 주몽이 동명성왕이 된 것은 활만 잘 쏘아 된 것은 아니다. 활 잘 쏜다는 것보다 민중을 잘 잡았기 때문이라라. 민중을 잡는 다는 것은 정신이요, 뜻이며 민중의 뜻을 ?는 것이다.

 

고구려는 결코 무의 나라만은 아니었다. 후에 비참한 운명때문에 그 자취조차 다 없어지고, 남은 것은 극히 작지만, 그것으로도 그때의 고구려의 장한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평양 금수산 밑에 가서 그 무너진 옛터를 보라, 강서에 가서 그 세 무덤을 보라, 압록강 건너 만주에 가서 그 장군의 무덤을 보라. 광개토왕의 비를 보라. 북중국에 남아있는 고려탑,고려문을 보라, 무심한 만주족들이 저희도 모르고 전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라!

 

압록강, 두만강 남쪽 언덕아래 좁디좁은 골짜기에 움츠리고 악착같은 생활에 기운 못 펴는 백성들아, 그것도 온전히 지키지 못해 남해가 잔지르진 언덕 밑에 우물거리고 있는 사람들아, 우주선이 지구 궤도를 깨치고 드나드는 때에 꿈도 하나 꿀 줄 모르고 남의 삯 쌍무하는 것으로 사람의 일이 다 된 양 멍청히 있는 민중아, 고구려가 망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나 불행이 아니라 오늘날 이 너와 나의 죄 때문이니라!

 

역사를 지나간 일의 결과라고 누가 그러나? 아니다. 역사는 장차 올 것 때문에 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망하게 된 것은 우리들 때문이다. 동명성왕은 저 할 것을 다하였고, 광개토왕도 저 할 것을 다하였다. 을지문덕, 연개소문,남생,남건도 저 할 것은 다하였다.고구려가 망한 것은 오늘날 너와 나에게 달렸다. 우리가 버리면 동명도 단군도 개죽음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살리면 세계의 주인으로 살아 남을 수 있다.

 


 

 

민족을 다듬어냄

고구려는 볼 만한 나라였다. 단단한 조직의 나라를 이루어 자유와 통일을 아는 사람들이요, 기개가 있었다. 부지런하고 절박하고 법률은 엄하고 싸움을 잘하면서도 '연일가무'하는 풍정도 있었다.

 

이 세 나라가 같은 형세로 맞서서 서로 나라힘을 펴기를 다투었다. 이 삼국시대는 '한'민족의 한 큰 시련기였다. 민족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그 힘을 기르고, 그 이상을 다듬고, 그 의견을 넓히고, 그 정신을 높일 때였다. 민족통일을 완성하는 것이 이 시대에 내준 과제였다. 만주.조선에 펴져있는 전 민족을 하나로 통일한 나라, 그야말로 '한나라'가 나왔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반쪽 통일을 겨우 가져온 것이 신라의 삼국통일이었다.

 

낙랑

낙랑은 이 민족에게 그리고 특히 고구려에게 4백 년 동안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주었다.남의 땅 중간을 차지하고 남의 나라 관리가 와서 갖은 수탈을 일삼고 지배한 기간이 4백 년이었다. 이 기간을 통하여 우리 민족은 줄기찬 항쟁과 투쟁을 진행하였으며 인내심을 기르고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웅지를 키워 후에 만주 대륙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한다.

 

불교가 들어옴

이 시대를 위하여 특별히 준비된 조건으로 보는 것은 불교의 전래다. 역사상 공전의 날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이나,실제로는 민간에는 훨씬 먼저 들어왔다. 이제 앞으로 벌어질 끔직한 싸움을 앞두고 이 불교가 들어온 것은 뜻 깊은 일이며 열국시대에 유교가 들어온 것처럼, 불교는 이 시대를 위한 정신적 준비였다.  열국시대,삼국시대 정치는 실패하였는지 몰라도 그 유교 때문에 부자가 되었고, 인생은 그 불교 때문에 구원되었다. 불교가 전래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째, 민족통일의 밀터가 되었다. 옛날부터 나라와 나라의 싸움은 그 종교가 다른데서 왔다. 옛날 싸움은 거의 다 부족신 사이의 싸움이었으며 섬기는 신이 달라 공연히 미운 것이 정말 미운 것이다. 밥도 옷도 상관 없이 공연한 생각 그것 때문에 싸우고 죽는 것이 사람이다. 신이 일으키는 생명의 꿈틀거림이며 결국 신의 전쟁이다. 선신이거나 악신이거나 같은 종교가 민족의 차이를 없애는 것과 같다. 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교, 또 기독교는 구교와 신교, 기독교와 불교,이슬람교와 불교간에 서로 종교적 사상과 이념 차이로, 중동전쟁과 유고전쟁,아프리카,파키스탄,동남아 등지에서 지금도 서로 피흘리며 싸우는 많은 경우를 우리는 실감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적 종교는 국경과 정치를 초월하여 서로 공감대를 형성시키고 있다.  

 

둘째, 세 나라의 정치적 시련이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경쟁에 그침을 막는 일이 되었다.고대 로마제국의 잔인성,살벌,잔혹하였던 모습을 떠 올리는데, 고구려도 마찬가지 로마식의 인성이 형성될 가능성과 위험성이 많았던 나라다. 아무리 전쟁을 하다가도 나라를 위한다는 감정에 미치다가도 너도나도 전생의 업을 못 벗어난 중생이다. 너도 나도 불자요, 죽으면 다 같이 정토에 가서 난다. 이 중생을 건지기 위해 보살은 항상 눈물을 흘리신다고 생각할 때 그 싸움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셋째, 생각을 깊게 만드는 일이다. 사람이 정치 없이 못 살지만 정치처럼 사람의 마음을 옅게 만드는 것도 없다. 현실에 열중하면 할수록 악착스런 생존경쟁만 눈에 보이고 인생의 근본 목적과 뜻은 잊어버리게 된다. 계속된 전쟁으로 인생의 허무를 느끼면 퇴폐적인 기분에 빠지기 쉬운바, 이러한 사람을 종교적인 길로 끌수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평화롭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불교가 이 땅에 한번 들어오자 마른 땅에 물을 쏟아 붓듯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젖어들었다. 그래서 삼국의 문화는 우뚝 솟아 올랐다. 모든 문화의 원동력이 불교에서 시작하여 번창하였으며 새 종교의 자극으로 사람들의 혼이 열리고 새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어 찬란한 창조가 일어났다.

 

깨어진 용광로

삼국시대는 한국역사에서 뜻 깊은 시기였다. 정금을 얻기위해 용광로에 불을 지피듯 삼국은 치열한 싸움으로 영토확장 전쟁에 너무나 많은 정력을 쏟아붓고 민족의 큰 이상을 자각하기에는 서로간에 영역 확장과 생존에 대한 집착이 강성하였다. 그래서 타오르던 용광로는 민족의 정금을 얻기도 전에 터지고 말았다.

 

처음 고구려는 강성하여 통일을 이루는 듯 하더니, 한편으로 동쪽의 중국으로부터 압박이 심하고 남으로는 신라가 강성해 감에 따라 신라와 백제가 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또 고구려와 백제가 화친하여 신라에 대항하고 백제는 일본까지 끌여들여 신라에 대항하였다. 한강 일대는 서로 뺐고 빼았기는 영역 쟁탈전이 계속되었으며 고구려와 벽제는 서로 왕이 전사하자 원수로 삼아 권토중래를 다짐하며 복수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천 년을 두고 기대해오던 이상은 그만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결과는 독립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천추의 한이 아닌가?  신라가 통일을 하였다고 하나 그 낸 값은 너무 크고, 그 얻은 것은 너무 작았다. 통일이 아니라 잃어버림이었다.

 

삼국을 통일하였노라고 당나라 옷을 입고, 당나라 제도로 나라를 고치고, 당나라 임금 앞에  절을 할 때, 단군의 혼이 백두산에서 내려다보았다면 그 어떠하였을까? 금강가에 평백제탑(平百濟塔)을 세우고 임금과 그 가족을 온통 묶어 중국으로 잡아가고 불귀의 객이 되고, 낙화암이 꽃 아닌, 꽃보다 더한 수천 혼이 떨어져 붉게 물이 들 때, 온조왕의 혼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면 어떠하였을까? 한때의 영웅 당태종도 천하 병마를 거느리고 바다와 뭍으로 총동원해서도 감히 어찌하지 못했던 고구려를 아비만도 못한 자식 남건.남생이 싸움하는 판에 소정방.이세적.설인귀 따위가 마음대로 짓밟는 것을 볼 때, 죽은 혼들이 어떠하였을까?

 

김춘추의 아비 자식이 번갈아 당나라에 드나들며 비루한 외교로 조상을 팔아 얻은 것은 겨우 반도의 절반이었다. 나라의 흥망이 관계되므로 부득이하여 수단을 쓴 것이라면 제법 용서도 될 듯도 하고, 통일의 뜻을 구태여 임진강 남쪽에 한정하였던 것은 아니나, 시세가 허락치 않았으니 어쩌하겠느냐 하면 얼마간 변명이 될 듯도 하지만, 아니다. 절대 용서 못한다. 변명이 안된다. 민족 통일의 큰 일이 자기를 팔아버린 데서 실패했다는 것은 핑계를 대려야 댈 수도 없고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는 비통한 시실이 아니냐?

 

고구려의 죽음

삼국시대의 실패 원인은 고구려가 망한 데 있다. 역사를 읽는 누구나 민족의 종주권을 고구려에 허하지 않을 수 없고, 동정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민족의 혼이 거기 대표되어 잇기 때문이다. 만일 고구려가 그렇듯 갑자기 망하지 않았더라면 만주.조선은 반드시 하나로 통일되어 큰 나라를 이루었을 것이요, 그랬다면 백제와 신라가 한때 분한 일이 좀 있다 하더라도 민족 전체의 운명은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평원에까지 그 다리를 한번 뻗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평화를 사랑하고, 남을 업신여길 줄 모르는 우리 민족이 한번 아시아를 쥐었더라면 세계역사는 좀 다르게 되지 않았을까?  혼 빠지고 얼빠지어 소국민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후일의 조선 사람으로는 꿈도 못 꿀 일이겠지만, 그때의 고구려는 결코 못할 바가 아니었다. 역사상 환한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고구려가 하려다가 못한 그 일을 후에 금.청은 사실로 해놓았으니 문화 수준이 훨씬 뒤떨어졌던 여진도 하는 그것을 고구려가 못할 리가 없다.  만일 고구려의 힘이 한때라도 중국으로 뻗었더라면 동양의 역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조선의 형편은 지금과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망했으니, 이는 한낱 고구려의 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일이요,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다. 5천 년 역사상 가장 아프고 쓰린 일이다. 역사를 읽을 때 매양 고구려의 실패에 이를 때면 책장을 찢어버리고 싶고, 주먹으로 땅을 치고 싶고, 울분이 솟구치지 않을 사람이 누구냐? 고구려가 망함으로써 한민족은 그 맏아들이 죽으면 찌끄러기의 막내 아들인 신라라도 대를 이어야지! 신라 문화라 자랑하는 사람들아, 생각 옅게 하지 마라. 그러면 네 혼이 줄어든다!

 

사실 고구려의 죽음은 횡사요, 요사다. 즉 잘못 죽은 것이다. 누구는 죽을 것이어서 죽었으리요만 고구려는 참 죽어서는 안될, 죽을 것 같지 않은 죽음을 죽은 것이다. 더러운 꼴을 부리다가 넘어진 것이 아니라 눈부신 활동을 다음 순간에 약속하다가 갑자기 거꾸러진 것이다. 졸도가 아니라 손에 칼을 든 채 전선에서 엎어져 죽은 것이다. 고구려의 패망은 순국으로 보아서만 바로 그 값을 알아준 것이다.

 

고구려의 사명은 전 민족과 문화를 보호하기 위하여 국경을 지키는 일이었다. 한족과 선비족의 닥쳐오는 사나운 물결을 막다가 그 일선 위에 거꾸러진 것이다. 낙랑을 다시 ?느라 그 손은 이미 다쳤고, 선비 모용의 포악한 대적을 막느라고 그 다리는 벌써 상하였고, 수.당의 흉악한 도둑을 용하게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가슴팍을 찔림을 입은 다음에는 신라가 염치없이 당나라를 이끌여들여 앞뒤로 들어치는데 그 고구려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민족 통일의 ?번째 자격자인 고구려는 하다 하다 못해 비통한 주검의 전선 위에 가로놓은 것으로써 계레에 대한 마지막 공헌이었다.

 

통일 아닌 통일

신라가 통일은 하였으나 통일을 참으로 이룬 것이 아니며 이를 계기로 한국역사는 일대 전환을 하면서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었다. 고난의 연옥길을 걷게 되며 엎누름과 부끄럼이 퍼붓고 한숨과 신음 소리가 연달아 나오게 된다.

 

신라는 너무 과한 값을 주고 통일을 샀으나 그 통일은 참으로 보잘것 없는 통일이었다. 청천강 이북은 가보지도 못한 통일이었다. 통일이 아니라 분열이었다. 이 때문에 나라땅을 대부분 다 잃고 겨우 일부분만 남아서 한국을 대표하게 되었고, 사람과 민족의 아름다운 것이 다 없어지고 아름답지 못한 것이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통일도 백년이 못 지나서 썩고 말았다.

 

정신문화도 모두 썩고 말았는데, 중국의 모방이라는 독충이 모두 잘라먹은 것이었다. 신라 '혜공왕' 이후 임금을 죽이는 내란이 빈번히 발생하였으며 마지막 임금은 신하들과 들러앉아 잔치하는 동안에, 서울이 적의 손에 들어간 줄도 모르고 망해버렸다. 분을 참지 못한 '마의태자'는 일생 베옷을 입고 금강산속 외로운 바위 밑에서 평생을 지낸 자취를 보고 우리는 지금도 한줄기 눈물을 금치 못하는 바지만, 흥하던 나라가 마지막에는 한 방울 피흘림도 없이, 한번 꿈틀하는 반항도 없이 천 년의 역사를 하루아침에 두어마디 흥정으로 남에게 넘겨주고 만 것은 그 뿌리에 그 열매라 아니할 수가 없다. 이 신라의 마지막에 비하여 고구려는 어떤가? 고구려 백성들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나라를 되?으려는 복원운동이 사방에 일어났으며 4-50년 후에는 대조영과 고구려 유민들이 결국은 발해를 건국하였던바, 이는 고구려의 부흥이었다. 발해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울어진 역사의 방향은 돌이킬 수가 없게 되었는바, 힘을 중국으로 전하지 못하고 수백 년을 겨우 견디다가 그후 거란.여진.몽고 민족이 연차로 들어오면서 만주땅은 싸움터로 변하고 말았다. 발해의 유민들 일부는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왔으나 나머지는 만주 벌판에서 이민족 저민족에 동화되어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 만주 벌판 버들숲에 서려있을 그 원통한 혼을 어느 날에 가서야 위로해 줄 것이냐? 한이라면 만고의 한이다!(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