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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7

 

'뜻으로 본 한국역사' 7

 

다하지 못한 고려의 책임

 

영원히 남는 책임

삼국시대 역사는 분명히 실패의 역사다. 민족통일을 하자던 것이 부셔지고 말았고, 문화 발달을 해야 했어야 할 것이 그만 시들어 죽고 말았다.  자기를 야무지게 길렀어야 할 것을 그만 잃고 말았으니 실패가 아닌가? 여왕이 나온다던 것이 그만 가엾은 계집종이 나오고 말았고, 위대한 혼을 기다렸던 것이 보기 싫은 산송장을 만나고 말았어니 숨길게 없다.

 

고려 시대 사람으로서 만일 역사의 뜻을 깨달아 민족적 이상의 자각 아래 꾸준히 준비해온 것이 있었더라면, 삼국시대의 그 참혹한 역사도, 마치 아침 햇빛이 죽은 용사의 무덤돌을 영광으로 물들이듯이, 빛나는 뜻으로 살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기회는 여러번 있었다.  고려시대가 만일 그것을 하기만 하였더라면 한국 역사는 적어도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려 5백 년은 책임이 많은 한 시대였다.

 

나를 잃어바린 죄

그런데 고려는 실패하였다. '지금 이때...', '이제 한번 시험해볼 때...', ' 이제라도...'  하는 때가 거듭거듭 왔건만 고려는 겁을 냈다. 왕건이 어찌 세운 나라던가? 정치적 기반이나 정통성을 �기 힘든 개경의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궁예 수하에서 궁예의 눈치를 보며 목숨을 부지하다가 기초를 만들어 놓은 왕조를 날치기한 장본인이 아닌가? 부하들 권유로 실권을 잡고  부하들의 살신성인으로 목숨을 부지하였고 견휜의 망명으로 세력을 넓히고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들고온 경순왕으로부터 거져 얻은 나라였다.

 

그러니 학대받은 거러지 아이같이 사지를 움츠리고 기운을 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고려 역시 삼국시대를 말 못 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병이 그대로 전수되어 벗어나지 못하였다. 자기를 잃어바리고 자기를 �으려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 실패요, 이것을 위해 다시 준 기회인데 또 못했다.

 

고려 일대를 고려 일대로 만든 선비님들, 이름은 단군, 고구려시대부터 있던 그 이름대로 선비건만 선비의 정신은 다 팔아먹고 고린내 나는 유학자뿐이였다. 유교와 중국 제도가 무슨 상관이 있으며 학은 도를 배운다는 말이지 어찌 문무주공을 배운다는 말인가? 신라가 망한 것이 불교에 있다고 보았지만, 어찌 불교냐? 불교와 절이 같지 않으며 부처와 중이 같지 않지 않느냐? 주공은 군주를 끝까지 보좌하였지 권력을 탐하지는 않았고, 유교를 강조하자니 자신의 출발부터 잘 못 된거라 어찌 신하와 백성들에게 충.효를 강조할 수 있었겠는가? 다른 나라는 나라를 빛나게 하였던 불교가 유독 신라에서만 나라를 망하게 하였겠는가?  

 

또 불교의 잘못이라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 고치는 것이 어찌 유교에 있느냐? 유교면 유교였지 어찌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답습해야 하느냐? 어찌 중국의 제도는 고상하고 우리 조상에게서 내려온 것은 속되냐? 대국눔이 갖다버린 청바지도 좋다고 입고 다니고 그들의 똥 냄새도 달더냐? 쓰레기 음식도 레스토랑에서 칼질하며 먹으면 양식이더냐? 

 

나라를 팔고, 어미를 팔고 나 자신을 팔아 중화에 수종을 들어야 하는 줄 알았으니, 유교를 배운게 아니라 유교의 종이 되었고, 유교의 종이 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종이 되어 버렸다.

 

 

궁예.왕건이 그림 나라

 

남아있는 민중의 감정

고려 한 시대를 세 구절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각 구절마다 한 봉우리가 있고 한 골짜기가 있다. 봉우리는 민족적 주체성이 높아졌을 때요, 골짜기는 의식이 낮아졌을 때다. 그러므로 먼저 것은 진취적인 밀물 때요, 뒤엣것은 퇴영적인 썰물 때다.

 

'황성옛터'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조사
18일부터 2개월간

북한 개성의 고려왕궁터인 만월대를 남북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발굴 조사한다.

문화재청은 남북이 개성 역사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록과 보존관리에 협력하기로 한 제 17, 18차 남북 장관급 회담 합의에 따라 18일부터 약 2개월 간 ‘개성역사지구 남북 공동발굴조사’를 실시한다고 15일 발표했다.

‘황성옛터’로 널리 알려진 개성 만월대는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다. 919년(태조 2년) 창건된 이래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에 의해 소실되기까지 고려 왕조와 흥망성쇠를 함께 한 곳으로 고려시대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동서 445m, 남북 150m 정도의 대지에 조성된 궁성 안에는 정전인 회경전을 비롯해 장화전, 원덕전, 건덕전, 만령전 등의 전각들과 각종 건축물이 계단식으로 자리잡고, 13개의 성문과 15개의 궁문이 있었다.

이번 조사는 만월대 유적의 서북지구(약 1만평)에서 유구의 분포 양상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궁궐의 배치 구조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확대 조사도 필요할 경우 북측과 합의해서 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발굴전문기관, 대학 관계기관 전문가들로 구성된 남측 10여명의 조사단과, 북측 연구자들이 여기에 참여한다. 조사 결과는 보고서로 나와 만월대 정비의 기본자료로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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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먼저가 왕건이 나라를 세우던 때다.신라의 마지막 정치가 심한 악취를 풍길 때 영웅이 한번 나설 때였다. 밀물 때란 민중의 가슴이 스스로 깨려고 흥분되어 감을 말하며 가슴속에 새 시대를 기다려 설렌다는 말이다. 나타난 영웅이 말을 타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타야 하는데, 민중의 가슴속 설레는 감정의 물결을 잡아타야 정말 영웅이다.

 

양길이 북에서 일어나고, 견휜은 남에서 일어났다. 양길의 뒤를 이어 궁예가 일어나고, 궁예의 뒤를 이어 왕건이다. 삼국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는 무슨 말인가? 고구려.백제가 멸망한 후 민중의 가슴에는 수백년이 지나갔지만 사라진 나라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삼국통일이 참으로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견휜은 백제를 내세우고, 궁예는 고구려를 내세웠다. 후백제.후고구려라 함은 민중을 잡아타는 한 수단이다. 민중의 기슴속에 망한 나라에 대한 원한이 깃들여 있는 것을 알므로 견훤이나 궁예는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궁예

궁예는 본래 왕족으로 서자로 태어났던 탓에 산간 절간으로 돌아다니며 역경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큰 뜻을 품었던 사나이였다. 시대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 산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는 너무 교만하고 사나운 짓을 많이 하여 민심을 잃고 실패한 사람이나 그는 뜻은 좀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관제를 정하는 데 중국 냄새가 나는 신라의 옛 것을 버리고 모두 우리 나라 고유의 식대로 하며, 나라서울을 평양에 세울 계획을 하고, 사대(史臺)를 두어 외국 말을 배우게 한 것들은 모두 다 뜻이 만주 옛터에 있어서 한 것이었다.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하였듯이 고구려의 정신을 살리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지은 운명의 심판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으니, 그는 싹트고도 자라지 못한 영웅이었다.

 

왕건의 큰 조선 생각

궁예는 넘어졌으나 그가 품었던 큰 뜻은 왕건에게 계속되었다. 그는 한 개의 군인으로 일어나서 궁예에게 붙었으나 그 하는 일이 점점 사납고 망측해지는 것을 보자 한편으로 재주 있게 하여 한 몸을 무사히 보존하고, 한편으로 너그럽고 착한 태도로 인심을 모아, 마침내 궁에를 내쫓고, 그 나라를 얻게 되었다.

 

그는 반도 안에서 임금질로 만족하고자 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견휜을 누르고 신라를 어루만지어 삼국을 통일한 다음은 역시 북으로 가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서울을 송도로 정하였으나, 늘 장래의 서울은 평양을 생각하여 성을 수리하고 학교를 세우고, 해마다 한 번씩 순행을 하여 특별히 생각하는 것이 잇었으니, 이것은 다 북으로 한번 가지는 게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직 나라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함을 고려하여 힘을 비축하고자 하였던 그였다. 그래서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여 돌보아주었으며, 거란의 교통 사절을 섬으로 정배보내고 예물로 보내온 낙타를 만부교 아래 매어두어 굶겨죽이는 등 아주 싹을 자르는 태도를 보여 백성으로 하여금 각오를 단단히 하게 하였다.

 

영웅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하나됨이다. 그런 것을 모르지 않을 진데. 신하란 눔들은 왕건 민중과 하나되어 만주를 칠 것이면 중국과의 관계가 험악해질 것이요, 그러면 그들의 감투가 그냥 붙어 있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저희 지위 만년 보장을 위하여 임금이 가진 사상을 아예 일찍부터 자르자는 것이었다.

 

어느 민족, 어느 시대나 민족을 파는 것은 권력계급이다. 민족을 팔지 않고는 권력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왕건 태조의 정책

그의 그러한 큰 계획은 실제 정책에 나타나 있다.  그는 '훈요십조' 제 4조에 말하기를 " 우리 동방이 예로부터 당나라풍을 사모하여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제도를 따랐으나, 곳이  다르고 땅이 다르면 사람의 성격도 다른 것이니 구태여 꼭 같이 할 필요가 없느니라" 고 하였다.이는 확실히 한(漢)의 정신을 불러일으키고 독립정신을 표방한 것이리라.

 

그는 종교정책에서도 불교를 통제하고 '팔관회'를 행한 것이다. 태조 왕건이 사실 사찰도 많이 세우고 고치기도 하였으며 '훈요십조' �째 조목에서 우리나라는 부처의 보호로 되었다 했고, 그 아래도 불교에 관한 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적절한 불교의 허용은 민중들을 안정시키고 유교주의자들을 억제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팔관회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혹자는 불교행사라 했고 어떤이는 전래되어온 종교의식이라 하였으나 딱히 정의할 수는 없다. 신라시대부터 궁중에서 거행해 오던 것으로 불교와 전래 종교의식의 복합적인 행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모든 점을 미루어 볼 때, 고려의 건국은 우리 민족 역사상 중대한 뜻을 가지는 시기이다. 책임이 많다는 것은 이 때문이며 태조의 정책은 실현을 보지 못하고 반도속에서 무능한 왕실과 권력투쟁속이 진행되는 사이 비극의 역사는 �아오는데, 바로 글안족의 3차에 걸친 침공과 6차레에 걸친 몽고족의 침공으로 전 백성은 능욕을 당하고 전 국토는 초토화 되고 말았다.  (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