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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9

 

 

'뜻으로 본 한국역사' 9

 

고려자기 속에 숨은 빛

 

국민이상의 죽음 

이렇게 보면 고려의 역사가 인종 때부터 감자기 곤두박질을 치는 어려운 형세로 어지러움에 빠지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개인이나 국민이나 삶을 빛나게 하는 것은 산 이상이다. 

 

그려 사람에게 민족 발전의 큰 이상이 있을 때다. 현종은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강감찬' 장군을 맞아 친히 들 밖으로 마중 나가, 금으로 여덟가지 꽃을 만들어 그 머리에 꽂아주며, 오른손에 술잔을 잡고 왼손에 그 손을 잡고 감격에 못이겨 하였다. 그렇게 온 나라가 한마음에 불탔기 때문에 얼김에 한강까지 몰고 들어왔던 거란군도 고려인의 높은 이상에 스스로 물러났던 것이다. 

 

반대로 국민적 이상이 한번 죽으면 어떠한가? '최충'이 나타나 '해동공자'란 칭호를 받으며 중국으로부터 칭송을 받았건만, 그 칭송은 유교에 비롯된 것이요, 그 유교가 도리어 나라의 발전을 질식시키는 가시덤풀이 되고, 민족의 생명을 좀먹는 모진 벌레가 되어,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켜 자기를 팔고 종살이하게 하는 독한 약이 되고 말지 않았나.

 

극민적 이상이 죽은 다음에 있을 것은 내란밖에 없다. 나라를 통일하는 것도 칼이 아니오,법도 아니오, 이런바 인정도 아니다. 민중은 언제나 비참한 존재요, 불평이 늘 있다. 아무리 법을 공평하게 하고 은혜를 고루 입힌다 하여도 천하의 입을 다 틀어막지는 못한다. 정말 민심을 하나로 하는 것은 어떤 위대한 국민적 이상을 주는 말이다. 사람은 의기를 느끼는 물건이라, 배부른 민중은 말을 아니 들어도 위대를 본 민중은 죽으면서도 나선다. 그러므로 국민적 이상, 민족적 사명, 세계사적 정신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북벌운동이 아주 실패하고 선비들이 나라를 맡게 된 다음부터 내란이 그칠날이 없었다. 인종 4년에 '이자겸의 난'이 있었고, 13년에 '묘청의 난'이 있었고, 의종 24년에 무신 '정중부의 난'이 있은 후 약 100년 동안은 줄곧 내란이 계속되었다. 자겸의 난은 중국제를 본뜬 궁중생활의 타락에서 온 것이요, 중부의 난도 중국에서 배워온 문존무비 사상의 산물이다. 본래 '주몽', '을지문덕', '연개소문'이 나라를 맡아하던 옛날에는 그런 사상이 없더니, 중국 문물을 열심히 실어들여 이른바 문치에 힘쓰며 무신을 낮춰보는 나쁜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그려같이 민족의 운명을 회복할 책임을 져야 할 시기에 꿋꿋하고 씩씩한 정신을 길러야 할 것임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건만 이따위 실속 없이 껍데기로만 성현의 정치를 한다는 형식주의.허식주의 때문에 그만 문약에 흐르고 말았다.

 

그때 임금 의종은 놀고 사치하기를 좋아하고 시문을 즐겼다. 덕택에 고려자기는 발달해 후세의 자랑거리가 되었으나 그때 백성은 견디기 어려운 시정이었다. 지금도 예술을 사랑한다 하여, 깨진 접시 하나, 쭈그러진 병 하나에도 수백만 원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지만, 과연 그 고려자기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선이 무슨 선이요, 그 빛은 무슨 빛인지 아는가? 그 선은 민중의 굶주린 창자선이요, 민족혼이 고민하는 선이며, 그 빛은 나라 운명이 슬프게 저무는 빛이요, 역사의 수평선이 가물거리는 선이다. 그런 줄이나 알고 예술을 좋다냐? 그런 줄이나 알고 민족의 자랑이라 하나? 차마 책상위에 두고 보기에 가슴에 저려오는 아픔이 서럽게 북받치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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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여백의 발견' 展

연합뉴스|기사입력 2007-10-30 17:05
(서울=연합뉴스) 강영국기자 = 30일 오후 삼성 미술관 Leeum에서 열린 '한국 미술-여백의 발견(Void in Korea Art)' 展 기자간담회에서 국보 169호인 12세기 고려시대 청자양각죽절문병 (靑磁陽刻竹節文甁)이 취재진에게 공개되고 있다.

자연-자유-상상, 세가지 코드로 풀어본 한국 미술 여백의 미학을 선보일 이번전시는 11월1일부터 2008년 1월27일까지 삼성미술관 Leeum 기획전시실에서 열릴 예정이다.

 

 


우리 나라 청자는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白土)로 형체를 만들고 잘 말려 섭씨 700∼800도에서 한번 구워(초벌구이)낸 다음, 그 위에 철분이 1∼3% 들어 있는 석회질의 유약을 입혀 1250∼1300도 정도의 높은 온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내어 자화(磁化)한 자기의 일종을 말한다. 이때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보석인 비취의 색과 유사하며 거의 투명하다. 그릇을 두 번 구워내면 태토(胎土)의 색은 흐린 회색이 되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 바탕에 비취색 유약이 입혀지게 되어 이를 비색이라 일컫는데 연연한 아름다운 발색을 보인다.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고 명랑한 비색, 조각도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유연하고 유려한 선의 흐름을 지닌 형태, 한두 점 엑센트로 강한색(진사발색)을 쓰는 이외에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는 것 등이 그 특색이며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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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짐

임금이 거들거리고 놀기 위하여 크게 토목을 일으키고 백성더러 제 밥 먹고 와서 하라 하니, 아내는 머리털을 짤라 팔아 그 돈으로 점심밥을 해다 나르는 판이 었으니, 이것이 문치주의의 뒷 면이요, 이것이 고려자기를 만든 손이었다.

 

이리하여 집을 짓고 놀이터를 만들고, 가다가 산수 좋은 곳만 있으면 임금은 문신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시를 짖고 해지는 줄을 몰랐다. 그러는 동안 무신들은 말꼬비를 쥐고,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하여 터져나온 것이 정중부의 난이다.

 

임금이 보는 앞에서 신하들의 목을 자르고 문신들은 모두 도륙을 냈으니 그 얼마나 억울한 심정이 뼈속깊이 저려 있었던가. 

 

정중부 뒤에는 '이의민', 그 뒤에는 '경재승' 하는 식으로 차례차례 무신들이 날뚜다가 나중에는 '최충헌'의 4대가 마음대로 하던 무신정권 시대가 계속되면서 나라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벼슬 매관매직은 물론, 백성들의 재산을 마구 빼았고, 뇌물이 떠돌고, 질서도 없고, 도덕도 없고, 선비는 최씨네 문간의 거지 노릇을 하고, 정부는 최씨네 사랑에 가 있었다. 문신은 썩고 독사같아 걱정이고, 무신은 사납고 짐승 같아 겆엉이니, 제정신이 아닌 다음에는 다 그런 것이라.(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