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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11

 

 '뜻으로 본 한국역사' 11 


경기북부 6월 문화인물 최영 장군
경기북부 6월 문화인물 최영 장군

 

최영과 이성계

 

공민왕의 북벌 경영

공민왕이 볼모로 가 있던 몽고로부터 돌아와 임금이 되자, 몽고에 있으면서 그 나라힘이 떨어진 것을 안지라, 한편 원나라 옷, 원나라 풍속을 벗어버려서 민심에 찔림을 주고, '인당'과 '유인우'를 보내어 압록강 서쪽의 팔참과 쌍성 여러 고을을 도로 빼았아 북벌의 기세를 올렸다. 이때 동양 천지는 어지러워 중국 본토에는 내란이 벌떼같이 일어나고, 요동에는 '홍두적',간도지방에는 '납합출','삼선삼개' 하는 것들이 일어나고, 동해.황해 바닷가 일대에는 왜구의 도둑질이 극심하였다. 뒤숭숭한 천하정세는 오직 담대한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민왕이 나라땅을 되?으려는 운동이 ?번째 성공에 뒤이어 그대로 진행이 되었으면, 이번에라도 한국 역사는 새로워졌을 것이요, 따라서 동양 전체의 역사도 다른 길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후년에 잘못하여 괴악한 중눔 '신돈'을 믿으면서 환관의 무리들을 가까이 하다가, 한 몸이 참혹한 운명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 정치를 어지럽게 만들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중국 주원장이 보잘것없는 낮은 데서 일어나 천하를 통일하여 명나라를 세우고 손을 만주에까지 내밀게 되었다.

 

고려는 또 기회를 놓쳤다. 요럴까 조럴까 구멍에서 훌근거리는 쥐 모양으로 일정한 국책 없는 더러운 외교로 이 중대한 시기에 때때로 꿰매가는 것으로 일삼았다. 망해가는 원과 일어나는 명에 외나무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던 고려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유신 눔들은 때를 살필 줄 모르고, 자신의 몸보신에만 급급하고, 상국에 대해 환란을 자초하는 경거망동은 예의지국이며 조용한 아침의 나라,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등 꼬리내린 강아지나  겁먹은 원숭이 같이 요리조리 눈치만 보는 약은 눔 천지의 조정에 홀로 서서 북벌론을 주장한 한 사내가 있었으니 바로 도통 장군 '최영'이었다. 그는 일찌기 원의 청을 받아 중국에 싸우러 나가 평정을 돕는 동안에 원의 실력과 천하대세를 실제로 눈으로 보고 온 사람인지라, 이것이 놓치지 못할 기회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정의 어느 신하도 그의 북벌론에 동조하는 눔이 없었다.

 

만주에 손을 뻗친 명나라는 한층 더 나와 우리 강계에다 철령위를 세우고 요동에서 철령에 이르는 사이에 70참을 둔다는, 실로 남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짓을 했다. 고려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우왕 14년 최 장군은 임금에게 권하여 북벌군을 일으키게 되었다. 고려로서는 이것이 최후의 기회요, 이번에 실패하면 다시는 얻을 기약이 없다.

 

고구려가 망한 7백 년 이래 이 한 싸움에 달릴 줄은 몰랐건만 후의 역사는 그것을 말한다. 정신이 죽지 않았더라면 역사의 오침이 들렸지, 강산에 사무친 조상혼의 부르짖음을 들었지, 압록강 건너오는 겨울바람에 그 소리 안 들었던가? 남쪽 바다에서 떠오르는 여름 구름, 고향 그립다고 아니 하던가? 이때가 세번째 밀물 때 였다.

 

대립되는 두 성격

최영과 이성계 둘의 사상과 성격은 정반대였다. 하나는 보수나 하나는 진취요, 하나는 자주독립이나 하나는 사대 예속적이며, 하나는 이상주의요 하나는 현실주의며, 하나는 의리요 하나는 권리다. 하늘의 뜻을 알수 없다고 하였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같이 환한 일이다. 꽃이 피려 할 때 바람이 불게 하는 하나님이 아닌가? 한 탯집에서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서, 유하혜와 도척, 놀부와 흥부를 내는 하나님이 아닌가?

 

최영이 북벌을 주장한 반면 이성계는 반대였다. 최영이 기개로써 버티면 이성계는 모략으로 이끈다. 이쪽이 의로써 책하면 저쪽은 이로써 달랜다. 하나가 홀로의 권으로 하면 하나는 여럿의 당으로 한다. 이리하여 무너지려는 집의 두 기중이 어긋나듯이 조정 안에 두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다. 그때 최 장군은 임금의 신임을 얻어 독재하는 처지이므로 이성계 파의 반대를 누르고 14년 4월 드디어 3만 8천의 군사를 내어 역사적 북벌을 시작하였다.

 

여러해 싸움의 공을 세워 많은 부하를 가진 이성계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인바, 최영은 그들의 술책에 빠지고 말았다. 최영은 마음은 곧으나 지혜가 적었고, 뜻은 굳으나 기다릴 줄을 몰랐다. 꾀 많은 성계는 자꾸 영을 찔러 무리를 하고 출병을 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행군을 하여 압록강까지 가더니 유언비어가 떠돌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성계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중을 시켜 왕자(王字) 꿈을 꿨다느니, 일부러 만들어 두었다가 캐내고는 어디서 무슨 참서가 나왔다느니 하자 군사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군사들이 뒤숭숭해 하는 것을 보고 이성계는 대놓고 나서서 반란의 깃발을 들었다. 고대 로마시대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평정하고 로마 원로원의 최종 권고를 받자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국경선인 루비콘 강을 건넜지만 이성계는 만주 평정도 마다하고 군대를 돌려 권력찬탈에 이용하였고, 고려를 새롭게 개혁시켜 부국강병을 이룬게 아니라 나라를 뒤집어 반역을 꾀하여 자신을 위한 새 나라를 세운 점이 달랐다.  그만큼 자아적이며 대국적인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성계의 회군 소식을 듣고 우왕과 최영은 어쩔 줄 모르고 송도로 돌아오고, 반란군은 개경을 습격하고 임금과 최영의 머리를 ?았다. 최영을 내쫓고 임금을 폐한 다음 영을 죽이고 유배지 보낸 임금은 베어버렸다. 그래서 나라의 모든 실권은 그에게 가고 말았다.

 

이성계의 반란

우왕 14년 서기 1388년. 이 날 한국 역사상 너무나 큰 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성계의 반란으로 이성계가 이기고 최영이 졌다. 최영이 진 것이 아니라 단군이 지고, 동명왕이 졌다. "상국지경을 범하면 천자께 죄를 짓는다"라고 했으니 이성계는 뉘 아들인지 모르지!

 

이 날에 이상이 죽고 악착같은 현실이 이긴 것이 분하다는 말이다. 현실의 작은 칼날이 그나마 남았던 우리 민족 혼의 날개를 자르고 만 것이 하도 슬퍼서 하는 말이다. 이해타산의 구구한 논리가 우리의 스승이 되어 버렸고 사대존주의 더러운 정치철학이 아주 우리의 임금이 되어 버렸다. 고려 일대 5백 년을 두고 두번, 세번 왔던 기회도 이날 하루에 다 쓸데없어지고 말았다. 이날은 한민족의 가슴에 옛터 ?자는 생각을 아주 마지막으로 끓어버린 날이다. 이 사람들아! 벼슬 준다고, 땅푼어치 나눠준다고 좋다 좋다 하던 사람들아, 이날이 그런 날인 줄이나 알고,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 줄이나 알기나 하고 만세를 불렀던가? 그래서 한 큰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상이냐 현실이냐

혹은, 최영의 주장은, 그때 형편으로는 될 수 없는 빈말이요, 이성계의 주장은 실제 형편에 들어맞는 말이라고. 그렇다. 사실 그때 우리 나라가 지치고 해진 것은 사실이다. 뒤이어 오는 내란과 외환으로 전쟁의 시달림을 극도로 받은 것은 사실이다. 살기를 애원하는 백성들이 전쟁을 무서워하고 싫어한 것도 사실이다. 이 비참한 밑바닥에서 앓고 있는 민중을 몰아 또 전쟁에 내세우는 것은 민중을 학대하고 죽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곧 역사의 시험이라는 말이다.

 

그는 백성들에게 행복을 약속하고 그 힘을 빌려 최영을 죽이고 나라를 빼았아 창업주가 되었다. 사이비 혁명가 지도자들이 약속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종살이 행복이 아닌가? 자유를 판 눔은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다 빼았기는 법이다. 자유를 팔고 행복했던 나라가 어디 있으며, 개인이 어디 있느냐? 있다면 그것은 우리안의 돼지뿐이다.

 

삼국 재조(再造)

우왕 6년 9월. 이성계가 지리산 근방의 운봉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이기고 돌아올 때에 최영은 들 밖까지 나와 맞으며 감격의 뜨거운 눈물을 뿌리고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 공이여, 공이여, 삼한을 한번 고쳐 만듦이 이 한번에 있소. 공이 아니면 이 나라가 누구를 믿겠소" 하였다.

 

최영은 삼남지방이 왜구에게 쑥대밭이 될 정도로 부패하고 무능해진 고려를 살려 보고자 애를 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그 조그마한 승리가 야심의 큰 구렁이를 그 가슴속에 끌어넣었다. 다리에 꽂힌 화살을 뽑으며 싸움을 계속하였을 때, 그 가슴에 임금이 될 생각이 있었을 리 없었다. 하건만 한번 이름이 높아지고 민중들의 뜨받듦이 있으면 아니 그렇던 마음도 흐려진다. 

 

최영은 원래 철원 사람이다. 생긴 모양이 무섭고, 힘이 사람에 지나치고, 마음이 곧고 굳고 참되고 맑아 나이 열 여섯에 그 아비 '원직'이 죽을 때 " 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한 유언을 잘 지켜 세간살림을 일삼지 않아 집이 보잘것없고, 먹고 입는 것이 수수하고, 살진 말, 가벼운 옷으로 다니는 눔을 보기를 개.돼지같이 보고, 싸움에 나가 대적을 맞음에 정신과 낮빛이 까딱없으며, 화살과 돌이 좌우에 어리되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으며, 군사가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다 베어 반드시 이기고야 말므로 몇백 번 싸움에 가는 곳마다 이기고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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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 장군 묘소

 ◇‘붉은 무덤’으로 알려진 최영 장군 묘. 600년 세월 속에 철천지한이 풀려서인지 풀과 떼가 잘 자라고 있다. 고려시대 묘제인 전형적인 사각묘다.
‘최영 장군 묘에는 정말 풀이 나지 않았을까.’ ‘떼를 입혔는데 처음에는 자라다가 나중에 말라 죽은 것일까.’ 어릴 적부터 이만저만 궁금한게 아니었다.  최영(1316∼1388) 장군 묘에는 풀과 떼가 잘 자라고 있다.

◇뒤에서 본 아버지 동원부원군 최원직 묘(뒤쪽)와 함께 있는 장군 묘역. 회룡은산의 작국으로 안산이 혈처보다 높아 은둔하기에 좋은 곳이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그 이름 빛나리라 최영 장군.

처음 이 노래를 배우면서 아버지 가르침에 따라 일평생 재물을 탐 안 내고 나라만 위하며 살다간 장군을 하늘같이 흠모했다. 최영은 회군하는 이성계군을 맞아 싸우다 체포돼 73세에 참형됐는데, 이때 생을 마감하며 “내가 탐욕한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고 유언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된 그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좀 험하다. 서울시립 장재장(벽제화장터)을 지나 통일로에 들어선 후 이정표를 따라 한참을 가다 보면 대자산 자락이 앞을 막아선다. 모든 차량은 이곳에서 멈춰서야 한다. 궁궐이나 종묘 앞에 서 있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누구든지 이 앞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라는 뜻)’라고 쓴 ‘하마비(下馬碑)’는 없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차에서 내려 0.5㎞는 걸어야 한다.

◇동원부원군 묘 앞의 고려 석비. 무당들의 촛불로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묘역에는 두 묘가 상하로 있는데 위쪽은 아버지 동원부원군 최원직이고 아래는 최영 장군과 부인의 합폄 묘다. 고려 말 우왕(재위 1375∼1388) 당시 문하시중과 팔도도통사로 권력의 최정상에 있을 때 골라 쓴 좋은 자리다. 자신의 첩 딸이 우왕에게 시집가 영비(寧妃)가 되었고 부원군(왕비의 친정아버지) 자리에 오르면서 모든 권력이 그의 손아귀에 있을 때다.

최영 이후 동주 최씨는 조선왕조에 와 이렇다 할 벼슬길에 오른 후손이 없다. 태조 6년(1397) 무민공(武愍公)이란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고 제전답(祭田畓)과 함께 복권시켰으나 500년 동안 숨어 지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과 국무총리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최두선이 형제간으로 동주 최씨다.

◇묘 앞 전순의 돌계단과 안내표시판. 기록된 내용 일부가 사실과 다르다.

팔도도통사 최영의 주장대로 조민수·이성계 좌·우도통사가 위화도 회군을 않고 요동정벌에 나섰더라면 의당히 그 전쟁에 승리하여 우리 영토를 넓혔을 것처럼 비분강개하는 시각들도 있다. 하지만 사학계는 그 당시 국제정세를 그토록 녹록하게 보고 있지 않다. 고려가 종주국으로 섬기던 원나라(1271∼1368)는 이미 중원을 석권한 주원장에게 패해 북원(北元)으로 쫓겨간 뒤였고, 그 후 주원장이 건국한 명나라(1368∼1644)는 300년 가까이 대륙을 지배했다. 일부에서는 최영 측의 구파 군벌과 조민수·이성계의 신파 군벌 간 대립으로 보며 당시 고려 군사력으로는 요동정벌 자체가 무리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묘역에 오르는 오솔길의 낙엽. 무당들이 ‘최영장군 신’을 접신하러 가는 외통로로 혼자 걷기에는 섬뜩하다.

고려사 ‘최영열전’에는 군졸이 한 걸음만 물러서도 곧 목을 베었으며 그러기에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고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동 시대의 간대부(諫大夫) 윤소종이 “최영의 공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고 평하자 세상에서는 이를 명언이라고 했다.

최영 장군은 죽은 지 6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전통 민속문화 속에 시퍼렇게 살아 있다. 굿판에서 만나는 그의 위세와 잡신 장악 능력은 실로 놀랍다. 최영과 접신된 무당은 머리카락을 썰어 날려 버리는 예리한 작두 날 위에서 맨발로 훌훌 날며 춤을 춘다. 도대체 인간의 죽음과 무덤의 진실이 무엇인지 산행이 거듭될수록 미지의 영역으로 다가온다.

◇무덤 뒤에 솟아 있는 암석. 용맥이나 전순 안의 바위는 여기(餘氣)라 하여 상서롭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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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을 때 나이 73세라, 목 자르는 마당에도 낯빛이 변치 않고 머리가 땅에 떨어져도 오히려 꼿꼿이 버티고 서 있으리 만큼 정기에 사무친 사람이었다. 그는 몇 천년 동안 내려오던 산 얼을 힘있게 나타내던 여럿 중에 마지막 사람이었다.  송도 성밖 길가에서 백발의 최 장군 머리가 땅에 떨어질 때, 그대들은 벼락소리 나며 한국 역사의 4천 년 큰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죽은 것은 최영이 아니라 한 얼이었다.

 

일편단심

최영 장군이 죽은 다음 정포은이 아무리 애타는 노래를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포은의 죽음은 최 도통의 그것과 아울러 고려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다. 고구려.백제의 마지막 보다 신라의 마지막이 더럽고, 신라의 마지막 보다 고려의 마지막이 더 더럽고, 고려보다 이조의 마지막은 더욱 더러웠다. 이는 그곳에 있는 산 정신에 비례하는 것이다.

 

그 책임 많던 고려시대도 다 지나갔다. 행여 이번에나 하고 기대하기를 몇 번이나 하였건만 종내 다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는 역사의 무대가 장백산 남쪽으로 국한되고 말았고, 압록.두만 강의 목메는 물결소리만이 한 얼이 다시 살아나기를 애원하는 고구려의 끼친 영의 울음소리같이 북쪽 하늘에 울리고 있게 되었다.(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