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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12

 

'뜻으로 본 한국역사'12

 

 

  
▲ 경회루. 경회루 편액은 세자에서 폐위된 양녕대군 글씨다

수난의 오백 년

흥안령 마루턱에서 내려다 보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던 우리 역사는 그 동안 4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단군시대의 높고 거룩한 나라 배판을 보고 존경하고 사모하는 생각이 나고, 열국시대에 여러 나라들이 씩씩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축하하였다. 세 나라가 서로 으뜸이 되겠다고 피땀을 흘려 다투는 단련시대를 보고 두 주먹을 부르쥐고 치를 떨다가, 신라가 형편없는 통일을 해버리는 것을 보고 이를 갈았고, 맥빠지고 겁난 고려가 거듭거듭 때를 놓치는 것을 보고는 쥐었던 주먹으로 땅을 쳤다. 그러나 이제는 발을 구르고 몸부림을 치며 통곡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온다. 바로 이조의 수난의 시대다.

 

4천 년 넘어 살아온 한민족의 역사 변천의 대체 모양은 한반도의 모습과 흡사한데, 단군시대 전은 그 살던 만주 평원과 같은 초야의 시대요, 단군이 나라를 세운 후에는 그 자리잡고 있던 백두산이 만주와 반도의 정기를 한군데 모아 구름 밖에 솟은 것같이 한민족이 높고 빛나는 이상을 가지고 위대한 역사의 주춧돌을 놓던 시대다.

 

천지에 고이는 억만 년의 정기가 넘쳐 흐르는 그 흐름을 따라 산발로 내려오면 남북으로 고원지대가 열려 거기 뭇 용이 서로 섞여 달리는 듯한 산줄기들이 얼크러지는데, 몇천 자씩 되는 삐죽삐죽한 봉우리들이 제각기 그 장하고 빼어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이것은 여기를 중심으로  벌어져서 서로 위대한 사명을 다하려고 다투던 열국시대에 비유할 수 있다.

 

개마고원에서 떨어져 남으로 반도에 내려오면 동과 서의 두 조선만이 좌우에 먹어들어 땅폭이 갑자기 좁아지고, 마식령에 오면 백두산의 마루 줄기를 받아 내려오는 등뼈 산줄기가 하마 끓어지려는 듯하니, 이것이 그때 그 자리에 들어와서 한때 고난을 몹시 겪던 한사군 시대라 할 것이요, 끓어지려던 산줄기가 철령에서 다시 일어나 점점 높은 물결을 일으키다가 드디어 만 이천봉의 금강산을 보게 되니, 이것이 기운차고 빼어나고 아름답고 험허고 묘하고 웅장한 삼국시대 문화라 할 것이다. 그러나 백두산 이남의 산세가 금강산으로 끝 꼭대기듯이 단군시대 이후 역사는 삼국시대로 가장 볼 만한 때를 이룬다.

 

신라가 통일을 하고 그 문화에 빛나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태백산 줄기의 남쪽 끝을 이루는 태백산의 형세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고려에 들어와서는 이미 들뼈가 상하였으니 사회적으로 발달한 점은 없지 않으나 역사의 방향은 확실히 변하고 말았다.

 

이때까지 남으로 내려오던 등뼈 산줄기가 여기서부터 꺽여 서남 방향으로 취하게 되며, 태백산 부터는 산 기운이 점점 잔지러지고 갈라져 새재.추풍령을 간신히 일으키고 지리산에 이르러 마지막 힘을 한번 써보고는 등뼈 줄기는 아주 자취를 잃고 말았으니 이것으로써 제법 고려시대의 역사를 보는 듯하지 않는가?

 

이제 우리가 보려는 이조 오백 년의 역사는 지리산 남쪽 갈기갈기 갈라지는 소백산 줄기의 낮고 약한 산줄기들이다. 잔지러지다 잔지러지지 못해 물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작고 어지러운 산 살래들의 헤어지고 얼크러지는 모양들이다. 물론 아주 사라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아주 흩어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멀지 않은 바닷속에서 제주도와 한라산이 솟는 것을 본다. 한라산은 백두산이 그대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한라는 분명 헤어지고 끊겼던 그 뼈 산줄기가 다시 모여 일어선 것이다. 남해 물결이 일제 36년이요, 한라의 높이 1,950미터인 것까지도 1950년대에 들어 새 나라가 다시 됨을 미리 표한 듯이 보인다.

 

더구나 이 섬은 서쪽으로 남중국과 동쪽으로 일본 열도의 산맥이 이곳에서 서로 만나 셋이 서로 하나가 된 것임을 생각하면 그것이 새로 일어난 이나라의 성격과 장차오는 시대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조 5백 년은 이 소백산맥 사이에서 헤매고 남쪽 물밑에서 숨바꼭질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시기다. 그래서 수난의 5백 년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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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도는 한양이다. 임금은 개성에 있고 한양을 지키던 세자는 축출되었다. 한양이 비어 있는 셈이다. 힘의 공백이 생길 수 있다. 양녕을 내치기 위하여 머물렀던 개성. 이제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양녕을 폐위하여 경기도 광주로 유배 보낸 태종은 세자와 대소신료들을 불렀다.

 

“세자는 중전을 모시고 한양으로 먼저 돌아가라. 3전이 함께 움직이면 길이 좁아 곡식을 다칠까 염려된다. 과인은 후일에 돌아갈 것이니 정부, 육조, 대간도 한양으로 돌아가라 ”

 

자신이 환궁하기 위한 정지 작업이다. 태종이 말한 3전은 대전, 중궁전, 세자전을 말한다. 개성을 출발한 세자가 한양에 입성했다. 유도한 대소신료들이 대대적인 환영을 펼쳤다. 조용히 환궁하려는 세자는 언짢았다.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요란을 떠는 그들이 부담스러웠다. 정비는 경복궁에서 하련하고 세자와 경빈은 창덕궁에 들었다.

 

내가 나를 잘 안다. “나는 임금 깜이 아니다”

 

열흘 후, 태종이 한양에 돌아왔다. 경복궁에 환궁한 태종은 지신사(知申事) 이명덕, 좌부대언(左副代言) 원숙, 우부대언(右副代言) 성엄을 경회루로 불렀다.

 

“내가 나를 잘 안다. 나의 상(像)은 임금의 상이 아니다. 위엄과 행동거지가 모두 임금에 적합하지 않다. 내가 재위한 지 이미 18년이다. 이에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려고 한다. 아비가 아들에게 전위하는 것은 천하고금의 떳떳한 일이요, 신하들이 간쟁할 일이 아니다.”

 

폭탄선언이다. 그간의 전위 파동이 몇 번 있었지만 이번 전위는 작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양녕이 충녕과 친하여 변(變)을 일으킬 의심은 없으나 어제까지 명분의 지위에 있다가 이제 폐출되어 외방에 있으니 어찌 틈을 엿보는 사람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조현(朝見)을 정지하고 내선(內禪)을 행하고자 한다. 전위한 뒤에도 내가 마땅히 노상(老相)들과 임금을 보익(輔翼)하고 일을 살필 것이다.”

 

“거두어 주소서.”
“18년 동안 호랑이(虎)를 탔으니 이제 내려올 만하다.”

 

전위 소식을 전해들은 영의정 한상경,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과 육조 판서·육조 참판이 몰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성상의 춘추가 노모(老?)함에 이르지 않고 병환도 정사를 폐지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원민생을 보내어 세자를 세우도록 청하고 세자가 조현한다고 아뢰게 한 지 몇 달이 못 되어서 전위하심은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선(內禪)은 나라의 큰일이니 마땅히 인심을 순하게 하여야 하며 억지로 간쟁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아비가 아들에게 전(傳)하는 것이니 신하들이 간쟁(諫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하의 간쟁하는 법이 어느 경전(經典)에 실려 있는가? 나의 뜻이 이미 결정된 지 오래니 고칠 수가 없다. 다시 이를 말하지 말라.”

 

태종의 의지는 단호했다. 말을 마친 태종은 지팡이를 짚고 보평전(報平殿)으로 이어(移御)했다. 지팡이에 의지한 태종의 모습은 처음이다. 보평전에 도착한 태종은 승전환자(承傳宦者) 최한을 불렀다.

 

  
▲ 상서원. 국왕의 새보(璽寶)와 절월, 부패(符牌)을 관장하였다.
ⓒ 이정근
대보


“개인(開印)할 일이 있으니 승정원은 속히 대보(大寶)를 가지고 들라 이르라.”

 

임금의 도장을 대보, 어보 또는 옥새라고 한다. 임금이 외교문서와 교지, 홍패, 백패 등에 도장 찍을 일이 있으면 인궤(印櫃)를 열고 도장(印)을 꺼냈다. 이것을 개인(開印)이라 한다.

 

내관이 승정원으로 달려가는 것과 동시에 대소신료들이 보평전(報平殿)으로 몰려왔다.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 말라 명한 태종은 세자를 급히 들라 명했다. 또 다른 내관이 세자전으로 뛰었다.

 

대궐 밖에서 이 소식을 접한 영돈녕(領敦寧) 유정현과 정부·육조·공신·삼군총제·육대언 등이 황급히 달려와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보평전 합문 밖에 이르러 통곡하면서 내선(內禪)의 거조(擧措)를 정지(停寢)하기를 청했다.

 

이때 임금의 호출을 받고 보평전으로 향하던 상서원 승지들과 대소신료들 사이에 대보를 바치지 못하게 실랑이가 벌어졌다. 문 밖에서 소란이 일자 임금이 지신사를 힐책했다.

 

“임금의 명(命)을 신하가 이리 가로막아도 되는 것이냐?”

 

이명덕이 마지못하여 대보(大寶)를 바쳤다. 부왕의 급한 부름을 받고 허둥지둥 달려온 세자가 도착하여 임금 앞에 부복했다. 태종이 세자의 소매를 잡아 일으켜서 대보를 주고 곧 안으로 들어갔다. 세자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다가 대보를 놓고 안으로 따라 들어가 지성으로 사양했다.

 

“세자는 대보를 받도록 하라.”

 

세자로 하여금 대보를 받도록 명한 태종은 홍양산(紅陽傘)을 내려 주며 궁 안에 머물도록 했다. 홍양산은 임금만이 쓸 수 있는 붉은 양산이다. 이어 상서관(尙瑞官)과 대언(代言)한 사람에게 명하여 대보를 지키면서 자게 하였다.

 

  
▲ 대보. 사진은 태조 이성계의 어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어보

 

대보를 세자에게 물려준 태종은 가종(駕從) 10여 기(騎)에게 명하여 서문으로 나가서 연화방의 옛 세자전에 거둥했다. 백관들이 따라서 전정(殿庭)에 이르러 통곡하면서 복위하기를 청하였다. 세자가 대보를 받들고 전(殿)에 나아가 대보를 바치며 굳이 사양하였다.

 

“나의 뜻을 유시한 것이 이미 두세 번이나 되는데 어찌 나에게 효도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같이 어지럽게 구느냐? 내가 만일 신료들의 청을 들어 복위한다면 나는 장차 편안한 죽음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

 

태종은 두 손을 맞잡아 북두성을 가리키며 맹세했다. 이는 다시 복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내가 이러한 거조(擧措)를 천지와 종묘에 맹세하여 고(告)하였으니 어찌 감히 변하겠느냐?”

 

부왕의 단호한 모습을 지켜보던 세자가 황공하고 두려운 얼굴로 이명덕에게 물었다.

 

“어찌할까?”

“성상의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효도를 다하심이 마땅합니다.”

 

“경은 대보를 받들고 경복궁으로 돌아가라.”

부왕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세자는 지신사 이명덕에게 명했다. 군왕스러운 명령 일성이다. 함께 경복궁으로 돌아온 세자는 대언(代言) 김효손으로 하여금 대보를 지키면서 자게 하였다.

 

날이 밝자 대간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피봉(皮封)에는 ‘상전개탁(上典開?)’이라 쓰여 있었다.

 

“나는 이미 사위(辭位)하였는데, ‘상전개탁(上典開?)’이라 함은 무엇인가? 만일 ‘상왕전개탁(上王前開?)’이라 한다면 내가 마땅히 읽어볼 것이다.”

 

태종은 소(疏)를 물리쳤다.

 

선위에 대한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상소를 일축한 태종은 임금이 타던 승여(乘與)와 의장을 세자전으로 보냈다. 또한 궐내에 시위(侍衛)하던 사금(司禁)·운검(雲劍)·비신(備身)·홀배(笏陪)를 보내어 내관 최한으로 하여금 왕세자를 맞아오게 했다. 단순히 임금에 준하는 예우가 아니라 즉위식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2007.11.01 11:06 ⓒ 2007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