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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14

 

'뜻으로 본 한국역사'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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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토대

 

잘하려 한 일이 잘못한 일

세종이 돌아가고 문종이 이어 서니 37살의 장년이요, 잘난 임금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얼굴, 긴 수염에, 생김생김이 틀지고 빼어나며,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인자하여 학문을 극히 좋아하며 신하를 사랑하고, 마주 대하면 엄엄한 가운대도 봄바람이 부는 듯하였다는 임금이다. 그러므로 그런 이가 임금이 될 때 백성은 다 훌륭한 정치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만일 문종으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하였더라면 아버지의 뜻을 이어볼 만한 것이 있게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 뜻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백성들의 기대를 받던 임금은 위에 오른지 두 해 만에 갑자기 돌아가고 말았다. 전하는 말에 임금이 아버지 세종의 돌아가심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잃어 그랬다고 하니, 이것도 잘못된 유교 도덕의 폐해다.

 

아들이 위를 이어 임금이 되니 나이 열 두 살인 단종이다. 남 같으면 연줄잡고 동네 어귀에서 연날리며 개구쟁이 처럼 뛰어놀 나이에 임금이 된 것이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다섯 해 후에 어떤 비극이 떨어질 줄은 단종이나 수양대군도 몰랐다. 문종은 숨을 거두기 전에 어린 것이 임금이 되는 것에 불안을 느껴 그대로 눈을 감을 수가 없기에 중요한 신하들을 불러 고명(顧命)을 한 것이다.

 

비극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이다. 동생이 되는 수양대군은 아니 부르고 성상문,김종서를 비롯한 신하들만 불러 특별히 단종을 부탁한 데서부터 수양은 반감을 사지 않았을까?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세상은 그리 알았다. 광명과 태평을 기대하던 세상은 불안한 먹구름에 싸이게 되었다.

 

수양의 시꺼먼 마음

이때의 나라의 운명은 수양의 양심 갈피에 달렸다. 물론 수양도 처음부터 그러한 마음을 두지는 않았다. 한명회를 비롯한 주변의 모리잡배들의 충동질에 스스로 양심의 탈을 벗어버렸다. 그는 심술과 칼 재주가 이성계에 비하던 사람이다. 한번 욕심이 나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도덕은 약한 눔에게만 있지 강한 눔에게는 없다. 힘이 있다는 그 자체가 도덕과는 반대다.

 

수양은 한명회. 권람 하는 사나운 눔들, 사나운 눔들은 나라가 바로 되었을 때는, 마치 부엉이가 대낮에 못나오는 모양으로, 어디 가 붙을 데가 없어 사회의 껌껌한 구석에서 불평만을 품고 있던 백정같은 눔들을 볼러모아 흉계를 꾸민 다음 단종 �해 시월에 그때 나라의 기둥이요, 백성들의 신망을 한몸에 모아가지고 있던 김종서를 우선 쳐죽이고, 이어 황보인이하 반대할 만한 신하를 살생부를 만들어 하룻밤 동안 모조리 때려 죽이고,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 채 없어지지는 못하여 실권만 쥐고 있다가 3년 6월에는 " 아저씨 날 살려주오" 하는 조카 임금을 아주 내쫓고 나중에는 약사발을 내리고, 제가 임금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세조다.

 

 누구나 그것을 한번 듣거나, 혹은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그 이야기를 한번 불러일으킨다면, 분을 참지 못하는 심장이 가슴안에서 사납게 뜀을 느낄 것이요, 혹은 의협심이 강한 이는 두 주먹을 들어, 그때에 한번 났다가 삼척 장검을 휘둘러 수양.한명회.권람 하는 그 굿은 물건들, 정인지.신숙주 하는 그 더러운 눔들을 한칼로 두 동강이 내어, 천하 민중을 위해 가슴 시원하게 분을 한번 풀어주지 못한 그 한을 책상을 치고 싶을 것이다.

 

무서운 검사역

세종.문종 때까지는 불행의 징조는 없었다. 세종이 18남, 4녀를 두는 것도 경사였고, 문종이 임금이 되어 여덟 대군이 병풍처럼 둘러 서는 것도 다 좋은 일이었다. 더구나 수양같은 이는 문종이 오래 살았더라면 형을 돕는 한 팔이 되었을 것이다. 수양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잘하려는 일이 잘못되어 효자 노릇 하려다가 도리어 불효자가 되어 일찍 죽게 되자, 모든 것이 다 합하여 난경절처(難景絶處)를 이루어놓았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본다면 문종은 한낱 아까운 임금으로 우연히 일찍 죽은 것이요, 단종은 그저 애처로운 사람이요, 수양은 욕심많고 밉살스런 사람으로서 모진 수단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문종에 대해서는 아까워할 것이요, 단종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릴 것이요, 세조에 대해서는 침을 뱉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세조가 더 불쌍한 사람이다. 그는 고난의 역사를 멘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종이 누운 자리에서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대신들을 부른 것은 차마 지독한 검사역의 손에 넘기지 않으면 안되는 그 토대를 놓고 지금까지의 공로가 하루 아침에 허무로 돌아가지 않겠느냐는 조바심에 그랬던 것이요, 단종이 김종서의 피를 묻히고 들어서는 수양을 보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던 것은 장차 무너지려는 민족의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 운명을 위해 빌었던 것이다.

 

충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목을 배고, 나이어린 조카와 동생도 개.돼지 잡듯 죽이고, 죽은 성상문의 처를 역신들 노비로 하는 등 충신들의 가솔들을 백정 역신들이 나누어 가지고 부귀영화를 구가하였다. 세조, 그를 우리 후세들이 도덕적으로 비난하지만 그 역시 역사의 무대위에서 악역을 담당하였을 뿐이다. 악한 일이라 좀 미안한 일이요 제 양심을 먼저 죽였던 것 뿐이다. 가리옷 유다,가야비,네로와 한가지로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없으나, 그 사람은 차라리 세상에 나지 않았던게 좋을 뻔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 역사는 꾸며지고 무대의 공연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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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에 이른대로 '칼 같은 산들이 얼키고 설켜' 있는 영월(寧越)은 이름처럼 그렇게 편안히 넘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단종애사(端宗哀史)의 깊은 그늘이 곳곳에 드리워 있어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비단결 같은 냇물만은 맑고 잔잔'하여 물줄기를 따라 흘러가는 길조차 어쩌지는 못한다. 그 유려함으로 '암캉'으로 불리는 서강과, 매서운 산세를 끼고 돌아 '수캉'으로 불리는 동강. 영월에서 물은 결코 산을 넘지 못하지만, 영월에서 물은 기어이 물과 만난다. 여울지고 휘어지며 아라리가락처럼 흘러서 그렇게 쉼없이 길을 만든다.


서강에 한반도가 있다

동강이 댐 건설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을 때, 서강은 그런 소동과는 무관하게 한켠에서 조용히 묻혀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기껏해야 청령포를 감싸고 도는 강 정도로 알려져 있던 서강이 그동안 감추어 두었던 비경을 드러내고야 마는 계기가 된 것도 결국은 환경 문제와 맞닿아 있었다.


1998년 영월군에서 서강 상류 지역에 쓰레기 매립장을 설립하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강 첫머리에 해당하는 서면 옹정리 선암마을에는 작은 소동이 일었다. 마을에서 불과 8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강 상류에 쓰레기 매립장이 들어설 경우 서강에 기대 살던 선암 마을이 맞닥뜨릴 상황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장을 중심으로 마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고작해야 10여 가구 30여명밖에 안 되는 그들의 반대 운동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온국민의 관심을 끈 동강과는 달리 선암마을 사람들의 외침 따위는 무관심 속에 그대로 파묻혀 버리는 듯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1999년 12월 첫눈이 내리던 날 매립장 반대운동을 펼치던 마을 주민 이종만 씨와 한 사진작가가 우연히 '한반도 지형'을 발견하면서 매립장 반대운동은 극적인 반전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주천강 물줄기를 이어받은 서강은 선암마을 앞에서 남산재를 끼고 물도리를 이루는데, 건너편 오간재에서 내려다본 그 지형은 놀랍게도 한반도 지형과 꼭 닮았다. 급경사를 이룬 동쪽면이나 완만한 백사장이 펼쳐진 서쪽면까지.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매립장 반대운동은 '한반도 살리기'라는 상징적 의미를 더하면서 급속히 번져나갔다. 사실 서강의 오염은 남한강으로 이어지고 종당에는 한강으로 흘러 수도권의 상수원을 위협할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 '서강 살리기'와 '한반도 살리기'는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001년 1월 마침내 영월군청이 매립장 설립 백지화를 발표하면서 서강마을의 소동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 지형'을 처음 발견한 이종만 씨는 반대운동의 와중에 매립장 예정지를 오가다 논길에 넘어져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희생을 기려 그가 처음 '한반도 지형'을 발견했던 오간재를 '종만봉'이라 부르고 있다.


단종에 얽힌 이야기들


아이러니컬하게도 단종의 유폐지로 청령포를 고른 사람은 신숙주였다. 세종의 총애를 받던 신하로서 불안하기만 한 세손(단종)의 미래를 지켜달라는 고명을 받들어야 했던 신숙주는 정변의 와중에 여덟 아들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변절의 길을 갔다. 같은 총신이자 동료였던 성삼문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무참히 죽임을 당한 후,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유배될 처지에 놓였을 때 신숙주는 기민하게 적지를 찾아냈다. 그의 안목은 탁월했다. 육육봉의 아득한 벼랑을 배경으로 앞으로 삼면이 강줄기로 둘러싸인 청령포는 천혜의 유폐지였다.

열일곱의 섬약한 어린 목숨은 군등치를 넘어 배일치에 이르면서 이미 겁에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쫓겨가는 이의 심정처럼 잔뜩 찌푸려 있던 날씨가 신천리 이 작은 고개에서 잠시나마 개자, 그는 해를 보고 연신 절을 해댈 정도였다. 그래서 군등치(君登峙)는 노산군이 오른 고개이며, 배일치(拜日峙)는 해를 보고 절을 한 고개다. 그러나 그는 금부도사 왕방연 휘하의 군졸들에 이끌려 소나기재(단종이 넘은 후부터 시도 때도 없이 소나기를 뿌린다는 고개)를 넘어 뭍속의 절해고도 청령포에 당도한다.

고개 위의 소나무는 상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혀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어린 목숨은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 안을 헤매며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그때 청령포 안에 한 그루 소나무가 있어 그의 슬픔을 보고 들었으니 관음송(觀音松)이라 했다. 그가 오른 벼랑은 노산대라 불렸고, 한양을 그리며 쌓은 돌탑은 망향탑이 되었다.

청령포에서의 유폐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치 그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하듯 그해 여름 장마는 지독스러웠고, 단종은 홍수를 피해 두 달 만에 영월 읍내의 관풍헌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성대군이 주도한 두 번째 복위운동이 발각되면서 어린 목숨은 마침내 그 끝을 향해 달려간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사약을 들고 관풍헌을 찾았을 때 단종은 보이지 않았다. 서러운 금부도사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나 끝내 단종을 찾아낸 하인놈이 뒤에서 달려들어 활끈으로 목을 졸라 죽이니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그의 시신은 서강과 동강이 만나는 자리쯤에 버려졌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어쩌지 못하고 있을 즈음 영월 호장 엄홍도가 몰래 송장을 수습하여 동을지산 기슭에 묻고 달아났다. 200여년이 지난 후에야 단종은 복위되었고, 버려져 있던 무덤은 장릉으로 봉해졌다. 그때쯤 뒤늦게 풍수쟁이들은 그곳이 천하의 명당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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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종에게서 아들 같은 사랑을  받았고, 문종에게는 친구 대접을 받아 밤낮으로 같이 학문 토론을 하며 손수 부어주는 술을 마시고, 취해 누우면 손수 자기 옷을 벗어 덮어줌을 입은 정인지.신숙주요, 김종서를 죽이고 돌아올 때 앞서 나아가 악수 환영한 것이 최항이다. 이것이 집현전이며 선왕지도며 선비다. 그렇게 악독한 일을 하고도 명군.명신이란 말을 들으며 역사 위에 버젓이 남아 있는 것은 그 유교 도덕, 대의 명분론을 빌려서 하는 것이다.

 

선왕지도.충의도덕.삼강오륜이라 하지마는, 그 모든 것이 다 속에 산 혼이 있고서 말이다. 혼 하나 빠지면, 스스로 하는 정신 하나 빠지면, 선왕지도는 견마지도일 뿐이요, 충의도덕은 종눔이 지는 사슬이요,  삼강 오륜은 얽어매놓고 해먹는 도둑눔의 밧줄이다.(계속)

                                                      -서초동-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