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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15

 

'뜻으로 본 한국역사' 15

 

 

의인의 피

 

사육신

세조가 피묻은 손으로 임금이 되니 시비 선악이 모두 거꾸로 바뀌었다. 흉하고, 사납고, 발라 맞추고, 앙큼한 눔들은 모두 정난공신이 되고, 맑고 바르고 참된 뼈다귀 있는 선비들은 모두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어 조정은 바로 백귀야행(百鬼夜行)의 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꼴을 보고 가슴속에 불길처럼 타오르는 정의의 생각을 못 견디어 하는 몇 사람의 의인이 있었다. 바로 '단종 모복 사건'이 그것이다.

 

당초에 세조가 그 흉한 변을 일으킨 것은 물론 어린 조카가 쓰고 있는 왕관이 욕심이 나서 한 것이지만, 그 세조로서도 정의를 향하여 정면으로 대항 할 수 없으므로 양위의 형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단종 3년 6월에 드디어 선위의 식을 행하게 되는데 수양이 조카 임금 앞에 엎디어 사양하는 척 흉내를 내고, 이제 임금 단종이 내미는 국새를 받으려 하는 것을 보고 조정에 그득 들어찬 신하가 모두 낯빛이 먹 같아지면서도 어느 눔 하나 감히 한마디 소리를 내는 눔이 없었다. 그때 국새를 이제 임금께 드려 수양에게 주게 하려고 안고 섰던 예방승지 '성삼문'이 터져나오는 분과 슬픔을 참다 못해 그만 소리내어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랬더니 방금 엎디어 사양하는 절을 하는 척하던 수양이 절을 그만두고 고개를 번쩍들어 삼문을 흘겨보았다. 그래도 온 조정이 시체만 있는 무덤같아 식을 그런대로 무사히 끝났다

 

이때 통곡하는 삼문만 통곡을 하게 두었으니 수양은 그것쯤 못 본 체하고 임금이 되었다. 단종은 상왕이 되었다. 원치않는 양위를 한 상왕이다. 이름은 좋으나 사실은 죄인인 양 감금을 받고 있으니, 그 마음 늘 슬펐고,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선위하는 그날 죽으려는 동지 박팽년을 말려 죽지 못하게 하고 때를 기다려 일을 일으켜 단종을 도로 임금자리에 앉히도록 하자고 의논했다. 분을 참고 기다리기를 2년, 세조 2년 6월에 드디어 한 기회가 왔다. 때마침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게 되므로 성삼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쿠테타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박평년.하위지.유응부.유성원.이개.김질 하는 사람들을 모아 의논 한 후, 각각 맡아할 일까지 작정하였다.

 

운명은 또 알 수 없었다. 일이 조금 어긋나자 주저하였고 부득이 연기하기로 하여 때를 더 기다리기로 하였다. 유응부는 군인인지라 당장 해치우기를 주장하였으나 삼문은 일을 신중히 하기 위하여 그것을 '만전지계'가 아니라고 듣지 않았다. 

 

그러자 김질이 변심하여 세조에게 달려가서 모두 고했다. 여섯 사람은 곧 잡히어 모두 세조 앞에 직접하는 문초에 말로 못할 악형을 받은 다음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세상이 이르는 '사육신'이다.

 

죽어야 하는 사람들

사육신, 차라리 셰익스피어를 못 읽고 괴테를 몰라도 이것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 중에도 살아 있는 한 얼을 보기 때문이다.

 

불의가 주는 녹(祿)은 입에 넣을 수 없다 하여 한알을 다치지 않고 곳간에 넣어 두었으며, 승지의 안방에 거적 자리 하나밖에 없었으니, 이것이 한 얼의 맑음이 아니며, 부젓가락으로 다리를 뚫고, 배꼽을 쑤시며, 칼로 팔을 뚫어도 낯빛이 까딱없었으니, 이것이 한 얼의 거셈이 아니고 무엇인가! 마음이 바다같이 너그러우니 그 모진 형벌도 허허 웃으며 당하였고, 혼이 금보다 참되고 정성이 불보다 더 뜨거웠으니 나를 죽이는 사람을 보고도 "나으리가 선조의 이름있는 선비를 다 죽이어 한 사람이 남았고 사실 이모계에는 참여치 않았으니 두어두어 쓰시오. 이는 참 어진 사람이오" 하고 알뜰하게 권하였다. 살을 지지는 무사를 보고 "철편이 식었구나!  더 달구어 오너라" 하였다 하니 죽음과 고통을 초월한 인간의 무한한 얼을 되새겨 볼 것이다. 

 

육신의 모복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생각할 수록 분한 일이며 간악한 것이 이기고 충의가 도리어 패하다니. 충의의 굳음은 천하가 다시 원해 할 일을 하려다가 한 목숨 보존 못하기는 그만두고 온 집이 멸족을 당하고 노량진두에 한줌의 흙이 되어 버렸는데, 간악한 무리는 한세상 부귀영화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역사 위에까지 공신명산으로 적히다니, 위하여 이를 갈자면 이가 모자랄 지경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육신의 사명은 성공에 있지 않고 죽는데 있었다. 그들이 죽기 위해 뽑힌 것이다. 실패의 원인은 김질의 배반에 있는 것도 아니오, 세조의 흉악함에 있는 것도 아니다. 섭리가 원하는 것 아니라면 세조가 다 어찌할 것인가? 하나님은 육신을 이 민족을 위하여 정의의 재단에 재물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어야 했다. 죽어서 �째는 한국을 위하여 불의의 빚을 물어야 했고, 둘째는 의인의 씨를 살리어야 했다.

 

불의의 값

과연 그들은 한국을 위하여 불의의 값을 문 사람들이다. 의는 값없이 그저 없어지는 일이 없다. 하나님이 허락하면 사람은 한때의 의를 엎누를 수는 없다. 그러나 값 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반드시 그기에 상당하는 값을 갚아야 한다.

 

의(義)의 씨

의는 생명이다. 그러나 그것을 구함에 의해서가 아니오, 버림에 의해서 얻어지는 생명이다. 밀알이 땅속에 들어가듯이 의는 자기를 버림에 의해서만 살아난다. 육신은 참으로 살기 위해 몸으로는 죽음이 필요하였다. 거친 들팜에서 모처럼 얻은 순옥을 보통 석재로 쓰기에는 너무 아까워 특별한 작품으로 아로새겨 영원한 재단에 놓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패하고 잘 죽었다. 죽을 줄 모르는 이 민족에게도 죽을 줄 앎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것은 우리 혼의 모습이었다.

 

슬픔의 사람

육신의 사건후 정인지.신숙주는 상왕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여 드디어 단종을 폐하여 노산군이라 하고 영월로 귀양보냈다.

 

그래서 그 가련한 소년은 서강 청령포에서 그 슬픈 눈물을 씻는 것도 오래 할 수 없었다. 충신 정인지는 노산군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이 가엾은 그림자도 두려웠다. 그 그림자가 아주 없어지기 전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불안했을까? 단종에게는 바늘도 없었다. 무섭다면 그 뒤에 민중이 서 있는 것이 무서웠다. 그리하여 종내 금부도사를 보내어 대낮에 강아지 잡듯 목을 졸라 홀치어 죽였다. 그때 나이 열입곱이었다.

 

▲ 관란정(觀瀾亭)과 원호유허비각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충청북도 기념물 제92호. 원호가 단종이 유배된 영월의 청령포를 향하여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문안을 드리던 곳으로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빈 박통에 넣고 물에 띄워 청령포로 보내어 단종께서 드시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세종 5년(1423)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던 원호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원주에 내려와 은거하였으며, 단종이 죽자 영월로 가서 2년 상을 마쳤다. 임제의 『원생몽유록』에서 두건을 쓴 호남아로 형상화된 남효온을 하늘에 있는 단종과 사육신에게 인도한 선비로 나온다. 원호의 손자 원숙강(元叔康)은 벼슬에 나갔다가, 『세조실록』편찬 당시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빼고 실록청에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가 장살 당하였다. 이때 원호는 모든 집안의 서책과 문헌을 불태웠다고 한다. 문집으로 『관란유고』가 전한다. 관란정 오른 쪽 비각의 유허비는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찬하여 세웠다.

 

여섯 개의 육탄이 불의의 옥좌및에 떨어질 때, 그 튀는 피는 세조의 얼굴에 뿌려졌고, 정인지.신숙주의 얼굴에 뿌려졌고, 온 조정의 신하가 그 피의 세례를 받았다. 그 피로써 저들은 자기의 불의를 씻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멀리서 그 터지는 육탄의 소리를 들은 민중은 드디어 반응하는 바가 많았으나, 이들 불의의 옥좌를 지키고 있는 자들의 마음은 점점 굳어만 갔다. 그리하여 조정에는 더 많은 피를 요구하였는데, 연루자 여러 십 명이 죽고 단종과 음모가 있었다 하여 금성대군과 그 관계자 여럿을 죽였다. 그성은 세조의 친동생이다. 그러고도 세조는 명군이 되겠다고 버둥거렸다.    (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