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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17

 

'뜻으로 본 한국역사' 17

 

사육신은 세조 2년(1456년) 음력 6월 8일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그 시신은 버려졌는데 어느 스님이 여섯 사람의 시체를 가져다가 한명회의 압구정이 내려다 보이는 노량진 산 언덕 위에 묻었다. 그 스님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연려실기술’은 적고 있다. 4일 동작구 사육신묘에서 올곧기 그지없었던 무장 유응부에게 헌화하는 도올. [사진=임진권 기자]

고질

 

당파 싸움의 시작

한바탕 미친 춤이 지나간 후에 명종을 지나 선조대에 이르러 역사는 평안을 다소 보여주었다. 이황.이이가 나와 성리학이 발달되고, 전 시대에 원통히 죽은 사람들을 모두 펴주어 회복의 기운이 돌았다. 그러나 한번 중추신경에 스며든 정신이상의 발작은 가라앉은 대신 만성적인 고질병이 되어 3백년 간 민족의 생명을 먹으치우고, 정신을 시들게 하고 양심을 숨막히게 하고, 생명을 깍아먹는 고치지 못할 병이 되었다. 이른바 당쟁이란 것이다.

 

당쟁은 보통심리가 아닌 이상심리에서 나온 것으로 겉으로 보면 당쟁은 노소의 싸움인듯 하고, 정당의 싸움인듯 하기도 하고, 신구 사상의 충돌인 듯한 점도 잇으나, 아니다. 이것들은 오직 싸움의 재료와 구실이 되고 동기가 되고, 발단이 됐을 뿐이요, 그 원인은 아니다. 당쟁의 근본 원인을 캐자면 삼국시대로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월래 크던 민족의 살림이 이때부터 작아지기 시작하였고, 원래 넓던 민족의 마음이 이때부터 좁아지기 시ㅏ작하였으며, 원래 높던 민족의 기개가 이때부터 낮아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원래 청직하였던 인물이요, 스스로 가지기를 자못 높이 하였으므로, 서거정이 시기하여, 후일 사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까지 있지만, 그 문화에서 나온 일파가 대개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평하는 것이 너무 심하므로 어느듯 반동의 세력을 끌어 일으키어 서로 배척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이 사화를 일으켰고, 그 풍이 갈수록 사회에 퍼져 선조 때에 재상 이준경이 붕당을 경고하였고 성종 전 예종 때 발생한 '남이의 옥사'를 당파 싸움의 초기 발단의 예로 들 수 있다. 낭이는 유자광이란 눔이 시기하여 남이의 시 글자중 '남아이십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쳐 혁명을 음모하고 있다고 거짓 일러바쳐서 악형 끝에 죽었다.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다. 글 한ㅇ 구를 가지고 고소한다고 그 말을 쉽게 듣고 사람을 의심한다는 것도 그러니와, 그것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도 한 나라의 정치로서는 너무 경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때 사회의 형편이었다. 유자광 같은 소인배가 고하는 말을 듣고 인망있던 인물을 그렇게 쉽게 죽여버리는 데서 그때 사회의 분위기는 서로 의심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만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이를 죽인 것은 유자광이 아니라, 그때 사회에 있었던 불안의 공기,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는 공기다. 그것은 이미 세조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세조는 사람으로 못할 짓을 했으니 밤낮 언제 원수 갚으려는 눔이 오지 않나 신경이 날카로웠을 것이요, 그 때문에 공연히 걸려들어 죽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또 요시찰 대상은 물론 특히 뜻이 높은 선비들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당쟁은 이성계의 쿠테타 이후  태종의 '왕자의 난'에 이러 세조의 권력찬탈이 계속되면서 조선에 만연된  불신과 음해, 시기, 배척, 붕당, 끼리끼리 모여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파벌이 자연스럽게 구성되고 있었다.

 

자기를 잃은 결과

이와같이 당쟁의 뿌리를 ?아 올라가다 보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일부에서는 유교에서 구하려 하는 이들도 있다.그러나 유교가 꼭 당쟁의 우너이이 도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어떤 개인이나 당파에 있는 것도 아니며 ,개인의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나, 개인의 힘이 수백 년에 걸쳐 민족의 역사를 지배할 수는 없다.

 

민족적으로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그 원인이다. 나를 잊었기 때문에 이상이 없고 자유가 없다. 민족적 큰 이상이 없기 때문에 대동단결이 안된다. 민족을 묶는 것은 폭력이나 법이 아니고 민족적 이상이다. 뜻이 하나일 때 통일은 저절로 된다. 자유가 없기 때문에 당파를 짓게 된다. 당파의 목적은 작은 세력을 다투는 데 있으니 강한 자에 대하여 비굴하게 구는 눔일 수록 심한 법이다. 그러므로 당쟁은 노예근성에서 나오며 망국민일수록 싸움이 많다. 그러나 나라를 ?으려면 죽기로써 서로 양보하고 한 이상을 세워 싸움을 그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고구려 패망으로부터 시작하여 내리막길을 달리게 된 역사는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본래 순후했던 것은 비박하여지고, 본래 청명했던 것은 혼탁하였다. 본성이 착한 민족이 사랑의 기아를 느끼게 되었고, 의협심이 많던 사람들이 질투가 그 천성을 이루게 되엇다. 비열해지고, 교활해지고, 음험해지고, 나약해졌으니 하나님은 장차 이 민족을 어찌할 것인가?

 

율곡의 헛수고

 

군자냐 예언자냐

사랑하는 자식을 교육하는 방법은 두가지인데, 좋은 말로 잘 타으르는 것이요 하나는 따끔한 맛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번째 방법을 취하였는데, 사람은 오직 고난의 절정에서만 비로소 자기의 근본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임진왜란.병자호란은 이 민족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체벌이었다. 

 

 

당론이 일어나고 민족적 정신 혼란 상태가 고질이 되어버리려 할 때, 그래도 식견이 높았던 율곡 이이는 그 화를 미리 막으보려고 애를 썼다.

 

동서 싸움이 한창 터지자 온 조정의 신하가 거기 참여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한때의 선비가 거기 버무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바른 말로 오해도 받았고, 그래서 나가기도 하고 또  물러나기도 하는 동안 모략 중상이 끓이지 않았으나, 일관되게 당론을 조정하여 조정을 평안하게 하고 세상을 건지려고 힘을 써서 49살의 생애를 보낸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율곡은 양편을 어루만져 잘못을 유야무야 간에 비벼버리고 협화를 이루어보려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동서 양편에서 율곡에 대한 비난과 조소를 보내며 배척하였다. 율곡은 당론의 원인을 너무 옅고 가까운 데에서 구하였다. 이제와서 율곡의 수고가 쓸데 없었던 것이 스스로 환한 일이 되었다.

 

그의 조정안

재상 이준경이 죽을 때에, 유언 4조로 임금에게 올렸는데, 하나는 임금더러 학문에 힘쓰라는 것이요, 그 둘은 제왕의 위의를 갖추라는 것이요, 그 셋은 군자.소인을 갈라서 쓰라는 말이요, 그 넷은 지금 붕당이 잇으니 숙히 없애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임금이 이것을 대신들에게 보이면서 그 4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다. 율곡은 그 사람이 이것을 배척하여 상소를 올렸다.실로 이외라는 느낌을 금 할 수 없다.

 

율곡이 이준경의 마음을 몰랐을리는 없을 것이다. 율곡은 일부러 그랬다 할 수 밖에 없는 데, 그 추측되는 이유는, 하나는 그가 당파심에서 음해하는 수단으로 그랬다는 것이요, 둘은 준경의 어짊과 나라에 공로가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때 가뜩이나 당파기분이 있는 조정에 그런 말을 하면 장차 화단을 일으키는 것이 될 것이므로 그를 눌러 없애기 위해서 극력 배척한 것이라는 것이다.

 

갑작스럼 퇴장

율곡이 다온을 조정하기 위하여 애쓰는 모양을 보면 탄식과 한줌의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는 죽은 사람을 팔아서까지 어루만져 화해를 시키려 애쓰는 그 모양이 참으로 애처럽고 부모님의 얼굴을 대하는 듯하다. 그가 임금을 보고 하는 말에 당론이란 조그만 것인데 '우리 나라 인심이 경박해서' 그런다고 하였다. 율곡의 주선으로 양당이 서로 화해를 하려는 순간 갑작스런 퇴장 명을 받고 그 일은 그 때문에 틀어지고 만다.

 

백성들에게 태산같은 기대를 받았던 그가 겨우 49살의 장년으로 이제 바야흐로 수완을 나타낼 때라고 할 때에,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니, 섭리의 손의 움직임에 누가 아니 놀라겠는가? 그의 부음 소식에 평소 그를 신임하던 선조는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장례를 하는 날에는 온 백성들이 길가에서 남여노소가  몇십 리에 이어닿아 우는 소리가 들을 진동하였다고 한다.(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