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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19

 

'뜻으로 본 한국역사' 19


 

전쟁의 참혹함

그와 같이 특별한 섭리로 멸망만은 면했으나 이번 전쟁으로 나라는 말할 수 없이 비참에 빠져버렸다. 전쟁으로 인해 죽은 생명만 해도 수를 알 수 없고, 산업이 모두 망가지고, 흉년과 염병이 겹쳐 각 도 백성이 모두 유리하게 되었다.

 

산과 들의 풀뿌리, 나무 껍질도 다 먹고, 길거리에서 대낮에 사람을 잡아먹고, 주검이 들 천지에 널리었다. 서울 수구문 밖에 내다버린는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그것을 처리하는 데 1년이 넘게 걸렸다. 전쟁이 난 2년 후인 갑오 여름에는 황소 한마리 값이 불과 쌀 서말, 가는 무명 한 필에 겨우 좁쌀 두서너 되에 지나지 않았으며, 보물 같은 것은 팔래야 살 사람이 없고, 사람이 죽으면 그 살을 서로 다투어 뜯어 먹었다고 한다.

 

나라에서 싸움이 난 지 불과 1년에 국고가 말라 버슬 팔기를 공공연히 허락하여 쌀 백 섬에 삼품, 서른 섬에 오품, 나중에는 열 스무 섬이면 가선당상에 올린다 하지만,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적군을 약탈하고 구원하려온 명군은 백성의 것을 마구 뻬았고 전국의 소. 돼지. 개. 닭은 명나라 군사가 다 잡아먹고 농사에 쓸 것 조차도 없었다. 술에 취한 명군이 길에 토악질을 하니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어 다투어 주워먹고, 약한 눔은 그것도 못먹어 울부짖으니, 이것이 사람의 세상인가? 아귀의 지옥인가? 우리는 이 지옥에서 죽지 않고, 죽으려 해도 못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자손임을...

 

생명처럼 야속한 것이 없고, 생명처럼 무서운 것이 없고, 생명처럼 엄숙한 것이 없다.동무의 시체라도 깍아먹고, 살아남은 눔은 또 새끼를 낳고 밭 갈고 또 싸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주받은 운명이 아닌가? 그러나 천년을 두고 매맞고,짓밟히고, 조롱받고, 속임당하는 이 백성을 이와같은 지옥에 몰아넣고, 부러지고, 찢기고, 피 흘리고, 허덕이며, 겨우 기어나올 만한 구멍 하나를 남겨놓고 발로 차고 채찍으로 후리며 몰아넣는 조물주는 대체 이 백성을 가지고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망하란 말인가? 흥하란 말인가?

 


명량해전 함성 다시 울려 퍼져
명량해전 함성 다시 울려 퍼져

 

민중의 반항

여기 대하여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씨알이었다. 맨주먹으로 나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이다. 의병이라야 빛나는 전적을 낼 수는 없고 , 한갖 푸른 피를 거친 들에 쏟았을 뿐이다. 밟혀서 끔틀거리는 버러지 고민같이, 습격을 받으면 반드시 대적을 쏘아 죽이고 죽는 꿀벌같이, 이것들은 살았노라는, 살겠다는 생활의식, 생존권의 주장을 나타낸 것이라는 데서 의미가 크다. 몇백 년을 두고 예의지방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에 팔려 쓸데없는 허식과 구구한 소절의 무거운 짐을 지느라 뼈가 빠지고 의기가 상실된 이 씨알도 이 강한 자극을 받고, 혼수상태의 중병자가 소리치듯 한소리 높이 부르짖은 것이다.

 

가장 먼저 군사를 모집한 자칭 천강홍의 대장 '곽재우', 백수서생으로 삼부자가 다 충의 전사함으로 삼종사의 '고경명', 외로운 진주성을 지키다가 마침내 형세가 불리하자 부자가 촉석루 아래 푸른 피를 뿌린 '김천일', 비분강개하며 미친 선비라는 말을 들으며 7백 의사와 붉은 피를 금산에 뿌린 의사총 '조헌', 이들은 모두 이 수없는 무명의 영웅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오는 23일 칠백의사 순의(殉義) 제향(祭享)행사 거행
오는 23일 칠백의사 순의(殉義) 제향(祭享)행사 거행

 

전쟁에도 아니 없어진 것

민중은 이와같이 맑은 정신이 드는 기색을 보였는데, 나라의 지배자와 지도층은 여전히 가위에 눌려 맥빠진 당파심만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무수한 인명이 죽고, 국가의 재물이 다 없어지고,문헌과 예술품도, 모든 문화유산을 수없이 잃었는데, 이것 당파싸움만은 아니 잃었다. 나라 그르친 책임을 서로 미대어 그것으로 묵은 원수를 갚으려는 그런 더러운 꼴을 냈고, 압록강변 국경 한모퉁에 몰려서 구차한 목숨을 보존하면서 공을 세우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시기하여 제 당의 세력 지키기에 급급하였다. 저쪽을 꺽으려 의논을 할 때는 참 틀을 불며 허물을 �고, 산 사람, 죽은 사람, 새 일, 묵은 일 할 것 없이 그저 파 들추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인이 갈라져 남인.북인이 되고, 서인은 갈라져 노.소파가 되고, 북인은 또 대.소로 갈리고, 그다음 내려가면 또 파에서 파가 생겨 서로 얼크러져 싸우는 것이다. 난리후 3년 경자에 곽재우의 '국세급급호태제(나라의 상태가 위태롭다)' 상소를 올려도 듣는 이가 없으니 훌훌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등산의 비장 김덕령을 이몽학의 모역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몰아 척살하였다.

 

못생긴 눔들이 인물이 조금 뛰어난 것이 보이면 저런 사람으로 두었다간 우리가 아무것도 못 해 먹는다 하는 생각에 갖은 수단, 갖은 간계를 다하여 죽이고야 마는 것이 우리 나라 지배계급의 버릇이다. 선조는 파쟁관계로, 태자 결정문제로 말년이 불행하였고, 광해 때에 일어난 궁중의 여러 비극, 몇 차례의 옥 사건, 임금이 폐위를 당하게 되는 모든 일이 이 얼크러진 파쟁 때문이다.

 

이리하여 사회의 밑층에서 일어나려던 각성운동은 오래 된 고질 때문에 숨이 막혀 버리고, 역사는 다시 지나온 바퀴 자리로 거꾸로 구르게 되었다.(계속)

                                                                -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