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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21

 

'뜻으로 본 한국역사'21

 

▲ 쌍영총에서 발견된 기마무인도의 모습입니다. 궁대와 시복 즉, 동개 일습을 패용한 당당한 고구려의 기마무인을 그렸습니다. 이처럼 말 위에서 활을 쏠 때에는 기본장비를 반드시 갖추고 움직여야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임경업

 

슬픔과 분 속에 밴 사나이

임진란을 말하는데 충무공을 빼 놓을 수 없듯이, 병자호란을 말하는 데 충민공을 빼 놓을 수 없다. 이들은 다 그시대를 위하여 하나님이 내세운 시대의 뜻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선조 27년 11월 2일 충주 달천촌에서 태어났다. 충주라면 임진란에 신립 장군이 적을 맞아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그만 일패도지하여 붉은 피를 강물에 뿌린 역사의 현장이요, 선조 27년이라면 이 뼈아픈 일이 있은 지 겨우 3년이 지난 때이니, 그는 바로 이 전쟁의 슬픔과 분노 속에 실러진 이요, 이 전쟁의 참혹한 꼴을 보면서 자란이다.

 

몸은 작고, 열은 크고, 날래고, 슬기있고 꾀있고, 말 잘하고, 무엇보다도 충의의 정신이 강하였다.

 

27살에 무관 길에 나서서 차차 그 재지와 인격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서북방어에 적합한 인물로 선발되어 의주부윤에 임명되었다. 임경업은 현지에 부임되자 남들은 장차 닥쳐올 환난은 모른체 세월 즐기기에 분주하나, 장군은 백마산성을 쌓는 등 장차 환난에 대비하였다. 당시 청태종과 임경업 장군은 서로 밀정을 보내 서로를 탐색하였는데 청태종은 임경업의 큰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난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군사 2만명만 주면 국경을 지킴은 물론 오랑캐의 소굴을 쳐 부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이의 허락이 떨어지자 간교한 유신들이 국경의 장수에게 그와같이 많은 군대를 주면 임금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말로 취하하게 만들어 버리매 통탄할 일이라. 이미 적국이 들어온 후에도 군사 5천만 주면 직접 심양을 공격하여 적의 근거지를 도륙내겠다고 하였으나 이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이 지나간 후에도 그 한을 합번 씻어 보려고 명과 연락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 때마침 청이 명나라를 치는 군사를 일으키어 우리더러 군사를 보내라 강요함에 장군은 출병간 이때를 통해 명과 연락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그만 발각되어 회군하고 말았는데, 청에서 장군을 잡아 보내라 함에 줄을 지고 만주로 갔다. 그러다가 중도에 탈출하여 배를 타고 산둥반도에 도달하여 명나라 조정을 움직이려 하였으나 이미 명나라는 형세가 기울었고 의탁하였던 명나라 장수가 못난눔이라 임경업을 잡아 청나라에 귀순함에 임경업은 포로의 몸이되어 심양으로 잡혀갔다.

 

그기서 오랜 곤욕을 당하다가 종내 꺽이지 않는 그 높은 의와 불타는 충절에 대적이 감복하여 본국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청 태종도 인물이라 남의 충신 대접이 내 충신 대접임을 알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요, 또는 죽여서 이가 될 것이 없는 한 사람을 놔주어 한 나라 국민의 뜻을 사고자 함이었다.

 

의주로 건너서니 남녀노소 백성들이 모두 나와 "우리 사또님 오신다", "우리 장군님 오신다" 라며 에워싸고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고, 고을마다 지나가는 동안에 마중이 끓이지 않고 칭찬이 자자하였는데, 서울에서 기다리는 것은 모함과 악형이었다.

 

김자점이란 눔이 본래 장군을 시기하여 일마다 해하려 하여서 전에도 몇번 그러한 짓을 서섬치 않아 걸린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장군을 아주 없애려고 심기원의 역모에 장군이 관련이 있다고 모함하여 심하게 고문하여 그만 매질 끝에 숨이 끓어지니 나이 쉰 셋이요, 장군이 죽을 때에 탄식하여 하는 말이 " 천하 일이 평정되지 않았는데, 나를 죽여 되느냐!" 고 하였다.

 

실패의 영웅

인조는 장군이 죄 없이 해를 받는 것이 아까워 구할 뜻을 가졌으나, 약한 임금이라, 대신들의 의견을 물으니 찬성하는 눔이 하나도 없고, 어물어물하고 있는데, 승지가 장군의 절명을 보고하자.

 

" 경업이 죽었어! 죽었단 말이냐? 그 무죄함을 말하려는데 정말 죽었단 말인가? 그렇게 장하고 튼튼하던 사람인데 어찌 그리 빨리 죽었단 말인가? 담대하여 쓸 만하고 공로도 많았는데 아깝구나! 남의 말에 걸려 종내 죽고 말았단 말이냐?  내가 너를 죽이잔 생각이 아니었는데 네가 질러 죽고 말았단 말인가? 아깝구나 아까워!"

 

그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매 사람마다 한숨짓고 "나라일을 어찌할꼬, 임장군을 죽여놓고!" 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그 재와 용을 가지고, 그 의와 충을 가지고 이 시대에 나는 일이 우연이 아닌데 왜 넘어지기를 그리 맥없이 할까? 적국의 손에서도 아니 죽은 몸이 하필이면 돌아와서 제나리의 손에 죽을까? 구하려는 이의 손이 방금 그 머리위에 내리려 하는데, 보고 일부러 도망하듯 갑자기 가버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는 역사의 고아였던가? 시대의 길을 잘못 들었던가? 하나님이 불과 연기와 울음속에서 나게 하고 길러서 일단 천하의 일을 결정하고 나라를 건질만한 자리에 놓고, 그리고는 참혹하게 빼았아 감은 무었인가? 더구나 민족의 양심을 아프게 할 대로 아프게 하고 부끄럽게 할 대로 부끄럽게 한 후에 훌쩍 데려감은 무슨 뜻인가? 그 모든 의문을 푸는 것은 오직 한마디- 고난을 철저히 겪어보아라!

 

그를 충무와 비교하면 대조가 된다. 저가 남문을 지켰다면 그는 북문을 지킨 것이요, 저가 바다의 영웅이면 그는 육지의 호걸이다. 그 빼어난 재용에서 같고, 그 뛰어난 식견에서 같고, 그 높은 충의의 인격에서 같다. 저를 병자에 두었으면 임 장군이 되었을 것이요, 그를 임진에 두었으면 이 충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둘의 운명은 달랐다. 그 한 몸 한 마음을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바친 데는 다를 것이 없으나 하나는 계획을 세워, 세운 대로 성공하여 나라를 건지는 사명을 다하였고, 하나는 애를 쓰면 쓰는 대로 틀려나가 천고의 원한을 맺고 갔을 뿐이다. 대세가 허하지 않았고 둘의 운명이 다름은 둘이 맡은 시대의 뜻이 다름 때문이었다.

 

충무는 죽어도 순사요, 제 손으로 한 자결이지만, 이는 역적의 이름으로 맞아죽었다. 나라가 용납 못한 점은 같다. 총사령관이 적군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은 자기가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충무의 죽음을 자결이라 하는 것이다. 이기고 돌아 왔다면 이미 통제부에 와 있던 금부도사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을 것이며 모진 고문과 악형으로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 나라는 나라를 구한 영웅을 잡아 죽이는게 나라를 위한 길이며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유신들의 생각은 항상 변함이 없다. 세치 혀로 온  나라를 절단내고 임금을 위협하여 종사를 좌지우지하고 눈에 띄는 충신은 어떻게 모함해서라도 죽이고, 전쟁의 영웅은 영웅이기 때문에 잡아 죽이는게 유신 정치였다.

 

믿음의 사람

그가 의주분윤으로 있을 시 나라일을 걱정하는 정성에서 올린<진만상편의급군무소(陳灣上便宜及軍務疏)>라는 상소문이 있는데, 마지막 조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六)은 왈, 경천재(敬天災)니, 예사람에 말에 있어 이르기를 임금이 잠깐 하는 한 생각의 아름다운 것이 빛난 구름 단  이슬같고, 잠깐 한 생각의 모진 것이 사나운 바람 닥치는 우레 같다 하니, 그 말이 참 옳습니다. 하늘이 미워하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대개 재앙이 있을 때 공경하면 재앙이 되지 않을 것이요,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위태롭고 망하는 일이 올 것입니다. 오늘 천재지변물괴가 자주 일어나는 것은 참으로 임금님의 복 입니다. 바라건데 상감께서는 재앙을 만나시고 더욱 덕을 닦으시어 재앙이 변하여 상서로운 것이되게 하시어 화가 변하여 북이 되게 하시기를 바라옵니다."

 

그 노염이 어디 있으며 그 분한 빛이 어디 있으며, 그 한탄이 어디 있는가? 추(秋)팔월 밝은 달이 통군정 위에 비치고, 역사적 회포를 자아내지 않고는 마지않는 압록강 바람이 소매에 가득 차는 밤, 나라 걱정에 타는 가슴을 안고, 이 니라를 소생시켜볼까 하고 구국의 일념이 가득찬 장군의 글귀는 충과 의에서 솟아나는 진솔된 마음이라라.

 

우리가 만주를 �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도, 삼전도의 부끄러움도, 짐승만도 못한 눔들이 단 한사람으로 났던 장군을 죽여 나라일을 그러쳤다는 분에 이를 갈던 것도 다 잊어버리고 그저 무언지 모르게 눈물이 저절로 흐름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 장군은 청 태종의 목을 베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도 아니오,다만 이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할까?  재앙과 고난을 공경해야 된다는 그의 말은 이 재난과 고난을 통하여 스스로를 추스르고 새로운 신념으로 강력한 왕도국가를 원하였던 그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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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바로보기] (31) 척화파와 주사파의 갈등

경향신문|기사입력 2004-12-22 18:09 |최종수정2004-12-22 18:09


임진왜란이 끝난 뒤 만주 일대에서는 여진족이 일으킨 청나라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력을 떨쳤다. 명나라는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와 달리 조선은 8년 전쟁의 뒤끝을 정리하느라 온 국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무렵 조선의 조야는 오랑캐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에 대해 재조자소(再造字小·다시 나라를 만들어주고 작은 것을 사랑해준 은혜)의 의식이 팽배했다.

그리하여 신흥국 청나라와 연달아 마찰을 빚고 있었다. 청나라는 거대한 적 명나라를 타도키 위해 온 국력을 기울이면서 조선과는 타협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광해군은 적당히 타협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명의 요구에 따라 청을 공격하는 군사를 보내면서도 현지 사령관인 강홍립에게 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재조자소의 은혜의식에 철저한 조선의 지배세력들은 타협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특히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세력들은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모조리 뒤엎고 청나라에 더욱 적대감을 보였다. 국제정세를 외면하고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 발톱이 빠진 늙은 사자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 실리 무시 대의명분만 앞세워 -

청나라로서는 배후의 조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신을 보내 회유하기도 하고 1차로 침략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조선은 결코 심복하지 않았다. 마침내 청나라는 1636년 전면적 침략을 단행했다. 적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횡행하는데도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꼼짝도 못했다. 서울 주변의 모든 백성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철저히 항전하여 죽느냐, 항복하여 사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이럴 때 김상헌이 주도하는 항전파와 최명길이 주도하는 화의파로 갈라졌다. 다시 말해 화의하는 문제를 두고 서로 이견을 노출하며 갈등을 빚고 있었다. 화의를 하여 백성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계열을 주화파, 죽어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화의를 할 수 없다는 계열을 척화파라 부른다.

김상헌은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으면서 유교적 대의명분을 살리려 했고, 최명길은 일단 화의를 하여 항복을 하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척화파는 철저한 명분론자, 주화파는 실리논자였던 셈이다. 일단 화의는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인조는 삼전도로 나와 청의 태종 앞에서 항복식을 치렀다. 조선 최초의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조선은 명을 대신하여 청을 임금으로 받들겠다고 서약했다. 항복을 한 뒤 김상헌과 최명길은 함께 전범으로 몰려 볼모로 잡혀갔다. 뒤이어 명나라도 멸망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문제가 개재되어 있다. 척화파들은 철저히 명나라를 받드는 주자학파들이었다. 주자는 북방민족인 금(金)나라가 중국을 침입하자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논리를 폈다. 중화주의 가치관에 따라 오랑캐와는 한 치도 타협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바로 금나라와 청나라를 같은 오랑캐 무리라 본 것이다.

이와 달리 주화파들은 국제정치를 현실논리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힘과 힘의 대결이므로 힘이 부칠 적에는 한 발 후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대개 주자학보다 양명학에 경도되었다. 곧 왕양명은 사변적 학문보다 실천을 중시했으며 직업과 신분의 차별을 배격했다. 따라서 중화주의 이론에 충실치 않았다.

따라서 척화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대의명분을 지키는 유교적 선비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주화파들은 양명학적 무실(務實)에 충실했다.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 국민을 살리는 길이 무엇인지와 연관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갈등이 유발되었다.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고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척화파들의 의식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더욱 청나라에 증오감을 드러내며 존화(尊華)의식에 사로잡혔다. 멸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쓰고 아무리 청나라가 유화정책을 써도 심복하지 않았다.

- 계속된 탄압에 주화파 뜻 못펴 -

그러면서 그들은 쉴 새 없이 불구대천의 오랑캐와 타협했다 하여 주화파들을 매도했다. 주화파들을 대의명분을 저버린 역적의 무리로 몰아갔다. 주화파들은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그리하여 소수로 전락했다. 주자학의 교조성은 결국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당색으로 따져 노론들은 거듭 집권을 하면서 척화파의 정치적 계승자임을 자부했다. 주화파들은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 속에서 소론으로 갈라져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주화 계열의 소론들은 정치적 압제를 피해 은둔하거나 양명학 연구에 몰두했다.

한편 조선 후기에 들어 모화사상을 배격하고 청의 실질적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을 배워야 한다는 한 무리의 재야 지식인 그룹이 있었다. 곧 실학자들 속에서도 박지원, 박제가 등이 이를 주도했다. 이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오랑캐도 문화적으로 수준이 높게 되면 중화가 될 수 있다는 것, 우리나라는 공리의 주자학을 불식하고 실질의 학문을 숭상해야 한다는 것 등에 모아졌다. 하지만 이들도 소수 그룹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척화계열은 학문적 또는 정치적으로 주류를 형성했다. 이들의 전통을 이은 이항로·최익현 등은 19세기 외세 침투의 상황에서 철저한 척화의식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묵은 이론을 끄집어내서 척사(斥邪)를 표방하고 새로운 시대의 변수에 대비했다.

- 수구·진보 갈등은 지금도 여전 -

적어도 척화, 주화 논쟁과 갈등은 300여년 동안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묵은 관념과 몽롱한 의식 속에서 헤맸다. 척화이론이야말로 대의명분이란 그럴 듯한 위장술로 포장하고서 시대의 진보를 외면하고 퇴행의 길을 걸었다. 이들은 기성의 신분제도 봉건가치를 고수하여 기득권을 계속 누리려 했다.

주화이론은 외세가 침투할 때마다 등장했다. 때로는 주체의식이 부족한 듯이 보이기도 했으나 현실타협의 노선을 추구했다. 대체로 19세기 끝 무렵, 개화파들이 척사파에 맞서 신문물의 수용을 외치면서 이 주장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은 어떤가? 미국·중국 등 패권국가들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남북관계에 있어서 화해 협력으로 가야 할지, 인권과 정의에 토대를 둔 과거사 청산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등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우리는 여전히 이 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 수구와 진보가 어우러져 갈등을 빚고 있다.

역사는 반복하는 듯이 보이지만 전개되는 시대상황과 현실가치 기준은 다를 것이다. 우리는 냉철한 현실인식을 요구한다.

〈이이화 역사학자〉

- 치욕의 삼전도碑 : 청태종의 공덕 새긴 뼈아픈 역사 상징물 -

조청전쟁이 끝난 지 4년 뒤인 1640년 청나라는 항복식을 거행한 삼전나루에 청 태종의 공덕비를 세우라고 강요해왔다. 그야말로 돌출행동이었다.

조선은 미적거렸으나 끝내 당해낼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인조는 너도나도 기피하는 분위기 속에서 세 사람의 문사들에게 글을 지으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들이 지은 내용은 부실했다. 청나라는 마지막 경고를 보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인조는 이경석에게 이 일을 지시했다.

이경석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 글을 지었다. 그 비문의 끝에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차가운 뿌리에 다시 봄이 오도다… 삼한에는 만세토록 황제의 덕이 남으리’라는 구절을 넣었다. 이 글을 받아본 청나라에서는 이제서야 만족하여 비를 세우게 했다.

청나라에서 이 비문을 바탕으로 하여 여진문자와 몽골문자로 번역해 보내고는 세 문자로 비를 세우라고 강요했다. 청의 사신이 와서 공사를 감독했다. 이 공덕비는 높이 395㎝, 너비 140㎝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앞에는 여진문자와 몽골문자로 이루어진 비문을 새기고 뒤에 한문의 비문을 새겼다.

위치는 말할 것도 없이 항복식을 하던 곳에 잡았다. 또 화려한 단청을 한 비각을 지어 비바람을 막게 했으며 주변에는 담을 둘러 보호케 했다. 여느 사람들은 감히 근접하지 못했다. 이 비의 정식 명칭은 청태종공덕비였으나 보통 삼전도비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비문은 정치투쟁의 빌미가 되었다. 이경석도 주화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뒤에 전범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압록강변의 백마산성에서 유배살이를 했다. 그런데도 척화파들은 치욕의 비문을 지어 나라의 체면을 잃었다고 매도했다.

주화파 후예가 중심이 된 소론들은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 사세가 부득이한 데에서 나왔다고 변명했으나 척화파들은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 결과 논쟁과 분란이 꼬리를 물고 연이어졌다. 당쟁의 빌미가 된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조선 말기에 들어 이 비를 어느 인사가 치욕을 감추려 했는지 땅에 묻어버렸다. 그러다가 해방 뒤 다시 발굴해 본래 있던 자리에 세우고 보호했다. 치욕의 역사도 후세의 교훈이 된다는 소박한 의식에서 나온 조치일 것이다. 한데 이를 남몰래 조각을 내서 없애려는 시도도 있었고 비문을 쓴 이경석의 이름을 지우기도 했다.

참으로 말썽 많은 비이기는 하나 그 결과를 누가 불러왔던가? 공허한 대의나 명분만 먹고 살 수 있었던가? 삼전도비는 잘못된 역사의 한 상징물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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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조는 너무나 무능하였고 의심이 많았고 임 장군이 뜻을 펼치기에는 부족한 임금이었다. 심양.북경으로 끌려가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선진사회의 문물과 서구의 발전된 모습을 배우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까지 청과의 내통을 의심하여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내 세자빈과 세 아들까지 모두 유배내지 죽임을 당하였는지라 그의 의심은 혈육을 그정도로 할 정도이니 짐승보다도 못한 인물이었으며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강했던 못난 인물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 차남 봉림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효종이라.

 

수많은 고난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데, 이 민족은 그 고난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으며 강력한 북벌도 세치 혀의 유신들에게 휘둘리어서는 될 수 없는 것이며 고난을 통해 부국강병의 원대한 실현을 기대하였는지 모른다. 압록강변의 고고한 강변 통군정! 수많은 세월동안  조선의 변방 장수들이 최전방인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회한과 염원을 불태웠을까! 군사력은 약하고 저들은 강한 군대로 밀고 내려오는 날에는 이곳 모든 백성들이 다시 적들의 말발굽에 짓�히며 살륙.방화.강간.약탈을 당하는 피바람 휘몰아치는 전쟁터에 내 팽개쳐질 것인데, 나라는 이곳 최전방의 장수의 생각과는 다르니 그들의 의분이 어떠하였겠는가?  (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