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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20

 

'뜻으로 본 한국역사' 20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신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하게 된 까닭은 당시 국제적으로는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이었고, 국내적으로는 그해 2월에 이괄의 난을 겪은 인조가 한성을 빼앗기고 충남 공주에 있는 공산성으로 피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1624년(인조 2)부터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2년만인 1626년(인조 4)에 완공되었다. 당시 옹성 3개, 문 4개, 암문 16개를 만들었고, 성안에 우물 80개, 샘 45개를 조성했다. 또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축성한 지 10년만인 1636년(인조 14), 유사시를 대비해 수어사(守禦使) 이시백이 처음으로 1만2,700명을 동원하여 기동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원래 강화도로 건너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린 뒤라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처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처참했다. 인조 행렬을 뒤따라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온 청군이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도 차단해버렸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군사들은 모진 추위에 점점 사기를 잃어갔다.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고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결국 인조는 45일만인 1월30일 남한산성 서문을 열고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남한산성은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정작 필요할 때 제구실을 전혀 못했던 것이다.

서문 근처 성벽의 조망. 서울 송파 너머로 북한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수어장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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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환난

 

전쟁의 뜻

전쟁의 의미는 전쟁 때보다 전쟁 후에, 그 사회에 있다. 전쟁은 한 큰 국민적 시련이라는 데 참 뜻이 있다. 이 시련으로 일단 정신의 향상을 얻은자가 진정한 승자다. 이 시련에 낙제하고 정신이 내려가는 자가 진자다. 임진.정유의 난은 한국을 심판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준비된 것이었다.그 환난을 이겨내는 것이며, 견디어 내는 것이며, 그것을 삼키는 것이며, 그것을 삭여내는 것이었다. 그 불과 피의 풀무속에서 국민적 정신을 깊이 하고 깨끗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낙제였다. 인조 14년 만주에서 일어난 청 태종을 보내어 임진란 때 터진 머리에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두번째 타격을 주었으니, 선조 31년 수길의 군사가 물러간지 겨우 40년이다.

 

청의 일어남

명의 세력이 쇠퇴함에 따라 만주에서 여진의 여러 부족이 일어나 서로 다투는 동안 동자강 유역에서 일으난 누르하치란 자가 선조 16년 부조의 원수를 갚는다고 군사를 일으켜 여러 부락을 쳐서 이기고 형세가 자못 떨치는 것이 있더니, 문득 천하의 형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비로소 큰 뜻을 품게 되었다. 명나라도 누르하치의 토벌보다 조선의 지원이 급하니 만주 군대로 하여금 조선으로 출병토록 하는 기회에 누르하치는 마음껏 세력을 확장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임진난이 일으나는 것을 보고 사신을 보내어 자청 도와주마 하였다. 조선은 이것을 보고 좋은 말로 거절하여 보낸 뒤로는 그대로 잊어 버렸다.

 

누르하치는 점점 세력이 강대해져서 명에 대해 들고 일어났다.인조 8년에 만주 벌판에서 천하 대세를 결정하는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명은 이 싸움에 우리보고 응원하라 하였다. 임진란 때의 신세도 있으니 의리상 응원해야겠지만, 다른 용기는 없고 군사 2만을 보내는 데 그치었으니 소극도 이런 소극 정책이 어디 있을까? 거느리고 간 장수 강홍립.김경서도 그 인물이 아니어서 한낱 남의 이용물만 되고 말았고, 조정이란 것은 아무 생각없이 그저 썩어빠진 옛 투대로 명.청 사이에 그 어디 가 붙는 것이 유리할까 그것만을 가리려 하고 있었다.

 

역사의 복수

드디어 복수하는 날이 왔다. 인조 4년, 만주에서 태조 누르하치가 죽고, 그 아들 태종이 서더니 이듬해 5년에 조선이 명나라와 통해 자기네를 칠 계획을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3만 명을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의주.곽산.정주.안주가 차례로 함락되고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강화로 피신하였더니, 뒤이어 평양이 떨어지고, 적병이 강화까지 오므로 부득이 굴복하여 형제의 의를 맺고, 임금의 종친을 볼모로 보내기로 약속하고 화의가 성립되었다. 업신여기던 북로(北虜)의 쓴 맛을 본 것이다.

 

임경업이 "조정에세 내게 4만 병력만 주면 그까짓 오랑캐들을 무찌르고 검을 압록강에 씻고 돌아오건만" 하여도 아무도 대답하는 눔이 없고, 간신히 평안감사 민성휘의 추천을 받아 선천에 검산, 곽산에 능한산, 철산에 운암산, 용천에 용골산하는 산성을 쌓으며,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의 직을 얻기는 하였으나, 국경을 지키기 위하여 2만 병력만 달라 한즉, "화의가 굳게 성립되고 틈이 생길 일 없는데 그다지도 겁 낼 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이눔들이 이때 임경업에게 넉넉한 군사를 주지 않은 것은 그의 세력이 커질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이눔들이 무서운 것은 외국이 아니오, 나라 안에 큰 인물이 생기는 일이다. 외국이 강해지� 식민지로 복종해 지내면 그만이므로 그들에게 전쟁에 지는 것도 걱정되지 않고 나라 주권이 없어지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눔들에게는 오직 올바르고 위대한 어떤 사람이 나서 자기네 세력을 빼앗을까봐 그것만 걱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만주에서는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이제는 국호를 대청이라 하고, 황제라 하며, 조선을 향해서는 형제의 관계를 바꾸어 군신으로 하고, 해마다 바치는 조공을 더하라는 명령이 왔다. 그대로 할 수 없다 했더니 인조 14년에 청 태종이 스스로 10만 군을 끌고 들어왔다. 이것이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의주 방면은 임경업이 몇 해 전부터 미리 알고 성을 쌓고 양식과 소금을 준비하고 대비하였는 즉, 청 태종은 그것을 알고 샛길로 적유령을 넘어 들어와 불과 열흘 만에 서울에 다다랐다. 임 장군은 그후에야 알았으나 그의 말대로 '군사 없는 장수'가 경업이면 어쩌리요, 서서 보는 수밖에 없었다. 임금도 강화도로 피하기로 하여 비빈왕자들은 먼저 보냈으나 자신은 미쳐 가지 못하고 청병이 가로막는 바람에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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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후 영조를 거쳐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으나 1907년 일본군은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폐허를 만들었다. 현재는 왕의 임시 숙소로 쓰이던 행궁,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던 수어장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시는 숭렬전, 남한산성을 쌓을 때 공을 세운 이회를 기리는 청량당, 남한산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연무관 등이 복원되어 있다. 또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다 청나라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윤집·홍익한·오달제 3학사, 그리고 역시 항전을 주장하던 김상헌, 정온을 함께 모신 현절사도 남아 있다.

 

■ 역사 흔적 짚으며 성곽 따라 걷는 산책길

남한산성 성벽은 능선과 계곡을 따라 자연스런 흐름으로 병풍을 치듯 부드럽게 굴곡이 져있다. 길은 성벽을 따라 널찍하게 나있고, 작은 오솔길들도 거미줄처럼 얽혀있어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코스를 잡을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성곽의 큰길을 따르는 산성로터리의 산성종로~(0.4km)~북문~(1.1km)~서문~(0.6km)~수어장대~(0.3km)~영춘정~(0.7km)~남문~( 0.7km)~산성종로 회귀 코스로 총 1시간 정도 걸린다. 하지만 이는 운동만 할 요량으로 계속 걷기만 했을 경우다. 문화유산이 많은 산성 길을 거닐면서 이곳저곳 꼼꼼히 살펴보려면 보통 2~3시간 정도 잡는 게 좋다. 길은 유치원생들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무난하다.

남문 수문장들의 임무교대 장면.

또 남한산성을 온전히 한 바퀴 도는 관리사무소~(0.6km)~동문~(1.1km)~동장대터~(1.6km)~북문~(1.1km)~서문~(0.6km)~수어장대~(0.3km)~영춘정~(0.7km)~남문~(1.7km)~동문 코스는 총 7.7km로 걷는 데만 2시간이 걸린다. 역시 문화유산을 둘러보려면 3~4시간 정도 잡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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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중에는 굴복하고 화친하자는 이, 화친해서는 안된다는 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하나가 항서를 초 잡으면 하나는 찢어 버리고, 그러면 또 하나는 쓰는 이도 없을 수 없고 찢는 이도 없을 수 없다 하며 찢은 것을 다시 모아놓으면, 이렇듯이 하여 군신이 눈물을 머금고 지키기 40일을 하다가 강화가 함락되어 임금의 가족이 다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는 수 없이 항복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은 삼전도에 쌓아놓은 항단밑에 엎디어 여태껏 북로라고 업신여기던 만주 되눔 앞에서 그들의 풍속대로 삼배구고두의 예를 하고, 화친을 반대하였던 충신들을 잡아 그들의 요구대로 개.돼지 처럼 포박되어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으니, 잡혀갔던 윤집.오달제.홍익한은 모두 만주 땅에서 푸른 피를 뿌리고 죽었으니 이것도 한국의 역사라 하던가?(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