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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18

 

'뜻으로 본 한국역사' 18


 

�번째 환난

 

수평선 위의 검은 구름

선조 25년. 임진년 4월 13일. 부귀와 영화속에 지난밤 먹은 술의 취기가 아직 가시기도 전에 악몽과 안락의 꿈에서 깨어나기도 전 조용한 아침의 나라 남쪽 관문인 부산진 앞바다 수평선 위에는 떠오르는 인륜의 뒤를 이어 문득 한점의 검은 구름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 열시. 어쩔 줄 모르는 부산진 사람들의 눈앞에는 그 검은 구름이던 것이 4백 척의 병선이 되어 바다를 뒤덮었고, 그 위에 깃발과 칼.창이 �볕을 가리는 것이 나타났다. 풍신수길의 정명군이 쳐들어 온 것이다. 큰 국난이 오는 것을 왜 그렇게도 모르고 있었을까? 나라의 관문을 지키는 책임을 진 부산첨사 '정발'은 이날 절영도에 사냥을 나갔다가 이 소식을 듣고야 급히 돌아왔으니, 몰라도 철저히 모른 것이었다. 부산진을 방어하던 정발 이하 전원이 전사하고 점령되자, 적군은 북으로 이동하여 동래성에 도착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현'도 기생들과 술판을 벌이다가 부랴부랴 성으로 달려왔고, 주변 나머지 목사,부사들이 모여 들어 고군분투하였으나 결국 점령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부산 동래성 전투' 재현


 

다른 지방의 관찰사.목사.부사들은 적이 쳐들어 오기도 전에 성을 버리고 달아나기에 바쁘니 적군은 콧노래 부르며 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경주.영천,대구가 무혈 점령되고, '이일'이 상주에 도착하여 근방 강변에서 오합지졸 수 백 명군대를 훈련 도중에 적의 공격을 받고 혼비백산하여 충주로 도망가고, 신립이 새재에 도착해 보니 상주가 이미 함락된지라 부하 장수들이 세제에서 방어하자는 건의에도 불구하고 새재 방어보다 충주에서 자신의 장기인 기마대로 하여금 벌판에서 적군과 결판을 내고자 하였다. 물론 훈련되지 못한 조선군을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에 임하게 하지는 속셈으로 배수진을 친 신립은 군령을 엄하게 세우고 물러나는 병사는 목을 치도록 하였다.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아무런 저항없이 넘은 적군이 충주에 도착하니 탄금대에 조선군이 진을 치고 있으매 서로 진영을 갖추자 신립은 8천의 기마대 및 보병으로 진흙탕속 벌판을 달려 적진을 공격하자 적은 이미 본토에서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숙달된바, 조선군 기마대를 차단하는 기마차단장애물을 사선으로 설치하여 조선군을 옆에서 조총으로 쏴대니 꽃잎처럼 떨어지고 쓰러지는 것이 조선군이요, 수차례 공격에 병사들이 지쳐 도망자가 속출하자 재차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 공격이 지지부진되자  이제는 기세를 잡은 일본군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사방을 죄어오는 적군이 남은 조선군을 강변으로 밀어부치자 신립은 점점 불리해지는 전세를 보고 탄금대 강물속으로 뛰어내려 장렬한 죽음을 하였다. 이것도 다 한국의 역사가 아니고는 못보는 진기한 것이요, 나라를 위한 큰 계획 없는 이 백성에게 국방이 어디 있으리요!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왔다갔다한 '신숙주'가 죽을 때에, 이다음에 결코 일본과 사이가 나빠서는 아니될 것이라 했고, '율곡'도 일찍이 선조를 보고 십 년이 못되어 큰 변이 있을 터이니 군사 십만만 길러서 준비하지고 한 일이 있다. 그렇게 아는 사람의 눈에는 환난의 날이 밝게 보였건만 아직 무사한 것만 좋아하고 당파 싸움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의 귀에는 그것이 다 빈말로 들렸을 것이다. 율곡이 양병론을 주장할 때, 후일 재상으로 고난을 겪는 유성룡도 태평시절에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라고 반대하였다. 그도 전쟁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후회하여 율곡은 참 성인이라, 만일 그의 말을 들었던들 나라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리라고 탄식하였다.

 

그처럼 미리 알아 준비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명나라를 칠 터이니 길을 빌려달라 하며 여러 번 사신이 왔다갔다하는 동안에라도 정신만 차렸으면 임기응변이라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정여립의 난'으로 수천명을 잡아 죽이기에 바빴고, 정신이 어지러워진 사람에게 "명년에는 온다" 고 전쟁을 미리 선언하는 적국 사신의 말도 한마디 농담으로밖에 아니 들렸다. 그러므로 태연히 베개를 높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당론으로

수길의 교섭이 하도 시끄러우므로 조정에서는 김성일.황윤길을 사신으로 보냈다. 돌아온 그들은 하는 보고가 서로 반대였다. 황은 서인이요, 김은 동인이라 동인이 세력을 잡고 있던 그때라 김의 말이 옳은 것으로 선 것은 물론이다. 이제 우리는 임진.정유 8년 동안 욕을 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모든 것이 이런 변태심리에서 나오자 않은 것이 없다.

 

유성룡이 김성일을 보고 "그대 말이 황과 다르니, 만일 왜가 정말 오면 어찌할 터인가?"라고 하자 김성일은 " 나 역시 어찌 왜가 종내 아니오리라 할 수 있소마는, 황의 말이 너무 지나친 듯하고 마치 왜가 사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아 인심이 흉흉할 터이므로 그리하였소"하였다. 참으로 기가찰 노릇의 답변이다.

 

사신을 갔다 온 뒤로 황윤길은 좋아하던 술.계집을 일체 끓고, 재물을 팔아 좋은 말을 사며 밤낮으로 말타고 활쏘기를 연습하였다 한다.

 

급해지는 풍운의 대세를 본 '조헌'이 우유부단한 외교를 보고 분을 참지 못하여 단연한 국책을 세워야 한다고 상소하여도 감사가 도무지 위로 올려보내주지 않았고, 고향 옥천에서 걸어서 올라와 임금께 직소한즉 미친사람으로 대접하였고, 다시 몇 해를 참다가 도끼를 가지고 올라와 대궐 앞에 엎디어 아니들으려거든 이 도끼로 신의 목을 찍으소서, 한즉 길주에 귀양으로 갚아주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

적군은 가는 곳마다 대적이 없었다. 두루마리를 말듯 팔도를 휩쓸었다. 밀물같이 밀려드는 그 군대 앞에는 울고, 부르짖고, 아우성치고 넘어지고, 짓밟히며, 찍히며 쫏기는 무리의 흰 거품이 떴을 뿐이요, 뒤에는 비린 냄새와 검은 재밖에 없는 거친 들이 남을 뿐이다.

 

부산에 올라온지 반 달이 못되어 서울이 떨어지고, 뒤이어 평양 이북의 서북 한 모퉁이를 남기고 조선 팔도가 그 말밥굽에 짓밟히지 않은데가 없었다. 임금은 그토록 믿었던 북방 전선의 영웅 신립이 충주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몰래 피난길을 준비토록 했다. 임금은 비내리는 밤 궁궐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고 백성들이 앞을 가로막고 통곡하였으나 제 살길이 바쁜 조정 중신들과 임금은 북으로 향했다. 성난 군중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하였다. 조정에 대한 처절한 복수였으며 선비들의 나라에 대한 한맺힌 저항이었다. 임진 나루터에서 강물이 불어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먹을 것이 없어 비맞고 웅크린 모습들은 어느나라 임금이며 어느나라 중신들이냐? 평양을 지나 의주에 다다른 임금은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고 어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8년 풍진을 어찌 지금 다 하리요마는, 요컨대 패요, 욕이요, 빼앗김이요, 밟힘이요, 죽음이다. 그러나 환난중에 한 사람의 사자를 보냈으니 완전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는 하지 않았다. 바로 바닷길을 지킨 충무공 이순신이다. 만일 이 한 길이 아니었던들 오늘 역사의 무거운 짐을 지는 우리나마 없었을 것이요, 하나님이 이 한 사람을 이 나라에 주지 않았더라면 그 한 줄기 길은 없었을 것이다. 8년 동안이나 사나운 기세를 부리던 그 군대가  아무런 소득 없이 명예스럽지 못한 퇴군을 한 것은 오로지 이 바닷길 하나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그 생명선을 지킨 이는 실로 우리 충무공이다.

 

사람들은 이순신을 사모하되, 그가 한국 사람을 위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였다 해서 그리한다. 어떤 이는 "조선에도 이런 영웅이 있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철갑선을 발명하였다 해서 그를 칭찬한다. 과연 거북선은 신기한 것이요, 그 빛나는 전공의 태반은 거북선에 있다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그 인격의 높음을 흠모한다. 과연 그는 원(原) 조선 사람의 씨를 전한 사람이다. 효성이 있고, 의기 있고, 사(私)를 죽이며 공을 살리고, 충의의 사람이요, 청절의 사람이었다. 전전에 있으매 7년 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며, 백성을 사랑하기를 손발같이 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나는 그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 믿으므로 그를 생각하며 감격의 눈믈을 못 금한다. 그는 하나님이 이 백성을 위하여, 이 망할 민족, 이 짓밟힌 씨알을 살리기 위하여 세운 사람이었다. 그는 당쟁의 더러운 진흙 위에 우연히 떨어진 한 송이 연꽃이 아니오, 깊고 깊은 그 진창밑에 살아 있는 뿌리에서 나온 연꽃이었다. 그에게서 이 민족의 면목만이 아니라, 그 사명이 구원되었고, 그로 인하여 이 씨알의 재지가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양심이 드러난 것이다. 더구나 그의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적탄을 스스로 맞으며 쓰러져간 그가 살아났다 한들 이 망할 조선이 그를 그대로 두었을리 만무할 것이며 역적의 누명을 쒸어 갖은 악형을 가하여 능지처참하였을 것이니,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마지막을 보고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층 더 가지게 된다.

 

‘불멸의 이순신’, ‘정(正)과 정(情)’ 남기고 떠났다


 

8년 전쟁의 공로가 있었다면 그가 제일인데 그는 왜 개선장군이 되지 못하고 마지막 싸움에서 비장한 순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나? 왜 공만 세우기만 하고 영예를 거두지는 못하였나? 다름이 아니요, 영원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이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이 위대한 혼을 한때 빌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개선장군이 되고 공신이 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지 못한 것이요, 숭고한 혼을 가진 사람이 영예로운 생을 살아가기에는 이 땅이 너무나 더러운 곳이었다. (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