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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23

 

'뜻으로 본 한국역사' 23

 

 

기독교의 들어옴

 

새 종교의 요구

한 시대가 새로워지려면 결국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외물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하는 정신만이다. 그러므로 결국 종교 문제다. 불교도 유교에서도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모두 특권층의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특권층과 함께 썩었으므로 도저히 씨알의 가슴을 흔들 힘이 없었다.씨알을 구하는 것은 새로운 양심이다. 두 종교가 특권층에 붙었으므로 씨알의 양심을 마비시켜 버렸다. 형식으로 굳어진 유교 교리나 고루한 선비의 유교 사상을 가지고는 아무리 뒤집고 고쳐보아도 씨알을 흔드는 새 것이 나올 수는 없었다.

 

자진(自進)을 기다림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올 즈음 한국은 세계와 접촉 없이 역사의 비탈길을 거꾸러지며 미끄러지며 굴러내리고 있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빌견할 즈음 우리는 성종조의 썩어 문드러진 사회에 취해 있었고, 도이치에 신교운동이 바야흐로 맹렬할 때에 우리는 사회의 미친 놀음에 빠져 있었고, 태평양에 '에스파냐.포르투갈.화란'모든 나라의 장사 배가 분주히 왔다갔다하고, '시베리아'와 '인도'에 영.노의 군도소리가 요란하던 때에도 우리는 '임진.정유.여진.이괄' 등의 난리로 눈뜰 겨를이 없었다. 남들이 새로운 과학 연구에 파묻혀 그 결과 놀랄 만한 발명.발견을 신이나서 하는 때에 우리는 당파싸움에 미쳐 나라도 세상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 물결은 반도로 밀려오고 있었다.

 

임진란 때에 천주교 선교사 '세스페데스'가 '소서행장'군에 따라와 전도를 해본 일이 있다. 그러나 종내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갔다.

 

인조 때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북경에서 천주교 선교사를 만나 화포.자명종.천문서적 들을 얻어가지고 돌아 온 일이 있다. 천주교에 대해 물론 들었을 것이나 오직 그들의 역법을 수입하여 썼을 뿐이요, 사상적으로 영향받은 것은 없었다.

 

효종 때에 '하멜' 이외 30여 명의 화란 사람들이 제주도에 표류하였으나 십여 년 동안 잡아두고 구경거리도 삼으며 학대를 했을 뿐이요, 종교나 사상에 대해 반성해 보는 것같은 자극을 얻지 못했다. 이와 같이 여러번의 밖으로 부터 자극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조선은 가슴을 열지 못하였다. 주변 일본이나 중국에는 세계대국들이 강제적인 포함외교를 통해 문을 열게 하였으나 조선은 빠졌다. 우연인가? 운명인가? 스스로 자진하여 구하기를 기다리는 듯 대세의 물결소리만 문앞을 스칠 뿐이요, 종내 침입하지는 않았다.

 

눌린자가 �는 손길

숙종.영.정조에 이르는 동안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우리나라에도 차차 퍼지게 되었다. 이것은 해마다 거래하는 동지사를 통하여 전래되었는데, 새 맛이 있는 학문으로 환영을 받았고 천주학 또는 서학이라 했다. 그것을 주로 남인들이 믿었는데 당시 남인들은 서인에게 눌리어 불우한 상태의 그들에게 자연 현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반발적인 사상을 가지고 실학으로 기울게 되었으므로 그들의 눈에 이 새 종교의 청신하고 고상한 도덕면이 매우 매력적으로 느꼈던 모양이다.

 

유교.불교가 지배층으로 부터 지배자 종교, 국교로 아래로 전파되었다면, 기독교는 그와 반대로 지배자가 아니고 불우한 지위에 있던 사람들을 통하여 들어왔다.

 

정조 7년 1783년 겨울.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갔던, 27세 청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천주교사의 전도를 받고 입신하여 세례를 받고 돌아오매, 우선 그의 인척되는 '이가환.정약종.정약용' 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남인 중의 유식자가 많이 공명하게 되었고, 점점 퍼지어 열성적인 신앙단체가 성립되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제일석(第一石)이다.

 

�번째 핍박

이 새 종교는 맹렬한 형세로 퍼져나갔고, 그 불길이 드디어 썩은 물웅덩이같이 침체되었던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입신하고 온 3년 후인 정조 10년에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중국으로부터 관련 책을 사들이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금지령에 �번째 희생으로 걸려들어 맨 처음 순교한 사람은 전라도 진산 사람 '윤지충'.'권상연'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양반으로 벼슬도 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믿게 되었는데, 제사를 폐하였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목이 잘리었다.

 

사람들이 북경에 청원하여 지도자를 보내주기를 간청하여 '주문모'라는 중국신부를 보냈다. '주문모'라는 사람은 소주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일찍이 천주교 교육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1794년 겨울 역부로 변복을 하고 압록강을 건너왔는데, 그때 나이 스물네살 청년이었다. 서울에 온 후, 숨어 있으면서 7년 동안 힘써 전도를 하였고 후에 잡히어 순교하였다. 시파 '체제공'이 재상으로 있는 동안에는 큰 핍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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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과 그 이듬해에 제공과 정조가 다 세상을 떠나가매 서인이 다시 세력을 얻고 남인을 타도하기 위하여 천주교에 대하여 큰 탄압을 내렸다. 때는 1801년 순조 원년 신유의 일이다. '이승훈'.'이가환'.'정약종'이 죽고 구밖에 죽은 자가 3백 명이나 되었다. 다산 '정약용'도 겨우 죽음을 면하고 유배의 길을 갔다. 이때 '주문모'는 압록강까지 갔으나 다시 영감을 얻어 서울로 돌아와 자수하고 노량진에서 형을 받아 죽었다.

 

주문모는 죽을 때 앞으로 30년 간 한국의 교도들은 목자를 잃어리라고 예언했는데, 실제 그후 30년 동안 종내 교사가 오지 못하였다. 1836년 비로소 프랑스 신부 '모방'이 의주로 몰래 들어오는데 성공하고, 그 뒤를 이어 '샤스탕','앙베르' 두 사람이 오매 다시 교세를 떨치기 시작하자 1839년 헌종 5년 기해에 갑자기 핍박이 다시 일어나 세 사람의 교사가 잡히어 온갖 고초를 겪은 후 사형을 당하고, 교도 중에서도 죽은자가 수십 명이었다.

 

한국인 신부가 된 '김대건'의 활동으로 1845년에 다시 선교사가 오게 되고, 그후 철종 때 정치가 풀어짐에 따라 교사가 이어 들어오게 되니 12명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고종 3년 병인에 대원군의 큰 학살에 몇만 신도와 아홉 사람의 선교사가 죽었고, 그로 인하여 양란사건이 생겨 쇄국령이 내려지더니, 대원군이 쫓겨나고 나라를 열개 됨에 미쳐서 핍박이 차차 없어지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
김대건 신부

 

신교는 천주교보다 늦게 1832년 독일 선교사 '구즈라프'가 전도 목적으로 충청도 바닷가에 왔던 일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1866년 양란 당시에 '최난헌'이라는 영국 사람 '토마스'가 미국 배를 타고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양에서 참살 당하였다. 그후 영국 사람 '존 로스라'는 사람이 만주에 와 있으면서 한국 전도를 목적으로 성경을 번역 인쇄하여 많이 들여보내었고, 일반적인 전도가 성하게 되기는 1882년 한미조약이 맺어진 이후다.

 

진리에 목이메인 사람들이 지도자를 끌여들이기 위해 만주로 중국으로 씽씽 부는 하늬바람이 살을 찌르는 압록강,두만강의 얼음위에서 떨기를 사양하지 않았고, 한 줄기 전도 길을 열기 위해 노한 물결 날뛰는 황해 바다에 조각배를 의지하여 나부껴 떠나가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상복 밑에 겨우 관리의 눈을 피하여, 시궁 구멍으로 나가 국경을 넘으며, 굴속에 숨으며, 산속에서 굶으며,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찬송가를 부르며 사형장으로 나갔던 용감한 선교사들의 일, 비방과 핍박을 받으며 견디며 믿다가 잡힌즉 조용히 묶음을 받고, 죽인즉 흔연히 칼을 받던 거룩한 순교자의 일, 죽일수록 점점 더 퍼져가는 신앙의 불길, 읽어서 감격하지 않을 것이 없이, 비단으로 꾸민 듯한 것이 처음으로 전해왔던 당시의 역사다.

 

그리하여 이 썩어가던 사회에 맑은 기분을 넣어 줄 수가 있었다. 오늘날 벌써 똑똑해지고 타협 잘하고 방편을 잘 쓰는 기독교도는 저들의 조상이 그렇게 소박하였고, 그렇게 목숨을 내 걸었고, 그렇게 직접적이요 저돌적이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는 조선의 여러 신앙이 비대해지면서 갖가지 인간 본연의 악습이 나타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신앙이 교세를 믿고 권세를 휘두르거나 권력과 야합하여 재물을 탐하고 지배층과 밀접해져 권력을 향유한다면 민중은 서서히 그들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민중의 고통과 서러움,억울함을 위해 앞장서고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할 때에만이 민중의 신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도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어두운 곳에서 사치와 향략에 물들고 권력에 편승하여 정치에 간섭하고 도덕.윤리성이 타락할 때는 예전의 신앙이었다가 부폐와 타락의 길로 빠지고만 불교.유교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민중들은 그들의 타락을 눈여겨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