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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24

 

'뜻으로 본 한국역사' 24

 


▲ 클라우디아 수도교

 

 

다시 거꾸러짐

 

기독교가 맡은 역사적 과제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올 때 한국을 건지기 위해 맡은 과제는 셋이었다. �째는 계급주의를 타파하는 것이요, 둘째는 사대사상을 쓸어버리는 것이요, 셋째는 숙명론의 미신을 없애는 일이었다. 이미 옛날부터 있었던 종교는 아주 타락하고 생명력을 잃어 사람의 마음을 이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조악의 근본이었다. 양반계급들은 자기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될수록 종교를 나쁘게 이용하였다. 기독교는 이 타락한 기성종교와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핍박을 받고 탄압을 받았으나 완전한 종교개혁과 정신혁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그 자신이 사실 유럽에서 타락되어 �겨온 낡은 종교였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기성종교 모두 원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생을 건지자는 것이지 압박하고 짜먹는 데 협력하지는 것은 아니다. 천주교가 그리스도의 근본정신을 갖고 왔다면 그것을 하려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 자신이 이미 유럽에서 자유정신의 반동으로 �겨온 지라 여기 와서 진리를 전하여도 묵은 찌끼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 그 자체 안에 계급주의가 있고, 사대사상이 있고, 미신적인 요소가 남아있고, 재물을 탐닉하는데, 어떻게 남을 고칠 수가 있었까? 그렇게 많은 비장한 순교자를 내고도 개인적인 믿음뿐이지 사회혁신을 못하고 만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천주교의 실패

양반들은 그들의 권세와 부귀를 누리기 위해서는 계급사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요, 7천(賤)이요,8천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는 그 뒷받침을 유교에서 구하였다. 그리하여 글을 배우는 선비에게는 어려서부터 특권의식을 넣어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복종하는 것이 하늘이 내린 법으로 가르쳐서 영구히 종으로 부리려 하였다. 천주교가 정말 한국 민족을 건지려면 반드시 이것과 맹렬한 싸움을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양반은 양반이요, 상눔은 여전히 상눔이었다.

 

그다음 특권계급이 민중압박으로 쓴 방법은 중국을 아주 대국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민중을 중국에 팔아먹은 대신, 그 지위를 가지고 그 대륙의 세력을 빌려서 자기네 지위를 튼튼히 하고, 그대신 반도 안에서는 마음놓고 짜먹었다. 우리 나라 농민이 특별히 발달하지 못한 것은 이 두 겹의 착취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특권계급은 종살이 제도를 지지하고, 혁명의식을 없애기 위하여 사대존주의 정신적 종살이는 절대 필요했던 것이다. 천주교가 정말 한국을 건지려 했다면 먼저 이것부터 했어야 했다. 천주교는 이러한 것을 시도하지 못했다. 그 이름 자체가 중국에서 해방되려는 생각이 없으며, 보수적이였기 때문이다.

 

종교는 핍박 때문에 발전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참종교가 자라는 것은 핍박 아래서다. 한국 불교가 정말 살았다면 이조의 압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핑계는 대지 못할 것이다. 그 스스로가 벌써 썩었기 때문이다. 불교와 재래종교에대하여 억누르고 천대한 결과 나타난 것은 미신이 성하는 것이었다. 미신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처럼 심한 곳은 없다. 그런데 그 원인이 민중이 핍박받고 짜임을 당하고 살기 힘드니 자연히 민중의 정신이 기운을 펴지 못하고 움츠려 음성으로 자라게 된 것이 미신이 성하게 된 것이다.

 

천주교가 정말 눈이 있었다면 이 미신을 없애기 위해 명렬히 싸워야 했을 것이다. 사실은 하기도 하였다. 조상숭배를 미신이라 하여 제사지내지 말라는 것만 강조했지 그 근본적인 숙명적.마술숭배적인 것을 힘있게 때리지 못하였다. 조상숭배와 제사에 대해서 그들은 너무 안이하게 판단하고 버리도록 행동했는 것이 결국 기존 세력에게 핍박당하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도덕의 뿌리를 건들이면서 민중으로 부터도 멀어지게 되었다.

 

또 민중 교육에 힘쓰야 했는데, 천주교는 그것을 하지 않고 옹기점에만 붙어 있었다. 사실 과학적으로 뒤떨어진 한국에서 그것을 잘 이용만 하였더라면 큰 개혁운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천주교가 실패한 원인은 바로 민중 교육을 소홀히 한데서 원인이 있다.

 

이리하여 일어나던 신생운동도 자라지 못하고 말았고, 믿음의 뿌리 없는 개혁운동이 자랄리가 없다. 영.정조 두 임금이 힘쓴 보람도 없이 당쟁은 그대로 남았고, 양반들은 굳어진 제도 밑에서 서로 지위를 얻으려고 싸움만 하고, 극도로 지치고 정신적으로 마비가 된 민중은 감히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고, 반항은 하였지만 조직적인 반항도 못하고 실패하여 모든 애가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서울에서는 당파 싸움과 벼슬팔고 사기요, 지방에서는 백성의 기름과 피를 �는 사나운 벼슬아치들의 학정이 점점 더해갈 뿐이었다.

 

» 2006년 5·18 기념전야제 모습. 김경호 기자

 

홍경래 혁명

이때 홍경래가 혁명을 일으킨 것은 크게 뜻있는 일이었다. 그에게 얼마나 큰 계획이 있었으며, 얼마나 높은 정신이 있었는지, 또 그 혁명의 동기가 얼마나 깨끗한 동기였는지, 참 혁명가였는지, 한 개 야심가에 불과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가 억눌린 민중의 대표자요, 몇백 년 줄어들었던 생명이 한번 꿈틀거려보는 반항이요, 학대받은 혼의 폭발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평안도 사람이다. 고구려의 옛터이며, 그 산이 있고 , 그 냇물이 있는 곳이다. 그는 용강 사람으로 평양 옆이요, 황해의 해변이다. 그는 단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요, 을지문덕의 사적을 보고 자랐을 것이다. 한사군 4백 년 싸우고 난 것이 그의 조상이요, 고구려가 망하던 한이 남아있는 것이 그의 성격일 것이다.

 

자칭 '평서대원수'라 하고 민중을 이끌고 일으켜 역사를 한번 고쳐보고자 일어난 그가 거기서 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사대주의.당파주의.운명철학. 이 양반 등쌀에 짓밟히고 찌그러지고 쫄아든 민족을 한번 고쳐 보고자 하는 인물이 난다면 그 땅을 내놓고 다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하늘이 한번 불러일으킨 것이라 아니할 수 있을까?

 

가산 다복동에서 계획을 교묘하게 꾸며 일을 일으키기는 하였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그 실패를 못내 슬프고 분해하는 평안도 민중의 입에 "다복동을 일으킨다"는 말 한마디 남겼을 뿐이지, 청천강 실개천 하나 못 건너고 정주성 북장대에서 그만 속절없이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홍경래는 왜 실패하였을 까? 물론 그의 잘못이 있을 것이다. 내부 통일을 기하지 못했다는 말이 있고, 비밀이 새어 예정보다 질러 일으나느라고 준비가 채 못되었다는 말도 있고, 그때의 안주 병사들도 호응의 마음은 있었으나 형편을 보느라고 대항한 것이니 한번 모험을 하고 청천강을 건너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그것을 못하였으므로 병사 편에서도 강경하게 나와서 일이 틀렸다는 말도 있다.

 

그는 민중을 완전히 동원하지 못했고, 정신적 준비가 부족하였다. 그는 어디까지나 지략과 술수의 사람이지 결코 높은 정신이나 의기의 사람이라는 말이 적다. 그것으로는 민중을 동원하지는 못한다. 그만 못한 인물도 성공하여 왕조를 열고, 왕권을 차지 하였건만 꼭 인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때는 대단한 위세로 형세를 펼쳤으나 그가 실패한 연유가 분명치 않으니 분명 우리 뜻으로 해석하기 힘든 그 무엇이 이 민족에게 길을 재촉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