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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25 (마지막회)

 

'뜻으로 본 한국역사' 25 (마지막회)

 

136년 만에 돌아온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의 장수기가 22일 서울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됐다.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 안덕수 강화군수, 김용환 인천해역방어사령관, 유홍준 문화재청장, 김기남 해병2사단장, 유천호 인천시의회의원, 소재구 국립고궁박물관장(왼쪽부터)이 장수기에 경례하고 있다. [사진=최승식 기자]

개신교의 활동

이 당시 우리들의 주의를 끄는 것은 기독교 개신교가 온 것과 동학이 일어남이다. 개신교는 천주교가 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대신 하려는 듯이 늦게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 그들은 같은 기독교이나 그 정신에서는 천주교와 다르다. 이것은 자유정신 때문에 그기서 반항하여 나온 것으로 전통보다는 자유를 존중한다. 의식보다는 교리의 깨달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저것이 귀족적인 데 반하여 이것은 평민적이다. 의회정치는 개신교 사상에서 자란 것이며 민족주의와 자본주의도 이것과 손을 잡고 자라온 것이다.

 

개신교의 정신인 '프로테스탄트'는 미국의 건국정신이며 그것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쇄국주의를 집어치우고 세계에 대해 나라를 열고,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 한글을 쓰고, 새 교육을 하고, 계급적인 풍속을 타파하고, 여러가지 미신, 이런 것들을 두둘겨 부수고 새 문명의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이 개신교 영향으로 된 것이다. 이것이 지난 천주교 백년 역사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또 천주교는 서울 이남 남부지방이 그 무대였던데 반하여 개신교는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성하였으며 사회 저변층을 대상으로 확산되었다. 이 새 종교는 맹렬한 기세로 뻗어 나갔으며 나라의 애국지사들도 이들 속에서 많이 나온 것도 주의할 만한 일이다.

 

우리 나라 새 교육의 시작인 '배화학당, 이화학당, 경신학당, 대성학교, 오산학교' 또 그밖에 서울과 시골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학교, 신문, 잡지, 병원 이런 것들이 모두 직.간접으로 이 개신교의 영향으로 된 것이었다. 이때 사회 각 방면에서 일어났던 원기와 맑은 공기와 혁신의 기분은 실로 몇백 년 이래 처음으로 보는 현상이었다. 촌락마다 신문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일어나고. 머리를 깍고 단출하고 물 들인 옷을 입고 북과 행진 나팔에 맞추어 체조를 하고 씩씩한 곡조의 노래를 하고, 챙이 달린 모자를 쓴 학도생이라면 그저 무조건 받아주고, 때때로 모여서 하는 연합운동회 때면 그야말로 강산이 떠들썩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서울.시골 할 것 없이 비분강개하는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가득 찬 연설회.토론회가 연달아 일어나고, 민중을 깨우자는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사람마다 하는 소리가 개명.개화요, 입마다 외치는 것이 삼천리 강토, 2천만 민족이었다. 이리하여 양반의 학정 밑에 짜먹히고, 짜먹혀 마른 나무같이 되었던 나라에 새봄이 돌아온 듯 하였다.

 

동학

기독교 개신교와 그것을 타고 온 민족주의 사상, 자본주의 개척.개발 사상의 영향을 받아 사회가 한번 큰 혁신을 해보려고 움직이는 때에, 또 한편에서는 동학이 일어났다. 이는 이름대로 서학 곧 천주학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 사상이나 교리에는 새롭고 독특하다 할 만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영향을 받아 깨어나는 일종의 자각운동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순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제폭구민'(除暴救民), 즉 '폭정을 없애어 백성을 살린다'는 표어와 그후 '전봉준'의 일이 보여주는 대로, 한 개의 혁명운동이었다. 그 주창자인 '최재우'는 잡혀 사형을 당하고 그 안에 많은 미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진보적이 아닌 점에서 민중을 제대로 깨우지 못하였다. 한때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세력이 전라.충청 지역까지 확산되어 서울 진공을 주창하는 등 세력이 확대되자, 일본군과 관군의 토벌작전으로 부족한 무기에다 강력한 화력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민중들 집단의 반항단체에 불과하여 조직력은 광대하였으나 지도층의 능력부족과 내부 분열로 맹렬히 타오르던 산불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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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 전봉준, 그는 근대적 정치체제를 꿈 꿨다
"국사를 한 세력가에 맡기는 건 큰 폐해… 몇사람의 명사가 함께 정치를 맡아야"
정치의식·혁명성 적극적으로 해석 눈길
녹두 전봉준 평전 / 김삼웅 지음 / 시대의 창 발행ㆍ568쪽ㆍ1만6,500원


1894년 12월 혁명동지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전북 순창에서 붙잡힌 뒤 압송되는 전봉준. 시대의 창 제공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힘이 강할수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영웅에 대한 관심은 높아진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역시 지배세력에 의해 오랫동안 금기시된 민중의 영웅이었다.

 

동학혁명에 참가한 농민군이 한 때 동비(동학의 비적)로 불렸고,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동학혁명이 동학난으로 통칭됐던 것처럼, 민중의 계급적 각성을 불러일으킬 가능성 때문에 전봉준의 이름에는 ‘불온’의 낙인이 찍혀있었다.

그 전봉준을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불러왔다. 저자는 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한 작업으로 이미 김구, 신채호, 한용운, 김창숙 등 민족주의자의 삶을 평가해 책으로 낸 적이 있다.

 

<녹두 전봉준 평전>은 그 동안 축적된 동학혁명과 전봉준에 관한 폭 넓은 연구를 섭렵해 한 평범한 농촌지식인이 근대 민중사의 절정인 동학농민혁명을 진두지휘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전봉준의 정치의식에 관한 적극적인 해석이 특히 눈길을 끈다. 노비제 폐지, 과부의 재가허용 등의 요구사항을 내건 폐정개혁 12개조에 나타난 동학혁명의 반봉건적 의식이나 ‘척왜(斥倭)’의 기치를 걸었던 혁명의 반제국주의적 대의는 잘 알려져 있지만 혁명의 최고 지도자가 어떤 정치체제를 열망했는지는 간과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왕권을 타도대상으로 삼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점을 들어 동학혁명의 한계를 거론하는 학자도 있지만 저자는 일본 신문의 기사와 공초(신문조서) 등을 꼼꼼히 살핀 뒤 전봉준이 분명히 근대적 정치체제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취조 과정에서 전봉준은 “국사를 들어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사에게 협합(協合)해서 합의법에 의해서 정치를 맡기게 할 생각”이라고 밝히는데 저자는 이것을 근대적 대의민주주의, 나아가 공화주의체제에 대한 전봉준의 비전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풀이한다.

 

 

연대기의 나열로 무미건조하기 일쑤인 여타 평전과 달리 전봉준의 일생을 소재로 한 빼어난 문학작품을 인용한 점도 돋보인다.

 

관군과 농민군의 대혈전이 벌어졌던 황토현 전투를 묘사한 대목에는 ‘한 시대의 /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시작하는 김남주의 <황토현의 노래>가 삽입돼 있다.

 

형형한 눈빛으로 최후를 맞은 전봉준의 죽음에는 ‘저 들판 끝 바람 앞에 선 사내하나 / 앙상한 뼛골로 우뚝 서 있는 / 서서 죽은 사내의 정수리에 들입다 꽂히는 바람아’로 시작하는 문병학의 시 <전봉준의 눈빛>이 수록돼 있다.

 

 

그래서 평전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웅서사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면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지 못한 것이나 전봉준이 동학의 접주였는지, 대원군과 내통했는지 등 학술적 쟁점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저자는 “전봉준은 개혁을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 결국 망국의 길을 간 지배층에 온몸으로 경고한 인물”

이라며 “전봉준 사상의 근대성, 혁명성을 부각하는데 주력했다”며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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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동학과 아울러 생각할 만한 정신운동의 하나는 '대종교' 즉 '단군교'다. 단군 내림으로 오는 우리 옛날 종교는 거의 완전히 잃어 버렸다. 고구려시대의 '선인'.''선비, 신라시대의 '화랑'이 그 모습을 전하는 것일 텐데, 그때 중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유교.도교.불교의 자극을 받아, 우리들의 '한.밝음.맑음'의 사상을 고갱이로, 체계있는 철학.도덕.신앙으로 발전시켜보려고 애섰음이 이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고려시대 '대위국'(大爲國)운동에서 한번 마지막 발버둥을 쳐 보다가 유교파에 못 견디어 실패한 다음, 이조대에 들어와서 아주 잊어버리고, 겨우 가난한 민중 집에 모시는 '제석님.성주님', 시골길 고개마루에 종이조각.신짝이 매달리는 '국수당', 산 속 절간의 외로운 뒷방에 더부살이 하는 '산신령님', 동구밖 한구석에 두세 그루 노목을 지키는 '서낭님'(城隍), 산당에 그 없어지다 남은 모습이 머물렀을 뿐이었다. 그래서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사상이 부활되면서 우리도 잊어버렸던 할아버지 단군을 ?게 되면서부터 일어난 것이 대종교다.

 

먼저 이것을 주창하고 나선 사람이 '나철'이라는 사람인데,그는 단군이래 고구려,발해로 전해 내려오던 '삼일신고'(三一神誥)라는 366자의 한문으로 된 경전을 ?아냈다 하면서 그것을 중심으로 교리.의식을 짜냈고, 그 자신은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하였다. 그것도 아마 에수의 십자가 영향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민족정신을 깨우는 한 구절이나 민중의 마음을 붙들지는 못하였다.

 

지친 민족

이때 역사의 요청은 한마디로 깨는 데 있었다. 민족으로 깨고, 세계에 깨고, 시대에 깨야 한다. 역사는 무서운 속도로 급선회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국 중국.왜눔이 문제가 아니라 영국.미국.독일.불란서.러시아.화란 등 얼굴이 다르고 말과 글이 다른 그리고 색깔도 다른 수많은 외국들이 들어 닥치고, 전에 보지도 못하던 총.육혈포.자명종.천리경.인쇄기 등이 들어오니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지 그 누구하나 그들의 문명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강변한 사람은 없었다.

 

일이 급해졌다. 이지까지 바다 가운데서 노략질이나 하던 왜구의 나라 일본이 '명치유신'을 하여 봉건시대의 막부를 집어치우고, 근대식의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천황이라 하고,  나라를 열어 세계 모든 열강과 교통을 하면서 우리더러 나라를 열라고 트집을 해온다. 일찌기 이런 세상은 보지를 못하였다. 우리나라 유신들이 보기에는 '사서삼경'에서도 못보던 것이요, '팔만대장경'에서도 못 보던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김씨고 이씨고 양반이라 자랑하고 있을 수도 없고, 양반이요 상눔이요를 가릴 수도 없다. 노론이요 소론이요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토록 조상 대대로 섬겨오던 대국 중국이 코쟁이 양눔들에게 꼼짝을 못하고청국군대가 사양군대에 대패를 하고, 그래서 항구를 조차하고, 땅을 빼았기고 ,배상을 물지않나? 이런 경우는 절대로 본적이 없는 조선은 천지가 개벽하고 모든 사상과 사고가 혼돈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이때 유신들이 하는 일이란 제것 챙기고 나라 망하기 전에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손대에 물려주는 일만 생각하고 백성들 쥐어 짤 궁리만 하고 있었으니 가련한 것은 우리 조선의 선량한 민중들 뿐이라! 이때에 살려거든 우리도 한 민족으로 깨어 말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 낡은 생각을 버리고 나날이 발달해 가는 새 지식.새 기술을 배워 여러 나라와 어깨를 겨루고 나갈 결심을 했어야 할 것이었지만

 

그것을 하자는 실학이었는데 실학파가 그것을 못하고 낡은 책장만 뒤집다 말았지 민심을 뒤집지 못하였다. 그래서 천주교였는데 천주교는 천당.지옥만 ?다가 말았다. 그후 홍경래가 나타나 한번 역사를 뒤집어 보려 하였지만 비만 들다가 조선의 더러운 찌꺼기를 쓸지도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고, 개신교도 바람을 불러 일으켰으나 민중의 힘으로는 중과부적이라 그만 지쳐 수구려들고 말았다.

 

역사에는 그래도 행운.시운이라는게 있는 법이라, 일본이 '페리 제독'의 강권에 못이겨 나라를 열게 된 것은 참 운이 좋다 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으나 종내 그저 지나가고 말았다. '하멜' 일행이 십수 년을 제주에 있었건만 서양 소개를 못하였고, '병인양요'에 불란서가 물러간 것은 저희 나라 일 때문이건만 이쪽에서는 우리 세력이 세서 됐거니 생각하여 점점 더 문을 닫게 되었고, 대동강에 '셔먼 호'가 들어온즉 때아닌 홍수에 속아 불타 실패하게 되고, 일이 모두 이런 식이어서 기회는 다시오지 못하였다. 우리에게도 '페리' 같은 강한 함대가 몰려와서 조선 양반눔들 간담을 쓸어내려 왜 강제로라도 열게 하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 막

그때 우리나라 꼴은 무엇보다 전주 이씨 집안에 잘 나타나 있다. 하필이면 대원군이요, 민비인가? 이것이 다 마지막 망국극을 하기 위해 준비된 마지막을 선택된 배우들이었다. 당파 싸움을 하다 하다, 외척이 전권 세도를 하다 하다, 끝마무름이 그 궁중의 싸움이었다.  흥선은 영악한 왕족이었다. 안동 김씨 세도천하가 계속되는 동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미친척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철종이 후사가 없으니 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다 계산된 임금 만들기를 예견하고 죽임을 피하면서 때를 기다린 사람이었다. 거지처럼,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미친척 숨죽이고 있다가 철종이 후사가 없이 갑자기 죽자 왕족의 혈육으로 임금이 된 자신의 아들 열두 살짜리 고종으로 등극하고, 그리고 섭정을 보게 된 그 아버지 흥선군은  영화를 누리자는 생각이었지, 그 운명이 그 아이의 손에 잡혀 있던 연줄처럼 끓어져 나갈 것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어린 임금의 왕후를 구하는데 고르고 골라 외척들이 말썽이 없을 만한 민씨집 딸을 대려올 때, 그것이 다음날 자기와 세력을 겨루다 집안 망치고 나라를 망칠 싸움의 적수인 민비가 될 줄은 천만 뜻밖이었을 것이다.

 


'마지막황실 대한제국과 덕수궁' 사진전

 

정국은 혼란을 거듭하는 가운데, 위로는 임금과 왕후를 포함하여 모든 당상관들은 매관매직에 정신이 없고, 평양감사 자리는 민씨네 집안이 독식하고, 지방의 모든 관리는 부패와 무능이, 매관매직으로 본전 뽑기에 백성 수탈이 판을 치고 백성들은 굶고 지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유랑민이 되어 도적떼가 되거나 낭인신세가 되어 이 장터, 저 장터를 돌아다니며 시장터 국밥이나 한 그릇 얻어먹는 거지신세가 된지 이미 오래고, 지방곳곳의 향교는 유신들이 진을 치고 백성들을 대려다가 곤장을 치고 관리를 협박하고 향교에 몰려 앉아 양반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수구파요 개화파요, 친일이요 친청이요, 친로요 친미요 하는 파들을 갈라 배치되어 서로 싸우고 물고 뜯고 하고 있는 모습은 그 모양이 늙은 창녀촌 갈보와 같다 아니 할 수 있으랴!

 


전주박물관, 흥선대원군 특별전
전주박물관, 흥선대원군 특별전
 

 

제가 스스로  제 운명을 개척하고 사람 노릇을 하자는 생각은 없고 오늘 이눔에게, 내일은 저눔에게 빌붙어 가랑이 벌리고 그때 그때 구차한 안락을 탐하고 돈푼께나 받고 군것질 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이눔에게도 사랑을 잃고 저눔에게도 미움을 사 몹쓸 병이 들어 자식 하나 없이 단칸방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늙은 창녀처럼 한 몸이 망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부 먼저 깬 사람들이 갑신정변.갑오경장 하는 운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싸움의 결과 대원군은 중국에 붙들려 가고, 민비는 일본눔들 손에 죽고, 임금은 자리에서 쫓겨나고 아들이 대신 들어섰다가 그나마도 오래 못가고 1910년 8월 28일에 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아주 망해 버렸다.

 

이 민족의 부끄럼이 이제는 끝에 간 것이다. 고구려 때에는 욕을 먹었는지 모르고, 신라때는 매 맞았는지 모르고, 고려 때에는 넘어졌는지 모르나, 이번에는 아주 거꾸로 쳐박혀 버렸다. 고구려에는 발해가 있고, 신라에는 마의태자.궁에가 있고, 고려에는 최도통.정포은이 있었으나 이조에는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들 뿐이었다. '이준'이 헤이그에서 붉은 피를 뿌리고, '민충정'이 서울에서 푸른 대를 올렸으나, 그것으로 가리기에는 그 허물이 너무나 컸다.

 

신라가 당나라에 수구렸다 하나 그래도 반도의 땅을 ?는데 힘을 쏟았고, 고려가 몽고에 굴복하였으나 나라는 지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라가 아주 없어지고 남의 한 개 식민지가 되어버렸으니, 5천년 역사에 먼저간 조상들이 바라볼 때 얾나나 한심한 모습이었을까! 수많은 영웅과 충절을 지키던 선조들이 지하에서 땅을치고 통곡을 하였을 것이다. 이순신의 7년 전공 23전 23승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항몽.항청을 통해 수많은 애국 충신들은 무어라 통곡하였을까? 5천년 역사에 나라 팔아먹는 일, 이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본이냐? 일본은 우리민족이 고대로 부터 바다를 건너가 구주지방에 정착한 민족의 물결이었다. 그들의 신화가 말해주고 석기시대의 유물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에게 한자와 유교.불교를 전해주었고 대륙의 모든 문물이 우리들이 전해 주었고 그래서 임나도 나온 말이요 왜구도 그래서 긴 세월을 두고 그렇게도 반도 해안을 들락거리며 약탈과 행패를 일삼아온 집나간 자식같은 말성꾸러기 일본이었다.

 

우리가 고구려 이래 전래된 용맹한 기상과 상무정신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힘과 제도를 정비한 힘찬 주권을 가지고 만주를 뒷마당 근거지로 북만주와 한반도를 호령하고 일본 열도를 앞 방파제로 삼아 대국경영을 펼칠 수가 있었다면 역사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친일.친로.친청 하며 몇십 년을 국제 매음을 하다가 우리가 길러내고 업신 여기던 섬나라 일본한테 나라를 몽땅 빼았겼으니, 이것은 마치 행랑체 머슴한테 그집 주인 아내 주부가 정조를 주고 집문서 내주면서 서방눔은 독살하고 그 머슴눔의 바지가랑이 밑에서 힘찬 밤일 즐기기를 좋아하는 창녀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그래서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많은 민족이 해방되었으나 우리는 빠졌다. 3.1운동의 물결이 일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이었다. 세계 2차 대전을 통해 민족의 의식은 실날같이 꺼져가는 ?불같은 신세로 빠져 들고 있었다. 수많은 청년과 처자들이 전선으로 끌러가서 천황눔의 총알받이가 되고, 정선대가 되어 이팔청춘 다 썩히어 썩은 몸이 되었고, 온 반도는 먹는것 입는 것 지하지원 할 것 없이 모두가 수탈의 극을 달했다. 몽고도,중국도, 만주족도 그토록 이 땅에서 고혈을 빨아가지는 않았다. 씨를 말리고 이름을 바꾸고 모든 것을 일본눔들 제도로 바꾸려고 하였다. 36년간의 길고긴 암흑의 시대.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 흡혈귀처럼 빨려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빨릴 피마져도 남은게 없는 앙상한 여윈 몰골로 휘청이는 민족, 그것이 피맛이냐 ? 물맛이냐? 고통이 온 반도에 뼈저리도록 사무치게 휘몰아 쳤고, 민족은 짐을 싸서 만주로 간도로 사할린으로 고향을 떠났다.

 


창덕궁 마지막 단풍

 

이것으로 우리 고난의 역사 대충 보기는 끝났다. 돌아보면, 아, 아, 삼국시대 이래 그 걸어온 길이 얼마나 잔혹했나? 눈물과 피로 걸었다기보다 기었고, 기었다기보다 굴러왔고 발길에 채어왔다. 그리고 5백 년 수난도 오히려 부족하여 돌아오던 회복의 기운도 사라지고 다시 더 심한 연옥의 바닥으로 거꾸러져 내려가는 뒷모양을 보며, 아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임을 의식하면서, 그러나 그보다도 날이 장차 오면 이것이 다 뜻이 있는 한 구절이 될 줄 믿으면서 이 글을 마친다.

                                                                                      (끝)

 

* 해방 이후는 사정에 의해 약술을 생략합니다. 감사합니다! *^^*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