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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뜻으로 본 한국역사' 5

 

'뜻으로 본 한국역사 5'

 

열국시대의 모밭

 

부족에서 나라로

단군조선은 나라를 세운 후 1천2백 년 넘게 이어 있었다. 그 동안 자세한 사실은 기록된 것이 없으므로 사람들의 살림이 어떠하였는지, 어떤 변천을 밟아갔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 시대에 한국 사람은 민족 발전의 터가 잡히었다. 만주로부터 남쪽으로 발전하여 내려오며 반도까지 골고루 퍼져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특별히 알려진 이유없이 단군조선은 망하게 되고 그 다음은 만주와 반도에서 여러 나라가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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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루트를 찾아서](2) 고조선 추정 청쯔산·싼줘뎬 유적
입력: 2007년 10월 12일 14:57:01
 
-거대한 성, 수천년 전 韓민족을 증거하다-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이 많은 싼줘뎬 석성 안에 있는 원형건축물 흔적. 조상신·하늘신에 제사 지낸 제단일 가능성이 높다.

월28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오후였다.

36도 불볕더위 속에 츠펑(적봉, 赤峰) 인근 청쯔산(성자산, 城子山) 유적을 찾아 나선 길. “일정에 없다”며 몽니를 부리는 버스 기사와 한바탕 큰소리가 오간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가도가도 끝 없는 길. 아는 길이라고 자신했던 안내인이 연방 고개를 갸웃거린다. 길을 묻느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를 무려 10여차례.



천신만고 끝에 쓰다오완쯔(사도만자, 四道灣子)역에 닿았다. ‘다 왔나’ 싶었더니 아니란다. 안내원이 뭔가 흥정을 하더니 다시 마을 6인승 승합차에 타란다.
치가 13개나 되는 싼줘뎬 석성의 위용.

# 위험천만 역주행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10여분 달리더니 어라 이상한 곳으로 들어간다. 츠펑~퉁랴오(통료, 通遼) 간 고속도로 공사구간이다. 아직 공사가 한창인 미개통 도로라 출입금지 팻말을 달아놓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휙 진입해버린다.

‘어어!’ 탐사단은 비명을 질렀다. 역주행길이다! 고속도로를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모골이 송연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 그냥 소름 돋는 스릴을 즐길 수밖에. 20여분 ‘역주행’의 경험을 맛본 뒤 역시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곤 등산이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수풀 가득한 청쯔산. 뛸 듯이 단숨에 올라갔다. 1분1초라도 빨리 올라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그 놈의 욕심 때문에.

과연 그랬다. 서요하 상류, 평원을 조망할 수 있는 정상, 그리고 수풀 사이로 펼쳐지는 끊임없는 돌, 돌의 흔적.

10여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아(亞)자 형태인 주봉 유적만 해도 총 면적이 15만㎡나 된다. 주위에는 성벽 같은 반원형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있다. 찬찬히 뜯어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200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석관묘, 그리고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 많은 적석총과 석관묘….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 여섯구역에서 확인된 원형석축건물지만 무려 232개나 된다니….

# 청쯔산 정상에 선 나라는?

싼줘뎬에서 수습한 덧띠무늬 토기편. <츠펑/김문석기자>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거대한 무덤터이자 제단터이며, 유적의 규모와 내용으로 보면 국가단계의 사회조직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내성에서는 최고위층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 10개가 확인되었습니다. 중국 학자들의 말처럼 고국(古國)의 형태가 분명합니다.”(이형구 교수)

탐사단의 눈을 끄는 것은 우리와의 친연성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샤자뎬(하가점, 夏家店) 하층문화의 대표적인 유적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그런데 샤자뎬 하층문화는 학자들 간 논란이 있지만 늦춰 잡아도 대략 BC 2000~BC 1200년 사이의 문화이다. 눈치 챘을 테지만 고조선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적석총과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고구려·백제와 비슷합니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 말입니다.”

이형구 교수는 “할석과 삼각석(견치석), 그리고 역삼각형의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인천 계양산성의 축성 방식을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기자를 비롯한 탐사단은 청쯔산 정상에 널려 있는 이른바 덧띠무늬 토기편을 수습했다. 이 역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양이다.

그렇다면 혹 고조선? 기자는 솟구치는 의문점을 가슴에 담아둔 채 하산하고 말았다. 학자들도 기자의 구미에 맞는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 어마어마한 석성의 실체는?

그런데 청쯔산 탐사는 그저 리허설에 불과했다. 다음날. 츠펑에서 북서쪽으로 40㎞쯤 떨어진 싼줘뎬(삼좌점, 三座店)으로 향했다. 역시 힘겨운 여정이었으나 탐사단은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설●다. 지난해 정식 발굴을 끝낸, 그래서 발굴보고서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지 않은 ‘싱싱한’ 싼줘뎬 유적을 찾아가는 참이니…. 유적은 2005년 인허(음하, 陰河) 다목적댐 공사 도중 발견되었고, 지난해 말까지 발굴을 끝냈다.

과연 댐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른쪽엔 야트막한 야산이 보였다. 청쯔산과 비슷한 입지다. 기자 일행은 메마른 산등성이를 서둘러 올라갔다.




“와!” 역시 1착으로 뛰어오른 기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저 보이는 대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댈 뿐. 마치 어제의 청쯔산 집터처럼 완연하게 드러난 집터와 적석총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고, 제사터와 그리고 도로 혹은 수로가 구획 사이에 조성돼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념. 정상부에 오르자 거대한 성벽의 행렬이 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학자들도 처음 보는 유적이라 흥분에 휩싸인 듯했다.

“치(雉·적을 제압하려고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가 도대체 몇 개야?”(이형구 교수)

이교수가 성의 행렬을 더듬으며 세어보니 확인할 수 있는 것만 13개나 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벽이다. 유적의 연대는 BC 2000~BC 1500년 사이(샤자뎬 하층문화)의 것이란다.

# 고구려·백제를 빼닮은 전통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이네요.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한 모습….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을 쌓았어요. 4000년 전에 이렇듯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견고하게 쌓았다니….”(이교수)

윤명철 교수는 “주거지에 샤자덴 하층문화 때의 토기편들이 널려 있다”면서 “치가 촘촘하게 있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교수가 실측해보니 치는 5m 간격으로 서 있었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성이 무너지지 않게 견치석을 적절하게 배치한 석성의 또 다른 특징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였고, 건물지 수십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되었다.

석성은 츠펑 지구를 포함한 발해만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축성술이다. 이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로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 쌓은 수원 화성의 공심돈(치의 역할)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우리 축성술의 전통이다.

놀라운 석성과 제단터, 주거지, 무덤…. 어쩌면 이렇게 어제 본 청쯔산성과 오늘 확인한 싼줘뎬 석성이 빼닮았고, 이 전통이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또 한번 생기는 궁금증…. 고조선의 채취가 물씬 풍기지 않나. 정녕 고조선의 성은 아닌가.

# 중원엔 하(夏), 동북엔 고조선?

중국학계의 분석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랴오시(요서, 遼西)의 샤자뎬 하층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청쯔산 같은) 유적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우한치 박물관 도록)

이형구 교수도 “중원의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동시대에 청쯔산과 싼줘뎬 같은, 수천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권력을 갖춘 왕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중국 학자들도 동의하듯 제사 공간, 주거지는 물론 거대한 적석총·석관묘까지, 여기에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권 말이다. 이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가 아니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냐. 이형구 교수나 윤명철 교수는 확언하지 못하지만 뉘앙스는 짙게 풍긴다. 여러 증거로 보아 “중원 하왕조 시기에 섰던 동이족의 왕권국가”가 분명하며, 이것은 ‘4000년 전의 고구려성’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고조선의 경우 ‘내가 고조선 유물·유적이요’하는 명문(銘文)을 달고 나오지 않는 이상 100%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고구려의 것’을 빼다 박았지만 2000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 고조선 연구의 밑거름

그러나 지난해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을 보았던 복기대 단국대 박물관 연구원은 “백암성 같은 고구려의 성과 너무도 똑같지 않으냐”면서 한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즉,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 134기를 분석한 주홍(朱泓) 지린대 교수는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은 정수리가 높고, 평평한 얼굴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는 ‘고동북유형’이 속한다”면서 “이 같은 유형은 랴오시 지역과 전체 동북지역에서 가장 빠른 문화주민”이라고 분석했다. 허베이성(하북생, 河北省), 산시성(산서생, 山西省), 산시성(섬서생, 陝西省), 네이멍구(내몽고, 內蒙古) 중남부 지구에서 보이는 ‘고화북유형’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다. 결국 샤자뎬 하층문화인들은 동북유형의 문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측정된 12곳의 샤자뎬 하층문화 유적 탄소연대측정값이 BC 2400~BC 1300년이라는 점이나, 고조선의 연대와 부합된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막 발굴을 끝낸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은 우리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이들 유적을 만든 이들의 문화전통은 동이의 것, 그 가운데서도 석성과 제단, 돌무덤의 전통을 쌓은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전통의 흔적은 청쯔산, 싼줘뎬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아니 그 이상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 할 탐사단의 여정은 그 머나먼 세월의 발자취를 찾는 것이다. 처음부터 “고조선이 아니냐”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기자의 조급함에 스스로 채찍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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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이 망한 원인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므로 단만 전하는 말에, 단군이 처음 태백산에 내려 모든 사람들의 떠임을 받아 나라를 이루고 도읍을 '평양'으로 정하였다가 후에 이르러 '당장경'으로 옮기고, 마지막에 '아사달'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한 개의 신화요, 그대로가 사실은 아니다. 태백산이 지금 백두산인 것은 틀림없으나 평양도 꼭 지금의 평양인지 알 수가 없고, 또 당장경의 위치도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고 태백-평양-아사달로 옮긴 이유도 분명치 않으며 아사달이 어딘지, 신선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나 단군조선이 끝난 것은 사실이다. 아마 점점 나라 살림의 규모가 크지고 평야와 벌로 나옴에 따라 새로운 사회형태가 나타나고 이러한 사화변동에 의해서 정치제도의 변동이 아닐까 생각된다.

 

종교와 산은 뗄 수가 없다. 단군을 비롯하여 '온조'가 나라를 세움에 '부아악'에 올라 나라터를 잡았다 하고, '김수로'왕도 '구지봉'에 내렸다고 한다. 나라를 세울 때는 명산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고 그 터를 정하고, 거기서 하늘에 제사하고, 백성은 그 산을 중심으로 하여 골짜기마다 옹기종기 부락을 짓고 살았던 모양이다.

 


 

천 년을 넘어 살아 내려오면 세상이 변할 수 밖에 없다. 인종이 늘고 농사와 연장을 만드는 방법이 점점 발달하고, 그러면 세상이 전과 같을 수는 없다. 석기에서 구리를 발견하여 청동기 시대를 지나면서 철을 발견하여 새로운 무기와 장비들이 발달하면서 힘의 변동이 생겼을 것이다. 임금도 전같이 종교의식으로만 백성들을 다스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각 지역간 부족간에 서로 연합하여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러한 열국들의 등장으로 단군조선은 힘을 잃고 스스로 무너지면서 망하게 되었을 것이다. 즉 새로운 문화의 발달로 새로운 힘이 생겨나고 기존의 체제는 스스로 붕괴되지 않았나 생각한다.이러한 변화는 중동이나 그리스.로마 시대의 힘의 변동에서도 ?아볼 수도 있다. 그대이래 무기의 발달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다라졌는데, 석기-청동기-철기의 발명에 따라 힘이 변하듯이 새로 발생한 나라들은 수백이 되었는데, 그 중 큰 것을 들면 이러하다.

 

부여

부여는 만주에서 일어나 장백산맥 이북 흑룡강에 이르는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단군의 직계에서 나왔던 모양으로 문화의 수준도 가장 높았다.

 

읍루

부여 동쪽으로 지금의 러시아 땅에 읍루가 있었다. 구멍을 파고 살았으며 활쏘기가 특히 유명하였다.

 

옥저

읍루에서 남으로 내려와 함경도에 이르면 옥저다. 산줄기를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는 좁고 긴 나라로 함흥,길주,단천 등지의 평야를 중심으로 농업과 어업을 주로 하였다.

 

졸본

장백산 골짜기 골짜기에는 조그만한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명한 나라가 졸본이다. 졸본은 본래 조그만 나라였는데 동명성왕 주몽이 동부여로부터 와서 그 나라를 얻어가지고 고구려를 세움으로부터 나라힘이 떨치게 되었다.

 

기자조선

압록강 하류에 내려오면 요동으로부터 황해도, 평안도 지방에 걸쳐 '기자조선'이란 나라가 있었다. 옛날부터 있는 기록에는 이 나라의 시작에 관하여 중국 은나라 왕족 '기자'가 그 나라가 망할 때에 동쪽으로 조선에 들어와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평양에 정하고 '8조'로써 백성을 가르쳤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관해서 학자들 간에 여러가지 학설이 분분하나 훗날 중국 숭배사상에서 비롯돤 것으로 기자가 와서 임금이 되었을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당시 중국 천지는 전쟁으로 어지러운 시대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왔을 것이고, 우리민족의 성격이 평화적이어서 그들을 오는대로 같이 살게 하였을 것이요, 더구나 우리보다 얼마쯤 앞선 문화를 가졌으니 환영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기자동래설'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 뒤에 나오는 '위만'의 이야기는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사실이다. 중국 이민과 중국 문화의 유입으로 경제변동이 일어나고 한족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으며 부여가 망한 것은 이들에게 눌려서 된 것일 것이다. 그 결과는 연나라 전쟁 피난민 위만이 기자조선을 빼았았다는 것이요, 그랬다가 8-90년 후에는 한무제가 쳐들어와 나라가 아주 망하고, 한의 직속 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고구려가 일어나게 된 것은 여기에서 받은 충격과 이 이족적인 것들과 겨루어 보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며 고구려 정신은 결국 민족정신에서 깨어나옴이었다.

 

예.맥

옥저의 남쪽에 이어 대관령을 사이에 두고  예.맥 두 나라가 있었다. 풍속은 고구려와 같았다.

 

삼한

한강 아래쪽으로 삼한이 있었다. 마한이 그 중 가장 강대하여 충청.전라지방을 차지하고 잇었으며 54개의 작은 나라가 합하여 된 것이다. 진한은 경상도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던 나라로 12개 속구으로 되어 있었다. 변한은 마한.진한 둘 사이에 끼여 있어 역시 속국이 합한 것이다. 또 변한의 남쪽 한 귀퉁이에 가락(가라.가야)이 일어났는데, 그것도 조그만한 나라로 되어 있었다. 이들 작은 나라란 옛날에 있던 부족체의 남은 끄트머리일 것인데, 마한.진한.변한에 아직 그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중앙집권화가 아직 채 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모판

단군조선 천 년이 민족문화가 싹트는 시기라면 이 열국시대 천년은 그 못자리 시기다. 즉 열국시대는 모판에서 강한 종자만이 자라 살아남는 자리며 시기이다. 서로 경쟁하며 실력을 키우고 진취적인 기상과 남다른 모험심과 용기를 가지고 주변국을 병합해 나가면서 고구려는 스스로 자리메김을 할 수 있는 강임함을 키웠으며 이 민족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시기였다.

 

한사군

이 시대 천년을 통하여 제일 큰 사건이라면 바로 '한사군' 이것이다. '전한'의 '무제'는 '위씨조선'을 멸하고 거기에 네 고을을 두어 직접 통치하였다. 그 중 셋은 우리 사람의  저항으로 얼마가지 못하여 쫓겨났으마 마지막 하나인 '낙랑군'만은 근 4백 년 동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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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ㆍ고조선은 요서에 있었다" ‥

심백강 박사, `황하에서 한라까지` 출간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중국 요서지방의 난하와 대릉하 유역에 있었으며 이곳이 고조선의 발상지였다."

중국 '동북공정'의 허구를 밝히는 학계의 연구 성과들이 잇따르는 가운데 한국 고대사 쟁점으로 남아있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역사학자인 심백강 박사(51·민족문화연구원장)가 이 같은 주장을 제기했다.

20일 발간한 저서 '황하에서 한라까지'(참좋은세상)를 통해서다.

그는 이 책에서 청나라 때 간행된 '사고전서' 등 중국의 각종 사료들을 토대로 사학계의 통설인 '대동강 낙랑설'을 반박하면서 고조선과 삼국의 영토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반도사관' 폐기를 주창한다.

심 박사가 랴오닝성(遼寧省)과 허베이성(河北省)의 접경지대인 난하와 대릉하 유역에 있었다고 보는 이유는 8가지.'한서 지리지''수서 지리지''사기 고제본기''노룡새략' 등 옛 사료의 관련 기록과 중국사회과학원이 펴낸 '중국역사지도집' 등이 근거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낙랑'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난하 부근에는 난현·난남·난평 등의 지명이 있고,요하 주변에는 요동·요서·요양 등의 관련 지명이 있는 것처럼 고대 사회의 지명은 산이나 강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지만 대동강 유역에서는 낙랑과 관련된 산이나 강이 없다는 것.반면 대릉하 유역에는 요락수(饒樂水)와 백랑수(白狼水)가 있었고 두 강의 이름에서 낙랑이라는 이름을 따왔다는 얘기다.

현재 시라무렌허(西拉木倫河)로 불리는 서요하 상류의 한나라 때 이름이 요락수였으며 그 아래쪽의 현재 대릉하가 백랑수였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낙랑군은 현재의 대릉하 유역을 중심으로 요하 서쪽과 난하 동쪽 일대에 있었다고 그는 추정한다.

'중국역사지도집' 제2책의 '서한과 동한시기 전도'를 보면 요하 부근에 요서군,난하 부근에 우북평군이 있고 대릉하 유역은 빈 곳으로 돼있는데 이곳이 낙랑군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심 박사는 따라서 대릉하 유역이 고조선의 발상지라며 문헌학·고고학·민족 이동경로·지명 등의 근거를 제시한다.

예컨대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王儉城)을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왕험(王險)에 도듭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이 바로 이곳이며 여러 사료를 비정하면 오늘날 대릉하 일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대릉하 유역에서 건국된 고조선이 점차 동쪽으로 밀려나면서 요동을 거쳐 평양까지 이동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또한 요서지방의 대릉하 일대에서 중원의 황하문명에 앞선 홍산문화를 꽃피운 주체가 한민족이었고,북경원인은 한족의 조상이 아니라 동이족의 조상이었으며 베이징은 동이족의 활동무대였으며,요하문명권의 주역이 한민족이었다는 주장은 기존의 역사 인식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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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이 이 땅에 죽치고 있던 4백여 년 동안 우리는 한없는 고통을 겪었다. 민족의 가슴에 칼을 꽂았고 나라의 심장부를 빼았기고 남북으로 갈라져 4백 년이 지나는 동안 그 아픔이 얼마나 컸으며 압박과 짜먹임에 못 견디어 죽은 사람은 얼마나 더 많았을까? 살아가는 사람이 당하는 업신여김과 슬픔과 쓰라림은 또 얼마나 컸을까?

 

일제 36년이나 지금의 38선 몇 십년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 역사를 잊지않고 기억한다면 어떻게 일제 36년을 또 허락하였으며 38선을 또 허락하였을까? 참 잊는 백성인가? 참 모든 것을 잊어바리고 마는 민족인가? 그렇다면 역사가 없을 것이다. 또 잊고 또 잊고 부끄럼과 죄를 되풀이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속에서도 죽지 않고 역사를 이루어오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이 아닐까?

 

4백 년 동안 한민족에게 던져준 하나님의 과제였다. 이것을 깨닭고 분연히 일어선 것이 고구려였다. 그들은 이것을 몰아내기에 전 역량을 기울였다. 사실 이것은 한민족에게 고귀한 교훈이 되었다. 비로소 조금씩 자각이 생기게 되었으며 정치사상도 따라 발달하였다. 남은 자에게 굳센 자립심을 심어주었다.

 


 

중국 문화가 들어오고 유교가 보급되었으며 높은 가르침이 없었던 야인같은 이 민족에게 고귀한 사상을 전파하였던 것이며 우리 정신사에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위대한 이상주의 사상은 그 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아 종교.도덕적인 정신  발달을 가져오고 민족의 가슴을 파고 들게 되었다. 이러한 유교가 근대에 오면서 고치기 어려운 큰 병을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인 이쪽이 잘못이지 반드시 유교 그 자체의 잘못이라고 할 것은 아니다. 받아들인 우리들이 우리들 스스로 그 함정에 빠져 자신의 부당한 행동을 정당화하고 부도덕한 결과를 바르게 접합시키려고 애를 쓰거나, 상대를 넘어뜨릴 빌미로 유교의 공리를 들먹이며 상국 중국의 언행을 흉내내고 무조건 따르려 함이 문제였던 것이지 스스로 이 땅에 맞게 바르게 적용하였더라면 비참한 망국병폐는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모두가 탐욕과 욕심에서 출발하였던  모리배 선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계속)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