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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제국의 흥망성쇠

 

<로마 제국의 흥망 성쇠>

 

 


▲ 그라쿠스의 개혁은 기득권측의 반발과 현실의 장벽에 부딪혔다. 사진은 로마의 콜로세움
  

 

* 로마의 기원-트로이 전쟁 후 왕족 이주

 

고대 로마는 기원전 1250년 '호머'의 <일리아스 Ilias>에서 노래한 '트로이 전쟁의 전설'에서 나오는 '트로이'는 다다넬스 해협의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흑해 교역의 관문 역활을 하던 도시 트로이를 당시 그리이스 반도에 번영을 구가하던 메케네 국가의 아카이아(Akhaia) 사람들이 공격한 것을 상상하면서 쓴 서사시이다.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그 전설은 이렇다.

 

실제 당시 청동기 문화의 꽃을 피우던 그리스와 지중해 일대는 상업과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며 도시국가들이 지중해,흑해,에게해 일대의 해안지역에 경쟁적으로 형성되고 있던 시기이다. 그리이스 반도에는 아카이아인들이 도시국가를 형성하면서 당시 가장 문명화 되었던 크레타 섬을 점령하여 그 문화를 접수한 메케네는 해양교역 도시 국가로 강력하게 성장하게 된다. 그래서 당시 경쟁적으로 번영을 누리던 전략적 중심지인 트로이와의 주도권 쟁탈전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케네는 트로이를 면분없이 공격하였던 것이다. 트로이 공성전은 11년이나 걸렸다. 미케네는 트로이 공성전 이후 승리는 하였으나, 장기간 정쟁으로 국력이 피패해져 50년 후인 기원전 1200년 경에 내부반란 때문인지 외적의 칩입때문이지 뚜렸한 이유없이 모든 궁전은 패허화되어 몰락하게 된다.

 
 

물론 그리이스 사람인 '호머'는 명분없는 트로이 침공을 미화시킬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로도 방영된 '트로이'의 이야기는 '호머'가 아름다운 서사시로 미화시켰던 것이다. 지금의 터키 지중해 해변에 위치한 도시 국가 '트로이' 왕자가 그리이스 미케네 왕후 '헤레나'를 납치한데서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게 되며 그리이스 미케네 군의 침공을 받고 11년 동안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였다. 전쟁에 지친 미케네 군이 철수하면서 남겨둔 '대형 목마'를 보고 성내로 끌고 들어간다. 승리의 환호성이 넘쳐나는 트로이 시민들은 축하의 향연이 벌어지고 공란의 도시로 변하고 모두 잠든 깊은 밤이되자 목마속에 숨어있던 미케네 군이 몰래 내려와서 성문을 열자, 대기하고 있던 주력부대가 밀려들어와 순식간에 트로이 성은 살륙과 방화로 불바다를 이루고 트로이 왕을 비롯한 대부분의 죽음을 맞이하고 점령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침공의 명분을 참으로 잘 미화시킨 서사시라 할까?

 

 

 * 로마 제국 성립

 

이때 트로이의 일부 왕족들이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배를 타고 도망하여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 후손들 중 초대왕 '로물루스'에 의하여 로마란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로물루스 초대왕은 알바롱가 정복-테레베 강 도시건설-기원전 753년 왕.원로원.시민회로 삼권분립 왕조 창업-사비니족 여인 강탈 사건-주변 부족국가 영입-로마 7개 언덕 도시 발전 등 로마는 피나는 노력과 대외 투쟁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정치체제가 변화하면서 매년 두명의 집정관을 선출하여 전장터로 나가게 된다.

 

기원전 3세기-2세기에 걸쳐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전쟁은 시칠리아 섬의 쟁패권을 놓고 신생국 로마와 당시 해양 강국이었던 북아프리카 지역인 지금의 튀니지아 지역의 '카르타고'와 지중해 쟁패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 바로 '포에니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통하여 로마 제국은 명실 공히 지중해의 최 강자로 자리메김하게 된다. 그래서 로마와 카르타고와 130년간 전개된 포에니 전쟁에 대하여 상세히 고찰해 보자고 한다.

 

 

* 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

 

기원전 264년. 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 쟁탈전에서 시작하였다. 시칠리 섬의 도시들은 대부분 그리이스 식민도시였는데, 섬 동쪽 이탈리아 반도 장화끝과 마주하는 메시나라는 도시를 이웃 도시인 시라쿠사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공격하였다. 이에 메시나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데, 로마 원로원은 메시나의 지원 요청을 놓고 갑론을박 후 결국 이탈리아 반도의 안전은 코앞의 메시나 해협 건너 메시나 도시를 지원하는 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지원군을 보내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시칠리 섬에서 육전이 계속되고 밀고 밀리는 싸움속에 로마군이 하나하나  카르타고 동맹도시를 함락하게 된다. 한편 재해권 장악의 필요성을 느낀 로마는 전 로마 연합의 동맹도시들 지원하에 함선을 빠른 속도로  건조하여 카르타고와 해전을 벌이게 된다. 해전의 경험이 전혀없는 로마 해군은 처음에는 고전하였으나 신장비 '까마귀'라 불리는 거치식 통로를 설치하여 접전시 적함으로 중보병이 건너가서 공격하는 방식을 전개했는데, 카르타고 해군이 전패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어서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여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자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로마군의 집정관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는다. 그는 결국 협상에 동원되어 약속을 어기자 대나무 통에 넣어져 코끼리들이 축구하듯 발로 차는 형벌로 죽는 등 치욕뿐만 아니라, 해상으로 철수하던 로마군 6-7만 명이 태풍을 만나 수장되는 참사를 당하기도 하지만 결국 지속적인 전쟁으로 로마는 시칠리아를 차지하게 된다. 시칠리 전투 마지막쯤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카르타고 귀족 중신이며 장군으로 시칠리아에서 로마군과 벌인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패배하게 되자 시칠리아를 포기하는 조약을 맺은 후 철수하게 된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종전후, 하밀카르는 카르타고 국내에서 귀국후 불만이 쌓인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정치 전면에 중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후 로마에 대한 설욕을 다짐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당시 카르타고 식민지인 에스파냐 총독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당시 9살이던 한니발을 신전으로 대려간 하밀카르는 신 앞에서 어린 한니발에게 로마 설욕을 맹세토록 한다. 

 

그후 하밀카르는 에스파냐 총독으로 부임하여 식민지 통치하는 가운데 영토 확장,광산 개발,상업 번창,농업과 공업,무역 확대 등 훌륭한 정책을 시행한 결과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되며 카르타고본국에 많은 재원을 충당하는 역활을 하였다. 한편 한니발은 지중해변의 호화로운 총독 궁전에서 아쉬움 없이 행복한 성장을 하게 된다. 로마 타도의 설욕을 되뇌이던 아버지가 지역내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갑자기 전사하자, 하밀카르의 사위가 총독을 이어받아 통치하다가 그도 갑작스런 노예의 반감으로 암살을 당하여 죽게된다. 아버지의 로마 설욕을 머리속에 항상 키워오던 한니발은 마케도니아 대왕 알렉산드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면서 그의 전략.전술을 배우고 탐구하며 그의 영웅적인 능력을 터득하게 된다. 후임 총독 자리를 이어받게된 한니발은 에스파냐 식민지의 총독으로 식민지 개척과 부흥에 박차를 가하면서 군비도 착실히 증강시켜 나간다.

 

* 한니발 전쟁(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218년-기원전202년)

 

식민지역 확장과 착실한 군비를 증강한 약관 28세의 한니발은 먼저 로마 식민 도시였던 이베리아 반도 동부 해안 도시 '사간토'를 공격하는데 로마는 사신을 보내 한니발에게 평화조약을 어겼다며 당장 철수할 것을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나 한니발이 반응이 없자,  카르타고 본국 의회를 방문하여 항의 하였지만 역시 협상이 결렬되었다. 그래서 로마는 카르타고와 전쟁을 선포한다. 이것이 제2차 포에니 전쟁인 '한니발 전쟁'이다.

 

선전이 포고되자 한니발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간토를 함락하고 여세를 몰아 코끼리 30여 마리를 포함한 약 9만여 명의 정예 군대로 로마를 침공하게 되는데, 그의 침공로는 카르타고 해군 전력이 부족하고 재해권을 잡고 있는 로마해군이 지배하는 지중해를 이용하는 길보다 육로를 택하여 로마군의 감시를 피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 북부로 기습전을 펼치기로 하였다. 대군을 이끌고 출발한 한니발은 이베리아 반도 깊숙한 중부의 밀림을 헤치면서 여러개의 강을 건너고 주변 지역 갈리아인들의 수많은 방해를 물리치면서 알프스로 향한다. 당시 로마는 한니발의 이동 방향을 탐지하지 못하여 애를 태우면서 백방으로 정보를 수집하려고 노력하던 중, 론 강 근방에서 한니발의 정찰 기병대와 우연히 조우하여 접전를 벌였으나 그 후 한니발의 종적을 놓치게 된다.

 

한니발의 이동 방향을 탐지하게된 로마군은 원로원에 보고하자 원로원에서는 계획대로 카르타고 본국은 침공할 것인지, 아니면 북방으로 병력을 이동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한니발의 침공 방향이 북쪽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얻고 당시 카르타고를 공격하기 위하여 시칠리아에 파견되어 침공 준비중이던 로마군을 급히 북부 지역으로 이동토록 한다. 한편 한니발은 알프스 산록에 도착하자 산악민족의 방해를 무마시키면서 혹한과 폭설, 비바람속에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기 시작한다. 이동간 헛발을 디뎌 계곡으로 떨어지는 많은 코끼리와 병사들의 비명소리, 자고나면 동사해서 움직이지 않는 수많은 군마, 폭설로 막히거나 얼어붙은 얼어붙은 좁은 계곡길을 뚫는 등 갖은 고생 끝에 알프스 정상에 도착한 한니발은 남쪽 구름 아래로 아득히 펼쳐진 아탈리아 반도를 바라보며 전 장병에게 희망과 결전의 우렁찬 메세지를 전달한다.

 

"장병 여러분! 수백년의 찬란한 전통과 번영을 구가하던 우리 카르타고가 신생 로마에게 수많은 영토와 기득권을 빼았기고 지금까지 고통받아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로마 정복에 반드시 로마군을 섬멸시켜야 한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나는 저 넓은 아탈리아 반도의 수많은 금은보화와 산더미 같은 재물은 모두 여러분들에게 분배해 줄 것이며 각자 원하는 수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고 원하는 어떤 곳에서라도 평생동안 편안한 여생을 보장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로마 정복 전쟁은 여러분들의 의지에 달렸다. 나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의 고통스런 행군과 어려움을 잘 극복해 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재부터 내리막 길이며 우리는 곧 이탈리이 반도 북부 평야에 도착할 것이다. 장병들이여! 나는 여러분들을 믿는다!"

 

알프스의 내리막 길은 오르막 길보다 더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주었다. 얼어붙은 내리막 길에서도 한니발은 수많은 장병들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이탈리아 북부 평원에 도착한 한니발의 병력은 반으로 줄었다. 보름동안 병사들의 휴식을 가지면서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살고 있는 주변의 갈리아인들을 설득하고 위협하여 하나하나 격파하면서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였다. 갈리아인들은 승마 기술과 전투에서 용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모두 용병으로 채용했음은 물론이다.

 

 

* 칸나 전투(칸내,칸나이) 

 

보름의 휴식을 가진 한니발 군은 동으로 전진을 시작하게 된다. 로마군은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정찰 활동을 계속하던 로마군 기병대는 마침 정찰나온 한니발 기병대와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한니발은 로마군과 처음 실시된 이 '트리노 전투'에서 정찰 기병대끼리 붙은 조우전이었는데, 약 3000기의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기병과 갈리아 기병이 주축이된 한니발 기병대는 약 2000기의 로마군의 기병대를 가볍게 격파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 지휘관인 집정관은 중상을 입고 젊은 아들인 기사의 도움으로 도망을 가서 겨우 생명을 유지한다. 젊은이가 바로 장차 북아프리카의 '자마전투'에서 한니발을 패퇴시킨 장수 '스키피오'였다. 

 

한니발은 로마군과의 1차전 '트리노 전투',2차전 '트레비아 전투', 3차전 '트라시메노 전투' 등 계속된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하면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남으로 진군을 하게 된다. 로마군은 전력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수차례 전투를 치르지만, 그때마다 한니발의 뛰어난 정보수집 능력과  전략.전술에 많은 병력과 지휘관,장수들을 잃으면서 연전연패하자 전 로마는 공포에 떨게 된다. 

 

기원전 216년, 전쟁 3년차, 로마는 각 연맹도시 및 속주로부터 병력을 징집하여 결전을 준비하는데, 바로 '칸나 전투'였다. 이는 트라시메노 호수옆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 2개 군단이 전멸한 것에 대한 설욕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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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전사자들로 부터 가치있는 물건을 빼았는데 이튼날 하루를 꼬박 소비했으며 승리를 알리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에 보낸 그의 동생 '마고네'는 죽은 로마 병사들의 손가락에서 빼낸 금반지를 본국 요인들의 눈앞에 산더미 처럼 쌓아 올렸다고 한다. 로마 시민에게 금반지는 결혼 반지가 아니라  개인도장으로 크고 묵직하였다고 한다. 이런 반지가 7만개나 쌓였다면 그 높이가 얼마나 될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로마는 완패 소식을 조용히 받아 들였다. 집정관 '바로'가 패잔병을 수습하여 수도 로마로 돌아오자 원로원 의원들을 비롯한 모든 시민이 성문까지 마중나와서 노고를 치하했다. 로마시민들은 조용히 패전을 감내하며 누구를 비난하거나 입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고대 로마의 유적지, 포로 로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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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반도 남동부에 위치한 칸나는 로마군 식량 저장고가 있는 곳으로 요충지였다. 한니발은 군량미도 확보할 겸 로마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이곳을 점령하고 주변 지형을 정찰하였다. 로마군의 이동을 실시간으로 정탐하면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마군이 드디어 도착하자 보무도 당당한 로마군은 진지를 편성하면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간혈적인 조우전은 전개되었으나 본격적인 접전은 없었다. 수일을 보내면서 조그만 승리에 로마군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집정관 바로가 지휘하는 날, 역사적인 칸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중앙이 불록나오게 진형을 특이하게 편성하여 접전이 시작되었다.중앙 보병이 접전이 개시되자 한니발 진영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로마군 보병대가 사기가 올라 집정관의 지시에 무질서하게 진격하였다. 그사이 한니발 기병대는 로마군 기병대와 양익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한니발 기병대가 로마군 기병대를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로마군 중보병이 투입되고 한니발 군 포위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병대를 물리친 한니발 기병대가 로마 중보병 후미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포위망을 이룬 한니발 군은 하나 둘 로마군을 쓰러뜨렸다. 예비대 투입도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공황상태에 이른 로마군은 전열이 무너지면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 결전에서 로마군은 동맹국 병사 등 8만 5천 여명의 병력 모두가 갈리아 용병 2만 4천 여명을 포함한 5만 여명의 한니발 군에게 전멸을 당하게 된다. 한니발은 기습,매복,전술대형 변환과 좌우 기병대의 다양한 전술적 운용에 의한 양익 포위 등 교묘한 전술을 로마군은 당할 수가 없었다. 로마군 전사자 중에는 원로원 80여명,집정관 1명,수많은 장수와 장교,백인대장,병사들이었다. 로마군 전사자 7만명의 반지가 카르타고 의회 로비에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1만 2천 여명의 포로는 그리스에 팔아넘겼다. 칸나 전투는 2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널리 군사학도들에게 전래되고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양익포위등 다양한 기병전술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알렉산드 대왕의 전술을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전술로 만들어 로마군에 승리했던 것이다. 로마군은 '낡은 전쟁'을 하였고 한니발른 '새로운 전쟁'을 하였던 것이었다.

 


국내 케이블 위성영화채널인 OCN에서 방영중인 로마제국 관련 역사시리즈물 ‘롬’(ROME)의 한 장면.

 

전 로마는 경악하였다. 절치부심한 로마는 다음해 집정관에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에 의해 이후부터 한니발과 직접적인 정면 결전을 피하고 지구전 전술로 전환하여 꼬리를 물고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공격하고 계속 감시하면서 한니발 군을 견제하는 전략을 전개하였다.

 

한니발은 정예 1만 5천 명외에는 현지에서 갈리아인이나 로마 속주 병력으로 편성하였으며 현지에서 약탈한 재물로 군량을 조달하고 용병의 급료를 지급해 주고 있었다. 한니발은 로마 함대의 견제로 조국 카르타고로 부터 지원은 받을 수가 없었다. 

 

 

* 한니발, 로마 성벽에 나타나다 

 

당시 나폴리 근방의 로마 연합의 동맹도시 '카푸아'는 한니발에게 항복하고 로마 연합을 배반하였다. 로마는 배반자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로마군은 카프아를 3중으로 포위하고 공격하고 있었는데, 카푸아의 지원 요청을 받은 한니발은 카푸아를 구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동하여 로마군 후방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로마군은 후방에도 방어 방책을 쌓고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소수의 기병대만 대동하고 로마시를 정찰하기로 하고 카프아를 지나 로마 가도를 따라 북상하였다. 이동중에 그 어떤 로마군도 비록 소수이지만 한니발에게 덤비지 못한고 성문을 꼭 닫고 숨죽이고 멀리서 바라만 보는 상황이었다. 로마 성문 앞 화살 사거리 밖에서 백마를 타고 나타난 한니발은 성벽을 둘러보면서 그 웅대함에 감탄하면서 장차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로마시는 비상이 걸렸다.전 로마 시민은 성벽위에서 저 멀리 백마를 타고 성벽을 둘러보는 한니발을 숨죽이고 바라보면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로마 성벽의 튼튼함을 둘러 본 한니발은 당장 로마시를 공격하자는 부하 장수들의 건의를 무시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는데, 나름대로 다른 전략이 있었다. 그는 로마 성벽을 공격하는 일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공성전은 한니발에게는 시간 낭비이며 로마시를 점령하더래도 로마 연합은 여전히 주변에 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연합을 하나하나 해체시켜 로마를 고립화 시키는 방책이었다. 그러면 로마는 그대로 고사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수많은 동맹도시와 속주에서 계속 공급되는 물자와 군대는 한니발이 로마군은 아무리 전멸시켜도 얼마 후면 다시 수만명의 군대를 편성해서 전장터에 내보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남부의카푸아,타렌토,시라쿠사 도시를 점령하여 자기편으로 끌여들였으나 로마 연합은 해체되지를 않았다. 로마 연합의 도시들은 차후 로마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배신 도시나 국가에 대해서는 철저한 섬멸전을 전개하여 모든 인명은 노예로, 모든 건물은 파괴하고 땅에는 소금을 뿌려 갈아 엎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로마 동맹의 결속은 강력하였다.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마음대로 휘저어 다니면서 약탈과 방화, 살륙을 일삼던 한니발은 로마 침공후 16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에서 잔류하면서 로마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 한니발의 친동생 하스두루발의 죽음 

 

에스파니아에 있던 한니발의 친동생 '하스두루발'이 한니발을 지원하기 위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약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한니발의 경로를 따라 알프스를 넘었다. 로마군은 하스두루발의 이동 소식에 또다른 적을 맞아 당황하였다. 알프스를 쉽게 넘은 하스두루발이 이탈리아 북부 평야에 도착하여 진군하면서 한니발에게 보내는 전령을 로마군이 생포하여 하스두루발의 의도를 간파하게 된다. 로마군은 북부 지역에서 하스두루발의 예상 이동로에 미리 대기하다가 하스두루발 군을 따라 잡고 교전을 강요하게 되자, 성미급한 하스두루발은 좁은 계곡 평야에 포진하여 로마군과 교전에 들어간다. 좁은 계곡 평야에서  로마군은 남부 전선에서 수백 리를 달려온 칸나전투의 패장 집정관인 '바로'의 지원군까지 협력하여 하스두루발의 지원부대를 전멸시키게 된다. 

 

모처럼 카르타고 군에 승리한 로마군의 집정관 바로는 남부 전선으로 당장 달려와서 하스두루발의 머리를 대치하고 있던 한니발 진영에 투척기를 사용하여 던진다.한니발 진영으로 날아온 동생 하스두루발의 머리를 본 한니발은 아무런 말도 눈물도 없었다고 한다. 한니발은 " 더위나 추위나 묵묵히 참았다. 병사들과 똑같은 식사도 시간에 맞춰서가 아니고 공복을 느낄때만 먹었다. 잠도 마찮가지였다. 그가 혼자 처리하는 문제가 끊이지 않으므로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그것을 처리하는 것이 항상 우선이었다. 그에게는 밤낮의 구분조차 없었다. 잠이나 휴식이 부드러운 침대와 평온람을 의미하지 않았다. 병사들에게는 나무가 그림자를 만들어 놓은 땅바닥에서 병사용 망투만 두르고 잠을 자는 한니발의 모습은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병사들은 그의 곁을 지날 때면 무기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했다" 리고 역사가 리비우스는 한니발을 이렇게 묘사했다.과묵하고 말이 없으며 친밀하지도 않았고 격려하지도 않았는데 병사들은 한니발을 무척이나 경애하였다고 한다. 오로지 로마 타도에만 전력해오던 한니발에게는 동생의 죽음은 무척 괴로운 순간이었으나 장병들에게 자신의 나약한 모습은 절대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니발은 용병들에게 그 어려운 적지에서도 급료를 지급하며 16년간 이탈리아 반도를 누볐다. 오로지 로마 멸망을 꿈꾸어 오던 한니발에게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바로 로마 집정관이 된 장군 '스키피오'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본국을 직접 침공한 것이었다.

 

이는 이베리아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젊은 장군 스키피오의 전략이었다.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떠나게 하는 방법은 직접 카르타고를 압박하는 방법외에는 없다고 역설하며 원로원을 설득하였기 때문이다. 스키피오는 한니발과 수차례 전투에서 그의 전법을 잘 알고 있었다. 스키피오 로마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자 카르타고는 한니발에게 급히 전령을 보내 조국의 위급성을 알리면서 즉시 철수하여 귀국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한니발은 이탈이라 반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정예 1만 5천 명만 배에 태우고 나머지 동맹국 병력들이 배에 매달리며 같이 태워주기를 간청하며 울부짖어도 화살을 쏘며 그들을 물리치고 이탈리아 반도를 출발했다. 한니발은 배를 타고 떠나면서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언덕위에 세워진 백색의 헤라신전을 바라보면서 카르타고로 귀향하게 된다. 한니발의 심정은 참으로 착찹하였을 것이다. 후일 헤라신전에 한니발의 공적을 기술하여 박아 놓은 동판을 발견한 것은 많은 세월이 지난 후였다.

 

 

* 자마 전투

 

카르타고 본국으로 철수한 한니발은 스키피오의 로마군과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데, 정예병 1만 5천 명에 추가 병력 3만 5천 명을 포함하여 약 5만 여명으로 전력을 편성했다. 물론 코끼리도 상당수 편성했다.  스키피오의 로마군은 약 4만 명 정도 되었다. 누미디아 반란군 왕자로부터 기병대를 지원받기로 한 스키피오는 누미디아 국경 근방의 자마평원으로 한니발 보다 먼저 신속히 이동하였다. 한니발도 친카르타고 누미디아 위성정부로부터 기병전력을 지원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자마평원에 먼저 도착한 스키피오는 진영을 편성하면서 이미 한니발의 전술을 꽤뚫고 있었으며 한니발이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전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양군 장수는 결전 하루전 양군이 포진한 지역 중앙의 조그만 언덕에 소수의 기병대만 데리고 서로 마주했다. 역사적으로 그 시대의 두 영웅이 같이 만나 회담을 한 것은 최초였다. 30대 초반의 스키피오는 40대 중반의 한니발에 비해 12살이나 어린 나이였다.

 

이 회담에 임하는 양국의 장수 입장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 젊은 로마 장수 스키피오! 그대는 나의 그동안 위대한 업적을 잘 알 것이다. 나는 로마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의 희생은 불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만약 그대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도 로마가 원하는 시칠리아를 포함한 그대들이 원하는 지역에 대해서 로마의 영유권을 인정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이 땅에서 고통을 방지하고 평화를 바라는 심정이다.이 싸움에서 지면 당신은 완전한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라고 이야기 하자 스키피오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이야기 한다.

 

"난 당신이 그동안 저질러 왔던 로마인에 대한 지금까지 무차별 학살은 물론 약탈과 방화를 일삼아 왔다는 사실과 그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한 살인 행위를 즐겨하는 악마적인 근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 당신은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으며 이제와서 평화 운운이라 함은 언어도단이다. 당신은 살인을 즐겨해 왔고 지금까지 저지른 일에 대하여 절대로 용서를 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난 당신에게 내일의 대규모 전투준비나 잘하라고 권하는 것밖에 말할 게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평화속에서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서투른 것 같으니까. 내일의 결전에서 그 응당한 댓가를 당신에게 지불하려 한다. 우리 로마인은 당신과 카르타고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양측 장수는 더 이상의 회담은 무의미 하다고 판단하고 서로의 진영으로 돌아온다. 한니발은 이번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카르타고의 운명도 같이해야 한다.그래서 이번 전투가 그에게는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는 패배해도 이탈리아 반도는 멀쩡할 것이며 또다시 군대를 편성해서 다른 장수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한니발은 이미 내일의 전투와 자신의 운명을 예견했던게 아닐까?

 

 

다음날 역사적인 '자마전투" 하루전, 

 

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도 지원병을 오지 않았고 급히 편성된 병사들은 훈련이 부족한 병사들이다. 믿는 것은 80여 마리의 코끼리 부대와 자신이 가장 아끼는 1만 5천 명의 알프스를 넘어온 생사고락을 같이한 정예 중보병 및 기병뿐이었다. 그래서 한니발의 작전은 이러했다.

 

먼저 코끼리 부대를 전진시켜 코끼리 부대가 없는 로마군의 전열을 흐트린 다음 경보병을 투입시켜 로마군 경보병을 격파하고 중보병을 유인한다. 로마군 중보병이 투입되어 지칠 때 쯤 자신의 중보병을 투입하여 격파하며 로마 중보병이 자신의 중보병과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자신의 정예 기병을 투입하여 적의 양익을 포위하여 하나하나 섬멸한다는 통상적인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미 한니발은 패배하고 있었다. 스키피오라는 젊은 로마군 장수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니발이 칸나전투에서 로마군의 집정관이 매� 교대로 전투를 지휘한다는 것을 알고 성질급한 '바로' 집정관이 지휘하는 날을 선택하여 공격하여 대전과를 올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니발은 나이 어린 스키피오를 과소 평가했다.이미 스키피오는 '트리노 전투'에서 한니발 기병의 전력을 경험했으며 그 후의 여러 전투에서 한니발의 전법을 유심히 관찰하였던 것이며, 그의 장점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안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와 기병의 양익포위 전술의 무력화에 주력하였는데, 코끼리 부대에 대해서는 로마군 전열을 군령 지시에 따라 지그재그로 변형시켜 그냥 통과시키는 방법을 훈련했으며 전투중 부상자 후송과 전열 재편성 및 교대 훈련을 철저히 했으며 기병 또한 기동력과 격파 훈련에 중점을 두고 실시했던 것이었다.

 

 

드디어 운명의 '자마 전투'가 실시되었다.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가 굉음을 울리며 달려왔다. 그러자 로마군 전열이 지그재그로 중간중간 공백이 생기면서 중첩되면서 코끼리 부대를 그냥 통과시켰다. 대열을 그냥 지나친 코끼리떼는 후방에 위치하던 경보병에 의하여 살륙되고 만다. 사전 철저한 준비를 한 스키피오의 임기응변 전술이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의도를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로마인이었으나 로마인 같지 않은 전술을 구사하는 스키피오에 한니발은 조금은 당황하였을 것이다. 어느 로마군 장수도 대부분 자신이 예상한 대로 전투에 임하였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전열이 흩어지면 양익 기병으로 포위하여 격멸하는 것이 통상이었다. 양군은 치열한 접근전이 전개되었으며 부상자와 전열이 흐트러 지고 있었다. 로마군은 부상자를 후방으로 후송시키면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전열을 재정비한 로마군은 한니발의 경보병 부대를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한니발의 중보병이 투입되었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면서 로마군의 중보병이 한니발 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한니발 군의 사상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로마군의 양익 기병이 공격을 실시하자, 한니발의 일부 기병이 점점 무너지면서 도망이 시작되었다. 양익 기병이 무너지려 하자 한니발은 자신의 정예군 1만 5찬 명을 투입했다. 충성심에 불타는 정예군이 투입되었으나 이미 전세는 로마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사기가 오른 로마군은 추격에서 돌아온 기병과 같이 한니발 군을 하나하나 쓰러뜨리고 있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정예 고참병들이 로마군에 차례차례 쓰러지는 모습을 참담하게 바라보다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 하다고 판단하고 소수의 기병만 대리고 카르타고 쪽으로 도망하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마지막 '자마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한 한니발은 더 이상 로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승리 소식을 전해들은 로마 시민들은 환호성 소리가 넘치는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 한니발의 망명과 사망

 

'자마 전투'후 카르타고의 전권대사 대표로 임명된 한니발은 스키피오와 강화회담을 하게 되고 로마의 요구대로 조약이 성립된다. 스키피오는 로마시민의 대대적인 축하속에 개선하게 되고 그후 로마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몇년 후 일인 영웅을 바라지 않는 로마 원로원의 스키피오 반대파 원로원들은 스키피오 동생의 부정행위를 문제 삼아 재판에 회부하게 되자 스키피오는 분노한 나머지 스스로 권좌를 물러나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내다가 몇년 후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강화 후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재상으로 국가 개혁을 실시하나 반대파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은 시리아로 망명을 하게 된다.수 년 후 두 영웅은 시리아 지역 전투에서 다시 만나게 되나 스키피오는 한니발에 대한 어떤 연민의 정을 가진듯 회담 후 그를 자유스럽게 놓아준다. 한니발은 크레타 섬으로 도망 후 다시 흑해근방 지역의 '비타비아' 국으로 망명하나 공명심에 불탄 로마군 장교의 추격을 받자, 스스로 독을 마시고 자결한다.스키피오도 같은 해에 지병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아마 두 영웅 모두 자신들의 조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울분을 삭이며 하늘 나라로 친구삼아 같이 간 듯하다.

 

 

* 카이사르,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스키피오 사후 로마는 지중해의 초강국으로 번영을 구가하다가 권력쟁탈의 혼란의 시대가 계속된다. 마리우스,슐라 등 호걸들의 시대를 겪으면서 쿠테타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수 차례 겪다가 당시 군부 실세였던 품페이우스가 등장하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실권을 장악하면서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는 등 재해권을 장악하였고 절대권력을 구가하는 등 폼페이우스 시대가 열리게 된다. 당시 갈리아 지역을 평정하고 총독으로 지내던 카이사르는 로마 정치권으로부터 코너에 몰리자, 카이사르는 고민끝에 부하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로마법에 군대를 해체해야 하던 경계선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였다. 그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결전에서 승리하여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권력을 실각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까지 도망가서 은거하나 카이사르의 추격에 결국 이집트 파견 로마군사에게 살해되고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게 된다. 정권 쟁탈전에서 카이사르의 힘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은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애인이 되어 환락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실세 권력의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온 후 번영을 구가하며 절대 권력을 추구하다가 이에 불만을 가진 원로원 의원 13명에 의하여 칼을 수 없이 맞고 쓰러진다. 암살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자 카이사르의 심복이었던 군부 실세 안토니우스는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일관하다가 후계자가 옥타비아누스임을 알고 실망하게 되나 아시아 통치 임무를 띠고  서아시아로 간다. 클레오파트라는 서아시아로 안토니우스를 �아가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애인이었던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여 이집트에 상주하면서 그녀의 치마폭에 빠져 로마 정부에 대해 분리를 주장하는 등 실정을 계속하면서 로마 통제를 벗어나려 하자 카이사르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이집트까지 추격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제거하고 로마 제국의 진정한 지배자로 단독으로 정권을 잡게된다. 그후 공화정이 끝나고 초대 황제로 등극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재정시대가 전개된다.

 

* 황제 시대

 

옥타비아누스 시대(재위 기원전 27-서기14년) 이후 로마는 황제의 유언으로 북으로는 브리톤(영국)-북해-라인강,도나우 강, 동으로는 노리콤(헝거리,불가리아)-일리쿠룸(유고)-다뉴뷰강-트라키야-콘스탄티노플-아르메니아-아시리아-시리아-유프라테스 강, 남으로는 팔레스타인-이집트,이디오피아-북아프리카, 서로는 대서양-이베리아(스페인,포르투칼)-갈리아(프랑스) 일대를 잇는 대로마 제국의 국경선을 더 이상 확대하지 말고 방어에만 주력하고 제국의 내실을 기하도록 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의 후계자들은 넘쳐나는 부귀와 영화속에 쾌락을 탐닉하고 폭정을 일삼으며 공포심과 악덕으로 지배하는 나날을 보내면서 정복사업은 더 이상 전개하지 않고 로마 궁전내에서 환락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로마군은 서서히 시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서기 14년에 사후 55세에 즉위한 티베리우스 황제(재위 서기 14년-37년)는 행정관과 전사로서의 명성이 높았다.시의심이 강하고 원로원과도 친숙하지 못했던 황제는 친아들인 드로수스가 변사하자 그 충격인지 로마시를 떠나 카프리섬으로 들어가서 재위기간 후반부 약 10년을 보내게 된다. 자유 노예로 출세한 인물들에 의한 반란 음모가 적발되자 무차별 처형을 내리고, 섬에서 모든 황제의 지시를 내리곤 하였다. 평생 불운한 결혼 생활이었던 황제는 젊은 선남선녀를 차출하여 그들의 성행위를 즐거보면서 세월을 보내다 서기 37년에 사망하였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칼라 쿨라 황제(재위 서기 37년-41년)는 먼 친척에 해당하는 가이우스 게르마니쿠스였다. 어릴 때부터 전장터를 따라다닌 어린 가이우스는 군대용 작은 군화를 싣고 있었는데, 애칭으로 병사들이 '칼라쿨라(유아용 군화)'라 불렸다. 이러한 병사들의 애칭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 제국의 � 번째 폭군이 되었다. 즉위 당시 칼라 쿨라 황제는 로마 시민들의 기대가 컸으나 그 기대를 져 버리고 중병을 만난 후 정신 이상이 생겼는지 병세 회복과 동시에 그는 잔학성을 나타내며 갖가지 포악한 행위를 저지르다가 궁중안에서 살해되었다.

 

칼라 쿨라 황제가 살해된 후 황제로 즉위한 인물은 그의 숙부에 해당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서기 41년-54년)였다. 근위대의 압력으로 즉위한 황제는 원로원에서 제정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화려한 인상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행정실무에 밝은 강점으로 극복하였다. 유능한 해방 노예를 중용하고 속주 경영에도 크게 배려하였던 바, 재정은 확대되고 차분한 성격의 황제는 로마 제국 시민들을 그런대로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생애 중 여러번 결혼하였으나 조카 딸인 아그리파를 아내로 맞아들여 후계자들의 권력쟁탈 가운데 그의 아내 아그리파에 의해 독살되었다. 후임자로 그녀의 아들이 등극하였는데, 바로 악명 높은 네로 황제였다.

 

네로 황제(재위 서기 54년-68년)가 재위에 올랐을 때 17살이었다. 당시 로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하였다. 젊은 황제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컷다는 것이다. 처음 5년 정도는 그도 선정을 베풀었는데, 여기에는 세네카 등이 참여한 고문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후 황제는 변득스런 폭군으로 변하기 시작햇다. 네로는 애첩의 사주를 받아 모친을 살해하고, 그의 정식 부인도 추방하여 처형하였다. 수많은 측근들이 그의 마수에 걸려 처형되었다. 서기 64년에 일어난 로마시 대화재 때에는 그 당시 신흥종교였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그들을 학대했다. 결국 원로원과 근위대의 반란으로 도망갔으나 그곳에서 자해하여 사망하였다.

 

네로가 죽자 혼란이 일어났다. 서기 69년 한해에 갈바.오토.비탤리우스 등 세 사람이 연이어 등극하고 실각한다. 갈바는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이었으며 근위대의 추대로 황제에 오른 인물이었다. 논공행상에서 병사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1년 가까이 재위하다가 근위대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뒤이어 즉위한 오토도 그리고 비탤리우스도 다같이 반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권좌에서 실각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재위 서기 69년-79년)는 북아프리카로 도망간 비탤리우스를 격파하고 원로원과 군대의 추대로 황제에 올랐다. 그가 즉위 했을 때 이미 나이가 60세였다. 그로부터 사망시까지 질서회복을 위해서 비교적 잘 대처해 나갔다. 황제의 권위도 회복하고 국가 재정도 재건하여 어느정도 성공적인 치세를 누렸다. 귀족 가문의 혈통도 아니고 인색하였고 인상이 황제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의 치적은 성공적이었다.

 

티투스 황제(재위 서기 79년-81년)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장남으로 황제에 즉위했다.부자 승계의 � 케이스였다. 그는 유능하고 사랑스런 성격의 소유자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 황제로 즉위 후 2년 만에 원인모를 병으로 쓰러졌다. 이 기간동안 폼페이의 비극이 발생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서기 81년-96년)는 티투스 황제의 친동생으로 15년간 황제에 재위하면서 재정관리와 속주통치에 나름대로 훌륭한 치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형인 티투스와는 달이 후반에는 폭군으로 변하여 공포정치로 기우면서 여러가지 포악한 행동을 자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아내인 드미티아누스 황후가 군대와 그녀의 측근들과 공모하여 황제를 살해했다. 이후 로마는 5현제 시대로 접어들면서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