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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 마크코 폴로.

아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이자 여행가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1254년 보석상인인 니콜로 폴로(Niccolo Polo)의 아들로 태어났다.

 

1271년 아버지와 숙부인 마페오 폴로를 따라 동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소아시아의 시바스에서 모슬을 거쳐 이라크로 들어가, 해로를 이용하여 원나라로 들어갈 예정으로 바그다드레서 비스라로 갔지만, 해로 이용을 포기하고 육로를 택해 키르만 타브리스-발흐-파미르 산길을 거쳐 타림 분지에 이르른다. 카슈가르-야르칸트-호탄-체르첸 등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변두리의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지나 하서 지방에 도달하여 간저우에서 1년 동안 머무른 다음, 쿠빌라이의 여름 궁전이 있는 상투에 도착하여 쿠빌라이를 알현한다.

 

마르코 폴로는 그대로 원나라에 머무르며 원나라 황제로 부터 우대를 받아 관직에도 올랐다. 특히 폴로는 그 총명함으로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는데, 황제는 폴로가 원나라를 떠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계속 머물면서 자신을 보좌하도록 강요했다. 황제의 총애와 관직의 임무를 부여받아 폴로는 중국 각지를 여행하며 17년간을 원나라에서 살았다. 그들 일행은 그 당시 이란 지방을 통치하던  몽고(원나라) 왕족인 타타르의 아르곤 왕에게 왕족의 딸로 시집가는 공주 코카친의 여행 안내자로 선발되어 17년만에 겨우 원나라를 떠날 수가 있었다.

 

이들 일행은 푸첸성(복건성)의 취안저우를 출발하여 해로로 자바-말레이-실론(현 스리랑카)-말라바르 등지를 거쳐 이란의 호르무즈에 도착하였지만, 이미 아른곤 왕은 죽었기 때문에 공주를 그의 아우인 가이하투 왕에게 맡기고, 1295년에야 겨우 베네치아로 귀환한다.

 

그후 그는 베네치아와 제노바와의 전쟁에서 해군 고문관으로 참전하다 포로가 되어 제노바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옥중에서 동방여행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기억과 메모로 구술하고, 이것을 이야기 작가인 동료 포로 루스타첼로가 기록한 것이 <동방견문록>이다.

 

좀 과장된 내용이 있긴 하나 당시의 서아시아.중앙 아시아.중국.남해 등지에 고나한 기사가 풍부하고 정황하며, 특히 중앙 아시아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그 내용이 당시에는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으나, 그후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여행을 함으로써 이 책의 내용이 매우 정확한 내용으로 소문나자 많은 유럽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서 동방의 황금과 보물,향료에 대한 큰 꿈을 갖게 되었고,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육로 여행길이 막히자 바닷길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는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계기가 되었으며, 포르투칼,에스파냐(스페인),네들란드,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의 각국이 앞다투어 동방진출로를 모색하면서 지리상의 발견에 큰 역활을 하게 되었다. 또한 문예부흥기의 지식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루스티첼로의 기록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현존하는 것은 원본에 의거한 사본,번역본,필사본 등 다양한 고사본과 고판본 등 이본 140여 종이 전해져 유럽 각지 도서관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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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내용 요약

 

1. 서장 

마르코 폴로의 책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위로는 황제.국왕.공작.후박.백작 그밖에 훈작을 받은 사람 및 시민 여러분을 비롯하여, 모름지기 인류의 여러 종족이나 세계 각 지역의 사정을 알고 싶으신 분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어보시라. 이 책에는 고아범위한 동방 여러 지역, 특히 대아르메니아.페르시아.타타르.인도, 그 밖에 수많은 제국의 최대의 경이와 아주 진기한 일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현명하고 존경할 만한 베네치아 시민으로 '밀리오네'라고 불리던 마르코 폴로가 스스로 목격한 바를 그가 말하는대로 기술한 것이다....(중략)... 이런 까닭으로 이 책은 스스로 읽으시는 분들, 또는 남에게 읽어달라고 하여 듣는 분들은 이 책의 내용이 전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한다...(중략)..마르코가 이렇게도 다양한 지식을 몸에지니기 위해서는 실로 전후 26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들 나라에서 보내야 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후일 그가 제너바 감옥에서 포로가  된 채 얽메여 있을 때, 같은 포로 신세였던 피사의 사람 루스티키엘로에게 구술하여 받아쓰도록 함으로써 이들 모든 사항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그때가 1298년이었다' 라고 시작하고 있다.

 

2. 니콜로와 마페오,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세계 탐험의 길에 오르다.

마르코의 부친 니콜로 폴로와 니콜로의 아우 마페오 형제가 상품을 싣고 베네치아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아온 것이 1260년 전후로 추측되는데, 그들은 흑해로 진출하여 큰 이익을 생각하고 다량의 보석을 사서 싣고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크리미아 반도 남단의 솔다이아로 향했다.

 

3. 니콜로 마페오, 솔다이아를 떠나다.

솔다이아에 얼마 동안 머무르고 있던 두 형제는 더 전방인 서쪽으로 가기로 마음먹고 말을 타고 타타르 지배지역인 킵자크 칸 제국의 수도 볼가라에 도착하여 제국의 왕인 바르카가 있는 궁정에 도착했다. 바르카 왕을 알현하니 왕은 유달리 기뻐하며 특별한 대우로 이들을 환영했다. 이들은 갖고온 보석을 왕에게 진상하고 하례하니 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 보석의 두 배나 되는 물건을 하사했다. 왕은 보석으로 장식하니 모두 다 잘 어울렸다고 한다.

 

바르카 왕의 배려로 궁전에서 1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타타르인들의 문물을 접하면서 그들의 정복 전쟁을 통한 용맹함과 습성을 피부로 느끼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자 이란 지방의 타타르 왕인 홀라구와 영토 문제로  전쟁이 발발했다. 쌍방은 카스피해와 흑해사이  부근 평원에서 서로 대치했다. 양군의 수십만 명의 군대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결과,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결국 홀라구 쪽이 승리했다. 이로말미암아 공도로 여행하는 자는 모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는데, 두 형제가 지나온 길이라 그들은 중국으로 가는길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전진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채비를 갖추고 불가리를 출발하여 서북 타타르 인의 왕 바르카가 지배하는 땅의 동쪽 끝에 위치하는 불가 강 중류에 위치하는 도시인 우카카에 도착했다. 그들은 다시 우카카를 뒤로하고 볼가 강을 건너 17일간이나 대사막을 횡단하여 행군하였다. 

 

4.두 형제 브라하에 당도하다.

사막을 횡단한  두 형제는 아주 근사한 대도시인 보하라에 도착했다.그들은 이곳 도시에서 3년간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홀라구 왕이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에게 보내는 사신 일행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 사신은 이들 두 형제를 보자 자신을 따라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동행하기를 요청하여 같이 사신 일행을 따라 원나라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 실은 타타르 대군주께서 라틴인을 알지 못하고 계시므로 꼭 한 번 이들을 만나보고자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나를 따라오신다면 반드시 대군주께서 기쁘게 귀하들을 맞아들여 빈객의 예로 대우하실 것입니다. 더구나 나와 동행하신다면 도중의 안전도 보장되고 곤란도 제거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5. 두 형제, 권유에 따르다

사신의 이 말을 듣고 두 형제는 크게 기쁘하여, 동행하는 것은 원하는 바라고 말하면서 사신 일행들과 같이 보하라를 출발하여 북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진로를 취하여 여행하기를 1년, 마침내 황제가 있는 국토에 당도하였다. 이동중 두 형제는 여러가지 민족과 풍습을 접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듣고 기술하였는데, '산의 노인과 부하 자객들' 이야기를 소개한다.

 

* 산의 노인과 부하 자객들

물레헤트는 그 옛날 '산의 노인'이 살았던 나라이다. 물레헤트란 이슬람 어로 '이단이 사는 곳'이란 뜻인데, 이슬람 이스마일 파의 이야기이다노인은 두 산맥 사이의 협곡안에 아주 장대한 궁전을 지어 정원과 온갖 근사한 과일나무를 심어 꾸몄으며 황금 누각, 벽면은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하였다. 네줄기의 시내를 만들어 포도주,우유,꿀,담수를 흐르도록하였으며 궁전 안에는 전세의 가인을 무수히 모아  온갖 악기를 연주토록하였는데, 그녀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양은 도저히 이 세상이 아닌 천국처럼 느끼도록 하였다. 노인이 이 궁전에 현출시킨 이러한 광경이야 말로 마호메트가 그 교도에게 설파한 것처럼 천국의 경지, 즉 천국에 태어나는 자는 포도주,우유,꿀,담수가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너하는 대로 미녀와 더불어 만족할 만한 쾌락에 빠질 수 있다는 바로 그대로의 광경이었기 때문이다.미호메트가 이슬람 교도에게 말한 천국을 그대로 본떠 만든 궁전이었다. 이러한 광경을 본 이슬람 사람이면 누구나 천국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풍경이었다.

 

노인은 지방의 12세-20세의 젊은이들을 골라 천국에 대해서 설파하면서 자신이 전지전능한 마호메트의 후게자임을 이야기 하면서 천국으로 대려다 주겠다면서 젊은이들을 유혹하였다. 모인 젊은이들은 노인의 이야기에 현혹되어 그가 시키는대로 하였는데, 그들에게 최면효과를 내는 약을 먹였다. 약에 취하여 정신을 잃은 젊은이들을 궁전으로 옮겨 놓는다. 그러면 일정시간이 지나면 젊은이들이 약에서 깨어나면 자신이 정말 천국에 와 있는 것으로 깜짝 놀라는 것이다. 오색찬란한 무지개와 술속에서 주변에는 음악과 춤을 추는 미녀들이 잇으며 자신들의 주변에는 반라의 미녀들이 둘러얹아 유혹하고 잇는게 아닌가! 젊은이들은 꿈인지 생시인지 자신의 팔을 꼬집어 보았으나 분명 현실이었던 것이다. 무아지경의 황홀한 시간이 밤낮으로 계속되면서 자신이 정말 천국에 와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주지육림에 빠진 젊은이들은 산해진미와 많은 미녀들 속에서 꿈 같은 향연과 쾌락의 시간을 보내면서 즐겨워한다. 이러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며칠 지나면 노인의 지시에 따라 몰래 젊은이들에게 최면제 약을 다시 먹이게 된다. 최면에 빠진 젊은이들은 모두 수레에 실려 각자 살던 지역에 노인을 만나던 곳으로 운반된다. 최면에서 깨어난 젊은이들은 또 깜짝 놀란다. 이제 현실로 돌아온 자신을 발견하고 천국의 모습을 서로 이야기 하며 어찌된 일인지 몰라 궁금해 하고 있을 때 얼마전에 본 노인이 다시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노인에게 몰려가서 그 위대함에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흠모의 마음을 표시하며 추앙하게 된다. 그러면 노인은 그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충성심과 무예를 점검한 다음 그중에서 능력이 뛰어난 젊은이를 골라 훈련을 시킨다. 다시 천국에 가고 싶다면 자기가 시키는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쇠뇌시켜 자신의 심복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마호메트가 설교한 대로 천국이 있음을 실제로 가 보았으며 노인이 그들을 천국으로 대려다 준 마호메트의 후계자며 예언자로 믿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젊은이들이 천국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자 노인은 예언자처럼 그들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설파하곤 하였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자신도 천국에 가서 즐기고 싶다는 욕망을 불태우며 소망이 이루어 진다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생각하며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주변의 산지 주민들은 노인이 진짜 마호메트의 후계자로 믿게 되었으며 노인의 말에 모두 절대복종하게 되었다.

 

이 노인은 누군가 지위가 높은 인물을 암살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우선 부하 자객중에서 누가 가장 적임자인가를 살핀다. 그런 다음 다수의 자객을 그 지방에 파견하여 저마다 암살할 인물을 지명한다. 명에 따라 그들은 그 지역으로 가서 지정된 인물을 살해하고 돌아온다. 몰론 일부는 잡혀 처형도 당하지만 성공한  일부는 돌아오면 노인에게 후한 보상을 받는다. 파견된 자객에게는 감시인을 붙여 그 암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감독하는데, 나중에 우수한 사람은 별도로 선발하였다. 산의 노인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암살해버리려고 마음먹은 인물이 있기만 하면 부하 자객중에서 몇몇을 기용해 그들을 파견하곤 하여 목적을 달성하였다. 노인은 그때마다 자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시 한번 너희들은 저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특히 너희들을 택하여 이 사명을 맡기는 것이니 자아, 가라! 단지 아무개를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만일 너희들이 실패하여 죽는 일이 있어도 그대로 곧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인의 암살행각은 주변 여러나라에 소문이 퍼져 제후들이 조공을 바치는 등 혼란기ㄹ르 틈타서 노인의 악행은 계속되어 노인이 주변 일대를 마음대로 지배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속임수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러한 악행을 전해들은 타타르 홀라구 왕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서기 1262년 전후, 이러한 온갖 악행을 이야기 들은 타타르 왕 홀라구는 부하 장수로 하여금 노인국의 성채를 공격하여 주살하도록 하였다. 타타르 군은 성채를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성채는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포위 공격을 실시한지 어느듯 3년이 지나자 식량이 떨어진 성채는 곧 점령되었다. 끝까지 저항하던 젊은이들과 노인은 주살되었고 궁전은 모두 불태워졌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를 보면서 오늘날 이슬람 교도들의 자살특공대를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라 무척 씁쓸하다. 그들의 천국은 이 산의 노인이 보여준 허구에 찬 천국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빈라덴이 산의 노인처럼 이슬람 교리에 나와 있는 천국을 그리워하며 오늘도 테러 집단을 양성하며 세계 도처에 테러를 자행하는 자살특공대를 양성하고 보내고 있으니 꼭 산의 노인 이야기가 이슬람 테러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들게 한다.

  

6. 두 형제, 칸의 궁전에 도착하다.

니콜로 형제가 카의 궁전에 도착하자 칸은 두 형제를 특별히 후하게 대접했다. 그는 두 형제의 입조를 매우 기뻐하여 갖가지 질문을 하였다. 우선 �째는 기독교 국가의 여러 황제에 대하여, 그들이 어떻게 하여 바른 정치를 행하고 있으며 혹은 전쟁에 나갈 때 출진의 모양은 어떠하며, 그 밖에 여러 황제의 생활 전반에 걸친 것이며, 이어 여러 국왕의 일에서부터 제후.영주에 관한 질문을 했다.

 

7. 칸, 두 형제에게 기독교 사정을 묻다.

다시 칸은 로마 교황과 교회 및 라틴 인의 풍습에 대해 여러 가지로 질문했다.두 형제는 이런 모든 것에 대해 순서있고 적절하게 그 진상을 아뢰었는데, 그것은 마치 타타르어나 터키 어에 정통한 이 나라에 현자와 마친가지로 조리있는 답변이었다.

 

8. 칸, 두 형제를 로마 교황에게 파견하다.

칸은 두 형제를 로마 교황의 사정로 보내기로 하였는데, 칸은 자신의 중신 가운데 한 사람을 동반하여 이 사명을 다하도록 지시했다. 두 형제는 칸의 명령이라면 그들이 섬기는 영주와 같이 다하겠다고 하였다. 칸은 중신 코카탈을 불러 두 행제를 수행하여 교황을 만나보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칸은 서한을 터키어로 써서 두 형제에게 건네주며 칸을 대신하여 교황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칸은 '그리스도의 교법에 능통하고 칠예에 연달한 인사로, 우산숭배자나 그밖의 교파의 신자들과 논의를 교환하여 그들의 교의가 결코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집집마다 모시고 예배하는 일체의 우상은 모두 악마에 속한다는 것을  명확한 논증을 할 만한 역량을 갖춘 현자를 백 명쯤 파견해 달라'는 것,간단히 말하면 기독교의 교법이 다른 우상숭배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진리에 비추어 명확하게 �힐 수 있는 인물을 파견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칸은 에루살램 성묘에 켜져있는 램프에서 약간의 성유를 갖고 돌아오도록 명령했다.

 

9. 두 형제, 권위의 황금 패자(마패)를 받다.

칸은 두 형제와 동행할 신하에게 자세한 칙서에 관한 내용에 대해 자세히 지시를 내리고 이어 그들에게 황금 패자를 하시했다. 이 황금 패자만 있으면 가는 곳 어디서나 숙소와 말이 공급될 뿐만 아니라 한 도시에서 다음 도시에 도달하기까지 신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두 형제와 사신은 여행준비를 마치고 칸에게 출발인사를 하고 드디어 기마로 여행길에 올랐다. 그런데 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행하던 타타르 인 사절이 병에 걸려 더 이상 여행을 계속 할 수가 없자, 도중의 어느 도시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도저히 그 사신은 동행이 불가하여 두 형제는 그들만이라도 출발하기로 하였다. 두 형제는 도처에서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여행을 계속한 끝에 드디어 지중해 동부 소아르메니아 항구 도시인 라이아스에 도착했다. 실로 3년에 걸친 여행이었다.

 

10. 두 형제, 이크르에 도착하다.

라이아스를 떠나 팔레스티나의 항구 도시인 아크로로 향한 두 형제는 1269년 4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미 교황 클레멘스 4세는 1268년 11월에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두 형제는 이집트 왕국 전역을 대표하는 교황청 특사 테달도 드 비스콘티(후일 그레고리우스 10세 교황이 됨)라는 성직자를 만나 타타르 황제의 칙서 내용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특사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면서 반가워 했다. 동방에 대한 엄청난 포교의 기회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황이 서거했으니 새로운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래서 우선 두 형제는 베네치아로 가서 가족들을 만나보기로 하고, 두 형제는 아크로를 떠나 네크로폰트에 이르러 그곳에서 배를 타고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베네치아에 도착해 보니 니콜로의 아내는 작년에 세상을 떠난 후였고, 오로지 당시 15세의 마르코 폴로만이 혼자 남아 있었다. 두 형제는 2년간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11. 두 형제, 다시 여행을 떠나는 길에 마르코를 동반하다.

두 형제는 새로운 교황  선출되기를 기다렸으나 교황청의 내부 갈등으로 좀처럼 결정이 나지 않았다. 두 형제는 칸에게 돌아가는 날을 더 이상 연기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소년 마르코 폴로를 같이 대동하고 베네치아를 출발하여 아크로로 향했다.아크로에서 앞서 언급한 특사를 만나 사정을 이야기 하고 일단 엘루살램의 성유를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던바, 특사는 쾌히 승락하고 입성을 허가했다. 두 형제는 엘루살램으로 가서 성유를 얻어낸 다음 다시 아크로로 돌아와서 특사를 만나 작별을 고했다. 특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는 두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 칸에게 전달할 서한과 전언을 작성하여 교황의 부재로 그들이 뜻을 자 이루지 못했다는 내용을 자세히 적어 증거물로 삼도록 했다.

 

12. 마르코 일행, 아크르를 떠나다.

교황 특사의 신서를 받아쥔 니콜로 형제는 아크로를 출발하여 귀환길에 올랐다. 그들이 무사히 라이아스에 도착하였을 때 새로운 교황으로 이집트 특사 테탈도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새교황이 보낸 사절이 니콜로 형제를 만나러 라이아스에 도착했다. 사신은 새로운 교황이 다시 한번 두 형제를 만나고 싶다고 전달하였다. 그래서 두 형제는 아크로로 돌아가서 새 교황을 만났다.

 

13. 두 형제, 로마 교황에게로 가다.

아크로에 도착한 두 형제는 새 교황에게 가서 정중히 경의를 표했는데, 교황은 이들을 알현하고 친히 축복을 내리는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교황은 다시 칸에게 보내는 신서 몇 장을 작성하였는데, 두 형제가 돌아올 길에 대해 원조와 보호를 부탁하고 진귀한 선물과 명망높은 두 사람의 사제인 비콜라의 니콜라스와 트리폴리의 홀라 기리에르모를 택하여 동행토록 하였다. 이들 두 사제에게는 그 나라에서 마음대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능, 즉 사제.사교의 임명을 비롯하여 교황과 마찬가지로 파문.입문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이 부여되었다. 아울러 이들 두 사제에게 신임장과 몇 통의 신서를 주고, 칸에게 축복의 뜻을 전하도록 하였다. 두 형제는 사제들과 같이 교황의 축복을 받은 다음 마르코를 동반하고 칸이 있는 중국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들이 라이아스에 도착하니 바빌론의 술탄인 분도크다리가 대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에 칩입하여 국내 도처에서 노략질을 하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그들 사절 일행도 언제 목숨을 잃을 지 몰라 위험한 상황에 에상되자, 사제 두명은 몹시 두려워하여 결국 동행을 거절한다.사제들은 소지했던 신임장과 신서 일체를 두 형제에게 맏기고 이들과 작별하고 성당 기사단의 대장과 함께 되돌아가고 말았다.

 

14. 두 형제, 마르코를 데리고 칸의 도성인 케멘푸(개평부)에 이르다.

두 형제와 마르코는 여름을 넘기고 겨울을 보내는 긴 여행을 계속한 뒤 마침내 칸의 궁전에 도착했다. 때마침 칸은 케멘푸(개평부,상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칸은 그들의 도착 소식을 듣고 사자를 40일 먼 곳에까지 파출시켜 그들을 맞이했다.

 

15. 세 사람, 칸을 알현하다.

두 형제는 마르코를 대동하고 도성에 도착하자 마자 왕궁으로 여러 중신이 시립해 있는 가운데에서 칸을 알현했다. 세 사람은 어전에 무릎을 끓고 공손히 경의를 표했다. 배례가 끝나자 칸은 그들을 일어서게 하여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정다운 말로 여러가지를 물었다. 그들은 교황으로부터 받은 신임장과 신서를 올리고 성유도 헌상했다. 칸은 매우 기뻐하며 매우 소중하게 간직토록 측근에게 지시했다. 칸은 젊은 마르코를 보고 그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저 젊은이는 누구인가?"

"폐하, 이애는 제 아들로, 폐하의 종이옵니다!"라고 니콜로가 대답하자,

"먼 길에 온 것을 기특하게 생각하노라"하고 말했다. 칸은 니콜로 형제와 마르코 모두 칸의 궁정에서 기거하도록 하였으며  모든 중신들이 환대하여 그들을 항상 융숭히 대접하는 등 국빈으로 대하였다.

 

16. 마르코, 칸의 사절이 되어 출발하다.

마르코는 실로 총명하여 타타르 인들의 언어.습속.문자를 빠른 속도로 습득하여 칸의 궁전에 머문 얼마 지나지 않아 언어와 문자의 서법에 정통해졌다. 현명하고 신중한 그는 칸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칸이 마르코의 총명함을 알고 카라잔이라는 지방으로 파견하였다. 이 여행에서 마르코는 6개월 이상의 고생 끝에 참으로 훌륭하게 그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왔다. 칸은 사신들이 임무 수행후 복명할 때 상세한 그 지방의 이야기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마르코가 특히 자세한 풍속과 인물,지세,풍광 등에 대해서 신기한 화제를 수집하여 사실대로 구수하게 이야기를 잘하여 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이러한 점을 칸은 매우 좋아하여 마르코를 가까이 두면서 수시로 지방의 관찰 임무를 수행토록하였다. 또한 마르코는 지방을 갈 때마다 상세한 그 모습을 꼼꼼하게 기록하여 자료로 삼았다.

 

17. 마르코,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

마르코의 임무수행은 물론 그의 복명을 듣는 칸은 즐거워하며 재미있어 했다. 마르코의 서술 솜씨가 참으로 교묘하고 흥미진진하여 칸을 비롯ㅅ하여 신하들이 모두 감탄해 마지않아 하며 칭찬했다. 마르코가 칸의 궁전에서 봉사한 세월은 전후 17년을 헤아리며, 그 동안 끊임없이 사신이 되어 여러 곳으로 파견되어 여러 지방의 신기한 화제를 갖고 돌아올 뿐만 아니라, 부과되는 사명을 늘 훌륭하게 수행하였기에 칸은 중대하거나 먼데까지 가야할 일은 모두 마르코에게 위임하였다. 상세하고 신기한 이야기는 모두 마르코가 미지의 나라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 그 지식을 획득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18. 세 사람, 칸네게 귀국 허가를 간청하다.

세 사람은 한결같이 칸의 곁에서 봉사하며 그를 섬겼다. 그들은 여러번 칸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했으나 그때마다 칸은 그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 그 무렵 근동(이란지방) 타타르의 영주 아르곤의 왕비 볼가나기 세상을 떠났는데, 그 유언에 그녀 뒤를 이을 왕비로 반드시 그 일족 중에서 택해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래서 아르곤 왕은 울리타이.아푸스카.고자의 세 중신을 택하여 이들에게 많은 수행원을 붙여 칸에게 보내, 죽은 왕비 불가나와 일족인 여인을 후비로 보내달라고 요청허였던 것이다. 세 명의 중신은 칸의 궁전에 이르러 자세한 내용을 전달하였는데,칸은 그들을 후히 대접하고 방년 17세가 되는 절세미인 코카친 공주를 불러 이르곤 세 중신과 만나게 하였다. 세 중신은 만족하였으며 칸은 드디어 코카친 공주를 보내기 위해 대대적인 수행원을 딸려 보내기로 하였다. 이들이 칸에게 작별하고 출발하여 8개월쯤 이동하였을때, 타타르와 전쟁으로 길이 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자 다시 캉에게 되 돌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다.

 

이때 마르코는 여러 미지의 바다를 건너 인도로 부터 돌아와 각지의 신기한 일을 보고했다. 세 중신은 이들 마르코 일행을 라틴인이며 또 하나같이 박식하니 바닷길로 그들의 안내를 받아 귀국길에 오르는게 좋겠다는 간청을 칸에게 간청했다. 칸은 처음에는 못 들은척 했으나, 결국 그들의 계속된 간청에 마르코 등 세 사람을 수행원에 포함하여 바닷길로 귀국토록 허락하였다.

 

19. 세 사람, 칸에게서 떠나 귀국길에 오르다.

마르코 일행은 마지막으로 칸에게 출발 인사를 올렸다. 칸은 그들에게 구너위의 표지인 부패 두 쪽을 수여했다. 이 부패를 소유한 사람에게는 칸의 영내라면 어느곳이나 여행할 수 있는 자유와, 본인 및 일행에게 필요한 식량을 지급받는 특권이 보장되어 있었다. 칸은 교황,프랑스 왕, 스페인 왕, 및 기독교국의 여러 왕에게 보내는 칸의 사절로서의 임무도 함께 맡겼다.

 

칸은 그들을 위하여 준비시킨 선박은 모두 열네 척이었는데,이중 250명 정도 태우는 배가 4-5척이 포함되었다. 항해에 필요한 물품이 다 갖추어지자 일행은 칸에게 고별 인사를 올리고 배에 올랐다. 일행은 대양 위를 항해하기를 약 3개월이 되어 남해의 자바섬에 도착하여 진기한 풍습을 많이 보게 된다. 자바섬을 출발하여 인도양으로 나가 실로 18개월 만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그러나 아르곤 왕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선원을 제외하고 수행원은 약 600여 명 이상이었는데, 오는 도중 대부분 사망하가나 실종되어 도착시에는 겨우 18명 정도였다. 이르곤 세 중신 가운대는 고자만 살아 남았고 부인들 중에도 한 여자만 살아 남았다.

 

이르곤 왕의 뒤를 이어 키아카투가 왕위에 올라 있었으므로 코카친 공주는 그의 보호하에 있게 되었고, 칸으로부터의 사명도 그에게 보고되었다. 키아카투 왕은 코카친 공주를 아르곤 왕의 왕자 카산으ㅣ 배필로 삼도록 명령했다. 당시 카산은 멀리 페르시아 국경의 '아르브르 솔' 이라는 변경 요새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르코 일행은 코카친 공주를 모시고 다시 출발하여 국경 지역으로 가서 카산 왕자에게 코카친 공주를 인계하고 임무를 무사히 마친 세 사람은 다시 키아카투 궁전으로 돌아와 9개월간 체류하다가 왕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고 귀국길에 올랐는데, 이때도 권위의 표시인 황금 패자 네 쪽을 받았다. 패자의 표면에는 "영원한 신의 덕에 의해 칸의 명칭은 존중되고 칭송받을 지어다. 명령에 거역하는 자는 사죄.몰적에 처하리라"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새겨진 문구의 취지는, 칸의 전영역을 통하여 세 사람의 사신에게 칼을 대는 것과 동일한 존경과 봉사를 공여해야하며, 필요한 일체의 말이나 식량.호위병도 함께 제공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명령대로 그들은 도처에서 말과 식량.호위를 불편없이 제공받았고 호위병을 실제 200여 명이나 제공받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는 수시로 전쟁이 일어났으며 지역 분쟁이 심하여 지방의 통치권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등 위험 요소가 많았고, 실제 백성들은 도처에서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들은 왕궁을 떠나 귀국길에 올라 하루도 쉬지 않고 기마 여행을 게속하여 비로소 트레비존드에 도착했다. 그들은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네그로폰트를 지나 베네치아에 귀착했다. 그때가 바로 1295년의 일이었다.

                                                     -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