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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폼페이' 그 최후의 날...

 

'폼페이' 그 최후의 날...

폼페이 공회장(Foro)에 남아있는 기둥

 

 

 

 

 

소설 '폼페이' 작가 로버트 헤리스(Robert Harris) 는 1957년 영국 노팅엄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BBC 뉴스나이트와 각종 파노라마 프로그램 리포터로, 또 옵저버 정치담당 기자로, 선데이타임즈와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브리티시 프레스 어워드에서 올해의 칼럼니스트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는 틈틈이 저술활동을 계속하여 <당신들의 조국>의 저서로 히스토리 팩션의 새 장을 열며 얼론과 독자들로 부터 큰 찬사를 받았으며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HBO에서 TV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후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연합군의 정보 전쟁을 다룬 <이그니마>와 스탈린의 숨겨진 일기장을 다룬 을 발표하여 일약 히스토리 팩션계의 최고봉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 두작품은 영화화되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를 다룬 대작 <폼페이>와 역시 뛰어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그만의 광대한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칸과 아카데미를 석권한 명장 로만폴란스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폼페이>는 유럽 영화 사상 최고의 제작비인 2억 달러가 투자되는 블록버스터 무비로 2008년 세계 개봉을 목표로 제작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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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 문명화 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패배할 수 밖에 없는 냉혹한 전쟁이다

 

이탈리아 반도 중남부 캄파니아 지방의 고대 도시 폼페이는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23Km 떨어진 베스비우스 산 근처에 위치해 있다. 기원후 79년에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하면서 헤르클라네움, 스타비아이와 함께 매몰되어 1,500년 동안 땅 속에 완전히 묻혀 있다가, 16세기 말에 이 지역에서 터널을 파던 어느 건축가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다.

 

당시 고대 로마 황제는 '티투스' 황제로 서기 79년에서 81년까지 통치하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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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제국의 성장과정> 

 

 

 

 * 로마 제국 성립

 

전설에 로마 부족의 선조는 트로이 전쟁시 트로이의 일부 왕족들이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배를 타고 도망하여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 후손들 중 초대왕 '로물루스'에 의하여 로마란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로물루스 초대왕은 알바롱가 정복-테레베 강 도시건설-기원전 753년 왕.원로원.시민회로 삼권분립 왕조 창업-사비니족 여인 강탈 사건-주변 부족국가 영입-로마 7개 언덕 도시 발전 등 로마는 피나는 노력과 대외 투쟁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정치체제가 변화하면서 매년 두명의 집정관을 선출하여 전장터로 나가게 된다.

 

기원전 3세기-2세기에 걸쳐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전쟁은 시칠리아 섬의 쟁패권을 놓고 신생국 로마와 당시 해양 강국이었던 북아프리카 지역인 지금의 튀니지아 지역의 '카르타고'와 지중해 쟁패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 바로 '포에니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통하여 로마 제국은 명실 공히 지중해의 최 강자로 자리메김하게 된다. 그래서 로마와 카르타고와 130년간 전개된 포에니 전쟁에 대하여 상세히 고찰해 보자고 한다.

 

 

* 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

 

기원전 264년. 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 쟁탈전에서 시작하였다. 시칠리 섬의 도시들은 대부분 그리이스 식민도시였는데, 섬 동쪽 이탈리아 반도 장화끝과 마주하는 메시나라는 도시를 이웃 도시인 시라쿠사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공격하였다. 이에 메시나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데, 로마 원로원은 메시나의 지원 요청을 놓고 갑론을박 후 결국 이탈리아 반도의 안전은 코앞의 메시나 해협 건너 메시나 도시를 지원하는 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지원군을 보내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시칠리아에서 로마군은 카르타고와 지속적인 전쟁으로 결국 시칠리아를 차지하게 된다. 시칠리 전투 마지막쯤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카르타고 귀족 중신이며 장군으로 시칠리아에서 로마군과 벌인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패배하게 되자 시칠리아를 포기하는 조약을 맺은 후 철수하게 된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종전후, 하밀카르는 카르타고 국내에서 귀국후 불만이 쌓인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정치 전면에 중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후 로마에 대한 설욕을 다짐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당시 카르타고 식민지인 에스파냐 총독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당시 9살이던 한니발을 신전으로 대려간 하밀카르는 신 앞에서 어린 한니발에게 로마 설욕을 맹세토록 한다. 

 

그후 하밀카르는 에스파냐 총독으로 부임하여 식민지 통치하는 가운데 영토 확장,광산 개발,상업 번창,농업과 공업,무역 확대 등 훌륭한 정책을 시행한 결과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되며 카르타고본국에 많은 재원을 충당하는 역활을 하였다. 한편 한니발은 지중해변의 호화로운 총독 궁전에서 아쉬움 없이 행복한 성장을 하게 된다. 후일 총독 자리를 이어받게된 한니발은 에스파냐 식민지의 총독으로 식민지 개척과 부흥에 박차를 가하면서 군비도 착실히 증강시켜 나간다.

 

* 한니발 전쟁(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218년-기원전202년)

 

식민지역 확장과 착실한 군비를 증강한 약관 28세의 한니발은 먼저 로마 식민 도시였던 이베리아 반도 동부 해안 도시 '사간토'를 공격하는데 로마는 사신을 보내 한니발에게 평화조약을 어겼다며 당장 철수할 것을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나 한니발이 반응이 없자,  카르타고 본국 의회를 방문하여 항의 하였지만 역시 협상이 결렬되었다. 그래서 로마는 카르타고와 전쟁을 선포한다. 이것이 제2차 포에니 전쟁인 '한니발 전쟁'이다.

 

 

 

* 칸나 전투(칸내,칸나이) 

 

 

한니발은 로마군과의 1차전 '트리노 전투',2차전 '트레비아 전투', 3차전 '트라시메노 전투' 등 계속된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하면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남으로 진군을 하게 된다. 로마군은 전력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수차례 전투를 치르지만, 그때마다 한니발의 뛰어난 정보수집 능력과  전략.전술에 많은 병력과 지휘관,장수들을 잃으면서 연전연패하자 전 로마는 공포에 떨게 된다. 

 

기원전 216년, 전쟁 3년차, 로마는 각 연맹도시 및 속주로부터 병력을 징집하여 결전을 준비하는데, 바로 '칸나 전투'였다. 이는 트라시메노 호수옆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 2개 군단이 전멸한 것에 대한 설욕전이었다.

 

▲ 카르타고 언덕에서 바라본 튀니스 만

 

한니발은 전사자들로 부터 가치있는 물건을 빼았는데 이튼날 하루를 꼬박 소비했으며 승리를 알리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에 보낸 그의 동생 '마고네'는 죽은 로마 병사들의 손가락에서 빼낸 금반지를 본국 요인들의 눈앞에 산더미 처럼 쌓아 올렸다고 한다. 로마 시민에게 금반지는 결혼 반지가 아니라  개인도장으로 크고 묵직하였다고 한다. 이런 반지가 7만개나 쌓였다면 그 높이가 얼마나 될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로마는 완패 소식을 조용히 받아 들였다. 집정관 '바로'가 패잔병을 수습하여 수도 로마로 돌아오자 원로원 의원들을 비롯한 모든 시민이 성문까지 마중나와서 노고를 치하했다. 로마시민들은 조용히 패전을 감내하며 누구를 비난하거나 입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고대 로마의 유적지, 포로 로마노

 

이탈리아 반도 남동부에 위치한 칸나는 로마군 식량 저장고가 있는 곳으로 요충지였다. 한니발은 군량미도 확보할 겸 로마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이곳을 점령하고 주변 지형을 정찰하였다. 로마군의 이동을 실시간으로 정탐하면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마군이 드디어 도착하자 보무도 당당한 로마군은 진지를 편성하면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간혈적인 조우전은 전개되었으나 본격적인 접전은 없었다. 수일을 보내면서 조그만 승리에 로마군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집정관 바로가 지휘하는 날, 역사적인 칸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결전에서 로마군은 동맹국 병사 등 8만 5천 여명의 병력 모두가 갈리아 용병 2만 4천 여명을 포함한 5만 여명의 한니발 군에게 전멸을 당하게 된다. 로마군은 '낡은 전쟁'을 하였고 한니발른 '새로운 전쟁'을 하였던 것이었다.

 

전 로마는 경악하였다. 절치부심한 로마는 다음해 집정관에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에 의해 이후부터 한니발과 직접적인 정면 결전을 피하고 지구전 전술로 전환하여 꼬리를 물고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공격하고 계속 감시하면서 한니발 군을 견제하는 전략을 전개하였다.

 

 

* 한니발, 로마 성벽에 나타나다 

 

당시 나폴리 근방의 로마 연합의 동맹도시 '카푸아'는 한니발에게 항복하고 로마 연합을 배반하였다. 로마는 배반자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로마군은 카프아를 3중으로 포위하고 공격하고 있었는데, 카푸아의 지원 요청을 받은 한니발은 카푸아를 구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동하여 로마군 후방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로마군은 후방에도 방어 방책을 쌓고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소수의 기병대만 대동하고 로마시를 정찰하기로 하고 카프아를 지나 로마 가도를 따라 북상하였다. 이동중에 그 어떤 로마군도 비록 소수이지만 한니발에게 덤비지 못한고 성문을 꼭 닫고 숨죽이고 멀리서 바라만 보는 상황이었다. 로마 성문 앞 화살 사거리 밖에서 백마를 타고 나타난 한니발은 성벽을 둘러보면서 그 웅대함에 감탄하면서 장차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로마시는 비상이 걸렸다.전 로마 시민은 성벽위에서 저 멀리 백마를 타고 성벽을 둘러보는 한니발을 숨죽이고 바라보면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로마 성벽의 튼튼함을 둘러 본 한니발은 당장 로마시를 공격하자는 부하 장수들의 건의를 무시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는데, 나름대로 다른 전략이 있었다. 그는 로마 성벽을 공격하는 일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공성전은 한니발에게는 시간 낭비이며 로마시를 점령하더래도 로마 연합은 여전히 주변에 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연합을 하나하나 해체시켜 로마를 고립화 시키는 방책이었다.

 

한니발은 용병들에게 그 어려운 적지에서도 급료를 지급하며 17년간 이탈리아 반도를 누볐다. 오로지 로마 멸망을 꿈꾸어 오던 한니발에게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바로 로마 집정관이 된 장군 '스키피오'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본국을 직접 침공한 것이었다.

 

이는 이베리아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젊은 장군 스키피오의 전략이었다.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떠나게 하는 방법은 직접 카르타고를 압박하는 방법외에는 없다고 역설하며 원로원을 설득하였기 때문이다.

 

 

* 자마 전투

 

카르타고 본국으로 철수한 한니발은 스키피오의 로마군과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데, 정예병 1만 5천 명에 추가 병력 3만 5천 명을 포함하여 약 5만 여명으로 전력을 편성했다. 물론 코끼리도 상당수 편성했다.  스키피오의 로마군은 약 4만 명 정도 되었다. 

 

자마평원에 먼저 도착한 스키피오는 진영을 편성하면서 이미 한니발의 전술을 꽤뚫고 있었으며 한니발이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전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운명의 '자마 전투'가 실시되었다.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가 굉음을 울리며 달려왔다. 그러자 로마군 전열이 지그재그로 중간중간 공백이 생기면서 중첩되면서 코끼리 부대를 그냥 통과시켰다. 대열을 그냥 지나친 코끼리떼는 후방에 위치하던 경보병에 의하여 살륙되고 만다. 사전 철저한 준비를 한 스키피오의 임기응변 전술이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의도를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로마인이었으나 로마인 같지 않은 전술을 구사하는 스키피오에 한니발은 조금은 당황하였을 것이다. 어느 로마군 장수도 대부분 자신이 예상한 대로 전투에 임하였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전열이 흩어지면 양익 기병으로 포위하여 격멸하는 것이 통상이었다. 양군은 치열한 접근전이 전개되었으며 부상자와 전열이 흐트러 지고 있었다. 로마군은 부상자를 후방으로 후송시키면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전열을 재정비한 로마군은 한니발의 경보병 부대를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한니발의 중보병이 투입되었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면서 로마군의 중보병이 한니발 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한니발 군의 사상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로마군의 양익 기병이 공격을 실시하자, 한니발의 일부 기병이 점점 무너지면서 도망이 시작되었다. 양익 기병이 무너지려 하자 한니발은 자신의 정예군 1만 5찬 명을 투입했다. 충성심에 불타는 정예군이 투입되었으나 이미 전세는 로마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사기가 오른 로마군은 추격에서 돌아온 기병과 같이 한니발 군을 하나하나 쓰러뜨리고 있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정예병들이 로마군에 차례차례 쓰러지는 모습을 참담하게 바라보다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 하다고 판단하고 소수의 기병만 대리고 카르타고 쪽으로 도망하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마지막 '자마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한 한니발은 더 이상 로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승리 소식을 전해들은 로마 시민들은 환호성 소리가 넘치는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 한니발의 망명과 사망

 

'자마 전투'후 카르타고의 전권대사 대표로 임명된 한니발은 스키피오와 강화회담을 하게 되고 로마의 요구대로 조약이 성립된다. 스키피오는 로마시민의 대대적인 축하속에 개선하게 되고 그후 로마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몇년 후 일인 영웅을 바라지 않는 로마 원로원의 스키피오 반대파 원로원들은 스키피오 동생의 부정행위를 문제 삼아 재판에 회부하게 되자 스키피오는 분노한 나머지 스스로 권좌를 물러나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내다가 몇년 후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강화 후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재상으로 국가 개혁을 실시하나 반대파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은 시리아로 망명을 하게 된다.수 년 후 두 영웅은 시리아 지역 전투에서 다시 만나게 되나 스키피오는 한니발에 대한 어떤 연민의 정을 가진듯 회담 후 그를 자유스럽게 놓아준다. 한니발은 크레타 섬으로 도망 후 다시 흑해근방 지역의 '비타비아' 국으로 망명하나 공명심에 불탄 로마군 장교의 추격을 받자, 스스로 독을 마시고 자결한다.스키피오도 같은 해에 지병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아마 두 영웅 모두 자신들의 조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울분을 삭이며 하늘 나라로 친구삼아 같이 간 듯하다.

 

 

* 카이사르,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스키피오 사후 로마는 지중해의 초강국으로 번영을 구가하다가 권력쟁탈의 혼란의 시대가 계속된다. 마리우스,슐라 등 호걸들의 시대를 겪으면서 쿠테타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수 차례 겪다가 당시 군부 실세였던 품페이우스가 등장하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실권을 장악하면서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는 등 재해권을 장악하였고 절대권력을 구가하는 등 폼페이우스 시대가 열리게 된다. 당시 갈리아 지역을 평정하고 총독으로 지내던 카이사르는 로마 정치권으로부터 코너에 몰리자, 카이사르는 고민끝에 부하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로마법에 군대를 해체해야 하던 경계선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였다. 그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결전에서 승리하여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권력을 실각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까지 도망가서 은거하나 카이사르의 추격에 결국 이집트 파견 로마군사에게 살해되고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게 된다. 정권 쟁탈전에서 카이사르의 힘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은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애인이 되어 환락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실세 권력의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온 후 번영을 구가하며 절대 권력을 추구하다가 이에 불만을 가진 원로원 의원 13명에 의하여 칼을 수 없이 맞고 쓰러진다. 암살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자 카이사르의 심복이었던 군부 실세 안토니우스는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일관하다가 후계자가 옥타비아누스임을 알고 실망하게 되나 아시아 통치 임무를 띠고  서아시아로 간다. 클레오파트라는 서아시아로 안토니우스를 �아가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애인이었던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여 이집트에 상주하면서 그녀의 치마폭에 빠져 로마 정부에 대해 분리를 주장하는 등 실정을 계속하면서 로마 통제를 벗어나려 하자 카이사르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이집트까지 추격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제거하고 로마 제국의 진정한 지배자로 단독으로 정권을 잡게된다. 그후 공화정이 끝나고 초대 황제로 등극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재정시대가 전개된다.

 

* 황제 시대

 

옥타비아누스 시대(재위 기원전 27-서기14년) 이후 로마는 황제의 유언으로 북으로는 브리톤(영국)-북해-라인강,도나우 강, 동으로는 노리콤(헝거리,불가리아)-일리쿠룸(유고)-다뉴뷰강-트라키야-콘스탄티노플-아르메니아-아시리아-시리아-유프라테스 강, 남으로는 팔레스타인-이집트,이디오피아-북아프리카, 서로는 대서양-이베리아(스페인,포르투칼)-갈리아(프랑스) 일대를 잇는 대로마 제국의 국경선을 더 이상 확대하지 말고 방어에만 주력하고 제국의 내실을 기하도록 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의 후계자들은 넘쳐나는 부귀와 영화속에 쾌락을 탐닉하고 폭정을 일삼으며 공포심과 악덕으로 지배하는 나날을 보내면서 정복사업은 더 이상 전개하지 않고 로마 궁전내에서 환락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로마군은 서서히 시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서기 14년에 사후 55세에 즉위한 티베리우스 황제(재위 서기 14년-37년)는 행정관과 전사로서의 명성이 높았다.시의심이 강하고 원로원과도 친숙하지 못했던 황제는 친아들인 드로수스가 변사하자 그 충격인지 로마시를 떠나 카프리섬으로 들어가서 재위기간 후반부 약 10년을 보내게 된다. 자유 노예로 출세한 인물들에 의한 반란 음모가 적발되자 무차별 처형을 내리고, 섬에서 모든 황제의 지시를 내리곤 하였다. 평생 불운한 결혼 생활이었던 황제는 젊은 선남선녀를 차출하여 그들의 성행위를 즐거보면서 세월을 보내다 서기 37년에 사망하였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칼라 쿨라 황제(재위 서기 37년-41년)는 먼 친척에 해당하는 가이우스 게르마니쿠스였다. 어릴 때부터 전장터를 따라다닌 어린 가이우스는 군대용 작은 군화를 싣고 있었는데, 애칭으로 병사들이 '칼라쿨라(유아용 군화)'라 불렸다. 이러한 병사들의 애칭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 제국의 � 번째 폭군이 되었다. 즉위 당시 칼라 쿨라 황제는 로마 시민들의 기대가 컸으나 그 기대를 져 버리고 중병을 만난 후 정신 이상이 생겼는지 병세 회복과 동시에 그는 잔학성을 나타내며 갖가지 포악한 행위를 저지르다가 궁중안에서 살해되었다.

 

칼라 쿨라 황제가 살해된 후 황제로 즉위한 인물은 그의 숙부에 해당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서기 41년-54년)였다. 근위대의 압력으로 즉위한 황제는 원로원에서 제정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화려한 인상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행정실무에 밝은 강점으로 극복하였다. 유능한 해방 노예를 중용하고 속주 경영에도 크게 배려하였던 바, 재정은 확대되고 차분한 성격의 황제는 로마 제국 시민들을 그런대로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생애 중 여러번 결혼하였으나 조카 딸인 아그리파를 아내로 맞아들여 후계자들의 권력쟁탈 가운데 그의 아내 아그리파에 의해 독살되었다. 후임자로 그녀의 아들이 등극하였는데, 바로 악명 높은 네로 황제였다.

 

네로 황제(재위 서기 54년-68년)가 재위에 올랐을 때 17살이었다. 당시 로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하였다. 젊은 황제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컷다는 것이다. 처음 5년 정도는 그도 선정을 베풀었는데, 여기에는 세네카 등이 참여한 고문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후 황제는 변득스런 폭군으로 변하기 시작햇다. 네로는 애첩의 사주를 받아 모친을 살해하고, 그의 정식 부인도 추방하여 처형하였다. 수많은 측근들이 그의 마수에 걸려 처형되었다. 서기 64년에 일어난 로마시 대화재 때에는 그 당시 신흥종교였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그들을 학대했다. 결국 원로원과 근위대의 반란으로 도망갔으나 그곳에서 자해하여 사망하였다.

 

네로가 죽자 혼란이 일어났다. 서기 69년 한해에 갈바.오토.비탤리우스 등 세 사람이 연이어 등극하고 실각한다. 갈바는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이었으며 근위대의 추대로 황제에 오른 인물이었다. 논공행상에서 병사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1년 가까이 재위하다가 근위대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뒤이어 즉위한 오토도 그리고 비탤리우스도 다같이 반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권좌에서 실각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재위 서기 69년-79년)는 북아프리카로 도망간 비탤리우스를 격파하고 원로원과 군대의 추대로 황제에 올랐다. 그가 즉위 했을 때 이미 나이가 60세였다. 그로부터 사망시까지 질서회복을 위해서 비교적 잘 대처해 나갔다. 황제의 권위도 회복하고 국가 재정도 재건하여 어느정도 성공적인 치세를 누렸다. 귀족 가문의 혈통도 아니고 인색하였고 인상이 황제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의 치적은 성공적이었다.

 

티투스 황제(재위 서기 79년-81년)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장남으로 황제에 즉위했다.부자 승계의 � 케이스였다. 그는 유능하고 사랑스런 성격의 소유자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 황제로 즉위 후 2년 만에 원인모를 병으로 쓰러졌다. 이 기간동안 폼페이의 비극이 발생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서기 81년-96년)는 티투스 황제의 친동생으로 15년간 황제에 재위하면서 재정관리와 속주통치에 나름대로 훌륭한 치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형인 티투스와는 달이 후반에는 폭군으로 변하여 공포정치로 기우면서 여러가지 포악한 행동을 자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아내인 드미티아누스 황후가 군대와 그녀의 측근들과 공모하여 황제를 살해했다. 이후 로마는 5현제 시대로 접어들면서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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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로마 제국의 태동에서 부터 폼페이의 비극이 일어난 서기 79년은 티투스 황제가 재위하던 시대까지 살펴 보았다. 로마는 고대 역사에서 그리고 인류의 문명사에 크나큰 역활을 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이 번영을 구가하고 발전된 문화의 총수가 바로 폼페이의 모습일 것이다. 당시의 그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그들의 말로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그들과 똑같은 길을 가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부정과 부패, 권력에 눈이 먼 정치인,쿠테타의 반복,민생을 무시하고 세금빼먹기에 정신없는 공공기업의 임원들 등은 우리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폼페이 유적은 발견된 1709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으며 당시의 유적들은 로마 제국의 생활상과 헬레니즘 문화를 보여주는 유용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발굴 당시 폼페이에는 화산 폭발로 인해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람들의 화석이 그대로 남아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는 사람, 발버둥 치다가 굳어진 사람, 그리고 손을 허공으로 뻗은 체 있는 사람 등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고대 도시 폼페이는 비옥한 토양과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로마 귀족들의 해변 휴양지로 애용되었다.도시의 규모나 시설은 오늘날의 도시를 빰 칠 정도로 수도시설을 포함하여 다양하고 선진화된 도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 관공서,체육관,술집,빵집,세탁소,공창,그리고 현대의 고급 호텔 사우나 시설에 견줄 만한 공중 목욕탕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로마 귀족들의 별장으로 보이는 정교한 구조의 호화 저택들은 모자이크 타일과 각종 예술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당시 한반도는 삼국시대로 영토 분쟁을 일삼고 있던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빠른 문명의 발전은 언제나 부작용을 낳는 법. 폼페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전에 일어났던 지진, 그리고 화산 폭발의 전조가 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자연이 내리는 일종의 벌로 간주한다. 현재 우리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결과들(지구 온난화,오존층 파괴)을 걱정하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등장 인물들이 보여주는 인간의 결점들 역시 현대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로버트 헤리스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우리들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잇다. 확고한 직업의식과 직업윤리를 지닌 소시민의 전형적인 아틸리우스, 호기를 노려 부정한 수단으로 돈을 모은 다음 자신의 노예 시절을 보상 받기 위해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지배지가 되어가는 졸부의 전형 암플리아투스, 그러한 아버지를 증오하며 사랑과 우정을 위해 싸우는 여전사의 전형 코렐리아, 자신이 해방시킨 노예의 꼭두각시가 되어 명예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굴욕적인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비굴한 고나리의 전형 포피디우스, 해박한 지식과 지칠줄 모르는 탐구 의지를 지녔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비대해진 몸과 악화된 건강 때문에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플리니우스까지. 이러한 모든 인물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것이다.

 

소설 <폼페이>는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을 중심 테마로 삼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돈과 권력,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우리 사회를 모양짓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다. 이야기 내내 미스터리에 싸여 있던 실종된 전임 수도기사 엑솜니우스도 결국에는 암플리아투스의 부정에 연루된 것으로 �혀지지 않는가!

 

슬픈 사실은, 독자가 이러한 진상이 완전히 �혀지기도도 전에 어느한 순간 전기에 감전되듯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한 줄기의 예감을 경험한다는 점이다. 설마 했던 예감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 돈과 권력으로 인해 발생되는 그 모든 부정 부패와 비리는 결국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그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결코 없어지지 않는, 그리고 우리 모두 불가피하게 안고 살아가야 하는 그 무엇임을 또 한번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슬픈 사실은 철저한 직업윤리를 지닌 아틸리우누스의 순수함과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는 코넬리아의 순수함,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후대에 전수하는 데 열 올리는 플리니우스의 순수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 모든 부패한 인물들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지만, 정직하며 순수한 의도로 이 위기를 벗아나기 위해 전념하는 이 세 사람은 부정과 비리, 폭력,테러 등이 만연하는 우리 사회에도 어느 정도의 희망이 남아 있음을 암시하는 긍정적인 요소가 아니겠는가!

 

로버트 해리스는 철저한 자료 조사와 연구로 허구에 그칠 만한 역사의 한 부분을 완벽한 현실로 재탄생시켰다. 그러나 이처럼 방대한 지식을 보유한 로버트 해리스는 역사학자도, 고고학자도, 화산학자도 아니다. 그는 언론인이다. 이처럼 방대한 자료와 깊이 있는 지식으로 작품을 써낸 그의 해박함에 찬사를 보낸다.

 

역자도 이 책을 번역하는데, 폼페이의 발굴된 유적과 유물, 고대 로마의 건축물 구조와 각종 직책들, 특히 로마 제국의 수도 시설 등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있어야 하며 인명과 지명,고유명사 표기법과  당시의 생활 풍습과 관습,제도,군제,시스템 등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하며 화산 활동에 대한 물리적 특성과 실제 분출시 현상,화산재,용암,가스,진동 등에 대해서도 공부해야만 했었다고 한다.  

                                                     - 서초동-

 

공회장(Foro)에 남아있는 기둥
폼페이의 도로
활을 쏘는 아폴로의 동상
폼페이 대극장(Great Theatre)
폼페이 아폴로 신전
잿더미에 묻힌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