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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야 하는 10가지 이유 

 

1. 사마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가이다.그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창조적인 사고와 넓고 깊은 지식을 바타으로 지금으로부터 2천 1백여 년 전에 세계적인 정신 문화유산인 <사기>라는 역사서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2. 사마천은 불굴의 의지로 참담했던 개인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그는 자신의 소신을 황제 앞에서 당당하게 밝히는 바람에 사형을 선고받고  남자로서는 가장 치욕스런 궁형을 자처한 다음 놀라운 투혼으로 끝내 위대한 역사서 <사기>를 완성했다. 사마천은 '깊은 원한을 절박한 사랑의 결정체'로 승화시킨 참다운 지성이다.

 

3. 사마천은 정의로운 지식인의 전형이다. 황제의 그릇된 판단을 두고 모두 침묵하고 있을 때, 그는 홀로 그름을 따졌다. 황제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던 전제군주 시절에 이러한 행동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는 불의와 정의, 옳고 그름을 바로 가릴 줄 아는 진정한 지식인었다.

 

4. 사마천은 시대의 흐름과 인심의 변화를 읽고 그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냉철한 인식과 역사관을 통하여 제시한 선구자적인 사상가이다.

 

5. 사마천은 투철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하는 애국자였으며, 백성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인간이다. 그는 중국 전역을 답사하며 세상과 인간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실질적인 현장경험을 쌓았다.

 

6. 사마천의 <사기>는 그 자체로 인류 역사의 살아 있는 증인이며,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7. <사기>는 인간군상의 생생한 보고서이며, 훌륭한 전기문학이고, 빼어난 문학작품이며 시대의 지침서이다.

 

8.<사기>가 없었더라면 중국 고대사 2천 여년이 사라졌거나, 그 복원에 엄청난 시간과  물질을 소모했어야 했다. 

 

9. <사기>는 실증을 중시하는 역사서이다. 그 내용은 모두 증거와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감동적인 문학작품까지 끌어 올렸다.

 

10. <사기>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책'이다. 우리가 사마천을 알고 사기를 읽어야 하는 가장 큰 까닭은 '참다운 인간성 회복'과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길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사마천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상기하며 인류의 보편적인 과제인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탐구하였는데, 인생의 의미, 치세의 태도, 인간관계 등에 대해서도 사색하게 해준다. 단 한권의 책이 문학,사상,철학을 포괄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그 속에서 강자의 부당한 핍박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고 그와 동시에 약자에 대한 인류애적 동정심을 진하게 표현했다는 점이 경이롭다. 사마천의 <사기>가 2천여 년 전의 중국 역사책이지만, 인류 전체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오늘날 한국의 젊은 부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 중에 한권으로 추천받고 있기도 하다. 

 
중국의 역사
신화와 고대
선사시대
삼황오제
기원전2000? – 기원전1600?
기원전1600? – 기원전1046
기원전1122 – 기원전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221 – 기원전206

기원전206 – 서기220
  전한
  8 – 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 – 420
  서진
  동진 오호십육국
304–439
남북조 시대 420 – 589
581 – 619

618 – 907
무주 690 – 705

오대십국
907 – 960

907 – 1125
   

960 – 1279
 
  북송   서하
1038 – 1227
  남송
1115 – 1234
 
1271 – 1368

1368 – 1644


1644 – 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 –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 – 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 사마천의 생애 

사마천 (司馬遷)은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이다. 성은 사마(司馬)이고, 이름은 천(遷)이다. 는 자장(子長)이며,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의 벼슬을 물려받아 태사령(太史令)으로 복무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후에 이릉사건에 연루되어, 이릉을 변호하다 당시 황제한 무제(漢武帝)의 노염움을사서 궁형(宮刑)을 받게 된다. 『사기(史記)』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의 한 명으로 꼽힌다.

 

 

사마천은 한나라의 역사가로 주나라 역사가 집안인 사마 가문의 후손이며,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은 전한(前漢)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太史令)으로 천문과 달력에 밝고, 고전에도 통달한 이였다. 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한 무제(漢武帝)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사기를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곳곡에서 실감나는 이야기를 기록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사마천이 36살 때인 기원전 110년, 사마담(司馬談)은 한 무제(漢武帝)가 태산(泰山)에서 거행된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는데, 죽을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것을 부탁한다. 기원전 108년, 사마담(司馬談)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사마천의 나이 42살쯤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太初曆)을 기원전 104년 한 무제(漢武帝) (태초 원년)에 완성하였다. 그후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태사령에 임명된 지 10년째 되던 기원전 99년. 마흔일곱 살이 되던 그해 사마천은 자신의 인생에 중대한 전환이 되는 뜻밖의 사건을 맞이 하게 된다.  한 무제(漢武帝)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명장 이관의 손자인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족와의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패전을 하여 항복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한 무제(漢武帝)는 매우 진노하여, 이릉(李陵)을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重臣) 회의를 열었다. 신하들은 얼마전까지 이릉의 승리에 그렇게 환호하던 모습은 없고 모두들 이릉(李陵)을 비난하고는 이릉(李陵)의 가족들을 모두 능지 처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사마천 이릉(李陵)의 충절과 용감함을 찬양하고 변호,두둔했기 때문에 한 무제(漢武帝)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릉이 흉노에서벼슬까지 받는 사태가 발생되자 사마천에게 더욱 나쁜 상황이 되어 결국 사형으르선고 받으나, 사마천은 50만 전을 내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으나 치욕을 감수하고 자청하여 궁형(宮刑)을 받고 석방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宮刑)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다.사마천은 아버님의 유언대로 사기를 완성하기 위하여 구차한 목숨을 구걸하여 궁형을 자청하였던 것이었다.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 사기(史記)의 편찬을 완료 하였다.

 

그후 한 무제(漢武帝)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되었다.

 

* <사기>의 가치

 

<사기>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에 걸쳐 살았던 서한(西漢)시대의 사관 사마천이 서술한 역사서로, 멀게는 전설시대 삼황오제로부터 가깝게는 사마천이 살았던 황제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약 3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중국 최초의 방대한 통사이다.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5천 년 역사중에 5분지 3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사기>는 역사책이면서도 문장에 힘이 넘치고 우아하며 깊이가 있으며 인물 묘사는 그때 그 사람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사기> 속의 인물들은 제왕에서 유협까지, 성인에서 모사까지, 혹리와 청백리, 풍운의 영웅에서 강호의 방랑자까지 그리고 코미디언, 국제 로비스트, 사업가, 점쟁이, 아첨꾼, 킬러 등등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사기>안에서는 다양한 인간상이 그 시대와 함께 사마천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경험을 동력으로 삼아 펄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들의 행적을 읽다보면 시간과 공간, 제도와 문물의 차이를 뛰어넘어 도데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된다. <사기>는 살아 있는 시대의식을 불어넣은 훌륭한 '인류의 백과전서'인 것이다.

 

<사기>에 기록된 역사의 시기는 전설시대부터 서한 무제시대까지이다. 주나라가 힘을 잃고 동쪽으로 쫓겨간 기원전 770년부터 진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약 550년은,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정신생활과 물질문명이 활기를 띠고 발전한 시기로, 이 시기를 '춘추전국' 시대라 한다. 이 시기는 수많은 사상가가 나와 나름대로의 논리와 철학을 제시한다. 난세였지만 인간과 삶, 국가와 제도, 사상과 철학 등에 관한 진지한 논쟁이 무한하게 펼쳐진 중국 문명사의 전성기였다. 만약 <사기>의 기록이 없었더라면  흔히 '제자백가'로 대변되는 이 시대 사상계의 면모는 제대로 �혀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춘추시대 이후 주 왕실이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2백 여 제후가 약육강식의 치열한 투쟁을 벌인 결과 7대 강국이 대치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후반기 2백여 년은 여러 나라가 더욱 치열하게 싸웠던 전국시대였다. 여러 영웅들이 피나는 싸움을 거듭한 결과 진(秦)이 최후의 승자가 되어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우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기원전 210년 통일의 주역인 진시황이 죽자, 천하는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남의 집에서 고용살이 하던 진섭(陳涉)이 "황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어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이냐" 라며 힘찬 구호와 함께 농민 봉기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진 제국을 멸망시킨다. 천하는 군웅들의 각축장으로 바뀌고 이 혼란속에서 난세를 극복할 영웅으로 항우와 유방이 시대의 전면에 떠 오른다. 모든면에서 대조적이던 이 두 영웅을 중심으로 몇 년간 '초.한.의 쟁패'가 전개되었고 그 결과 유방의 한이 기원전 202년 천하를 다시 통일 하게 된다.

 

사마천은 이 과정을 수많은 영웅들과 그들을 따르는 인간군상의 활약상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재현하였다. 신의와 배신, 뛰어난 전략과 음모, 성공과 실패, 혼란과 통일의 전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를 묘사하고 서로의 성격을 비교함으로써 장쾌한 서사구조를 펼치고 있다. 또 수 천년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시.공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으며, 그것을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펼쳤던 행적을 통해 실감나게 뒷받침하였다. 역사의 주체를 철두철미하게 인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의 총화로 파악한 사마천의 역사 인식은 그 후의 역사서술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 체제와 내용을 완벽하게 결합한 <사기>

<사기>는 유일무일하게 체제와 내용이 완벽하게 결합된 통사이다.

 

사마천은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하에 잊혀진 옛 일들을 모조리 망라하고 그것을 비교.검토하여 성공과 실패, 흥기와 파멸의 이치를 고증하고 싶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기의 출발점이다. 여기에 앞 시대의 각종 기록들과 역사 편찬법들을 종합적으로 흡수하고 이를 활용하여 130권 52만 6천5백자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책을 만들어냅니다.

 

130권은 다시 '본기', '표','서','세가','열전'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 체제가 바로 새로운 역사 서술체계인 '기전체'이다.

 

먼저, '본기'는 제왕의 역사가 담기어 있으며 모두 12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설시대의 황제로 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시기까지 역대 제왕의 흥망과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은 단순히 제왕들의 역사적 사건 기술에만 머문 것이아니라, 그들 전후 계승관계를 통해 역사 발전과정과이를 이용해 역사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탁월한 안목을 부여주고 있다.

 

본기는 기본적으로 제왕들의 기록이기는 하나 제왕이 아닌 인물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사마천은 후대 보수적 정통주의자들이 제왕으로서 그 지위를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인물까지도 본기에 담았다. 항우와 진시황이 그 주인공이며, 여성인 여후(呂后)를 본기에 편입시킨 점은 더욱 파격적이다.

 

사마천이 항우와 진시황, 그리고 여후를 본기에 편입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마천이 본기 서술의  중점을 역사의 큰 흐름에 두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마천은 누가 되었건 시대를 단절시키지 않고 천하 형세를 장악했다면 본기에 편입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역사관을 가졌던 것이다.누가 되었건 시세와 대세를 주도한 자의 기록, 이것이 바로 본기이다.

 

두 번째, '표'는 사건 위주의 본기를 알기 쉽도록 배려한 부분이다. 시간과 세대가 다르면 연도가 불분명하기에 표를 만들었다고 한다. 표는 �힌다는 뜻이며 총 10권으로 세표, 연표, 월표의 세 종류로 되어 있다. 먼저 왕조 순서에 따라 역사를 약간의 세 단계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대. 연. 월로 나누어, 큰 사건을 간명하게 나타내는 동시에 사건 전체를 서로서로 연계시키고 보완하게 한다.

 

사마천은 지난 3천 년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다섯 단계로 나누었는데, 10편의 표로 구분하였는데,

1) 춘추 이전 : 삼대세표

2) 춘추 : 심이제후연표

3) 전국 : 육국연표

4) 진.초 교체기 : 진초지제월표

5) 한 : 한흥이래제후왕연표~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상기 '표' 중에서 진.초 교체기는 기원전 210년 진나라 호해 원년부터 한고조 5년인 기원전 202년까지, 단 9년 이라는 짧은 교체기를 월 단위로 세밀하게 기술하였으나 나머지 표는 1년 단위로 기술하였다는 차이점이다.즉 교체기의 세 영웅인 농민봉기군의 수령 진섭(陳涉,진승), 구귀족 세력의 대표 항우, 말단 관리 출신으로 농민봉기군을 이끈 유방의 역사적 작용에 주목한 결과이다. 사마천은 이 세 인물로 천하 정세의 흐름과 변화를 간파하는 탁월한 역사 안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항우를 본기에 편입하고 진섭을 세기에 편입하였던 사마천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있다.

 

세 번째는 모두 8권으로 된 '서(書)'이다. 서는 예의(에서), 음악(악서), 천문(천관서), 달력(역서), 수리(하거서), 경제(평준서), 군사(율서), 종교(봉선서),에 관한 당시 사회의 중요한 제도를 전문적으로 논술한 것으로, 당나라 때 역사학자 사마정은 '국가의 대체에 관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즉 국가를 운영하는 여러 분야의 시스템에 비유할 수 있다.

 

8서는 국가의 문물제도에 대한 서술이자 그것의 운영원리 내지 운영철학까지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내용이 깊이가 있고 광범위한 지식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래된 제도의 근원을 �히고 그것의 변화를 거시적인 안목에서 분석한 다음, 나아가서는 그 폐단과 장단점까지도 지적한 고도로 응축된 지식이다.그 중에도 상업과 상인을 극도로 억압하던 시대적 분위기에서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자유경제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아울러, 경제가 인간의 생활은 물론 심리에 미치는 영향관계까지 간파한 <평준서>는 사기 전체를 통틀어 백미로 꼽힌다.

 

네 번째, '세가'는 3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춘추전국 이래 한대에 이르는 주요한 제후들의 역사 기록이 담겨 있으며 세가의 의도는 본가와 비슷하다.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 농민봉기군의 우두머리였던 진섭은 제후가 이닌 인물인대도 세가에 포함시키는 의미심장한 파격이 눈에 띤다. 사마천은 국가정치와 사회역사에서 천자(황제)가 차지하는 중심적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세가라는 체제를 창설할 수가 있었다. 계급적 관점에서 보자면, 봉건전제주의에 입각한 중앙집권 국가가 건립되는 역사 단계에서 국가통일과 중앙집권 그리고 사회안정을 강조하는 통치계급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가 바로 세가이다. 체제와 형식을 창조하여 역사의 진보적 요구를 수용했다고 할 수 있다.

 

1) 오태백세가, 전경중완세가에 이르는 16편으로 귀족제후에 관한 기록이다.

 

2) 공자세가는 공자의 저서 <춘추>를 비롯하여 유가 경전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집대성하였던 공적과 천자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던 그의 위대한 공적을 인정한 경우이며

 

3) 진섭세가는 세가의 백미로 진섭은 진나라 멸망의 근원지가 진섭이며 진섭의 봉기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는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고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한 것과 연계시켰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춘추와 연계하여 '혁명'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세가에는 역사를 주도하고 흐름과 변화를 이끈 역사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라면 편견없이 세가에 기록하였는데, 이때의 기준은 '천하의 존망'에 관계되느냐 아니냐 이다. 소하.장량.주발,진평 등을 세가에 포함한 이유도 이로 이러한 기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기준은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이들 공신들에 대한 야유와 조롱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들이 보여준 굴종적 치세 등이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또 한 사람, 한신이 상당한 작용을 하고 있는데, 유방은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한신에 비해 한단계 아래이나 한신은 반역을 도모한 죄목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세가에 편입되지 못하고 열전으로 내려가게 된다. 사마천은 한신의 처지를 동정하였던 것이다. 원칙적으로 한신을 열전으로 내려 보내기는 했지만 한신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런 절묘한 안배는 주아부와 조참에 대한 기록에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4) 외척세가,초원왕세가,형연세가,제도혜왕세가,양효왕세가,오종세가,삼왕세가의 7편으로 모두 한나라 왕실과 종친들에 대한 기록이다.

 

 

5) 소상국세가,조상국세가,유후세가,진승상세가,강후주발세가의 6편은 한나라를 개국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공신들에 대한 기록이다.  

 

다섯 번째는 사기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열전'편이다. 왕.제후 이외의 인물에 대한 기록으로 모두 70권으로 되어 있다. 사회 각 계층에서 수도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독특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여 사마천의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가장 잘 엿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전전(專傳,한사람 전기), 합전(合傳,생애나 사상이 비슷한 두사람 이상의 전기를 한편에 합친것), 부전(附傳, 한사람의 전기 뒤에다 그와 관련된 사적이나 가까운 인물의 전기를 덧붙인것), 유전(類傳,같은 부류의 인물들을 같은 전기에 거의 같은 비중으로 다룬 것) 등이 있으며 기타 잡전,휘전등이 있는데 '혹리열전', '자객열전' 등이 이에 속한다.

 

마지막 권은 <자서>로 성격이나 특징으로 보아 전전에 포함시켜도 무방하나 사기를 서술하게 된 동기와 취지 및 129편 전체의 핵심과 개략적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별도의 유형으로 '저자의 후기'로 볼 수 있겠다.

 

사기가 갖는 특징과 장점은 무수히 많으나, 사기는 사마천의 파란만장한 인생이라는 삶의 경험과 그것을 바탕으로 형성된 세계관을 체현한 서사시이다. 냉철한 역사관을 더욱 객관화하고 심화시키기 위해 사마천은 자신이 살았던 당대뿐만 아니라 아득한 전설시대와 상고시대로까지 역사의 시.공간을 넓혀 놓았다. 사기는 인간들의 삶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파노라마 처럼 펼쳐지고 있으며 마치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기는 발로 쓴 역사서이다. 그는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고 기록과 후손,증인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 사적지와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기록을 수집하였다.

 

인물에 대한 비평은 날카로우면서도 끝까지 공정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인물의 장단점을 여러가지로 분석하여 때로는 섬뜩하리만치 준엄한 비평을 가하지만 끝까지 따뜻한 인간애를 잃지 않으려 하였으며 적절하게 균형을 잃지 않는 범위내에서 자신의 견해를 제기한다.

 

사기는 사마천의 삶과 역사관을 지혜로 아로새긴 예술이다. 고통과 치욕을 견디고 죽음보다 더한 고독과 싸우며 탄생시킨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이다. 시종 합리주의와 인도주의적 입장을 잃지 않고 있으며, 어느 쪽도 버리지 않는 조화의 정신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도 읽어야 하겠지만 지혜로 읽어야 하고 지혜 없이는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사기는 인간을 위한 책이며 인간을 탐구하며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좌표가 된다. 인간관계와 관련하여 많은 메세지를 우리들에게 던져주고 있는 책이다. 인간학 교과서이며 인서(人書)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책은 최근 한국의 젊은 부자들이 가장 많이 탐독하는 저서로 밝혀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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