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촉의 유비

 

'황제에게 길을 묻다'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촉의 유비 -

 

4.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촉의 유비       

중국의 역사
신화와 고대
선사시대
삼황오제
기원전2000? – 기원전1600?
기원전1600? – 기원전1046
기원전1122 – 기원전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221 – 기원전206

기원전206 – 서기220
  전한
  8 – 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 – 420
  서진
  동진 오호십육국
304–439
남북조 시대 420 – 589
581 – 619

618 – 907
무주 690 – 705

오대십국
907 – 960

907 – 1125

960 – 1279
  북송 서하
1038 – 1227
  남송
1115 – 1234
1271 – 1368

1368 – 1644


1644 – 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 –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 – 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 관우, 장비와 형제의 연을 맺고 천하를 도모하다.

유비는 탁군 탁현에서 서기 161년에 태어났다. 한 왕실의 자손으로 아버지 유홍은 동군 범현의 지사였지만 일찍 죽었다. 유비는 어머니 손에 자라면서 어머니를 도와 짚신과 돗자리를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유비는 어머니로 부터 '그래도 우리 집안은 뼈대있는 가문이란다'라는 소리를 자주 들으면서 자랐다.

 

유비는 15세 때에 고향을 떠나 고향 선배인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자발적인지는 모르나 유비는 어려서 부터 책읽기 보다 사냥,음악,옷 등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유비는 체격이 특이하여 팔이 길었으며 귀가 크서 곁눈질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말수가 적고 남에게 겸손했으며, 기쁨이나 슬픔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며 호협들과 사귀기를 즐겨 주변에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함께 공부하던 동문 중에 유덕연이라는 친척이 있었는데, 유비는 학비는 물론 여러가지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또 동문중에 공손찬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와 마음이 맞았던 유비는 그를 형으로 모셨다. 공손찬은 후에 군웅들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유비의 � 보호자가 된다.

 

공부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유비는 평생 행동을 같이 할 관우와 장비를 만나게 된다. 관우는 운장 하동군 회현사람이나 고향인 하동군에서 죄를 저질러 탁군으로 피해왔으며 유비를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장비는 자는 익덕,탁군 사람이다. 관우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장비는 관우를 형으로 모셨다. <삼국지연의>에 '도원의 결의'에 나오는 장면이지만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 유비 드디어 세상으로 나서 천하의 영웅들과 어깨를 겨루다.

환관과 외척들의 세력 다툼으로 혼란스럽던 후한 왕조는 서기 148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으로 통치 능력을 상실했다. 마침내 조정은 동탁에게 제압당하고, 지방에서는 반란을 진압하여 실력을 쌓은 군웅들이 각지에서 할거해 전쟁을 반복했다. 기주.청주.병주를 지배한 원소, 유주의 공손찬,연주의 조조,양주의 원술,서주의 도겸.여포, 강동의 손책과 손권,익주의 유연 등 십여 명에 가까웠다. 유비는 이런 군웅들과 때로는 적대하고 때로는 연합하여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유비는 황건적 난을 토벌하기위한 한 왕조의 의용군 모집에 참여하여 황건의 난 토벌에 세운 공으로 안희현의 경찰서장인 위에 임명되나 얼마가지 않아 지방순찰관과의 마찰로 그만두었다. 또 단양군에서 다시 의용군에 자원하여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하밀현 부지사로 임명된다. 다시 고당현의 위가 되어 지사까지 승진했으나 반란군에 패해 유주위 공손찬에게로 도망간다. 중량장근위군 사령관으로 출세한 공손찬은 유비를 별동대 대장으로 기용해 원소군과 싸우게 했다. 유비은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평원현 지사에 임명되고 나중에는 집정관으로 발탁된다.

 

이때서야 비로소 군웅들 사이에 유비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년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하자 도겸은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유비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도겸의 지휘를 받았다. 본거지로 소패 땅을 받고 예주 자사 감찰관으로 추천을 받았다. 194년 유비도 드디어 자신의 근거지를 손에 넣었다. 마침 도겸이 병으로 죽자 소주 땅도 유비 차지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유비는 상승기류를 타는 듯 했으나 가진 힘이 부족했다.

 

이때 유비의 발목을 잡은 사람이 여포였다. 날뛰는 호랑이 처럼 용맹한 여포는 책략이 부족했으며 경박하고 교활해 배반을 일 삼는 난세형 인물이었다. 조조의 공격을 피해 서주로 몸을 의지하려 온 여포는 서주가 원술의 공격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빼았았다. 여포에세 당한 유비는 너무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서기 196년, 서주를 빼았긴 유비는 어쩔수 없이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려 간다. 조조는 한의 헌제를 자신의 본거지인 허로 맞이해 그 기세가 떠오르는 태양과 같았다. 조조는 유비를 맞아들여 전식으로 예주의 목장관에 임명하고 패에 주둔하게 하였다.그리고 병력과 군량미도 지원하는 등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유비가 한 황족 후예라는 점과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모양이다.

 

조조는 198년에 여포를 죽인 후에도 유비를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그를 우대했다. 유비는 암암리에 조조를 암살하는 중심인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유비는 조조로 부터 벗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후 조조는 유비에게 원소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조조에게서 벗어 날 좋은 기회를 얻은 유비는 병사를 이끌고 서주로 향했는데, 조조는 책사들이 '유비는 장래 위험인물로 미리 제거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조조가 뒤늣게 유비를 잡으려고 군사를 보냈으나 유비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서주를 토벌한 유비는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때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조조는 원소보다 유비 토벌을 우선시 하여 서주로 향하였다. 의표를 찔린 유비는 처자식을 버리고 달아나 원소에게 의지했다. 서기 200년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와 대결하는데, 유비는 별동대가 되어 조조군을 후방을 교란하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가, 원소군이 패하고 조조군이 승리하자 유비는 조조의 공격을 당할 수가 없는지라 형주의 유표에게 도망갔다.

 

형주의 유표는 어느편에도 붙지 않고 천하의 정세를 관망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놓고 있었다. 유비가 보호를 요청하자 유표는 귀한 손님으로 맞이하여 신여현을 주고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유비는 201년부터 208년까지 7년동안 유표에 기대었다. 조조는 북중국 전역을 제압하였지만, 유비 자신은 여전히 뿌리 없는 풀처럼 더부살이를 하고 있으니 자신이 한심하여 견딜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게 된다. 이때 유비의 나이는 47세였고 제갈량의 나이는 27세 였다. '삼고초려' 등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는 '사람됨을 알고 인재를 기다린다'는 평가를 받는 유비의 진면목일 것이다.

 

* 천하의 지략가, 제갈량을 얻다.

유비의 배려는 헛되지 않았다.제갈량의 입에서 '천하삼분의 계'라는 뛰어난 장래구상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제갈량의 계략은 다음과 같다.

1) 조조는 이미 백만 대군을 보유했으며, 황제를 끌어안고 천하를 호령하기 때문에 싸워도 승산이 없다

2) 강동의 손권은 양쯔 강이라는 요충지를 손에 넣고 있으며, 백성들과도 친숙하기에 적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3)형주는 교통의 요지이며 기름진 들판이 넓게 펼처져 있으나 유표는 지킬 능력이 없다.  서쪽의 익주도 천혜의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곡창지대이지만 유장이 계속 이곳을 지킬만한 능력이 없다

4) 따라서 유비는 형주와 익주를 손에 넣어 밖으로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기회를 봐서 동서에서 조조를 토벌해야 한다.

 

이는 미래의 구상이지만 당시의 정세분석이기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천하삼분의 계를 제시한 제갈량과 유비는 점점 친밀해져 갔다.제갈량과 같이 뛰어난 전략가를 발견한 유비는 관우와 장비의 불평불만을 설득하고 제갈량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백성을 저버리지 않는다.

북방 이민족인 오환족의 세력을 몰아낸 조조는 서기 208년 7월,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천하통일의 완성에 들어간다. 목표는 형주의 유표와 강도의 손권이었다. 형주에는 유표가 죽고 아들 유종이 뒤를 이었는데, 조조의 세력에 겁먹은 유종은 싸워보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번성을 지키고 있더 유비는 유종이 항복하자 서둘러 철수했다.유비는 유표묘를 �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을 고하고 남하한다. 이러한 유비의 인간적인 매력이 그의 성공기반이 된다. 

 

유비는 앙쯔 강 북부 연안에 있는 강릉으로 향했다. 강릉은 물자가 풍부하여 조조에게 대항하기에 좋은 전략 요충지였다. 유종의 가신들과 백성들이 유비의 뒤를 쫓아 유비쪽으로 몰려들었다. 유비는 중신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백성들을 배에 먼저 태우고 강릉으로 출발시킨 다음 자신은 육로로 이동하다가 조조군의 추격을 받아 처자식을 버리면서 도망한다.

 

* 형제, 관우를 잃다

조조의 추격대를 간신히 피한 유비는 제갈량을 보내 강동의 손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오의 손권은 중신회의 끝에 반대를 물리치고 조조의 군대와 대적하게 된다. 손권은 결국 적벽에서 조조에게 대승을 거두게 된다. 조조의 천하통일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유비는 조연에 불과했지만 형주일대에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는 큰 이익을 얻게 된다.그러나 나중에 형주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익주의 유장이 유비에게 조조의 공격에 구원을 요청한다. 이는 전부터 촉 땅을 노리던 유비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재갈량과 관우 등을 형주에 남기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촉으로 향했다. 그리고 3년후 서기 214년에는 유장을 항복시키고 촉 땅을 얻었다. 3년이란 기간은 유비에게 대의명분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촉을 지배하게 된 유비는 촉의 신하들과 관우,장비,제갈량 등으로 구성된 정치체제를 잘 혼용하여 나라를 정상궤도에 올렸다. 삼국정립의 화평속에 형주를 적절히 손권과 합의하여 분리하였고 한중을 조조에게 양보해 적당한 시기에 북방 진출의 교도보를 준비했다.

 

그런데 형주의 관우에게서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형주의 관우는 219년 지금이 위를 공격할 호기로 생각하고 군사를 몰아 위 땅 번성을 공격하였다. 조조는 처음 당황하였으나 참모인 사마의의 진언으로 손권에게 사자를 보내 관우를 치는 조건으로 양쯔강 이남지역 할양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자 손권은 동의하였다.관우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본거지가 점령되자 번성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으나, 손권 군사들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어 참수되었다. 형주는 다시 오의 영토가 되어 버렸다. 유비는 관우가 참살되었다는 사실에 원한은 손권에게 집중되었으며 원수를 갚기 위하여 손권 토벌 준비를 했다.

 

이듬해 220년 정월, 조조가 뤄양에서 사망하고 아들 조비가 위 왕의 자리를 이었다. 조비는 10개월 후 한의 헌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라 위 왕조를 열었다. 221년 4월 유비도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올라 촉 땅에 한 왕조를 세웠다. 위에 멸망한 한 왕조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대의명분이었다.

 

유비는 황제가 되었지만 손권에 대한 원한은 잊을 수가 없었다. 제갈량의 생각은 오와 동맹을 맺어 위에 대항한다는 전략이지만 유비는 결국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천하를 버리고 만다.

 

* 신하에게 아들을 맡기는 두터운 믿음

221년 6월, 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하여 유비가 이끄는 촉 대군은 양쯔 강을 내려와 일제히 오나라를 침공했다. 손권은 이미 유비의 움직임을 알고 위와 동맹을 맺고 육송을 방어군 사령관으로 하여 대비케 했다. 처음에는 유비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으나 육송의 오나라 군대는 싸움을 하지 않고 방어만 하였다. 세월은 반년이 지났다. 피로한 유비군은 지쳐서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중 육송의 오나라 군대가 반격을 시작하였다. 결국 유비군은 대패하게 되고 유비는 백제성으로 도망하였다. 육손에게 대패한 유비는 재기를 노렸지만 서기 222년 봄에 병을 얻어 자리에 누었다. 다음해 봄이 되자 유비는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 승상인 제갈량을 불러 후사를 맡겼다.

 

" 그대 재능은 조비보다 열배는 뛰어나오. 그대가 나라를 안정케 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리라 믿소! 만약 내 아들 유선이 보좌할 만한 가치가 있는 눔이라면 부디 보살펴 주시기 바라오. 하지만 기량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대가 대신 황위에 오르시오."

 

제갈양은 눈물을 흐리면서 대답했다.

 

"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여 제 목숨과 바꿔서라도 유선님을 지켜드릴 것 입니다"

 

유비는 신하인 재갈량에게 죽으면서까지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 나라와 아들의 장래를 그이 손에 맡겼다. 결국 그것이 제갈량의 분골쇄신을 끌어냈다. 진수가 "실로 고금의 모범이 되는 군신 관계다."라고 하였다.

 

 유비는 촉한의 초대 황제 재위 서기 221-223년 간 조조와 함께 <삼국지>의 영웅 중 한 사람이다. 몸뚱이 하나로 후한말의 군웅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동분서주하기를 35년. 고난 끝에 촉 땅에 자립해 촉한 왕조를 세우고 '삼국정립'의 한 축을 형성했다. 위의 조조와 오의 손권과는 달리 처음부터 기반이 없었던 유비는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적, 오늘의 적은 내일은 친구' 라는 변화무쌍한 정세속에서 종종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그의 정치 인생은 굴곡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몰락했나 싶다가도 불사조처럼 되살아났고, 마침내는 작기는 하지만 촉 땅에 자립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삼국지> 진수의 평가에 따르면,

" 유비는 넓은 견식과 강한 의지, 풍부한 포용력을 소유했으며, 중요한 인물에게는 대범하고 겸손했다. 그야말로 고조의 풍모가 엿보였으며 영웅의 그릇이었다. 죽음이 다가오자 신하인 재갈량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 나라의 장래와 아들의 미래를 모두 그의 손에 맡겼다. 여기서는 사적인 감정을 한 점도 �을 수가 없다. 이 군신관계는 고금의 모범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유비의 정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어려움에 몰릴 때마다 여포,조조,원소,유표와 같은 군웅들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들도 나름대로 정중하게 유비를 맞이했으며 손님으로 대했다. 그러나 유비는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몸을 의지할 상대를 바꿨다. 이런 점에서 유비가 대접받은 이유는 한 왕실의 후예라는 점과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인간적인 매력이 넘쳤다는 점이다. 한 왕실의 후예라는 점은 그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 무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만든 것이 유비의 인간성이었다. 그는 그의 신하들에게도 인간적인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는데,관우,장비,조운,재갈량 등이 목숨을 걸고 유비를 모셨던 이유이다.

                                                         -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