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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중국의 삼국시대

 

 

중국의 삼국시대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후한 왕조의 권위는 붕괴하여 동탁이 낙양으로 입성하여 환관을 주멸하고, 황제의 폐위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동탁 토벌군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산둥에 있던 조조도 189년에 군사를 일으켜 황건적을 격파하고 동탁을 토멸하여 후한의 헌제를 옹립해서 기주목사 원소와 화북지방을 양분하였다. 양자는 202년 관도에서 자웅을 결하였으나, 이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화북지방의 지배권을 거의 확립하였다.

 

 한편, 형주목사 유표에게 식객으로 있던 유비는, 현신 제갈량의 협력을 얻어 형주를 빼앗아 손에 넣고 오()의 손권과 동맹하여 조조의 남하를 저지하였으며, 211년에는 익주를 공략하여 이 지방을 빼앗았다. 그 후 오()의 손권은 유비와 싸워서 형주를 손에 넣었으며, 거의 양쯔강의 중 ·하 유역을 세력하에 두었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는 후한의 헌제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케 하고, 낙양에 도읍하여 위국()이라 칭했다. 그 전년에 한중왕을 호칭하던 유비는,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칭하여 성도에 도읍하고, 한제 또는 촉한제라 칭하였다(221). 손권은 처음에 위의 오왕으로 봉해져 있었으나, 222년에는 스스로 연호를 세우고, 또한 229년 오제의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여기에 3국의 분립이 확정되었다.

 

 3국 가운데 화북에 있던 위는 병호제 ·둔전제 ·구품관인법 등을 실시하여, 군사적 ·경제적 기초를 공고히 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촉한은 국토도 좁고 가장 약하였으나, 한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서 중원의 회복을 뜻하여, 수차에 걸쳐 위에 도전하였다. 그 후 위에서는 사마 의가 중심이 되어 이를 격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마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 소는 263년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진왕에 봉해졌으며, 265년에는 그의 아들 사마 염이 위제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받고 진()나라를 세웠다. 이 사람이 서진(西)의 무제이다. 무제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재차 중국을 통일하였다.

 

위(魏) 

《삼국지》에서 정통으로 삼고 있는 위나라는 220년(황초 원년) 후한 왕조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으면서 265년(진시 원년) 사마염에게 선양하기까지 5대 황제 46년 간에 걸친 왕조로, 실제 건국은 조조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다.

 

 189년(중평 6년) 조조는 여러 제후와 함께 동탁 토벌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데, 이때 조인, 하후돈, 하후연 등 조조의 일족이 그를 따른다. 191년(초평 2년)에는 일찍이 청류파 지식인이었던 순욱이 조조의 진영에 가세한다. 순욱은 곽가, 순유, 종요 등 국방과 내정 면에서 활약하는 여러 명사들을 천거했다. 192년에는 황건적의 잔당을 굴복시켜 자기 군사로 흡수한 다음 정예를 선발해 ‘청주병’으로 부른다. 이 정예 부대가 대륙 각지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조조는 원술, 여포, 원소 등을 쳐부수고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적장이었던 장료, 장합, 가후와 같은 인재를 얻는다. 조조는 옛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 ‘재능제일’이라는 인재등용 방침은 210년에 ‘구현령’으로 공포되는데, 여기에 기라성 같은 인재가 모여들어 크게 활약하게 된다. 이것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조조의 수집벽인데, 알고 보면 조조의 뛰어난 통솔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후한 왕조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지만 조조는 황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6년(건안 원년)에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받들어 허창으로 천도한다. 이때 원소의 참모도 황제를 영입할 것을 진언하지만 원소가 주저하는 사이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조조는 황제를 봉대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얻어 관군이 되고,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는 조정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에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은 현지 조달로 식량을 충당했는데, 식량이 남으면 버리고 부족하면 약탈하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농촌은 황폐해지고 유랑민이 급증했다. 이에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는 일은 강력한 군대와 충분한 식량에 달려 있다”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 계획적으로 식량을 생산·저장하려고 시도한다. 이리하여 백성을 모집해 빈농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허창 주변에서 둔전시킨다. 이미 둔전제 자체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조조의 둔전제는 각지에 전농부를 설치하고 전농관이라는 농업 전업관에게 이를 관리하게 했다. 그래서 사방을 정벌하는 데 식량을 수송하는 노고가 없어져 삼국시대 최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조조는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208년에 승상, 213년에 위공, 216년에 위왕이 되어 이미 제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는다. 조조가 죽은 지 9개월 후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음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조비가 황제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병사한 후 위나라는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그 뒤를 이은 조예조차 239년(경초 3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후계자 조방은 이때 겨우 8살로, 사마의와 조상이 후견인이 된다. 곧이어 조상은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고 정무에서 소외시키지만 사마의의 노회환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 249년(정시 10년) 사마의는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등을 실각시키고, 그에게 무고한 반역죄를 씌워 삼족을 모두 멸하고 만다. 이리하여 조씨 일족은 쇠퇴하고 실권이 사마씨에게 옮겨지며,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에게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254년(가평 6년)에는 이풍, 장집 등이 주도한 사마사 제거 계획마저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고, 황제 조방도 폐위를 강요받는다. 이때부터 관구검, 문흠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257년(감로 2년)에는 제갈탄의 반란이 일어나지만 모두 진압되어 사마씨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소된다. 260년에는 조방의 뒤를 이은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고 수백 명의 측근을 이끌고 출격하는데, 반격하는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지만, 사마소가 갑자기 죽게 된다. 마침내 265년(함희 2년) 아들 사마염 시대에 선양에 의해 진(晉)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다.

 

 

촉한(蜀漢)

 전한 경제의 후손 현덕 유비가 촉(사천성)에다 창건하였다. 정식 명칭은 한(). 계한()이라고도 하며, 촉()·촉한으로 통칭한다. 후한() 말 황건적의 대반란이 일어나 후한의 권위가 무너지자 군웅할거의 정세는 결정적이 되었다. 


 형주 목사 유표의 객장이던 유비는 유표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종이 조조에게 투항하자, 제갈량의 협력을 얻어 천하 '3분의 계'를 세우고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 전투에서 조조를 격파하고 형주의 목사가 되었다. 이리하여 양쯔강 중류 유역을 거의 장악하자, 익주(성도) 목사 유장을 공략하여 스스로 익주 목사가 된 뒤 219년 스스로 '한중왕'이라 칭하였다.

 

 다음해 조비가 한제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자, 221년 유비도 또한 제위에 올라 수도를 성도로 정하고, 고조 이하의 종묘를 세워 한()의 정통성을 명백히 하였다.


 다음해 손권도 연호를 세웠으므로 바야흐로 3국 정립의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를 둘러싼 촉한·오()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유비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오를 쳤으나 백제성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후사를 위임받은 제갈량은 후주 유선을 잘 보좌하여, 오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하고 산업을 장려, 민력을 기른 후 운남·구이저우(귀주)를 토벌하여 이를 개발하는 등 국력을 강화하였다. 


 동시에 중원을 회복하고자 자주 북벌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34년 우장위안(오장원)에서 대전 중 병사하였다. 그후 장완·비위·강유 등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해마다 일어난 위()와의 전쟁 때문에 환관 황호의 전횡까지 겹쳐, 국력이 쇠퇴하여 263년 위군의 대공격에 유선이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오(吳)

 한말 군웅의 한 사람인 부춘(절강성 부양현)의 호족 손견이 원술 밑에서 동탁을 토벌하여 세력을 얻고, 그의 맏아들 손책은 영쯔강 동쪽의 여러 군을 평정하고, 동생 손권에 이르러 208년(건안 13) 유비와 결탁, 조조의 대군을 적벽 싸움에서 크게 무찌른 뒤, 천하를 3분하여 그 하나를 영유하게 되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 헌제로부터 제위를 양도받아 위()의 황제가 되자 손권도 오왕에 봉해졌으나 222년 스스로 연호를 황무라 부르고 229년 위와 촉한()의 싸움이 격화하자 그 틈을 타고 무창에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오'라 하고 도읍을 말릉(현재의 남경)으로 옮겨 그곳을 건업이라 불렀다.

 

 오는 손권 때 위세를 떨쳤으나 그가 죽자 국내의 대성들이 서로 싸우고 내란도 자주 일어나 국력이 쇠퇴하였다. 263년 촉한이 위에게 망하고, 위가 진()에게 망하자 진은 대군을 파견하여 오를 공략하였으므로 280년 건업은 함락되고 오는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