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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권모술수에 뛰어난 '난세의 간웅' 조조

 

'황제에게 길을 묻다'

 

권모술수에 뛰어난 '난세의 간웅 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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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조조

조조(曹操, 155년~220년)

 

*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 될 운명을 태어나다.

조조는 서기 155년 패국의 초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한 고조 유방 밑에서 승상까지 오른 조참이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왜나하면 조조의 할아버지 조등이 환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조가 실제 조참의 피를 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능한 환관이었다. 그는 30여 년 동안 궁중에 있으면서 네 황제를 모셨는데, 그동안 단 한번의 실수도 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년에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비정후에 봉해지기도 하였는데, 자손을 이을 능력이 없던 터라 숭이라는 양자를 들였다. 숭이 본래 어느 집 소생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하후씨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숭은 대신을 역임한 후 만년에는 국방장관격인 태위까지 승진했으나 당시에는 실권은 없었다. 조조는 이 조승의 아들이었다.

 

소년 시절 조조는 말도 못할 만큼 불량소년이었다. 그는 재치가 넘쳤고 정도를 걷기보다는 권모술수를 부리기 좋아했다. 그러나 보통의 불량소년들과는 달리 전혀 수행을 쌓지는 않았다고 하며 한편 비범한 기운을 내뿜었다고 한다. 조조의 행동은 가짜 중풍 흉내를 내는 방법으로 작은 아버지를 우롱하는 이야기를 보면 때로 방탕하고 무례했다.

 

* 성공을 위해 잔혹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독선적인 인물

조조는 청년이 되면서 환관의 자식이라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상류사회의 멸시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명사들과 사귀기를 즐겨하고 그중에서 허소, 태위 교현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추천을 받아 뤄양 북부 지방에 지금의 경찰서장격인 위로 취임하여 관리로써 � 발을 내딛는다. 조조는 자신의 좌우에 다섯 색깔로 칠한 봉을 10개를 만들어 놓고서는 금기사항을 어기는 사람은 가차없아 그 봉으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 조조는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였고 영내 관원들의 부정과 부패를 뿌리 뽑았다고 한다.

 

이런 정의로운 관료의 모습은 그야말로 '치세의 능신'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당시 한 왕조는 내로는 환관과 외척의 대립과 밖으로는 황건적의 난으로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다.  조조는 동군태수로 임명되자 시국의 혼란함과 한 왕조의 몰락으르 예견하고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가 책읽기와 사냥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후 조조를 도성으로 불러 전군교위군사령관을 임명하였으니 서기 189년에 도성의 정변으로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끝이 난다. 그해에 영제가 세상을 떠나고 소제가 즉위했다.

 

정변은 외척의 실권자인 하진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환관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군사령관인 원소와 모의하여 병주의 목장관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동탁을 도성으로 불러 들였다. 그러나 동탁이 오기전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고, 그 환관들도 원소가 이끈 친위군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었다. 이 정변으로 외척과 환관이라는 세력이 모두 제거되고 나자 동탁이 도착했다. 동탁은 친위군을 제압하고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고 실권을 잡게 되었다. 이때 동탁은 조조에게 효기교위기병군사령관 자리를 주며 자기편으로 끌여들이려 했지만 조조는 제의를 거부하고 기병 수 명만 대리고 도성을 탈출한다.

 

탈출 도중 조조는 여백사라는 지인의 집을 �아가 후한 대접을 받았지만 오해로 여백사와 가족, 하인들 모두를 죽이고 다시 도망을 가게 된다. 이렇게 탈출한 조조는 진류의 호족인 위홍의 협력을 얻어 병력 약 5천 명을모았다. 이듬해 190년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 동탁 연합군에 가담한다. 계속 전력을 키우던 조조는 191년에는 동군태수가 되어 독자세력을 구축하며, 연주목으로 추천받아 연주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198년에는 서주를 차지하고, 200년에는 '관도 전투'에서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원소의 대군을 격파하고 10여 년 만에 북중국 일대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조조의 성공 요인은

1) 조조의 군대는 오합지졸로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졌으나, 당시 반란군인 황건적을 맞아 여러번의 전투로 포로로 잡은 자중 '청주병'이라는 강한자를 뽑아 군대에 편입하고 강한 훈련을 시켰다.이들 수만명의 군대는 조조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고 한다.

2)조조는 196년에 모사인 순옥 등의 진언에 따라 뤄양에서 헌제를 받들어 자신의 본거지인 허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당시 황실은 내란의 혼란속에 형편없이 허약한 상태였다.

3) 조조의 능력은 적극적으로 둔전을 실시하여 식량을 비축하고 자급자족하였다. 당시 내란으로 농토는 황폐화 되어 군사들의 식량자급이 절실하였던 터라 식량의 자급자족은 강한 군사력 그 자체였다.

 

* 똑같은 실수는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

조조는 10년 동안 세번을 크게패하였는데, 190년 동탁과 싸움에서,194년 복양을 사수하던 여포를 공격하였던 때와 197년 남양군 장수라는 사람한테 당한 실패였다.  두번 다시 그러한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이것이 조조가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이다.

 

* 전략 전술에 뛰어난 선두지휘형 리더

조조는 대패한 경험도 있지만, 실상은 싸움에서 이긴 때가 훨씬 많았으며 이길 때는 확실하게 승리했다. 옆에서 보면 조조가 기묘한 술책을 사용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손오의 병법을 착실하게 지켰다고 볼 수 있다.

 

192년 조조가 직접 주력군을 이끌고 동부 공략에 나섰을 때, 우독이 이끄는 흑산적 대군이 조조의 본거지인 동무양을 습격했다. 이소식을 들은 조조는 즉시 군대를 돌려 동무양으로 가지 않고 우독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자신의 본거지를 공격받자 우독은 스스로 포위를 풀고 철수 하였다고 한다. 이대 조조가 쓴 작전은 '위를 포위해 조를 구한다'는 손빈병법의 유명한 전략을 따른 것이다.

 

또 198년 장수를 정벌하기 위해서 공격하였을 때 조조는 적에게 앞뒤로  포위되자을 적을 유인하여 매복작전으로 패퇴시키는 전공을 세우는데, 이는 '적의 퇴로를 막지 말라'는 손자병법의 �번째 원칙이다. '사지에서 싸우면 필사적으로 싸우게 할 수 있다'는 손자의 가르침이다. 조조는 진두지휘형 장수였으며 부하를 통솔하는 기술도 뛰어났다. 행군중 병사들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조조의 '살구나무 이야기'는 병사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기지를 발휘하였는데,이러한 조조의 성공에는 빠른 두뇌회전이 큰 몫을 했다고 한다.

 

* 명문가의 총아, 원소를 물리치고 패권을 장악하다

북중국 지역에서 10여 년의 쟁패속에 결국 살아 남은 자는 조조와 원술이었다. 둘은 북중국의 패군을 놓고 격돌했다.이는 서기 200년 관도 전투이다. 당시 조조는 항허 이남이 있는 연,예,서 세주를 지배한데 반하여 원술은 화허 이북의 유,기,청,병 네 주를 차지하고 있었다. 병력 수도 조조의 2만에 비하여 원술은 10만 명이었다. 조조군은 피로했고 원술군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상태였다.

 

원술의 혈육인 원소가 정예 10만에 기병 1만을 이끌고 남하했다. 양군은 황허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일진일퇴의 소규모 공방 접전을 벌이면서 호기를 노리고 있었다. 조조는 병사들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점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책사  순욱의 조언을 받아 관도에서 계속 버티기로 하였다.

 

이러던차, 기회가 �아왔다. 허유라는 원소의 중신이 원소에 반감을 가지고 배반하여고 귀순하여 조조에게 귀중한 정보를 알려준 것이었다. 원소군의 식량저장고 위치를 알려준 것이다. 조조는 즉시 병력 5천을 은밀히 기동하여 고시와 오소 부근의 원소 식량저장고를 급습하여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전세는 바로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원소는 군량을 잃고 기습까지 당하자 내부 분열을 일으켜 대혼란에 빠졌고 원소는 불과 800여 기와 함께 도망하였다. 조조의 대승이었다. 조조는 허유의 귀순과 군량저장고의 정보도 중요했으나 원소 스스로 패인을 자초했다. 원소의 패인은 원소가 술책을 좋아하지만 결단력이 없다는 것이며,재능이 있어도 쓰지 못하고 좋은 말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허유가 배반한 것도 원소의 인재 운용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다.

 

* 적벽대전에서 참패를 당하다

원소를 격파한 조조는 이후 몇 년간 북방 정벌에 힘을 쏟았고, 205년에는 허베이에서 꿈틀거리던 잔존 세력을 소탕하였으며, 207년에는 그 세력 배후에서 도운 오황족도 토벌해 명실상부한 북중국 영유에 성공하였다. 남아 있는 잔존 세력은 형주의 유표, 남쪽 강동의 손권뿐이었다. 당시 유비는 유표에 의탁하고 있었다. 조조는 208년 드디어 15만의 군사를 일으켜 형주를 향하여 남방 토벌에 나섰다. 형주에는 때마침 유표가 죽고 그 아들 유종이 뒤를 이었는데, 조조의 세력에 겁을 먹고 바로 항복했다.

 

번성을 지키고 있던 유비는 급히 남쪽의 강릉으로 철수했다. 이곳에는 형주군의 전략물자 저장소였다. 이에 조조는 5천 기병으로 유비를 추격하여 유비군을 당양의 장판에서 격파하고 강릉에 입성했다.유비는 패잔병을 모아 하구로 도망갔으며 의기충천한 조조는 남쪽의 손권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손권은 대책을 강구하였는데, 나라의 존망이 달린 위기였다. 숙의 결과 결사항전하기로 하고 급히 주유로 하여금 수군 3만 명을 편성하였다.여기에 유비 패잔병도 합류하였다. 조조는 형주에서 재편성한 24만 명의 대병력을 강릉에서 배를 타고 장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왔다. 이렇게 해서 양 군은 적벽(赤壁)에서 만났고, 조조군은 북쪽 연안, 주유군은 남쪽 연안에 대치했다. 조조의 군사는 수전에도 약했으며 역병도 돌았다. 그래서 조조는 뱃머리를 서로 묶어 흔들림을 방지했다.

 

이를 주유 진영에서 놓칠 리가 없었다. 부장 황개가 화공작전을 준비하여 미리 조조에게 항복한다고 연락을 취한 뒤, 바람이 부는 날을 골라 출발했다. 쾌속선 10척에는 기름을 부은 마른풀을 잔뜩 싣고 탈출용 작은 배는 뒤에 묶여 있었다. 조조군 군사들이 황개의 배를 발견하고 " 보라! 황개가 항복하려 온다!" 면서 흥분하고 잇을 때 50미터까지 접근한 황개 군사는 배에 불을 붙인 후 때마침 불어 온 바람을 맏으며 일제히 조조군 배를 향해 불덩이가 되어 돌진했다. 불은 삽시간에 물 위에 떠 있던 조조군 배에 옮겨 붙어 불태웠으며 연안에 있는 진지에도 번졌다.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사람과 말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뒤이어 주유 등의 군사들이 조조군을 공격했다. 조조군을 뿔뿔이 흩어져 도망했다. 그러나 퇴각도 쉽지 않았는데, 유비군이 바짝 뒤�아 왔으며 길은 질퍽거려 앞으로 나아 갈 수가 없었다. 조조는 강풍이 부는 가운데 마른 풀을 가져와 길에 깔도록 하여 간신히 지나 갈 수가 있었다.겨우 조조는 위기를 벗어나도망 갈 수 있었다.조조는 더 이상의 천하통일의 꿈을 펼 수가 없었으며 손권으로 하여금 강북으로 진출할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유비는 형주에서 할거 할 기반을 만들었다. 

 

214년, 촉을 점령해 자립한 유비는 219년에 조조가 동쪽에서 손권과 싸우는 틈을 타서 한중에 진격해 조조의 수비부대를 격파하고 그 따을 차지했다. 조조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진중을 탈환하려 했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 천하를 장악하고도 황제직은 탐내지 않았다.

조조는 213년 위공에 봉해져 업으로 본거지를 옮겼을 때 허에 두고 온 헌제를 감시하며 행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해인 214년, 헌제의 황후인 복 씨가 10년 전에 조조의 횡포를 아버지에게 고한 사실이 발각되어 조조는 황후의 일족을 참수하였다. 조조는 상대가 유능하고 이용 가치가 있어 보이면 정중하게 우대하였으나 조정내 반대 세력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서기 219년, 손권이 상소를 올려 황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을 때 조조는 신하들에게, " 이 친구, 나를 훨훨 타는 화로 위에 올려 놓을 생각인가!"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서기 220년, 조조는 병을 얻어 뤄양에서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그의 아들 조비가 황제를 선양받는 형식으로 황제가 되어 위 왕조를 창업하였다.

 

조조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 조조는 사람보는 눈이 뛰어나 거짖으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기재를 꿰뚫어 볼 줄 알았으며 신분의 귀천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에 따라 임용해 모두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적과 대치하였을 때는 편안하고 한가로워 싸울 뜻이 없는 것 같지만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승리를 차지할 때까지 기세가 육일승천하였다. 상을 주어야 할 자에게는 천금을 아끼지 않았으며 공이 없으면서 바라는 자에게는 조금도 주지 않았다. 법을 엄격히 집행해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었고, 때로는 이 때문에 눈믈을 흘렸다. 그러나 결코 용서하는 일은 없었다. 성격이 검소하고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병사들이 농부들이 재배하는 밀밭에 들어가면 참수하라던 자신이 내린 군률을 자신의 말이 들어가자 자신의머리탈을 짜르는 것이라던가, 식량이 부족할 때 담당관이 방안을 묻자 식량 배급시 되를 작게 만들어 배급하다가 군사들이 원성이 높아지자 담당관의 목을 친 일은 군률을 지키려는 그의 장수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그는 비상한 인물이었으며 초세의 걸물이라 할 만하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