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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대중선동과 여론 조작의 대가 신왕조 왕망

 

'황제에게 길을 묻다'

1.창업황제, 용인의 달인 한고조 유방

2. 대중선동과 여론 조작의 대가 신왕조 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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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 ? 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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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7 ? 960

907 ? 1125

960 ? 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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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8 ? 1227
  남송
1115 ? 1234
1271 ? 1368

1368 ? 1644


1644 ? 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 ?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 ? 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 왕씨 집안의 딸이 황후로 간택되어 외척 세도 얻다.
한고조 유방이 세운 한 왕조는 15대 200여 년 동안 계속되다 영대에 잠시 단절되어 20년 가까운 공백기를 거친 뒤에 광무제 유수에 의해 후한으로 재건되었다. 두 왕조를 구분하기 위하여 전자를 전한(前漢), 후자를 후한(後漢)으로 부른다.
 
이 전한과 후한 사이에 있는 20여 년의 공백은 신(新)이라는 왕조가 메우는데, 신 왕조의 창시자가 바로 '왕망'이다. 왕망은 서기 8년에 신왕조를 세워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즉위 15년 만에 반란군 병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게다가 왕망의 죽음과 함께 신 왕조도 사라졌다. 오랜 중국의 역사 속에서 보면 그야말로 '3일 천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서(漢書)는 왕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망(莽)은 어질지 못하여 아첨하는 데 재능이 있었다. 그 간특함을 거리낌없이 휘둘러 찬탈이라는 재앙을 일으켰다. 그 재앙이 부른 실패를 생각하면 왕망만큼 악독한 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혹평에도 북구하고 사기의 평가와는 반대로 그는 중국 역사상 대중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왕망은 신 왕조의 황제로, 기원전 45년에 왕 왕후의 배다른 이복동생인 왕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왕씨 일가가 한조에서 외척으로 권세를 휘두르던 시절이었다. 당시 왕씨 일족에서 제후 열 명과 대사마 다섯 명을 배출했다고 하니,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왕씨 일가의 번성은 왕정군이라는 왕씨 일가의 딸이 황후로 뽑히면서였다. 왕정군이 황후로 뽑힌 것은 우연이 몇 차례 거듭된 결과라고 한다. 왕씨 가문의 몇 대 위 조상은 제나라 국왕이었다고 한다. 가문의 내력을 보면 최고지만 역성혁명의 나라인 중국에서 이런 과거 따위는 별 의미가 없다.
 
왕조가 바뀌면 지금까지 왕후귀족이었던 사람들이 하층의 농민으로 전락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왕씨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할아버지 대에는 농촌 촌장, 아버지 대는 재판소 하급 관리 정도의 지위까지 떨어졌다.
 
훗날 왕 왕후가 되는 왕정군은 이 왕씨 가문의 둘째 딸로 태어나 열여덟 살에 당시 황제였던 '선제'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당시 황태자는 총애하던 궁녀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중, 선제는 황태자의 후사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후궁중에서 황태자가 고르도록 하였으나 황태자는 관심이 없자 황후가 최종 다섯명의 선택된 궁녀중에 왕정군을 선택하게 되는데, 왕정군은 다른 궁녀와 다르게 특별한 빨간색 옷을 입고 눈에  뛰었다고 한다. 패션이 한 여인의 인생을 좌우하는 역활을 한 것이다.
 
* 모범적인 태도로 인척의 총애를 받다.
이렇게 하여 간택된 왕정군은 마침내 아이를 낳게 되는 데, 이를 기쁘한 선제는 직접 경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면서 항상 곁에 두고 귀여워 했다 한다.
 
3년 후인 기원전 49년에 선제가 세상을 떠나고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했는데 이가 바로 '원제'이다. 이에 따라 경은 황태자가 되었으며 어머니 왕정군은 황후가 되었다. 15년 뒤 원제가 죽자 황태자인 경이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성제'이다. 동시에 황후인 왕정군은 황태후가 되어 국정에 보이지 않는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
 
드디어 왕씨 일가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왕씨 일족은 계속 국정의 중추에 관리로 등용되어 조정을 활보했다. 왕망은 아버지 왕만은 왕 왕후의 배다른 동생이었고, 왕 왕후에게는 배다른 형제까지 포함해 동생이 8명이었다. 따라서 왕망이 볼 때 왕 왕후는 고모에 해당하며 성제와는 사촌간이 되었다. 왕망은 아버지 왕만이 일찍 죽어서 집안은 왕씨 일족의 출세 경쟁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있었다. 사촌들은 장군과 왕후의 아들이 되어 권세를 휘두르며 봄 날을 노래하고 있었지만 왕망은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청소년 시절 왕망은 매우 모범적인 학생이었으며 다른 사촌들과는 달랐다. 홀로된 어머니와 형수를 모시고 조카들을 제 자식처럼 돌보며 교우 관계도 원만하여 모두 왕망을 따랐다.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찿아왔는데, 왕씨 일족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장군 왕봉이 병으로 쓰러져 있자 왕망은 병문안이 아니라 그날부터 극진한 병간호를 하였다. 세수도 못하고 옷도 갈아 입지 못하면서 밤을 지세우며 두 달이나 극진한 병 간호를 하였으나 왕봉은 숨을 거두었다. 죽기전 왕봉은 성제와 황태후에게 왕망을 등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에 따라 왕망은 '황문랑'이라는 시종직에 등용되었다. 그 다음 '사성교위'로 승진하였으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와 절제를 보이면서 그의 꿈을 키워나갔다. 작은 아버지인 성도후 왕상은 상소를 올려 자신의 호읍을 나누어 줄터이니 왕망을 제후로 봉해 달라고 상소를 올리고 당대의 명사들도 왕망을 칭찬하였다. 결국 성제는 왕망에게 1500호의 영지를 주면서 제후로 봉했다. 당시 왕망의 나이는 31세였다.
 
나날이 왕망에 대한 평판으 높아져 갔다. 그리고 8년후에는 드디어 재상직인 대사마에 추대되었다. 이제 왕망은 동년배 친족들을 따 돌리고 일족의 최고봉이 되었다. 그의 나이 39세 였다. 신하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왕망은 여전히 신중한 언행과 행동으로 정직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주변의 인재들을 불러모으고 아낌없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주위에 뿌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생활은 항상 검소하면서 청빈했다.
 
* 외척 세력이 바뀌자 스스로 퇴임을 자처하다.
왕망이 대사마에 오른 후 불과 5개월 만에 성제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가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애제'이다. 애제의 부임으로 왕씨 일가는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는데, 애제는 성제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애제의 할머니는 부씨이며, 어머니는 정씨였다. 부씨는 성제의 측실로 왕 황후와 원제의 총애를 다투던 사이였다. 부씨는 원제와의 사이에 1남 1여를 두었는데, 후에 아들은 정도공왕에 봉해졌다. 애제가 스무살에 즉위했을 때, 아버지인 정도공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 부씨와 어머니 정씨는 모두 건재했다. 애제가 즉위하자 부씨와 정씨의 친족들이 조정에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부씨는 늘그막에 자기에게 찿아 온 절치부심의 엄청난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면서 왕 왕후의 세력들을 하나 둘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이미 눈치챈 왕망은 스스로 대사마 자리를 사의를 표하면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애제는 윤허하지 않았다. 애제는 부씨 할머니와 정씨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왕망의 사표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황금 500근과 수레를  하사하면서 세상의 비난을 피하려고 하였다.
 
왕망은 여론을 항상 중시하여 모든 언행은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전파되곤 하였는데, 어느날 궁중 연회시 황태후와 동등한 자리를 배치한 문제로 부씨의 자리는 황태후와 같은 위치에 앉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입바른 소리를 했다. 그것은 왕망의 계산된 행동이었으며 어차피 물러날 바에는 주변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부씨를 깔보는 것은 바로 황태후에게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인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등에게는 의리있는 충성스런 왕망으로 기억에 남기게 되었다.
 
* 적을 제거할 때도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그가 퇴임한 지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부씨 측근들이 왕망을 탄핵하여 왕망은 그의 봉지에서 갇힌 신세가 되어 또 1년이 흘러 3년 째가 되었다. 그 당시 왕망의 아들이 노예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는 아들에게 자결을 명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이 소문은 전국적으로 퍼져 왕후장상들이과 선비들이 조정에 왕망의 어질고 바른 행동을 극찬하며 법을 존중하는 사람으로 다시 등용하여 국정에 동참시킬 것을 수천 명이 상소를 올렸다. 결국 애제는 왕망을 다시 수도로 불렀다.
 
왕망이 수도로 돌아오고 얼마 후에 부 태후가 세상을 떠났으며 정태후는 이미 3년 전에 죽었으며 1년 뒤에는 재위 6년 만인 애제도 26세 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잇다른 죽음이 우연이라고만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역사서에는 아무 말이 없다. 다만 그일이 왕망에게는 기회로 작용된 것은 사실이며 이것을 계기로 야심을 점점 드러내기 시작한다.
 
태황태후는 황제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미앙궁에 가서 황제의 상징인 옥새를 손에 넣고 사자를 왕망에게 보낸다. 수년 동안 한이 맺힌 태황태후는 전광석화 같은 행동으로 왕망과 상의하여 중산왕 기자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가 바로 '평제'이다. 평제은 겨우 아홉살이기 때문에 황제를 대신해서 태황태후는 조정을 장악했고 왕망은 다시 대사마가 되었다.
 
국정의 실권을 장악한 왕망은 자신을 따르는 자를 발탁하고 거스르는 자는 죽였다. 누군가를 제거하고 싶을 때는 측근들에게 미세하게 눈치를 주거나 찡거리면 측근들이 태황태후에게 간하여 그를 제거했다. 이때 왕망은 눈물을 흘리면서 반대하는 척 하였다고 한다. 아주 교모한 술책이며 자신은 눈물을 흘리면서 반대하고 그의 측근들은 반대파를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왕망은 대중들의 인심을 잃어서는 자신의 입지를 굳히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굳이 자신의 손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왕망의 뜻을 거스른 대신들은 하나하나 조정에서 제거되었다. 그러나 쫓겨난 누구도 왕망을 욕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러한 방법으로 왕망은 착실하게 그의 권세를 굳혀 나갔다.
 
* 대중의 인기에 힘입어 황제에 등극하다
왕망은 대사마가 된 이듬해에 서기 1년, 안한공이라는 전에 없던 칭호를 하사 받았다. 인기몰이 면에서도 왐망의 수법은 대단했다. 흉년이 들거나 농민들에게 자연재해나 피해가 발생되면 자신의 재산을 털어 지원하였으며 태황태후에게도 스스로 검소하고 궁중의 요리사를 줄이도록 건의하였다. 그러자 고관들이 너도나도 재산을 털어 백성들을 지원했다. 이러한 치세는 결국에는 왕망의 인기를 높인 결과를 초래했다.
 
권력의 정점에 선 왕망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 권력을 확고히 다지려 하였다.후보자가 많자 왕망은 자신의 딸을 물러나게 하였으며 이에 감동한 태황태후는 일족의 딸을 모두 물러나게 하였다.왕망은 여론을 동원하였는데, 서민에서 조정의 고관대신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천 통의 상소를 올려 안태공 왕망의 딸을 황후에 어울린다는 상소를 올렸다.또 대신들이 조정에 들어가서 직접 청원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봉지를 다시 조정에 헌납하는 것으로 많은 백성들이 왕망에 대하여 상소와 청원을 올려 왕망에게 큰 상을 내리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교묘한 수법의 연출로 왕망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왕망 열풍이 일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인기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의도된 여론 조작과 연출이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아무도 몰랐다.
 
* 인기영합, 그 참담한 실정의 결과
권력과 인기라는 두 가지 무기를 가진 왕망은 명실 공히 최고의 위치를 귿혔다. 그런 가운데 평제가 사망했다. 즉위한지 5년 만이었다. 사마광은 영왕망이 술에 독을 타서 죽였다고 하나 근거는 확실치 않다.
 
평제의 뒤를 이어 선제의 증손자 광척후 자영이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그의 나이는 두 살이었다. 하지만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황제를 누구를 추대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거듭되고 있을 때, 무공현의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흰 돌을 발견하였는데, "안태공,망에게 말한다. 황제가 되어라|"고 적혀 있었다면서 백성들은 왕망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여론이 비등하였다. 태황태후는 반대를 하였으나 이미 대세는 왕망에게 가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며 자영은 황태자로 봉해졌다.그리고 3년후 왕망은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애장이란자가 부명을 가짜로 만들어 왕망의 황제됨은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서기 8년에 왕망은 부명에 따라 진천자, 즉 다시 말해 황제가 되었고 국호를 신으로 고쳤다. 이에 따라 한 왕조가 자동으로 소멸되었지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왕망의 손에는 옥새가 없었는데, 옥쇄는 태황태후의 손에 있었다. 그래서 왕망은 태황태후에게 사자를 보내 옥새를 넘기도록 강요하자 태황태후는 왕망을 크게 꾸짖고 옥새를 내동댕이 치면서 "은혜도 모르는 눔!" 이라고 했다.
 
왕망의 황제 즉의, 다시 말해 신 왕조의 창시는 신하들과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로 등장했다. 그러나 왕망이 즉위하여 시행한 각종 토지정책, 경제정책, 대외정책이 모두 실패를 가져왔는데, 백성들의 생활은 파탄이 났다.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비참하였는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즉위한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천하의 정세는 완전히 바뀌었다.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으며 그것이 눈덩이 처럼 불어나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그리고 몇 년후 왕망은 수도로 쳐들어온 반란군 병사에게 참살당해 신 왕조는 불과 1대 15년만에 막을 내렸다.
 
역사가 사마광은 " 왕망은 성격이 급하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또 일을 추진할 때 시기가 적당한 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제도가 자주 변하여 벼슬아치들이 나쁜 짓을 했고 백성들이 괴로워 하며 범죄를 저지르는 자가 많았다"라고 했다. 왕망은 국가성립의 근간을 건드리는 개혁을 너무 빠르게 잇따라 실시하는 바람에 실패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겠다.
                                                   -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