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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창업황제, 용인의 달인 한고조 유방

 

'황제에게 길을 묻다'

1.창업황제, 용인의 달인 한고조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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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7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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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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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송


1115 ? 1234

1271 ? 1368


1368 ? 1644


1644 ? 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 ?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 ? 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 이름없는 농민의 아들 건달패 두목이 되다

 

한 고조 유방은 기원전 256년 지금의 장쑤성 패현에서 이름없는 농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방의 성장기는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는 밖으로 나도는 데만 정신이 팔려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 청년이 되면서부터는 아예 집을 나와 건달패와 어울려 살았다.

 

그렇다고 양질의 건달도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패거리 중에 개를 잡아 파는 백정인 번쾌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훗날 무양후에 책봉된다. 유방은 번쾌의 가게에서 무전취식을 자주 하였는데 번쾌는 어느날 반드시 밥값을 받으려고 하는데 이를 눈치챈 유방이 무전취식후 갑자기 도망을 가자 번쾌는 유방을 잡으려 쫓아간다. 유방은 도망을 가다가 강에 다다르자 거북이가 나타나 등을 타고 강을 건너가 거북이까지 잡아 먹었다는 일화가 나온다. 이를 본 번쾌는 유방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충성을 다하게 된다.

 

건달 생활로 세월을 보내는 아들을 보는 부모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유방의 두 형은 그와는 반대의 성격으로 묵묵히 농사일에 매진하던 청년들이었다. 유방의 아버지는 항상 유방에게 "너의 형 유희의 반만 닮아라"고 했다고 한다.어린시절에 형제를 비교하면 마음에 상처로 남는 법, 유빙은 천하를 재패한 후에 황제가 되어 아버님에게 한 연회에서 아버지를 비꼬았다고 한다.

 

유방은 무일푼에서 시작하여 현대 중국의 원형을 이루는 한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었일까? 이렇게 낮은 신분에서 출발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중국 역사상 단 두 명이 있을 뿐이다. 바로 빈농 출신의 탁발승에서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과 유방 둘이다.

 

사마천 <사기> 유협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 유협의 행동은 소위 사회개념에서 일탈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며, 행동은 항상 과감하다. 일단 받아들인 일은 끝까지 추진하며 완수한다. 신명을 다 바쳐 다른 사람을 어려움에서 구하고, 목숨을 버리면서 일을 추진하며, 그 능력을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유협의 무리는 서민에 불과 하지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을 줄 안다. 또한 한 번 시작한 일은 무슨일 이 있어도 끝을 본다. 예을 들어 천리 끝에 떨어져 있어도 굳게 의리를 지키고, 그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의 평판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 반역의 우두머리에서 민중의 우상이 되다

유방은 건달이지만 30세에 사수지방의 하급관리인 정장으로 임명되는데, 지금의 방범대장 비슷한 직책이었다. 유방은 이 직책을 이용하여 천하를 도모할 토대를 쌓는데, 부지런히 덕을 쌓으며 사람을 사귀었다. 훗날 창업 공신이 되어 한 왕조의 명제상으로 이르을 날리는 소하, 조참 등을 이시기에 사귀게 되며 당시 그 지역의 유력자였던 여씨의 딸 여치를 아내로 얻을 수 있었다.

 

 만약 그 당시 태평성대였다면 유방은 평범한 지방관리로 평탄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대는 평온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진시황이 죽고 2대 황제가 즉위한 해, 유방은 조인들을 이끌고 여산릉 조영공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인솔 도중 죄인들이 도망을 가는 등 도망자가 속출하자, 당시의 진나라 법령이 엄하여 현령에게 받게 될 책임추궁이 두려워 죄인들을 풀어주고 그 자신도 도피 길에 오른다.

 

이제껏 쌓아왔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관군에게 쫓기게 된 유방은 그에게 천하에 다시 없는 기화로 찿아 온다. 얼마후 진승과 오광이 "황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반란을 일으켰고 패현 현령이 반란군에 가담하여 유방을 다시 부른 것이다.

 

산속으로 숨어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유방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일개 건달 우두머리가 아니라 민초들의 희망으로 떠 올라 따르는 자가 수백명이 넘었다. 패현 현령이 유방의 무리를 보고 두려워 성문을 열어주지 않자 주민들이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현령으로 추대했다. 이때부터 유방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는데 그 숫자는 3천이 넘었다.

 

각지에서 일으난 반란군 중에 중심이 된 당대 최고의 영웅 항우와 그의 숙부 항량이었다. 그들은 유방과 거의 같은 시기에 군사 8천명을 이끌고 강동에서 봉기하였는데, 양쯔 강을 건너 북으로 올라가 설현에 이르렀을 때는 각지의 반란 분자를 규합하여 10만에 이르는 대군으로 불어나 있었다.

 

한편 패현에서 봉기한 유방의 반란군은 그 후 반 년 동안 진의 군대와 밀고 당기는 싸움을 계속했다. 기원전 208년 4월, 유방은 설현에 머물고 있던 향량을 찿아가 수하부대로 합류한다. 이일로 유방군을 크게 성장 하였고 유방은 장량이라는 최고의 벼슬을 얻는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방이 성공할 수 있었던 기반은 수많은 인재들을 주변에 모으고 거느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방은 정장으로 일하던 시기에 소하와 친분을 맺은 것이다. 소하는 역대 보조관 중에서 중국인 들이 가장 훌륭한 보좌관으로 소하를 들고 있다. 후에 유방은 소하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는데,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안심시켰으며, 식량을 나눠주고 보급을 끊지 않으니 나는 도저히 소하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논공행상에서 소하를 제1의 공신으로 추천하여 그의 공적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안에서 살림을 맡는 이상적인 보좌관이 소하라면 장량은 전쟁터에서 최고의 참모였다. 제갈량도 장량을 평가함에 있어 "진영 안에서 책략을 짜내어 천리 밖에 서 승리를 결정짓는 데는 나 역시 장량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장량은 유방의 최고 군사 참모로서 치밀한 전략을 짜는 일을 했다. 건달 출신 유방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장량과 같은 최고급 브레인을 만나 수하로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항량은 유방이 합류한 지 2개월 후, 멸망한 초왕의 혈통인 심이라는 목동을 찿아내어 초희황으로 추대하고 그를 명목상의 맹주로 삼아 반란군 통합을 꾀했다. 그러나 항량은 유방 군사를 포함하여 진의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다 진의 군대와 전투중 크게 패하고 목숨도 잃는다. 진의 관군이 북진하여 반란군의 본거지 팽성을 압박하자 반란군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북상하는 관군을 막고 한편의 군대는 진의 수도 센양으로 진격토록 한다. 항우는 황하를 건너 치열한 전투끝에 진군을 크게 대패시키며 반진 연합군의 일인자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항우는 제후 연합군 40만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해 진군하며 진의 관군을 굴복시키면서 센양으로 향한다. 그가 함곡관에 도착하였을 때 유방군은 이미 센양에 입성한다. 유방은 진의 최후 방어선인 무관을 돌파하여 센양을 코앞에 둔 패상으로 진출하자 진왕 자영은 유방의 항복 권고에 따라 옥쇄를 바치고 항복했다. 이로써 진은 완전히 멸망한 것이다.

 

센양에 입성한 유방은 화려한 궁전과 휘장, 견마, 보물, 미인들에 눈이 휘둥그래져 눌러 앉기를 원하지만, 참모 번쾌와 장량의 권고로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센양을 물러나 패상으로 돌아가 야영을 하였다. 1개월 후에 센양으로 들어간 항우는 자영 등 진의 왕자들을 모두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지르자 센양은 잿더미로 변했다. 진의 사람들은 무리하게 그런 만행을 저지른 항우를  보고 "목후이관의관을 쓴 원숭이"라고 <사기>에서 비웃었다고 한다. 결국 누가 민심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 만하다.

 

유방은 상대가 강해 보이면 정면 공격을 피하고 우회 전략을 썼다. 되도록 힘을 쓰는 대결을 피하고, 투항으로 설득해 적이 항복하면 상대의 체면이 서도록 합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이는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은 무리 없는 싸움법이었다. 그 때문에 항우는 강한 적과 마주하다가 유방보다 센양에 늦게 도착할 수 밖에 없었다.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이동한 것이 유방군이었다. 게다가 유방은 항복한 적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우려를 범하지 않았다. 반면 항우는 거침없이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고 그래서 천하의 민심은 자연스레 유방에게 쏠린 것은 당연했다.

 

* 천하의 영웅, 항우와 맞서다.

항우의 모사 범증은 급속하게 명망이 높아지는 유방에게 일찌감치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범증의 조언에 항우는 유방을 토벌하기 위하여 모의한다. 이러한 사실을 항우의 숙부이면서 장량의 친구였던 항백이 항우 진영의 불온한 움직임을 패상에 주둔하고 있던 유방에게 전한다. 이때 유방군은 10만이었고 항우군은 40만이었다. 유방은 정면 싸움에서는 항우를 이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방은 수하 군사 100여기만 대리고 홍문에 있는 항우의 진영으로 간다. 이른바 '홍문의 만남'이 이루어 졌다. 술자리에서 항우의 책사 범증은 유방을 죽이도록 항우에게 권유하지만 항우는 주저하기만 하고 항장이 칼춤을 추다가 유방을 보호하지 주군의 목숨이 위태로움을 알고 번쾌가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항우가 "저자는 누구인가?" 하자 유방이 "패공의 부하인 번쾌란 자이옵니다"그러자, 번쾌는 항우에게 유방은 다른 뜻이 없슴을 이야기 한다. 번쾌는 항우가 술과 고기를 권하자 번쾌는 술을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키고 백정 방식으로 단숨에 바닥의 고기를 썰어 먹으며 장사다운 기개를 보이자, 항우는 번쾌의 장사다움에 감탄하면서 "과연 장사답게 생겼구나!" 하면서 번쾌를 칭찬한다.

 

 유방은 잠시 나갔다 온다면서 그길로 뒷일을 장량에게 맡기고 그대로 패상으로 도망간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된 범증은 "아아, 어린아이와 함께 큰 일을 도모하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하면서 탄식한다.

 

진이 멸망한 후 연합군 총사령관 항우는 전쟁의 뒷처리와 새로운 제도 만들기에 착수했다.  항우는 이름뿐인 초회황에게 의제라는 칭호를 주고 작은 현 한개를 주었다. 항우 자신은 스스로 서초 패왕이라면서 9개 현을 거느렸으며, 장군 18명과 구왕족 등을 각자 공적에 따라 지역별 왕으로 봉했다. 이때 유방은 한왕이 되어 한중,파,촉 등 3개 현을 다스렸다. 그러나 항우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제나라, 촉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패왕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항우는 대군을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이때 항우는 의제를 암살하게 되는데, 이는 유방에게 명분을 주게 되었다. 기원전 205년 유방은 의제의 상을 치르고, 항우와 전면전을 선포하고 4년에 걸친 초.한전이 시작되었다.

 

유방은 초기에는 항우에게 밀리는 전력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략적 우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첯번째로,이런 상황을 만든 공신은 재상으로 후방을 책임진 소하였다. 두번째 공신은 한신과 팽월이었다. 젊은 시정 불량배 가량이 사이로 지나간 일화로 유명한 한신은 소하의 추천으로 유방의 장수가 되었다. 한신은 뛰어난 용병술로 항우를 괴롭혔으며, 별동대장이 되어 제나라를 평정해 항우를 양쪽에서 협공했다. 또 팽월은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 근방에서 활발한 게릴라전을 전개해서 항우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이렇게 되자 기원전 203년  8월 양자간에 화의가 이루어져 홍구를 경계로 서쪽은 한이, 동쪽은 촉이 지배하기로 하고 항우는 군사를 돌렸다.

 

이때 진평이 유방에게 이런 호기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하여 유방은 항우를 추격한다. 한신과 팽월,영포도 합류하여 항우군을 따라 잡았다. 사방에서 포위한 유방군은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여 장기간 전쟁으로 지친 항우군을 동요시켰다(사면초가). 더 이상의 방안이 없던 항우는 우미인을 옆에 앉히고 이렇게 말했다.

 

" 나에게는 산을 뽑을 만한 힘과 세상을 뒤덮을 기세가 있다. 때는 이롭지 않은데 추(말)는 가려 하지 않으니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우야,우야, 너는 또 어찌해야 하느냐?" 라며 항우는 마지막 힘을 다해 유방의 포위망을 뚫고 양쯔 강가에 있는 오구까지 도망을 한다. 그때 그를 따르는 병사는 불과 20여 기였다. 오구에서 양쯔 강을 건너면 그의 고향 강동 지방이었다. 그는 주변의 권유도 뿌리치며, " 내가 모든 부하를 잃고 무슨 면목으로 강동에 있는 부모형제와 이웃들을 본단 말인가?" 하면서 끝까지 싸우다가 스스로 칼로 목을 찌르니 항우의 최후였다.

 

한신은 처음 천신만고 끝에 출사하여 항우 밑으로 들어가나 하찬은 말단 직위인 집극량이라는 자리에서 십여 년을 일하나, 항우의 군사인 범증이 그를 등용하도록 권유하나 항우는 한신의 볼 품 없는 모습에 등용하지 않는다. 한신은 항우에게 등용을 받지 못하자 항우곁을 떠나 유방을 찿아가 그곳에서 대원수로 발탁되어 연전연승을 하게 된다.삼진왕을 깨는 것으로 부터 하나하나 작은 자치국들을 해치우다가 마침내 초나라와 자웅을 겨루게 되고 급기야는 1백 30만 대군으로 초패왕 항우를 완벽하게 섬멸함으로써 유방에게 천하를 안겨 준다.

 

이후 초나라의 제후가 된 한신은 자신에게 밥을 먹여주던 노파, 밥주기에 인색했던 관리 아내, 그리고 가랑이 밑으로 가게했던 불량배를 부른다. 노파에게는 천금을 주면서 과거 온정에 대하여 감사의 에를 표시했으며 관리 부인에게는 백 냥을 주면서 '당신은 시시한 사람이기에 이만큼 주는 것이오" 라고 하였고, 불량배는 경찰 경위 정도의 직위를 주면서 신하와 장수들에게 " 이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나를 모욕 했을 때, 내가 이 사람 정도의 사나이를 어찌 죽일 수가 없었겠는가! 다만 이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명예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 나갔다. 오늘날 내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게 아니겠는가? 그 보답으로 이런 벼슬을 주는 것이다."라고 했다.

 

때를 기다리며 수모를 참을 줄 아는 인내. 그리고 훗날 이 수모를 은혜로 갚는 한신의 그릇은 감탄을 자아낸다.

 

* 건달패를 해체하고 국가를 건설하다

4년에 걸친 사투 끝에 숙적 항우를 물리친 유방은 기원전 202년 2월에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등극했다. 유방은 국호를 한으로 정했는데, 이는 자신이 전에 한왕이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당시 유방의 나이는 55세 였다.

 

그후 유방은 기원전 195년에세상을 떠날 때까지 7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싸움터에서 보냈다. 한신과 영포,맹월 등 성이 다른 왕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킨 탓에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서야 했다.

 

건달 출신이라는 점은 공신들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는데, 한나라 재상의 아들이었던 장량과 현의 하급 관리였던 소하,조참 등 소수를 제외하면 번쾌,주발,관영,왕릉,진평 같은 공신들 대부분이 건달 출신이다. 따라서 그들을 연결하는 건달이라는 동료애는 군신 관계라기보다 두목과 부하의 관계였다. 궁궐내에는 공신 건달들의 고함소리와 풍악소리가 그칠날이 없었고 질서는 말이 아니었다.

 

결국 유방은 창업 공신들을 차례로 숙청하기에 이른다. 이를 배신이라고 욕 할 수 없는 것이 황제가 된 이상 의리보다는 더 큰 대의가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국가이며 왕조인 이상 건달패들과는 다른 제도와 규칙, 법령이 필요했다. 정승이 된 소하는 <구장률>이라는 법령을 만들었는데, 이는 진의 법을 고치고 살을 붙인 것으로 후대에 왕조 법률의 기초가 되었다. 한의 제도는 법제나 관제 모두 진의 제도를 모델로 삼았는데, 진의 군현제를 한은 군국제를 채용했으며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15개 군현과 지방 왕들이 다스리는 30개의 군현제를 병합한 것이다.

 

유방은 신하들에게 물었다.

 

"모두 거짖없이 이야기 해 주길 바라오. 짐이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었이라고 생각하오? 항우가 천하를 잃은 이유는 무엇이오?"

 

그러자 중신인 고기와 왕릉이 대답했다.

 

" 패하께서는 오만하고 상대를 무시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도성이나 영토를 얻으면 기분 좋게 나눠주며 결코 모든 것을 혼자 차지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항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에 약하고 부하를 사랑하지만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능력이나 솜씨를 발휘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적으로 여깁니다. 차지한 것은 모두 자신만의 공으로 돌릴 뿐 나눠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항우가 천하를 잃은 원인으로 압니다."

 

그러자 유방이 이렇게 말했다.

 

" 귀공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짐은 책략을 짜내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데는 장량에 미치지 못하고, 내정을 충실하게 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군량을 조달하며 보급로를 확보하는데는 소하에 미치지 못하오. 또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자유자재로 지휘해 승리를 얻어내는 일은 한신이 짐보다 뛰어나오. 이 세 사람은 모두 걸물이라 할 수 있소. 하지만 짐은 그 걸물들을 부릴 수 있었소. 이것이 짐이 천하를 쥔 이유요. 항우에게는 범증이라는 걸물이 있었지만 그는 그 한사람조차도 제대로 쓰지 못했소. 그것이 항우가 내게 패한 이유요."

 

유방 승리의 비결은 휘하에 인재를 얻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충성하게 만든 것이다. 

  

                                                    - 서초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