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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내성적이고 착실했던 광무제

 

'황제에게 길을 묻다'

    - 내성적이고 착실했던 후한의 광무제 -

 

3.내성적이고 착실했던 : 후한의 광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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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 ? 1644


1644 ?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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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 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 얌전한 서생, 반란의 깃발을 들다

왕망의 신왕조가 망하고 후한 왕조의 초대 황제가 되는 광무제 유수는 기원전 6년 한 고조 유방의 혈통에 해당하는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수의 인생 전반기를 살펴보면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는 청년 시절 농사에만 매진했던 사람으로 지주로 생활을 넉넉 했으나 농사일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유수를 착실하고 얌전한 청년으로 보았을 뿐, 그가 훗날 큰일을 도모할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는 유연이라는 형이 있었는데, 형은 성격이 유수와는 반대로 협객을 좋아하고 병사를 양성하는 등 야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왕망의 실정으로 민생이 피페해지자 곳곳에서 반란군이 궐기할 때, 실제로 군사들이 따른 사람은 유연이 아니라 유수였다.  서기 22년, 형 유연은 그의 고향인 춘릉에서 선비들을 설득하여 왕망 타도를 위한 군사를 일으키자, 유수도 작업복을 벗어버리고 유연의 뒤를 따르자 모두의 반응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만큼 유수는 주변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있었다.

 

한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들은 원래 왕망 정권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 반란군의 세력이 날로 강해졌던 터라 왕망 정권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 반란군의 중추는 녹림군이었다. 녹림군은 세력이 컸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도 네 개의 파벌로 갈라져 있었는데, 신시군, 하강군과 나중에 합류한 평림군과 춘릉군이 그 파벌이었다.

 

반란군은 북상 중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는데, 이때 유일하게 승리한 인물이 바로 유연이었다. 그후 녹림군은 유수를 중심으로 20만이 넘는 군대로 성장하였다. 세력이 크지자 유연은 최고 책임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호족과 재산가와 빈민 출신들인 신시군과 하강군이 불만을 표시하자, 대신 야망이 없는 유현이라는 인물이 혁명 정부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유연은 불만이 있었으나 대사도란 직책에 만족해야 했으며 유수는 여단장급 직책으로 항상 그늘에서 보이지 않게 행동했다.

 

* 뒤에 쳐저있던 유수, 드디어 선두에 서다

혁명 정부를 구축하고 체제를 정비한 반란군은 드디어 왕망 타도를 위한 북벌 원정에 나섰다. 이에 당황한 왕망은 40만 이라는 대군으로 온 힘을 다하여 맞서는 바람에 반란군은 오합지졸이라 무너지려 하였으나 곤양성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때 유수가 과감하게 나서서 일장연설을 한 다음에 기존의 상위 장수들에게 자신의 계책을 이야기 한다. 그제야 장수들은 유수의 의견에 동조하고 같이 대적하기로 한게 된다. 당시 곤양성 안에는 팔구천 명의 병사밖에 없었으며 밤이 되자 유수는 부하 30기만 대리고 성을 빠져나와 각지의 증원군을 모아 안밖에서 정부군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정부군은 10만이 넘는 병력으로 곤양성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하고 전멸작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포위는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권유에도 정부군 장수인 왕읍과 왕심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반란군을 완전히 포위하여 섬멸시킬 계획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유수는 각지의 증원군을 설득하여 천여기를 이끌고 정부군 후방에 나타나 적의 후방을 기습했다. 군세를 보고 반란군 장수들이 머뭇거리자, 유수가 앞장서서 과감하게 돌격하였다. 이 모습을 본 장수들이 하나 둘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유수의 후방 공격으로 반격에 나선 왕심군을 맞아 적진을 돌파하는 등  적의 전열을 흐뜨리자 이 난전와중에 적장 왕심이 전사하였다. 이에 성안의 반란군도 협동하여 성문을 열고 왕협군을 양쪽에서 공격하여 수만명을 살륙하자 마차 등 무기를 버리고 왕협은 패잔병 수천명만 대리고 장안으로 도망갔으며 왕협의 군사들은 흩어져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40만 정부군은 하루아침에 소멸되어 버렸다.

 

정부군은 그 패인이 전의가 약한 민중의 지지기반을 잃고 있던 정권에 강제 동원된 군사들이었다. 민심이 떠난 신 왕조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장수 왕읍과 왕심이 신하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군사 숫자의 많음으로 적을 깔 보았던 것이며, 반란군 유수의 계책과 진두지휘로 적진에 앞장서서 돌격하는 모습에 반란군 장수들이 용기를 얻어 적을 양쪽에서 협공한 덕분이었다. 유수는 비록 낮은 장수이나 이번 전투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평소에는 얌전하나 위기시에는 결단을 내리면 용감하며 굳은 결의로 군사들을 독려하고 앞장서서 싸우는 장수로 인식되었다.

 

* 힘이 부족할 때는 물러나는 지혜를 발휘한다.

유수가 곤양에서 정부군을 물리치는 대전과를 올리는 사이, 완성에서는 형 유연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연은 유수보다 먼저 춘릉군을 이끌고 완성을 포위해 함락시키고 유현을 경시황제로 맞아 들였다. 춘릉군 수령들은 유현같은 사람이 황제에 옹립된 것에  불만이었다. 자신들은 유연이나 유수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싸웠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신시군과 평림군 간부들은 기분이 좋지 않아 양 파간에는 균열이 점점 깊어 갔다. 사건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유연의 부하 유직이 항명사건이었다. 경시 황제는 유직을 사형에 처하게 하였는데, 이때 유연이 관여하여 설득하다 반대파 함정에 빠져 둘 다 사형을 당하는 일이었다.

 

유수는 경시 황제에게 달려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자세를 낮추었다. 곤양전공의 자랑도,형을 위한 상복도 입지 않고 평소대로 조신하였으며 유연의 부하들도 만나지 않고 근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머쓱해진 경시 황제는 유수를 파로대장군으로 삼고 무신후에 봉했다. 실권이 없는 관직이나 유수는 아무 이유없이 봉지로 갔다. 그래서 위기를 벗어 날 수 있었다.

 

서기 12년 7월, 경시 황제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북상하였는데, 한 부대는 낙양으로 ,다른 부대는 장안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정부군의 방어선을 차례차례 돌파해서 9월에는 장안과 낙양을 모두 접수했다. 왕망은 난전중에 죽임을 당하고 신 왕조는 1대 15년 만에 멸망하였다.

 

* 인간적 매력으로 주변 인재들을 모으다

유수는 경시 황제가 낙양으로 이동하여 정권을 정비하고 있을 때 사례교위 즉, 지금의 경찰청장을 맏게 되어 천도 행렬을 지휘하고 수도 치안을 담당하였다. 그후 대사마, 즉 국방장관을 겸직해 반대파들의 조종으로 하북지방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파견되었다. 당시 하북지방은 신 왕조 잔존세력인 왕랑이 대부분의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하북에 파견된 유수는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서 갖은 고생을 하는 동시에 군사력이 열세하여 유수는 왕랑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였다. 유수는 왕랑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몇몇 고을 태수를 아군으로 합류시켰다. 이때 그에세 합류한 사람 가운데 등우, 경엄, 오한 등 쟁쟁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후 유수의 심복이 되었다.이러한 인재를 얻을 수 있는 힘은 바로 유수의 인간적인 매력이었다.

 

* 적을 친구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뢰이다.

유수는 하북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서기 24년 5월, 마침내 왕랑을 토벌했으며 동마군 등 다른 반란군도 격파해 확고한 기반을 쌓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승리후 전후 처리에도 절묘한 솜씨로 민심을 끌어 모았다.

 

왕랑을 처단하고 기밀문서를 압수했으나, 그는 보지도 않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변측자들은 안심히라" 고 하였다. 즉 '변측자'란 왕랑과 연락하여 서로지원하였던 '불안해 하는자'란 뜻이다.이렇듯 그는 적을 포용하고 인정해 주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군사들은 유수를 진정으로 자신들을 생각해 주는 군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한 일련의 신뢰행동으로 사방에서 군사들이 몰려들어 수십만으로 불어났다. 경시 정권에서는 유수가 점차 크다란 위협이 되자 그를 불려 들였으나 그는 오지 않고 허베이 등지에 머물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 어부지리도 황제에 등극하다

서기 25년 6월 부하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호 땅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4개월 후인 10월에는 낙양에 입성해 그곳을 수도로 정했다. 한 왕조가 수도를 장안으로 삼았으나 유수는 수도를 낙양으로 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한(東漢)왕조라 불렀다. 또 한 왕조의 뒤를 이었다 해서 후한(後漢)이라고도 불렀다. 유수가 천하를 통일하는데는 그후로 10년이 더 걸렸다. 당시 농민군인 적미군이 산동반도 일대에서 봉기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경시 황제의 항복을 받아내고 유씨 왕손 후손중 한명인 유분자란 사람을 골라내서 황제로 옹립하고 대권을 이어받았으나 바로 유수의 대군이 장안을 향하여 토벌하려 진격하였다. 장안에 갖힌 적미군 30여만 명은 식량이 떨어지자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철수하였지만 서쪽에도 30만 대군을 먹일 양식은 없자 다시 장안으로 돌아 왔으나 장안도 텅 비어 있었다. 고향으로 가려도 유수군이 가로막고 있어 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 굶주림에 지친 적미군은 결국 유수군에게 항복하게 된다. 그리하여 맹위를 떨치던 적미군도 봉기 10년만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자멸하게 된다.

 

유수는 항복하려온 유분자를 보고

" 그대는 그대가 지은 죄를 잘 알고 있겠지?"

"신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만, 다행히 페하의 은덕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영리한 친구군! 우리 유씨 가문에 바보는 없는 것 같아." 라면서 유분자를 조왕의 시종으로 임명해 평생을 보장해줬다고 한다. 

 

* 싸움을 멈추는 것이 진정한 무(武)

후한 광무제 유수의 치세는 서기 25년 6월에 즉위하여 57년 2월에 62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32년 동안 계속되었다. 서기 36년에 촉의 공손술을 정벌할 때까지 25년 동안은 각지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데 상당한 힘을 소비했다. 공손술을 정벌후에는 전 중국 전역이 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광무제 치세의 특징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무리하지 않고 가장 먼저 민생을 회복한은 데 힘쓴 점이다. 광무제는 당시 중국의 궁핍한 경제를 회복시킨 훌륭한 황제이다. 광무제는 흉노를 정벌하려다가 스스로 무덤을 파지만 ,적절히 그들을 견제하면서 국가 안정에 주력하였다. 정치에 임하는 자세도 진지하여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정사를 밤 늦게까지 돌보았으며 경륜도 밤 늦도록 토의 하였다. 그리고 부하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문관을 등용하고 공신들은 국정의 중추에서 멀리하였지만 높은 신분과 대우를 보증해 보답했다. 황제는 관용과 제어를 적절히 잘 운용한 황제였다. 실제 공신 중 한 명도 숙청하지 않았는데, 작은 실수는 용서하며 복된 인연을 지켰고 허물 때문에 죽는 자는 없었다. 

 

<후한서> 저자 법엽은 광무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스스로 대업을 이루었지만 삼가고 두려워하여 이룬 것이 적은 듯 행동했다. 그래서 정치 체제를 명확하고 신중하게 했고, 권력기관의 동태를 잘 관찰하였으며, 필요한 시간과 힘을 예측해 실행하니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공신을 몰아내고 문사를 등용했으며 활과 화살을 거두어들이고 말과 소를 풀어 놓았다. 그 도가 옛것과 같지는 않지만, 이 또한 싸움을 멈추게 하는 무(武)다."

 

무(武)를 둘로 분해하면 '싸움을 멈춘다는 뜻'이 된다. 중국인들은 무의 최고 경지가 이것이라고 했다. 광무제는 이를 실천에 옮긴 황제였다.

                                                       -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