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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256 : 로마 제국 961 ( 로마 제국과 기독교 9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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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256 : 로마 제국 961 ( 로마 제국과 기독교 9 )

두바퀴인생 2023. 7. 8. 04:59

로마의 역사 1256 : 로마 제국 961 ( 로마 제국과 기독교 9 )

 

 

 

로마 제국과 기독교 9

마르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쓴 <명상록> 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야 할 때, 그것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지만 이 마음의 준비는 인간의 자유로운 이성으로 이룩한 결과여야 한다. 기독교도들처럼 완고한 믿음이 아니라.>

진솔하게 심정을 털어놓은 태도는 철인 황제라고 불리기에 충분하다. 죽음을 자유로운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러려면 정신력이 필요하다. 불안으로 가득찬 시대인 3세기에 살았던 로마 제국 사람들은 그것까지는 요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철인 황제 자신도 그가 신봉하는 스토아 철학으로는 충분치 않았는지, 엘레시우스 '비의'(秘儀), 즉 '비밀 의식'에 입회했다.

엘레시우스 '비의'란 다신교 세계인 그리스에 옛날부터 있었던 제례 의식 가운데 하나로,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엘레시우스에서 거행되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 주신은 제우스의 누이이며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다. '비의'니까 입회 의식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입회하면 죽은 뒤의 평안과 그에 따른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도 엘레시우스 비의에 입회했지만, 그의 경우는 그리스적인 모든 것에 대한 애정에 불과했고, 죽은 뒤에 영혼의 평안을 얻기 위해 입회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입회는 진지한 동기에 따른 행동으로 여겨진다. 무슨 일이든 가벼운 마음으로 할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엘레시우스 '비의'도 말 그대로 '비의'니까 밤중에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3세기에 지중해 세계에 펴진 신플라톤주의 철학도 신비적인 것으로 도피하는 경향은 엘레시우스 비의와 비슷했다. 이런 경향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로마 제국의 지식인들이 현대식으로 말하면 ' 정체성의 위기'에 빠져 있던 증거라고 생각한다.

로마 제국의 지식인도 과거에는 당당하게 현세주의를 내세웠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문화에서는 그리스에 정복당했다."고 기원전 1세기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말하면, 동석한 사람들은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까지도 "옳은 말씀"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철학과 예술과 과학은 모두 그리스인에게 맡기자, 현세 생활에 필요한 안전보장이나 법률에 따른 정치, 인프라 정비, 식량 보장은 우리 로마인이 책임지고 맡겠다는 식이다. 대(大) 플리니우스는 <박물지>에서, '피라미트는 볼만 하지만 파라오 한 사람의 내세를 위해만들어진 반면, 우리 로마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현세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만들고 있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 전성기 시대에 로마인에게 '정체성 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었다. 그런데 3세기에는 답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답을 찿아 신플라톤주의 철학으로 달려가도, 그것은 지식인의 자기만족일 뿐 널리 일반인들까지 납득시킬 수 있는 답은 되지 않았다. 일반인들이 직면해 있는 것은 사후나 장래에 대한 불안보다 지금 현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결핍과 불안이기 때문이었다. 지적이고 생활도 윤택한 사람이라면 그런 결핍과 불안은 맛볼 필요가 없었다.

  • 거듭되는 야만족의 침입에 따른 살육과 방화, 약탈
  • 그 결과 농경지의 황폐화와 농촌 인구 감소
  • 그것을 피하여 정든 땅을 버리고 도시로 흘러들어왔지만, 과밀화한 도시에서 일자리도 찿지 못해 가족과 함께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형편
  • 게다가 사회복지 정책이 약화하여, 전에는 휼륭하게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식량 무료배급이나 빈곤 가정 자녀를 위한 앙육비 형태로 불우한 사람을 지원하는 정책도 황제의 체면이 걸려 있는 수도 로마에서나 간신히 지속되고 있을 뿐, 부유한 개인의 기부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부유층의 공공심이 줄어들면서 빈껍데기만 남아 있는 형편이었다.
  • 그리고 이런 현실이 낳은 결과인 '희망'의 상실

불행이나 역경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구원이고 위안이 되는 것은 희망이라고 전성기 로마인이었던 세네카가 말했다. 그런 로마 제국도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제국 내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희망'도 줄 수 없게 되었다. 완고한 신앙심보다 자유로운 이성의 작용을 중시해야 한다는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과연 그들에게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기독교가 승리한 요인은 실제로는 로마가 약해지고 피폐해져 가고 있었던 시기였고, 로마 제국은 활력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자신감과 자긍심마저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