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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255 : 로마 제국 960 ( 로마 제국과 기독교 8 )

로마의 역사 1255 : 로마 제국 960 ( 로마 제국과 기독교 8 )

 

 

로마 제국과 기독교 8

로마의 클로세움 남쪽에 있는 성 클레맨테 교회 지하실에는 미트라교 집회실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것은 종교라기보다 결사에 가깝다. 비밀결사도 아닌데 좁은 지하실에 모이기를 좋아한 것만 보아도, 같은 신자들 사이의 굳은 결속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도살된 소의 피를 입교 의식에 사용한 용맹한 미트라교가 특히 병사들 사이에 널리 퍼진 요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나 어린이한테까지 퍼지기에는 이 용맹스러움이 오히려 장애가 되었지도 모른다. 지하 깊은 곳에 집회소를 둔 것은 소의 피를 나중에 씻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 클레맨테 지하의 유적 밑에는 지금도 로마 시대의 하수관이 묻혀 있어서 하수가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있다.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기독교의 온건파와 급진파의 다툼도 온건퍼의 결정직인 반격으로 결판이 난 모양이다. 어쩌면 기독교 성직자를 겨냥한 데키우스 황제와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탄압으로 급진파 지도층이 전멸했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도 기독교를 탄압할 때 군단을 표적으로 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에 포로가 되었을 때 신이 내린 천벌을 받았다고 기독교도들이 자축한 것은 260년이었다. 그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대규모 탄압에 나설 때까지 43년 동안 로마 황제들은 야만족을 격퇴하는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도들은 평온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탄압은 로마군에서 기독교 병사들을 모조리 추방한 것이 특징이지만, 3세기의 혼란 속에서 등장한 이 황제가 로마군이 와르르 무너져버릴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기독교로 개종한 병사들을 모두 추방했다 해도 로마군은 군대로서 충분히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표면에 나타난 숫자와 활력의 강약은 동의어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에는 기독교도가 가장 많았다는 시리아의 대도시 안티오키아조차도 전체 주민의 20분지 1정도에 머물렀다는 데 연구자들의 의견은 대체로 일치한다. 즉 전체 도시 인구의 5%에 불과했다는 뜻인데, 문제는 나머지 95%가 어떤 상태에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20명에 한 명의 비율이라 해도, 그 소수의 사람들만 일치한다고 하면 문제는 수가 아니었다.

기독교가 대두한 네번째 요인으로 든 '회색지대'는 첯번째와 두번째와 세번째 요인을 종합한 것으로,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양보했다는 가설의 결론에 해당한다고 해도 좋다. 로마와 기독교의 경계가 흑과 백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기독교의 양보로 '회색지대'가 사이에 끼어 있었다는 것이 당시의 실상이다.

인간은 명백한 백이나 흑에서 반대로 이동하려면 망설임을 느끼고 멈춰서버리게 된다. 그 선을 넘으려면 상당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색깔을 조금씩 반대편 색갈로 변화해 나가면 사람들은 잘 인지하지 못하고 별 저항감을 느끼지 못하고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3세기의 기독교와 로마 제국 사이에는 이런 경향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반대로 로마 제국괴 유대교와의 관계는 중간에 이러한 회색지대를 가지지 못한 흑과 백의 관계와 비슷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회색지대를 갖을 수 있었던 것은 경탄할만한 유연성의 산물이었다. 변화에 대해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게 할 것, 변한다 해도 대단한 변화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할 것, 선남선녀를 움직이는 데 이보다도 더 효과적인 전술도 없기 때문이다. 일신교는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신을 믿는 사람까지도 인정하지 않지만, 다신교 세계인 고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유럽 사람들이 깨닫게 된 것은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가 1천 년 동안이나 계속된 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로마 시대의 지식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언급한 글을 읽으면서 통감하는 것은 그들이 일신교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신교와 일신교의 차이를 언급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많은 신들을 공유한 시대니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대두에 저항하여 일어선 로마 시대 지식인한테서 논쟁의 무기를 박탈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들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무대에서, 말하자면 적에게 유리한 싸움판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 - 로마 신들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역활을 맡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의 구원을 철학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