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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마음이 가는 곳에, 두바퀴가 머무는 곳에 20

마음이 가는 곳에, 두바퀴가 머무는 곳에 20

 

산성 정상 일대

 

 

남한산성 주행 1

 

지난 5월 25일에는 남한산성을 주파했다. 남한산성은 오르내리막길이 좁고 다니는 차량이 많아 좀 위험한 길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한번은 주파하기로 한 지역이라 내친김에 이날 주파하기로 한 것이다. 

 

남한산성에 대해서는 책이나 영화로 소개된 적이 있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서울 인근에 위치한 방어시설로 삼국시대 이래 오랜 기간동안 우리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한 곳이다. 산세가 험하고 조망이 좋고 한강을 통제하며 한양 방어의 최후 거점으로 인식되어 누대에 걸쳐 성곽 축성과 각종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로 들어오는 차량의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하고 드라이브 코스, 역사 유적 탐방, 맛집, 자전거족들의 주행 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 역사에서 남한 산성이 크게 부각된 것은 조선의 인조대다. 남한산성은 조선의 인조가 병자호란을 맞아 피란했던 곳으로 40여일을 버티가가 식량이 떨어지자 치욕적인 삼전도 항복을 하였던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무능한 인조가 반정으로 왕권을 잡고 반정 공신들에게 휘둘리면서 개혁을 제대로 이루지도 못하고 휘둘리다가 공신간 정쟁과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후금의 침공에 대비하여 평안도에 파견되었던 이괄이 난을 일으켜 신속하게 남하하자,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공주로 피란가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이괄이 부하에게 암살되어 반란이 진압되자 다시 조선의 명맥을 이어간 명줄도 긴 왕이었다. 

 

 

남한산성에 대하여

 

아래는 백과 사전 내용을 인용한 내용이다.

 

개요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며 경기도의 도립공원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곳에서 40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성문을 열고 청에게 항복한 곳으로 유명하다.

 

과거 한양을 지키던 4대 요새 중 하나인 남한산성을 품은, 남한산성도립공원이 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총 12.4km(본성 8.9km, 외성 3.2km, 신남산성 0.2km), 높이는 7.3m이다. 

 

원래 2천여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12km이다. 자연석을 써 큰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16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와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칸, 하궐 154칸, 좌전 26칸으로, 모두 252칸을 지었다.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이쯤되면 남한산성의 중요성과 성안이 유치 가능 인구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으로 시행(인조 17년, 1639)된 기동 훈련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12,700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성내에 남아 있는 건물은 불과 몇 안 된다. 동.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연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숭렬전 이서 장군사당, 보, 루, 돈대 등이 남아있다. 그 중 4대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쯤의 일부 성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사적 제 57호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

삼국 시대 및 통일 신라 시대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남한산성이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세운 왕도인 하남위례성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산성이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晝長城, 일장성(日長城))이라는 의견이다.

하남위례성을 남한산성과 연관 짓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고려 시대이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대부분의 조선 시대 지리 관련 문헌에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이라는 주장이 실릴 정도로 힘을 얻었다.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 조선의 입장에서 한성이 국가의 수도로 적합한 곳임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정남한지》의 저자인 홍경모만이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인용하며 이런 주장을 반박하였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최초의 백제 수도인 위례성으로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을 강력하게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2001년과 2002년에 걸쳐 토지박물관에서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조사 하였는데, 이곳에서 백제의 유적으로 보이는 수혈과 화덕자리 그리고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어 백제 시대에도 남한산성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아직 대대적인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도읍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며, 계속 연구 중이다.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대해서 두 번째 설은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12년 조에 “한강 이남의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과 투쟁에 들어간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 당나라의 병력 4만여명이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를 침범하려는 의도를 보이던 시기였고 고구려의 패잔병과도 대치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를 대비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축조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통일 신라 시대의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것은 이후 여러 고문헌에도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연구에서 주장성과 남한산성의 크기를 비교하여 볼 때 당시 한산 지역 산성 중에서 이 기록에 근접한 산성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다는 것이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또 조선 시대 기록에도 주장성의 길이가 3,993보 나 17,400척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거리를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여 계산하면 주장성에 관한 기록과 비슷하다. 인조 당시 개축할 때 기록에는 “옛 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하였다.”라는 《남한지》의 기록이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에서 통일신라 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토지박물관의 남한산성 행궁터 조사에 따르면, 조선 시대 층위 아래에서 길이 50m가량의 통일 신라 시대 초대형 건물지가 출토되었고, 유물로는 국내 최대 크기의 통일 신라 시대 평기와가 다수 출토 되었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는 특별한 기록은 없다. 다만, 광주부사 이세화(李世華, 미상~1238년 9월 25일(음력 8월 16일))의 묘지명에 따르면 몽골의 고려 침입 당시 1231년 1232년 두 번 광주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주 지역에 소재하는 산성은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이지만, 6세기 중엽 축성된 이성산성은 규모가 작아 농성 전용이라기보다 해미읍성처럼 행정 중심지의 성격이 강해 위의 기록에 나오는 광주성을 남한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서 언급된 이세화의 묘지명에는 몽고군이 침공했을때 성을 수리했다고 되어 있으며, 고려사》에 공민왕 10년 홍건적이 침공했을때 공민왕이 개경을 포기하고 피난길에 오르자 광주 주변 백성들이 모두 산성으로 올라갔다는 기록이 고려 시대 기록의 전부다. 다만, 남한산성이 고려 시대 기록에 나오는 광주성이라는 전제 하에 기록 자료나 발굴된 고려 시대 유물이 적은 점을 들어 일각에서는 고려 시대의 남한산성을 전쟁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군사적 용도의 농성 전용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시대

조선 초

전략 거점으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조선 태종 때 본격화되었다. 1401년 요동을 다녀온 이자영의 보고에 의거,  명나라가 조선을 침략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자 태종은 국경과 내륙을 막론하고 고을 별로 산성을 쌓고 기존의 산성을 개축하여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남한산성도 이러한 국방정책에 따라 세종 때에 군사시설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직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남한산성이 개축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남한산성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현황을 파악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남한산성을 이용하기 위해 현황을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를 통해 당시 개축이나 수리는 안했어도 군사기지로 이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6년 서애 류성룡이 남한산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고, 1603년(선조 36년)에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실제 남한산성이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1621년(광해군 13년)에 석성으로 개축 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때 일부 수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광해군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폐위되었으며, 남한산성이 본격적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증축된 것은 인조 대에 이르러서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집권세력이 교체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에 큰 변화가 초래되었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친명배금 정책을 취한 것이다. 후금이 침입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더욱이 인조 2년(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계기로 도성을 방어하고 유사시 왕이 피신할 수 있는 거처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에 인조는 1624년부터 1626년까지 2년간 공사를 추진하여, 공사 완료 후 광주목이 남한산성으로 이전했고, 수어청도 같은 해에 남한산성에 설치되었다. 성의 둘레도 6,927보가 되었다. 왕이 거처할 행궁도 인조 4년 성곽이 완성될 때 건축되어 《남한지》, 《광주부읍지》에 의하면 상궐이 72칸 반,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이 건축되었다.

병자호란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을 피할 수 없었다. 1627년(인조 5년)에 발발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조선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한데 대해서 조선이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후금은 조선의 왕자를 보내고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따라 청 태종 황태극이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침공 직전 청으로 국호를 개칭한 황태극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후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이에 조선은 먼저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의 왕자를 먼저 강화도로 피신하게 하고, 조정 또한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청군의 선발대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으면서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성 안에는 1만 3천여명의 군사가 방어를 하고 있었고, 양곡 1만 4300여 석과 소금 90여 석이 있어 겨우 50일 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청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남한산성에 당도해 산성 밑의 탄천 부근에 포진하였다. 이에 전국의 구원병들이 출병하였지만, 모두 남한산성에 당도하기 전에 궤멸되었다. 구원병이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자 성안의 조정에서는 강화론이 제기 되었다. 주화파와 주전파 사이에 여러차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이듬해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당하고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자와 군신들의 처자 200여 명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대세는 강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 이후 청군은 화포를 쏘아대어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등 압박을 가하였다. 1월 26일 조선의 사신이 협상을 위해 청 진영에 도착했을때 청군은 강화에서 포로가 된 왕자를 대면시켰다. 이에 조선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1월 30일 인조가 45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갖게 되었다. 이 곳에서 인조는 소복을 입고 청나라 황제 황태극은 높은 단상에 앉아서 삼궤구고두의 예를 받았다. 삼궤구고두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여진족의 의식이었다.

호란 이후

 
동국여도(19세기 초)의 남한산성도(경기도박물관 소장)

호란 이후로 남한산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홍이포와 같은 공성무기의 위력을 실감하였고, 이후 조선은 조총 화포를 주로 하고 궁사와 창검을 보조무기로 하는 형태로 체제를 바꾸게 되었다. 이에 따라 봉암외성, 포루, 돈대, 옹성 등을 증축하였고, 문루와 장대(將臺)를 축조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전쟁으로 인하여 무너진 성벽의 보수 및 원성에 대한 증개축과 함께 아마도 남옹성 3개가 신축되고 연주봉옹성을 비롯한 4개의 옹성에 포루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86년 숙종 12년에는 광주유수 윤지선이 봉암성 축조를 건의하였다. 또한 숙종 19년에는 수어사 오시복이 한봉외성을 새로 건축하였다. 숙종 31년에는 수어사 민진후의 주장에 따라 봉암성에 2개의 포루를 건설하였다. 포루의 방향은 정확히 한봉의 정상부를 향하도록 설치되었으며, 장경사의 원성부분에도 포루를 신축해서 방어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숙종 45년에는 남격대를 신축했다. 이후 많은 수축작업이 이루어져서, 영조대에는 3번의 큰 수축 공사가 이루어졌고, 정조 3년에는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작업이 벌어져 기와로 쌓았던 여장을 벽돌로 교체하였다.

조선 말, 남한산성은 의병 활동사에 다시 등장했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후 봉기한 의병들 중 경기 의병이 이천 의병들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2월 28일). 이후 한성 진공을 준비했으나, 관군에 체포된 김귀성이란 자가 관군에 남한산성 성벽 서쪽에 파손된 부분이 있음을 밀고했다. 관군은 이 파손된 부분으로 밀고 들어와 의병을 해산시키고 성을 장악했다.

1907년 군대 해산 후, 일본은 당시 조선군의 무기와 탄약을 인수했는데, 남한산성 내 사찰에 보관 중이던 무기와 탄약도 회수하여 폭발시켰다.

일제 강점기

1919년 3월 27일, 남한산성에서 인근의 중부면 단대리, 탄리, 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1930년대에는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30년 석혜환, 정영배 등이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를 남한산성을 중심지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1936년 일제에 의해 괴멸되었다.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 조직도 마찬가지였으며, 해방 후에도 인근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해방 후 현재

남한산성도 한국전쟁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벽과 성내의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산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으나, 4·19 혁명 후에 수립된 제2공화국은 이를 무효화시켰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재지정 되었고,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했다. 

 

1963년 1월 21일에는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성벽 복원사업이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97년까지 성벽 5.1Km를 복원했다. 현재 성남시 광주시 양 방향으로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도로는 1974년에 완공되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하고, 201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현재는 옛 풍파를 간직한 채 연 280만명이 방문하는 서울특별시 경기도 등지의 시민들의 자연 휴양처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