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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사극 드라마에 빠지다. 2 <대송궁사>, <대명풍화>

사극 드라마에 빠지다. 2

<대송궁사>, <대명풍화> 

 

 

 

 

'대송궁사'

61부작 '대송궁사'는 북송시대 전성기를 이끈 진종과 장헌황후의 일대기를 그렸다. 절강성 상산현에 약 6천 평의 세트장을 지어 송나라 건축을 재현한 이 드라마는 서비스 시작 후 온라인 플랫폼 아이치이와 텐센트에서 각각 8.9점, 7.9점이라는 높은 평점을 얻으며 연속 4주간 인기지수 TOP(톱)3를 유지했다.

 

 


7월 19일 첫 방송 된 61부작 사극 <대송궁사>는 북송시대 전성기를 이끈 진종과 장헌황후의 일대기를 그렸다. 고증을 위해 절강성 상산현에 약 6000평의 세트장을 지어 송나라 건축을 재현한 이 드라마는 서비스 시작 후 온라인 플랫폼 아이치이(IQIYI)와 텐센트(TENCENT)에서 각각 8.9점, 7.9점이라는 높은 평점을 얻으며 연속 4주간 인기지수 TOP3를 유지했다.

송 역사상 첫 섭정 태후로 꼽히는 장헌황후 ‘유아’는 촉지의 고아 출신임에도 재능이 출중하고 정사에 깊은 이해도를 가진 인물로 기록 돼있다. 드라마는 전란 때 3황자인 ‘조항’과 만나 사랑에 빠진 유아가 진왕의 모반과 3황자의 즉위, 요나라와의 전쟁 등 우여곡절을 거쳐 송의 황후가 되는 과정을 그렸다.

어질고 현명한 유아 역에는 <환락송>, <랑야방> 등 많은 대작에서 주연을 맡았던 류타오(유도, 刘涛)가 캐스팅되어 기품 있는 황후의 역할을 잘 소화했다. 유아의 도움을 받아 황위에 오른 진종 조항 역은 <열화여가>, <꽃보다 남자>의 저우위민(주유민, 周渝民)이 맡았으며, 진왕 ‘조정미’역과 ‘소태후’ 역은 각각 자오원쉬안(조문선, 赵文瑄), 꿰이야레이(귀아뢰, 归亚蕾)등 연륜 있는 배우들이 연기해 작품의 퀄리티를 높였다.

 

 

그러면 여기서 송나라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드라마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중국의 역사에서 송나라 역사 중 북송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송나라 역사 >

 

 

북송

 

북송(北宋, 960년 ~ 1126년)은 중국의 왕조 중 하나이다. 조광윤(趙匡胤)이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에게서 선양을 받아 개봉(開封)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이다. 국호는 이었으나, 금나라에 의해 개봉에서 쫓겨나 남하한 뒤에는 남송과 구별하여 북송이라 불리었다. 남송과 더불어 송, 송조(宋朝)라고 한다.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1111년의 북송.

 

 

역사

후주의 전전도점검(殿前都点検; 근위대장)이었던 조광윤이 후주 최후의 황제에게서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조광윤은 남은 10국을 정복하여 분열상태의 중국을 재통일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 병사했다. 뒤를 계승한 이는 동생 조광의(趙匡義)였는데, 이 계승에 관해서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 촉영부성(燭影斧聲)라는 의혹의 말이 퍼졌었다. 태종(太宗)이 된 조광의는 형의 사업을 물려받아 중국 통일을 이루고, 과거 제도의 충실을 노렸다. 과거 제도는 태종의 아들 진종(眞宗)의 대에 완성되었다.

 

과거 제도의 확립은 황제 독재권의 강화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과도한 문관 대우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를 불러왔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여 송을 침공하였다. 진종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맞아 싸웠으나 요에게 매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했다.(단연의 맹세) 또 요의 침공과 동시에 서쪽의 탕구트족은 서하를 건국하고 송에 반기를 들었으나, 이것도 1044년 매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했다.(경력의 화약)

 

 

이 맹세로 인해 평화를 얻은 송은 압도적인 경제력을 배경으로 높은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 시기에는 회화, 도자기, 한시 등 여러 분야에서도 중국 역대에서도 최고봉이라 칭해지는 작품이 적지 않게 있다. 또 경제 발전과 함께 일반 백성의 경제력도 향상되어 수도 개봉에는 밤이 없을 정도로 활기가 끊이지 않았고, 도시에서 자유롭게 시장을 열어 도단에서는 강담 및 예술인이 시민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했다.

 

또 후세에 이르러, 요와 서하(후에 남송시대의 금도 포함)에 재물을 바쳐 평화를 얻은 것을 재정 고갈 및 민족주의적인 측면에서 비난하는 의견도 있으나, 이것으로 인해 요 및 서하의 지배 계층을 추락시켜 상대국의 군사력 약체화를 초래한 것은 물론, 견직물 및 도자기, 차 등을 애호하는 습관이 이들 여러 나라의 사회 전체에 널리 퍼뜨려 수입량이 증가하여 바쳐진 재물을 상회하는 재물이 송 측으로 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어, 결과적으로 송의 경제력 강화와 연결된 측면도 있다.

 

신법-구법의 다툼

그러나 이 경제적 발전의 이면에는 사회적 모순도 진행되어 민중들 간의 경제적 격차는 매우 커지게 되었다. 또한 요, 서하에 대한 방어에 사용된 군사비가 국가재정에 커다란 부담을 안겨주었고, 그 외 대상인, 대지주의 세수(稅收)의 감소는 무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어, 어떻게든 개혁이 요구되었다.

 

6대 황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에 나섰다. 이 움직임을 신법, 왕안석의 신법이라고 불렀다. 이 신법은 주로 영세 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를 목표로 한 것이기에 신법은 지주, 상인세력과 그 집단 출신인 관료들의 엄청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이들 반대파들을 가리켜 구법파(舊法派)라고 불렀다.

 

이 신법파와 구법파의 다툼은 나날이 격렬해져 갔다. 신법파의 왕안석에 대해 구법파의 대표자는 사마광(司馬光)이었다. 이 두 사람이 살아있던 기간에는 당파의 다툼은 높은 이념에 의한 것이었으나,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당리에 의한 이념 다툼으로 추락했다. 신법파가 이기면 구법파의 관료는 한꺼번에 중앙에서 밀려났고, 법률을 모두 개정하였지만, 그 후에 구법파가 득세할 때에는 오히려 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상황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러한 반복된 다툼은 국가 체제 약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서서히 송의 국력은 기울어져갔다.

 

멸망

8대 황제 휘종(徽宗)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춘 군주로써, 그의 회화는 북송시대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도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제로써 한 일은 채경(蔡京), 고구(高俅), 이언(李彦), 동관(童貫)등 황제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측근들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의 예술을 위해 거대한 정원석 및 정원목을 먼 남쪽에서 운반하는 데 거액의 국비를 사용하고(화석망), 그 재정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신법을 이용하여 증세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민중반란이 빈발하고, 군대는 이들을 진압하기에 바빴다. 이 시기 반란 중 한 가지에 힌트를 얻어 이야기를 부풀리고, 강담으로써 널리 퍼져, 후에 이것을 집대성한 작품이 바로 『수호전(水滸伝)』이다.

 

이때 북쪽의 숙적이던 요는 중국 동북지방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여진족은 요의 착취에 대항해 부족이 단결하여 1115년 스스로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금이었다. 이 여진족을 주목한 송 정부는 금에 대해 공동으로 요를 공격하자고 약속하였다.(해상의 맹세)

 

1121년 금과 공동으로 출병하여 요를 멸망시키고 연운십육주의 일부를 되찾았으나, 반환 전에 연운십육주 전 지역은 금의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북방으로 강제 이주 당했기에 당분간 이 지방에서 세수를 바라지는 못했다. 송나라는 이러한 금에 대항하기 위해 은밀히 요의 잔당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금의 분노를 사게 되어, 1127년 개봉을 함락당하고, 황제 흠종, 상황 휘종을 북쪽으로 연행해 갔다. 이것을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가 남쪽으로 도망쳐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고, 지형 및 기후 관계로 금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던 회하 이남의 땅을 확보하여 송을 재흥하였다. 이때부터 송을 남송이라고 불렀다.

 

문치주의

이 각지에 군벌이라고 불리는 절도사의 할거를 용인하여 이윽고 오대십국 시대의 병란까지 이르는 것을 본 태조 조광윤이 세운 송 왕조는 각지의 유력자 세력을 전시(殿試)를 실시하는 등, 과거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해 명실 공히 문신 관료체제가 완성의 영역에 도달하였다. 진나라 이전, 오호십육국 시대, 남북조 시대, 오대십국 시대의 군웅 할거 상황은 이 이후 중화 왕조에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송 시대의 지배체제는 당(唐) 시대의 귀족층이 오대십국의 병란을 통해 몰락한 후, 사대부(士大夫)라 불리는 새로운 계층이 중심이 되었다. 사대부는 교양을 지닌 부유한 시민이라는 뜻을 가진 존재로써 학문을 쌓고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것으로 귀족이란 혈연에 의해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합격자를 배출해 현관으로 오르는 일이 주위의 존경을 모아, 지방의 간판 같은 존재가 되어 재산을 쌓았다.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재산을 쌓을 수 있는 출세한 인간이 이 일족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존경은 받지 못하고, 재산도 이윽고 소멸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황제가 이러한 사대부 출신의 관료를 수족으로 사용하여 국정을 담당하게 한 체제는 '황제전제', '군주독재'라고도 칭하였다. 다만 또 한편으로는 진종의 사망 후, 어리고 병약한 황제가 차례로 즉위하고, 송 황실과는 혈연관계가 없는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황제의 직무를 대행하여, 정치를 안정시킨 일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러한 사대부 층은 관료이면서 동시에 지주, 대상인이었기에 모든 문화를 독점하게 되었다. 이 이후 중국에서 다음 원나라 시대를 제외하고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들은 거의 사대부로 제한되었고, 그 외로는 누르하치를 비롯한 왕조 창설기의 인물과 그 주위에 있던 존재로써 이자성, 홍수전이라 말 할 수 있는 반란 지도자들뿐이었다.

 

과거제도

수나라 문제에 의해 시작된 과거 제도였으나, 과거가 진정한 의미로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은 송 시대라 말할 수 있다. 당나라에서는 과거를 통과하더라도 귀족층의 방해를 받아, 몇 년이 지나도 관직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한유(韓愈)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송 시대에는 귀족층의 몰락으로 인해 이러한 일은 없었다.

 

송 시대에서의 과거제도의 주요 변경 점으로 즉 전시를 시작한 일을 꼽을 수 있다. 이때까지는 지방에서 1차 시험으로 실시한 해시(解試), 중앙에서 2차 시험으로 실시한 회시(會試)의 2종류가 있었는데, 이들 시험 위에 황제의 눈앞에서 실시한 전시를 만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전시에 의해 낙제한 사람도 있었으나, 낙제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거의 없었다. 또 그때까지 많은 수의 과거 과목(교과가 아닌, 수험코스)을 진사(進士), 명법(明法)등으로 나뉘었으나, 신종 시기에 진사과 하나로 만들었다. 이 이후로 과거의 합격자를 진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과거제도에 있어서 매년 시험관이 그 해 합격자와 사제관계를 맺어 이것이 관계(官界)에 관련된 인맥의 기초가 되었다. 낙제자가 거의 없었던 전시가 존재하는 의미도 여기에 있기에, 황제와의 사이에서 사제관계를 맺는 일이 황제의 직속 관료라는 의식을 생겨나게 하였다.

 

송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과거가 성행하던 시대여서, 거의 3년에 1번 시행되었고, 1회에 약 300~400명이 합격하였다. 그 중에는 수석 합격자를 가리켜 장원(状元)이라고 불렀다.

 

송 시대에는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개인이 국가를 책임지려는 기개가 보였다. 신법, 구법의 다툼에서도 그 기개가. 그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의해 실력으로 지위를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송 시대를 통해 관료와 관료 예비군인 학생들의 세력은 매우 강해져, 학생들의 운동에 의해 재상이 탄핵을 받은 일도 있었다.

 

관료제도

송 시대 관료제도는 북송의 원풍(元豊)년간을 경계로 크게 변화하였다. 송 초기 원풍개혁 때까지는 오대의 영향을 크게 받아, 당 제도에 의거한 관명이 기록관(寄禄官; 봉급표(俸給表)으로 변화해 실제 직함을 표시하지 않는 등, 당 제도 및 명, 청 시대의 관료체계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육부(六部)의 시랑(侍郞) 및 원외랑(員外郞)은 실제로는 육부의 일을 하지 않고, 봉급의 단계를 표시하는 데 쓰였다. 이 시대의 관료 제도를 간단하게 서술한다면 아래와 같다.

 

중앙관제는 형식상 예부터 내려온 삼성육부(三省六部), 구사(九寺), 오감(五監)을 유지하였다. 그 중에 중서성(中書省)이 문하성(門下省)의 권한을 흡수하는 형태로 권한이 집중화된 재상부(宰相府)가 있었고, 재상은 동중서문하평장서(同中書門下平章事)라고 불리어, 1명이 아닌 3명이 선택되었고, 부재상으로써 참지정사(参 知政事)가 여러 명 선택되었다.

 

재상부는 민정을 담당하고, 군사를 담당한 것은 추밀원(枢密院)이었다. 추밀원의 장관 추밀사(枢密使)와 부장관 추밀부사(枢密副使)에 참가정사을 합쳐 집정(執政)이라 불렸고, 재상과 집정이 전체의 정무를 맡았다.

 

행정기관인 육부, 구사, 오감이 있으나, 이들은 실제로는 아무런 역할이 없었고, 대신하여 실제 행정을 맡았던 사직(使職)이라 불리는 관직이 있었다.

  • 삼사(三司) - 재정을 담당.
  • 어사대(御史台) - 관료를 감찰.
  • 심관원(審官院) - 인사담당.
  • 태상예의원(太常礼儀院) - 제사담당.
  • 심형원(審刑院), 형부(刑部), 대리사(大理寺) - 재판담당.

등의 관직이 담당했다.

 

예부터 내려온 관직명은 일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그 일이 단계에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당나라 시대의 삼품(三品)의 위라는 것이 구품(九品)의 아래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지방관제에 의거한 최대 행정구분으로 (路)가 있고, 그 아래에 부(府), 주(州), 군(軍), 현(縣)이 존재했다. 주의 장관은 지(知)~주(州; ~의 부분에는 주의 이름이 들어간다)라고 불렸고, 그 부관으로써 통판(通判)이란 직책이 잇었다.

 

군사제도

송의 군사제도는 위병제였다. 태조는 절도사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동시에, 자신의 출신 모체였던 금군을 강화시켜, 이것을 정규군으로 삼았다. 이 정책으로 인해 중앙의 힘이 강해지고, 절도사가 지방에서 할거하는 것을 억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금군의 사령관에서 황제가 된 일을 교훈 삼아, 금군의 제도를 개혁하여 전군의 사령관직을 폐지하고 황제직속으로 그 하부의 존재로써 있던 장군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정규군인 금군과 치중병이었던 상군이 있었고, 상비군은 북송 중기에 140만을 헤아렸다. 그러나 숫자만 많을 뿐, 실제 전투에서는 불안한 병사가 많았었다. 또한 문인중시주의로 다른 무인들은 경시 받아 그 결과 병사를 뽑는 것에 고충이 많아지게 되어, 병사들은 죄인출신자가 뽑히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대책 중 한가지로 왕안석은 보마법이라 말해지는 군제개혁안을 내놓았다. 보마법은 군마를 사육하는 일을 장려하는 것으로 보병이 많은 송군이 기병을 증가시켜 전력향상을 노리기 위해 실시한 것이었다.

 

송은 관료가 역대왕조 중에서도 가장 우대받았던 시기였다.

 

 

역대황제 일람

북송 황제와 연호대수묘호시호성명연호재위기간

- 송 성조
(宋聖祖)
(송 태조 추숭)
상령고도구천사명
보생천존대제
(上靈高道九天司命
保生天尊大帝)
조현랑(趙玄朗) - -
- 송 희조
(宋僖祖)
(송 태조 추숭)
입도조기적덕기공의문
헌무예화지효황제
(立道肇基積德起功懿文
憲武睿和至孝皇帝)
조조(趙朓) - -
- 송 순조
(宋順祖)
(송 태조 추숭)
혜원예명황제
(惠元睿明皇帝)
조정(趙珽) - -
- 송 익조
(宋翼祖)
(송 태조 추숭)
간공예덕황제
(簡恭睿德皇帝)
조경(趙敬) - -
- 송 선조
(宋宣祖)
(송 태조 추숭)
무소예성황제
(武昭睿聖皇帝)
조홍은(趙弘殷) - -
제1대 송 태조
(宋太祖)
계운입극영무예문신덕
성공지명대효황제
(啓運立極英武睿文神德
聖功至明大孝皇帝)
조광윤(趙匡胤) 건륭(建隆) 960년 ~ 963년
건덕(乾德) 963년 ~ 968년
개보(開寶) 968년 ~ 976년
960년 ~ 976년
제2대 송 태종
(宋太宗)
지인응도신공성덕문무
예열대명광효황제
(至仁應道神功聖德文武
睿烈大明廣孝皇帝)
조광의(趙匡義) 태평흥국(太平興國) 976년 ~ 984년
옹희(雍熙) 984년 ~ 987년
단공(端拱) 988년 ~ 989년
순화(淳化) 990년 ~ 994년
지도(至道) 995년 ~ 997년
976년 ~ 997년
제3대 송 진종
(宋眞宗)
응부계고신공양덕문명
무정장성원효황제
(應符稽古神功讓德文明
武定章聖元孝皇帝)
조항(趙恆) 함평(咸平) 998년 ~ 1003년
경덕(景德) 1004년 ~ 1007년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년 ~ 1016년
천희(天禧) 1017년 ~ 1021년
건흥(乾興) 1022년
997년 ~ 1022년
제4대 송 인종
(宋仁宗)
체천법도극공전덕신문
성무예철명효황제
(體天法道極功全德神文
聖武睿哲明孝皇帝)
조정(趙禎) 천성(天聖) 1023년 ~ 1032년
명도(明道) 1032년 ~ 1033년
경우(景祐) 1034년 ~ 1038년
보원(寶元) 1038년 ~ 1040년
강정(康定) 1040년 ~ 1041년
경력(慶曆) 1041년 ~ 1048년
황우(皇祐) 1049년 ~ 1054년
지화(至化) 1054년 ~ 1056년
가우(嘉祐) 1056년 ~ 1063년
1022년 ~ 1063년
제5대 송 영종
(宋英宗)
체건응력융공성덕헌문
숙무예성선효황제
(體乾應歷隆功盛德憲文
肅武睿聖宣孝皇帝)
조서(趙曙) 치평(治平) 1064년 ~ 1067년 1063년 ~ 1067년
제6대 송 신종
(宋神宗)
소천법고운덕건공영문
열무흠인성효황제
(紹天法古運德建功英文
烈武欽仁聖孝皇帝)
조욱(趙頊) 희녕(熙寧) 1068년 ~ 1077년
원풍(元豊) 1078년 ~ 1085년
1067년 ~ 1085년
제7대 송 철종
(宋哲宗)
헌원계도현덕정공흠문
예무제성소효황제
(憲元繼道顯德定功欽文
睿武齊聖昭孝皇帝)
조후(趙煦) 원우(元祐) 1086년 ~ 1094년
소성(紹聖) 1094년 ~ 1098년
원부(元符) 1098년 ~ 1100년
1085년 ~ 1100년
제8대 송 휘종
(宋徽宗)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
인덕헌자현효황제
(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
仁德憲慈顯孝皇帝)
조길(趙佶)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대관(大觀) 1107년 ~ 1110년
정화(政和) 1111년 ~ 1118년
중화(重和) 1118년 ~ 1119년
선화(宣和) 1119년 ~ 1125년
1100년 ~ 1125년
제9대 송 흠종
(宋欽宗)
공문순덕인효황제
(恭文順德仁孝皇帝)
조환(趙桓) 정강(靖康) 1126년 ~ 1127년 1125년 ~ 1127년

 

 

송태조 조광윤(宋太祖 趙匡胤, 927년 ~ 976년)은 중국의 송 황조의 창시자이자 북송의 초대 황제(재위: 960년 ~ 976년)이다.

 

북송 태조북송의 초대 황제재위황후부친모친다음 황제묘호시호

 
960년 ~ 976년
효혜황후
효명황후
효장황후
선조
소헌황후
태종
태조(太祖)
계운입극영무예문신덕성공지명대효황제(啓運立極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

 

 

생애 초기

하북성 고안현 사람으로 부친은 후당의 금군 장관이었던 조홍은(趙弘殷)이었고, 모친은 두씨이다. 후주 세종 시영의 부하였다가, 근위군의 장관이 되었다. 시영은 명군이었지만, 그의 후계자는 7세에 불과한 공제였다. 전란의 시대에 어린 군주에게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자신의 수장인 조광윤이 권력을 쥐는 것을 원했고, 조광윤이 과음을 하여, 인사불성이 되어 있는 틈을 타서, 무리하게 그를 황제로 옹립해 버렸다. (진교의 변) 주위의 소리에 눌려진 조광윤은 개봉에 돌아와서 공제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아 국명을 송이라고 했다.

 

976년 천하통일을 목표로 오나라와 월나라 그리고 북한의 잔재를 정복하고, 통일 전 50세에 급사를 하게 된다. 동생 태종에 살해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고, 진교의 변에서 보듯 두주불사하는 그의 음주 습관 때문에 질환에 의한 급사라고 하는 설도 있다.

 

오대십국의 혼란

오대십국 시대가 시작된 해는 당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907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조로써의 당나라는 875년 ~ 884년에 걸쳐 일어난 황소의 난에 의해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고, 그 후 장안을 중심으로 관중지역을 지배한 일개 지방정권으로 추락하여 주전충 이극용  절도사 세력이 함께 존재하는 난립상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오대십국의 오대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뜻하며, 십국은 오월, , 형남, . , 남당, 남한, 북한, 전촉, 후촉을 포함한다.

 

조광윤의 세력은 후주의 속해 있었다. 세종의 뒤를 계승한 사람은 겨우 7살의 공제 시종훈이었다. 이 상황을 보고 북한은 요나라의 후원을 얻어 후주를 침공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나선 인물이 세종의 제일 측근이었으며, 전전도점검(殿前都点検;금군사령관)이었던 조광윤(후에 송나라 태조)이었다.

 

진교의 변

960년 정월, 조광윤은 어린 황제를 모시고, 요나라와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도중에 개봉 부근의 진교역(陳橋驛)에서 조광윤에게 술을 만취하도록 먹이고, 정신을 잃은 그에게 황포를 입혀 강제로 추대하였다. 조광윤은 조보, 조광의 등 부하들의 추천에 못이기는 척하며 개봉에 입성하여 7세의 어린 시종훈에게 황제를 선양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이것을 진교병변(陳橋兵變) 또는 진교의 변(陳橋之變)'이라고 한다.

 

반대를 하던 한통(韓通)은 조광윤의 부하들에게 피살되었고, 당시 후주의 재상이었던, 범질(范質)과 왕부(王溥) 등을 협박하여 굴복시켰다.

 

오대에서는 선양은 이렇듯 자주 일어났었고, 양위를 물려준 황제는 뒷날 일어날 역습을 우려해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시종훈을 죽이지 않았고, 시종훈의 자손은 남송의 멸망 때까지 두터운 보호를 받았다. 시종훈은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송태종은 황제의 예로 장례를 치뤄준다.

 

배주석병권

휘하 장수들과 술을 마시고, 황제로 옹립되었던 송태조는 961년 역으로 금위군(禁衛軍) 장수 석수신(石守信) 등의 휘하 장수들을 초청하여 말술을 먹이고, 병권을 자발적으로 내놓게 하는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을 단행하였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십국의 혼란이 군벌의 폐해로 일어났다고 생각한 송태조는 휘하의 군벌들에게도 그러한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하고 술자리에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함으로써 하루 저녁에 군벌들의 세력을 넘겨받아 중앙으로 복속시킨다. 이 사건은 지방 군벌에 의한 군웅할거의 국면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된다. 태조는 동일한 수단으로 왕언초(王彦超) 등 여러 명의 절도사들의 병권도 박탈하고, 지방의 행정과 재정을 모두 중앙으로 복속시켰다.

 

통일 전쟁

과거제도의 정비와 내치의 안정을 바탕으로 송태조 조광윤은 통일 전쟁을 시행하였다. 963년 중국대륙의 가장 중요한 요지라 할 수 있는 호북성의 형남을 합병했다. 965년에 사천성의 후촉을 병합하고 이땅의 풍부한 물산을 빼앗아 전쟁 비용을 보충한다. 그리고 971년 광동을 지배하던 남한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975년 화남에서 최대 세력을 자랑하던 남당을 멸망시키게 되었다. 남은 것은 북쪽의 북한과 남쪽의 오월뿐이었지만 태조는 당돌에서 병사했다.

 

정책

계속된 오대십국의 혼란으로 조광윤은 군벌의 힘을 억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나라 때부터 전란의 원인이 되고 있었던 절도사의 힘을 조금씩 줄여 단순한 명예직으로 남겨두었다. 조광윤은 많은 대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권한을 줄여나갔다. 조광윤의 정치는 만사가 이러한 방법으로 행해졌으며, 혈사를 일으키는 것을 싫어했다.


과거제도를 개선하여 전시(殿試)를 행하고, 무인보다 문인이 상위에 서는 문치주의를 확립했다. 과거시험이 실질적으로 관료선발 제도로 제 기능을 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라고 한다. 조광윤이 폈던 문민통제 정책은 그 후 시대를 지날 때마다 극단적으로 강화되어, 군사력의 저하로 나타나 관료 간의 파벌싸움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약화된 군사력으로 외적의 도발을 막지못하여 멸망한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대부분의 개국황제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전 군주들을 죽인 것에 반해 조광윤은 후주의 시씨를 시작으로 항복한 나라들의 군주들을 살리고, 귀족으로서의 지위도 보장하였다. 따라서 송태조 조광윤은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명군 중의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황제이다.

 

석각 유훈

석각유훈은 조광윤이 돌에 새겨 자손에게 전한 유언이다. 송왕조의 황제가 즉위를 하면 반드시 이것을 석각유훈을 보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 존재는 극비였고, 궁중에서만 전해져 내려와 정해진 사람들 이외에는 재상조차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군의 침입으로 왕궁이 점령되어 발견되었고, 처음으로 그 존재가 표면화되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유훈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 조광윤에게 황위를 미루었던 시씨 가문의 자손을 대대로 돌봐 주어라.
  • 뜻이 맞지 않다고 사대부를 죽여서는 안 된다.

 

이 두 개의 유훈이 지켜진 것은 시씨의 자손이 남송이 멸망한 애산 전투에서 운명을 함께 한 것과, 정쟁으로 실각한 관료(신법, 구법의 다툼. 사마광 진회)가 처형되지 않고 정국의 변화에 의해 좌천되었다 중앙에 복귀하는 것으로 증명하고 있다. 조광윤의 우수한 인간성이 후의 송왕조의 정치에 반영된 것을 이 유훈은 말해 주고 있다.

부모

  1. 효혜황후 하씨(孝惠皇后贺氏)
  2. 효명황후 왕씨(孝明皇后王氏)
  3. 효장황후 송씨(孝章皇后宋氏)

형제

  1. 북송 태종(太宗) 조광의
  2. 위애왕 조정미(魏哀王趙廷美)

  1. 등왕(滕王) 조덕수(趙德秀),일찍 사망
  2. 연의왕(燕懿王) 조덕소(趙德昭),효혜황후(孝惠皇后 )의 아들
  3. 서왕(舒王) 조덕림(趙德林),일찍 사망
  4. 진강혜왕(秦康惠王) 조덕방(趙德芳)

  1. 위국대장공주 - 효혜황후의 딸
  2. 노국대장공주 - 효혜황후의 딸
  3. 진국대장공주 -

 

송태종 조광의(宋太宗 趙匡義, 939년 ~ 997년)는 중국의 송 황조의 제2대 황제(재위: 976년 ~ 997년)이다. 송태조 조광윤의 동생으로 후에 형과 같은 이름을 쓰는 것을 꺼려하여 '빛 광'으로 바꿔서 광의(光義)로 사용하다가 즉위를 하고 나서 경(炅)으로 고쳤다.

 

 

북송 태종북송의 제2대 황제재위황후이전 황제다음 황제

 
976년 ~ 997년
숙덕황후
태조
진종

 

태조 후주의 장군이었던 때부터 항상 형에게 협력하고, 보조하였고, 진교의 변으로 태조를 옹립할 때도 조보(趙普)등과 함께 중심이 되어 태조를 설득하였다.

 

태조가 사망하고 나서 아들이 후사를 잇지 않고 태종이 즉위한 것에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다만 급사를 하고 양위를 받은 것에 대해 암살설도 사라지지 않았다. 후에 태조의 장자 조덕소(趙徳昭)가 자살하고, 둘째 아들 조덕방(趙徳芳)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적장자의 황위 승계에 엄격한 북송에서는 형인 태조의 자식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고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준 것에 대해 항상 규탄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태종에게는 태조에 뒤지지 않는 수완이 있었고, 979년 태조가 통일하지 못하고 남긴 오대십국 중의 오나라, 월나라, 북한을 멸망시켜, 태조의 업을 잇고 중국을 재통일하는 업적을 남긴다.

 

요나라 정벌

979년 5월 연운16국도 수복하고자 태원을 출발하여 요나라에 원정군을 보내지만, 대패하고 만다. 처음에는 두 개의 성을 손쉽게 공략하였지만, 지금의 베이징인 연경을 공략하는데는 실패하고 만다. 본인도 화살을 맞고 상처를 입었으며, 무주공산이 된 지휘부를 대신하여 태조의 장자인 조덕소를 황위로 옹립하기 위한 움직임도 이 상황에서 발생하였는데, 결국 조덕소의 자결로 이 사태는 마무리 된다. 993년 토지를 둘러싼 귀족들의 갈등이 깊어져 순화 4년 봄에 왕소파, 이순 등의 농민들이 쓰촨에서 봉기하였다. 원정으로서는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내치는 착실하게 이뤄 과거시험으로 문관을 대거 채용하고, 감찰제도를 갖추어, 당시까지 군인정치의 폐해로부터 문치주의로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태종은 21년의 통치기간이 지난 997년 5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아들이 제3대 황제 진종(眞宗)으로 계승, 등극했다.

 

 

 

송 진종(宋 眞宗, 968년 ~ 1022년)은 중국 북송의 제3대 황제(재위 998년 ~ 1022년). 휘는 조덕창(趙德昌)이며 시호는 응부계고신공양덕문명무정장성원효황제(應符稽古神功讓德文明武定章聖元孝皇帝)이다.

 

 

 

 

태종(太宗)이 된 조광의는 형의 사업을 물려받아 중국 통일을 이루고, 과거제도의 충실을 노렸다. 과거제도는 태종의 아들 진종(眞宗)의 대에 완성되었다.

 

과거제도의 확립은 황제독재권의 강화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과도한 문관대우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를 불러왔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여 송나라를 침공하였다. 진종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맞아 싸웠으나 요나라에게 매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했다. (단연의 맹세)

 

1005년 송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서하의 덕명(德明)은 송나라와 화의하고 송 황실로부터 조(趙)씨 성을 하사받고 은주, 유주 절도사의 직책을 받는다.

 

진종은 1022년에 붕어하고 북송 인종이 즉위하였다.

 

조부모와 부모

  • 조부 : 선조(宣祖) 소무황제(昭武皇帝) 조홍은(趙弘殷)
  • 조모 : 소헌황후(昭憲皇后) 두씨(杜氏)
  • 부친 : 태종(太宗) 광효황제(廣孝皇帝) 조경(趙炅)
  • 모친 : 원덕황후(元德皇后) 이씨(李氏)

황후

봉호시호이름(성씨)별칭재위년도생몰년도국구(장인/장모)능묘비고

국부인(國夫人) 장회황후
(章懷皇后)
반씨(潘氏) [1] (추존) 968년 ~ 989년 정무혜왕(鄭武惠王)
반미(潘美)
영창릉
(永昌陵)
[2]
황후(皇后) 장목황후
(章穆皇后)
곽씨(郭氏) [3] 997년 ~ 1007년 975년 ~ 1007년 팽충무왕(彭忠武王)
곽수문(郭守文)
내국태부인(萊國太夫人)
(梁氏)
영희릉
(永熙陵)
 
황후(皇后) 장헌명숙황후
(章獻明肅皇后)
유씨(劉氏) [4] 1012년 ~ 1022년 968년 ~ 1033년 영흥군절도사(永興軍節度使)
유통(劉通)
서국태부인(徐國太夫人)
농씨(龐氏)
영정릉
(永定陵)
 
신비(宸妃) 장의황후
(章懿皇后)
이씨(李氏) [5] (추존) 987년 ~ 1032년 경도군왕(京兆郡王)
이인덕(李仁德)
월진국태부인(越陳國太夫人)
동씨(董氏)
[6]
숙비(淑妃) 장혜황후
(章惠皇后)
양씨(楊氏) [7] (추존) 984년 ~ 1036년 양지엄(楊知儼)   [8]

후궁

봉호시호(봉호)이름(성씨)별칭생몰년도비고

귀비(貴妃) 소정귀비
(昭靜貴妃)
심씨(沈氏) 황태비(皇太妃) 994년 ~ 1076년 [9]
현비(賢妃) 귀비(貴妃) 두경진(杜瓊眞) 오진대사(悟眞大師) ? ~ 1046년 진종 사후 출가함.
수원(修媛) 현비(賢妃) 조씨(曹氏)   ? ~ 1026년  
  귀비(貴妃) 진씨(陳氏)      
사의(司衣) 현비(賢妃) 진씨(陳氏)   ? ~ 996년 진종 즉위 전 사망.
귀인(貴人) 순용(順容) 대씨(戴氏)      
등국부인(滕國夫人) 미인(美人) 서씨(徐氏) 난릉군부인(蘭陵郡夫人) ? ~ 1008년  
  귀인(貴人) 진씨(陳氏)      
    장심미(張甚微)     온성황후의 고모. 작위 미상.
    장씨(張氏)     작위 미상.

황자

-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자식별칭비고

1 온왕(溫王)   조제(趙禔)         조졸함.
2 주왕(周王) 도헌황태자
(悼獻皇太子)
조현우(趙玄祐)
조우(趙祐)
995년 ~ 1003년 장목황후 곽씨   [10]  
3 창왕(昌王)   조기(趙祇)         조졸함.
4 신왕(信王)   조지(趙祉)         조졸함.
5 흠왕(欽王)   조기(趙祈)         조졸함.
6 황태자(皇太子)   조수익(趙受益)
조정(趙禎)
1010년 ~ 1063년 장의황후 이씨 3남 13녀
+ 1양자
[11] 제4대 황제 인종(仁宗).

황녀

-봉호(공주)봉호(제희)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별칭비고

1 혜국대장공주
(惠國大長公主)
정일대장제희
(靜一大長帝姬)
      장의황후 이씨     요절함.
2 승국대장공주
(升國大長公主)
소회대장제희
(昭懷大長帝姬)
소회(昭懷) 조지충(趙志冲) ? ~ 1047년 귀비 두씨   [12] 출가함.

 

 

* 요나라 소태후

예지황후 소씨(睿智皇后 蕭氏, 953년 6월 14일 ~ 1009년 12월 29일)는 요나라의 5대 황제 경종의 부인이자 요나라의 6대 황제 성종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이름은 소작(蕭綽)이며, 자는 염염(炎炎)이다. 아아극(雅雅克)으로 기록되기도 하고, 때로는 연연(燕燕)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녀는 아들 성종의 섭정을 하였는데, 성종은 그녀에게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라는 존칭을 내렸다. 이후, 승천태후 또는 그녀의 성인 '소' 를 따서 소태후(蕭太后)라고 불렸다. 그녀가 성종을 섭정한 시기를 승천후섭정 시기라고도 부른다.

 

소태후가 역사상에 등장하는 모습은, 거란을 발전시킨 현명하고 대의에 밝은 여걸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남편 경종이 몸이 허약하여 경종이 황위에 있던 시기에도 중요한 국사를 주로 처리하였다. 이후, 아들 성종이 황위에 오르자, 12세의 그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섭정 기간에 법전을 편찬해 공포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불경을 편수하여 불교 문화를 발달시켰다. 

 

또한 993년 소손녕에게 고려를 침략케 하여 고려와 거란의 1차 전쟁을 일으키게 했으며, 1004년 송나라와 직접 전쟁을 하여 거란에 유리한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연의 맹'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후로 은 거란에 매년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세폐로 바친다. 이후, 거란은 그를 기반으로 재정을 닦고, 송과의 무역도 활성화되었다. 거란이 거대한 정복 왕조로 대제국을 이루고, 성종 때 전성기를 이룩하기 위한 기반을 닦은 여인으로 평가된다. 향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송 인종(宋仁宗, 1010년 ~ 1063년)은 북송의 제4대 황제(재위:1022년 ~ 1063년)였다. 휘는 조정(趙禎). 시호는 체천법도극공전덕신문성무예철명효황제(體天法道極功全德神文聖武睿哲明孝皇帝). 제 3대 황제 송 진종의 여섯번째 아들이다.

 

 

 

범중엄은 송나라 인종이 친정을 하면서 중앙 관리가 되었다. 곽황후(郭皇后)의 폐립문제를 놓고 찬성파인 재상 여이간(呂夷簡)과 대립했기 때문에 재상에 항론을 하여 요주로 좌천되게 된다. 이후 여정, 윤수, 구양수 등이 그를 지지하여 차례로 조정에서 물러나면서 그들 스스로를 군자의 붕당이라고 칭한다.

 

1038년 서하의 이원호가 섬서 지방을 침공을 하자 범중엄은 전운사로서 섬서를 그 침공으로부터 방어를 하고 국경을 지키는 역할을 몇 해 동안 담당하였다. 그는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장병들을 엄하게 훈련시키고 인자하게 대했으며, 허약한 송군을 정예부대로 편성하여 서하를 퇴치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공으로 인종은 범중엄을 부재상에 임명했으며, 1043년 관리제도를 정비하여 인재를 양성하며, 무력을 강화하는 개혁조치를 제안했다. 인종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개혁안이 전국적으로 실시되게 된다. 이 정치개혁은 1041-1048년까지에 7년간 실시되어, 이 개혁을 경력신정(慶曆新政)이라고 불렀다.

 

1041년 서하군이 송나라 영토 근처에 집결해 호수천에서 양국 간 전투가 벌어졌는데, 송군이 패배해 전사자가 1만 3천 명에 달했다. 그 후 2년 여간 전쟁이 계속 되었는데, 송나라와 요나라가 강화를 맺고 서하의 병사와 백성들이 느끼는 전쟁의 피로가 커지는 등 전황이 서하군에 유리하지 않게 되자 서하에서는 송나라에 강화를 요청했다.

 

송나라는 서하와 요나라와의 동맹을 우려하여 서하의 강화 교섭을 받아들였다. 1044년 송이 서하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는 대신 서하에서는 송나라의 황제를 인정하고 신하의 나라가 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그래서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夏國王)에 봉해졌고, 송나라는 평화유지를 위해, 사실 상 공물에 해당하는 비단 13만 필, 은 5만 냥, 차 2만근을 매년 서하국에 보내기로 하였다.

 

1063년, 인종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이 병사하고 영종이 즉위하였다.

 

 

범중엄(范仲淹)(989년 - 1052년)은 자는 자는 희문(希文),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북송 때의 정치가, 문학가, 교육가이며, 쑤저우 저장성 오현 사람이다.

 

989년 소주(蘇州)에서 태여나 서주(徐州)에서 거세(去世) (1052年)했으며 籍贯(적관)은 彬州(빈주)에서 행했다. 불행하게도 2세 때 부친을 여위었다. 모친도 어린 그를 데리고, 산둥성의 지저우의 장산현 주씨 집안으로 개가를 하여 그의 이름도 '주설'로 바꾸었다. 이후 성장을 하면서 생가를 알아내고는 다시 제 이름을 찾았다.

 

응천부로 가서 고학을 하여, 1015년에 진사에 급제를 하고, 광덕군(廣徳軍)의 사리참사를 역임했다. 안수의 추천을 받아, 비각교리가 되었고, 송나라 인종이 친정을 하면서 중앙 관리가 되었다. 곽황후(郭皇后)의 폐립문제를 놓고 찬성파인 재상 여이간(呂夷簡)과 대립했기 때문에 재상에 항론을 하여 요주로 좌천되게 된다. 이후 여정, 윤수, 구양수 등이 그를 지지하여 차례로 조정에서 물러나면서 그들 스스로를 군자의 붕당이라고 칭한다.

 

1038년 서하 이원호가 섬서 지방을 침공을 하자 전운사로서 섬서를 그 침공으로부터 방어하고 국경을 지키는 역할을 몇 해 동안 담당하였다. 그는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장병들을 엄하게 훈련시키고 인자하게 대했으며, 허약한 송군을 정예부대로 편성하여 서하를 퇴치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공으로 인종은 그를 부재상에 임명했으며, 1043년 관리제도를 정비하여 인재를 양성하며, 무력을 강화하는 개혁조치를 제안했다. 인종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개혁안이 전국적으로 실시되게 된다. 이 정치개혁은 1041-1048년까지에 7년간 실시되어, 이 개혁을 경력신정(慶曆新政)이라고 불렀다.

 

범중엄은 어렵게 자라, 출세한 뒤에도 부귀를 누릴 수 있었는데도 지독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자나깨나 백성만을 생각했다고 전한다.

 

송대의 사대부 풍을 형성시킨 사람이요, 육경과 역경에 통달하였고, 항상 감사히 천하를 논하며,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았다고 전한다.

 

당시 사회는 워낙 부패하여 비록 범중엄의 개혁은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개혁에 자극을 받아 송나라 때의 가장 위대한 개혁가로 불리는 젊은 개혁가 왕안석(王安石, 1021년-1086년)은 그의 개혁을 이어받아 송나라 최고의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구양수(歐陽修, 1007년~1072년)는 중국 송나라 인종 ~ 신종 때의 정치가 이자 문인, 학자이다. 자는 영숙, 취옹. 육일거사. 익호는 문충.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길주 여릉(현재의 장쑤성 길안 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4살 때 부친을 여윈다. 부친인 구양관(歐陽觀)은 쓰촨성 지방관이었는데, 그의 사후 어머니를 따라 백부 구양엽(歐陽曄)이 추관(推官)으로 있는 수주(隨州)[후베이(湖北)]로 가서 생활하며 빈궁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정규교육에 의하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구양수는 한유(韓愈)의 깊고 예리한 문장에 매력을 느꼈고 그를 추앙했다. 1023년 17세 때 처음으로 수주의 지방 고시에 참가하지만 그의 용운(用韻)이 관운(官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패한다. 그 뒤 1028년 명사인 서언(胥偃)을 찾아가 자신의 문장을 보여주었다. 서언은 구양수의 웅대한 문장에 감탄해 그를 자신의 문하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해 겨울 서언과 함께 경사로 가서 춘계국자감고시(春季國子監考試)에 응시한 구양수는 수석의 영광을 얻었고, 가을에는 국학(國學)에 응시해 또 수석을 차지하게 된다.

 

1030년(천성 8년) 서른 살때 진사에게 급제하여 포증을 이어 개봉 부윤의 임무에 종사한다. 고관으로 출세의 길이 열려있었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가꾸진 독립 사상은 그의 성품 중의 하나로 계속해서 남게 되었다. 이후 관각 비교 연구 등을 역임하지만, 1036년 (경우 3년) 개혁파 범중엄을 월권을 하면서까지 변호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당시 재상이었던 여이간에 의해 이능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1034년에는 아내와 자식이 죽는 아픔을 겪었으나 1043년 인종(仁宗)은 언로(言路)를 확장하기 위해 간관(諫官)을 늘리면서 구양수 등을 지간원(知諫院)으로 삼고 여정(余靖)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임명하자 같은 해 4월에 구양수는 경사로 돌아온다.

 

약 십년의 지방 근무 후, 중앙에 복귀 간관에 임명된다. 범중엄 등과 경력의 개혁을 진행하다가 인종의 신임를 잃게 되고, 1045년 (경력 5년)에는 비방을 받아 안후이 성의 지사로 또 한번 좌천되었다.

 

몇 해 후에 다시 한번 중앙에 복귀하여 한림학사 등 요직을 역임한다.1054년 수년 만에 구양수를 만난 인종은 그의 노쇠한 외모와 상황을 측은히 여겨 극진히 대우하며 이부(吏部)의 유내전(流內銓)에 임명한다. 1057년 (가후 2년)권 지례 부공거에 오르고, 과거 시험을 감독하여 소식을 발굴해 낸다. 당시 구양수의 정적들은 그의 기용에 두려움을 느끼고 각종 모함과 구설수를 만들었지만, 구양수는 지속적으로 경사에 머무르며 <당서(唐書)> 편찬에 참여하게 되고 한림학사 겸 사관수찬(翰林學士兼史館修撰)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 후 추밀부사, 삼지정사(부재상)에 오르고, 소순, 왕안석 등을 등용했다. 왕안석의 신법을 전부터 지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신법이 실시되자 역으로 청묘법에 대해 엄격한 논고를 지켜보는 등 가장 강력한 반대파의 한 사람이 되어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 다음해인 1072년 (희녕 5년), 은둔 생활을 하며 영주(안후이 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양수는 66세의 나이로 천명을 다했고, 2년 후에 조정에서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문충’은 그가 일생 동안 이루어낸 문학적 위업의 저력을 알 수 있는 상징이다.

 

문학

 

산문

산문에 있어서는 한유의 예를 모방하고, 이른바 고문 부흥운동을 추진했다. 저주(滁州)의 자연이나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취옹정기는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고, 중국의 기행문 중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운문으로는 시(詩)와 사(詞)를 모두 쓰고, 은밀하고 유머러스한 작풍이다. 시는 당나라 후기의 현란한 문체를 피하고, 당나라 전성기의 실질적이고 강건한 위풍을 따랐다. 구양수는 사(詞)로도 유명한데, 특히 채상자(采桑子)를 위해 만들어진 서호호(西湖好)라고 지어진 일련의 사는 그 양식의 표준이 되어 사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사람들은 작가로서의 구양수를 유학(儒學)과 밀접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와 관련한 대부분을 ‘개인적인 것보다는 사회적인 것’에, ‘해이한 것보다는 경직되고 긴장된 것’에, ‘유흥적인 것보다는 건설적인 것’에 무게를 둔다. 틀린 것은 아니다. 구양수의 시문을 통해 그를 이해한다면 맞는 말이다. 별다른 배경 없이 상식만을 가지고 구양수를 본다면, 구양수는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한 사람을 제삼의 눈으로 보아낸다는 것은 대단히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지금은 아쉬울 것이 없어도 앞으로는 아쉬울 것이 있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특히 심리의 저변은 본인만이 알기 때문에 옆에서 단정 지어 무어라 말할 계제도 아니다.

 

그런데 구양수는 사를 통해서 아쉬운 소리와 사람들이 보지 못한 많은 심정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구양수가 사를 통해 사람들이 보아내지 못하는 이면의 감정을 상당 부분 노출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배경 때문이었다. 사는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가장 유리한 수단이었고, 점차 흥행해 구양수가 살던 시기에는 지체의 고하에 관계없이 모두가 애용하는 국민 문학의 형식이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구양수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계승하고 한유(韓愈)의 도통(道統)을 이은 사람이라고 해도 기녀와의 사랑에서 느끼는 세심한 희열과 비애를 사 형식을 빌려 거침없이 쓰는 것이 결격이나 비난의 사유가 되지 않았다. 당황스럽고 민망한 내용이나 표현도 적잖게 보이지만 오히려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모습이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결국 구양수 문학 세계의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을 망라해 보아야만 하고, 사는 구양수의 문학에 대한 오해를 일소하고 환기할 수 있는 결정적인 관건이 된다.

 

역사

역사가로서 구양수는 지방 근무 중에 신오대사(新五代史)를 편찬하고, 중앙에 복귀하여 송기 등과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명한 경학자였던 류창(劉敞)과 작업을 같이 하여 범례를 찾게 만들어진 것으로, 춘추 학문적 색채가 강한 근엄한 스타일을 견지한 책으로서 평가됐다. 또 금석문의 수집을 좋아하여, 집고록(集古録)을 정리, 사료 편찬의 방법으로서 금석문의 활용을 확립하는 송대의 역사수법(특히 금석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구양수의 일련의 작품은 주필대(周必大)에 의해 구양문충공전집(欧陽文忠公全集)으로 정리되었다.

 

 

송 영종(宋 英宗, 1032년 ~ 1067년)은 북송의 제 5대 황제(재위 : 1063년 ~ 1067년). 제4대 황제 인종의 사촌형제에 해당되는 조윤양(趙允譲)의 13번째 아들 이다. 초명은 종실(宗實)이었으며, 황태자가 된 후 개명하여 휘는 서(曙)이다. 시호는 체건응력융공성덕헌문숙무예성선효황제(體乾應歷隆功盛德憲文肅武睿聖宣孝皇帝)이다.

 

 

1063년 인종이 붕어 했을 때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윤양의 13번째 아들 영종이 제5대 황제로서 즉위 했다. 영종은 파탄하고 있던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서 개혁에 착수하려고 했지만,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강하고, 또 영종 자신도 병약하고, 재위 불과 4년으로 해 병사했기 때문에 개혁은 실패에 끝났다

 

그는 1066년에 조욱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다음 해 붕어하였다. 신종이 즉위하였다.

 

 

송 신종(宋神宗, 1048년 ~ 1085년)은, 북송의 6대 황제(재위 : 1067년 ~ 1085년)로 제5대 황제 영종의 장남이다. 휘는 조욱(趙頊). 시호는 소천법고운덕건공영문열무흠인성효황제(紹天法古運德建功英文烈武欽仁聖孝皇帝)이다.

 

 

 

그는 1066년에 황태자가 되고 다음 해 영종 붕어후에 즉위하였다.

 

19세의 젊은 황제 신종(神宗)이 즉위한 후에 왕안석은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이 때 황제의 신뢰를 얻었다. 국방비의 증가와 대상인, 대지주 증가로 일어난 세수(稅收) 감소 등에 대해 개혁이 촉구되어 6대 황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에 나섰다.

 

1069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다양한 내용의 개혁정책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 움직임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이라 불리었다.

 

이 신법은 주로 영세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를 목표로 한 것이기에 신법은 지주, 상인세력과 그곳 출신인 관료들의 엄청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이들 반대파들을 가리켜 구법파(旧法派)라고 불렀다.

 

이 신법파와 구법파의 다툼은 나날이 격렬해져 갔다. 신법파의 왕안석에 대해 구법파의 대표자는 사마광(司馬光)이었다. 이 두 사람이 살아있던 기간에는 당파의 다툼은 높은 이념에 의한 것이었으나,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당리에 의한 이념 다툼으로 추락했다. 신법파가 이기면 구법파의 관료는 한꺼번에 중앙에서 멀어졌고, 법률을 모두 개정하였지만, 그 후에 구법파가 득세할 때에는 오히려 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상황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러한 다툼은 국가체제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서서히 송나라의 국력은 기울어져갔다. 1085년 북송 신종이 붕어하고 철종이 즉위하였다.

 

 

왕안석(王安石, 1021년 12월 18일~1086년 5월 21일)은 송나라의 개혁 정치가이다. 중국 장시성(江西省) 출신이며 북송 시기에의 시인·문필가로 활약하였다.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이다. 신법(新法)이라는 개혁책을 통해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시역법(市易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쟁이 격화되고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의 개혁 정치는 보수파에 매도되었지만 문장력은 동료뿐 아니라 정적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을 만큼 뛰어났으며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이다.

 

생애

왕안석은 21세에 진사가 되었고 이후 20여년 동안 화난(華南)에서 지방관리로서 벼슬 생활을 한다. 19세의 젊은 황제 신종(神宗)이 즉위한 후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이 때 황제의 신뢰를 얻었다. 1069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다양한 내용의 개혁정책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장시성 출신인 그는 정치적으로는 신법당(新法黨)에 속해 한기(韓琦)·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 인물들을 축출하고 이재에 능한 강남 출신 신진관료들을 대거 발탁 기용하여 신법을 과감히 추진한다.

 

개혁의 배경

1038년 이원호가 국호를 대하(서하)라고 고치고,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다. 7년간의 전쟁으로 화약을 체결하는데, 태조 조광윤의 문치정책으로 군사력이 약해진 인종 연간에는 범중엄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하를 물리칠 군사력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서하가 송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는 대신, 송은 매년 비단 13만필과 은 5만냥, 차 2만근을 보내게 된다. 또한 거란에게도 화의를 주선한 댓가로 비단과 은을 제공한다. 병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나, 질은 형편없었고, 국방비가 정부 예산의 80%를 차지하게 된다.

황실은 황실대로 낭비를 일삼는 행사를 하여 국고를 탕진하였고, 3년마다 치러진 과거로 인해 벼슬자리보다 관료의 수가 많아지게 되었다. 대지주의 증가로 농민들은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재정 수입이 크게 줄어들게 된다. 이에 따라 물가는 상승되고 세수는 줄어들고, 노비와 빈민들은 늘어나는 악순환의 경지에 이르렀다.

 

왕안석의 개혁

왕안석은 19세의 젊은 신종 황제가 제위에 오르자, 정치개혁안이 담긴 만언서를 올려 신종의 재가를 얻고 부재상으로 임명된다. 그의 개혁 정책은 1069년~1074년에 걸쳐 시행되었으며, 대상인과 대지주의 횡포를 막아 중소의 농민과 상인을 보호하여 세수를 늘리고, 관료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가 부국강병책으로 제시한 정책은 청묘법, 균수법과 보갑법으로 다음과 같다.

균수법정부가 지방의 물자를 사들여 다른 지방에 팔아 이익을 얻음으로써 물자 유통을 원활히 하고 물건 값의 조절과 안정을 꾀하고자 한 정책이다.청묘법농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농사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어 지주들의 비싼 이잣돈을 얻어 쓰는 일이 없도록 한 정책이다. 신법을 지지하던 구양수도 이것 때문에 왕안석과 정치적인 견해를 달리하게 된다.보갑법10집을 1보로, 5보를 대보로, 10대보를 도보로 편성하여 장점을 징집,훈련하여 민병으로 삼아 평화시에는 치안 임무를 수행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관군을 돕게한 정책이다.시역법자본이 적은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대상인들이 이익을 독차지 하는 것을 막고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한 정책이다.모역법역이 면제되어 온 관리 사원으로부터 돈을 받아 실업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품삯을 주어 역의 형평을 기하고자 한 정책이다.보마법백성에게 말을 기르게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군마로 쓰도록 한 정책이다. 

개혁의 결과

왕안석의 정책은 국가와 일반 서민층인 농민, 중소상인들에게는 이로웠지만, 대상인, 대지주와 권력자 등의 기득권 세력에게는 치명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많은 수의 사대부들이 대부분 이 계층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당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반대파를 구법파라고 하고 개혁에 찬성하는 파를 신법파라고 하여 당쟁이 가속화 되었다. 당시 구법파의 당수는 사마광이었다.

 

1074년 희녕 7년 허베이에 큰 가뭄이 발생하자 구법파는 이것을 신법에 대한 하늘의 분노로 상소하여, 당시 구법파의 배경이었던 황태후와 내시, 구법파 관료들이 지속적인 퇴진운행을 벌였다. 이에 신종도 왕안석을 해임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왕안석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신법당에는 왕안석 외에는 그다지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신법파 내부에서도 내부분열이 일어난다. 다음 해에 왕안석은 복직을 하지만, 1076년에 사직하고 은둔생활을 한다. 1085년 북송 신종이 사망하고 다음 해에는 왕안석도 사망한다. 신종이 죽은 후 구법파의 황태후에 의해 사마광이 재상이 되고, 바로 신법이 폐지된다. 사마광도 오래 집권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고, 신법과 구법의 당쟁은 더욱 가속화되어 정치혼란으로 인해 송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화된다.

 

 

사마광(司馬光; 1019년 - 1086년)은 중국 북송 대의 유학자이자 역사가, 정치가이다. 자(字)는 군실(君實). 섬주 하현(陝州 夏縣;산시 성) 사람으로 호(號)는 우수(迂叟). 또는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불렸다. 시호는 문정(文正). 온국공(溫國公)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선조는 서진(西晋)의 고조(高祖) 선제(宣帝) 사마의(司馬懿)의 동생 사마부(司馬孚)라고 한다. 자치통감의 저자로서 유명하다. 신법(新法)과 구법(舊法)의 다툼에서 구법파의 영수로서 왕안석과 논쟁을 벌였다.

 

생애

1038년 진사(進士)가 된다. 부친도, 조부도 진사였다.

 

1067년 북송 신종(神宗)이 즉위하고 왕안석을 기용하여 신법을 단행했다. 당시 한림학사(翰林学士)였던 사마광은 당초 개혁에는 찬성이었다. 그러나 왕안석이 관료의 기득권을 침범하고 정치의 일신을 도모하자, 곧 반대 입장으로 바꾸고 추밀원을 근거지로 한 왕안석 반대파(이른바 구법파)와 연계하여 강행하는 신법 반대를 주장했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신법의 철회를 요구했기 때문에, 마침내 조정에서 퇴출되어 부도(副都) 낙양에 사실상의 은거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 이후 사마광은 구법파 동조자와 함께 신법의 반대를 끝까지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조정의 의향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사마광이었지만 선대 영종(英宗)이후 신종에게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특히 <자치통감>의 편찬을 생각한 후에는 영종에게서 특별히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그 완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또 신종의 신법에 반대하여 수도에서 쫓겨난 사마광이었지만 역으로 신종에게서 <자치통감>을 완성하라는 명을 받았다. 즉 이 책은 사마광의 낙양 은거때 완성되었다.

 

1085년 신종이 붕어하고 북송 철종(哲宗)이 10살의 나이로 즉위하고, 섭정 선인태후(宣仁太后) 고씨(高氏)의 명령으로 재상으로 중앙에 복귀했다. 이때 사마광은 신법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모두 신법실시이전의 법으로 되돌려 정권을 운영했으나, 매우 극단적이기에 같은 신법의 폐지를 주장하던 친구, 부하들에게도 반대받을 정도였다. 더해서 사마광의 명성은 천하에 울려퍼질 정도로 영향력이 있어 많은 관료가 사마광의 발언에 영합해 거꾸로 신법 여러 정책 중에 근간 중 하나였던 역법(役法)을 변경할 정도였기에 그 폐해는 이후 10년 가까이 영향을 끼쳤다. 바라던 신법 폐지에 전력을 기울이던 사마광이었지만 재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다.

 

평가

오래전부터 사마광의 평판은 매우 높았다. 그것은 그가 속한 구법파의 흐름을 따르던 주자학이 학계에 군림하였고 사마광을 격찬한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 입장에서 본다면 사마광은 군자 중에 군자로, 또 시시비비가 없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이후 발전한 경제사학적인 입장으로 본다면 사마광은 오랜 대지주, 대상인을 옹호하고 이들의 정권세습 타파를 노리던 신법을 배제하는 반동적 정치가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의 의의를 모두 이해하지 않았고 단지 수구파의 영수 이외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사마광이 재임한 지 겨우 8개월 만에 서거했기 때문에 왕안석의 신법을 대신할 방책을 고려했지만 이것을 바꿀 때까지의 시간을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자치통감

<자치통감>은 기년체 전성시대였던 시기 과감하게 경서 춘추의 편년체를 기초로 제작된 역사서이다. 춘추이후부터 송나라 이전의 5대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한 이 책은 황제로부터 편의를 받을 정도였으나, 당시 사학자중에 제1인자였던 유?(劉?) 및 한대사의 저명한 연구자 유?(劉?), 제자 범조우(范祖禹)등의 도움을 얻어 당시 모을 수 있었던 사료를 망라한 자료집을 만들었고, 이것을 사마광이 손을 더하는 방법을 거쳐 제작하였다. 책 이름처럼 황제의 치세도구를 위해 만든 책이기도 했으며, 사마광의 이름도 기록되어, 높은 호평을 얻었다.

 

일화

  • 사마광이 어렸을 때 그의 친구들과 함께 화원에서 놀고 있었다. 화원 안에는 가산(假山)이 있었으며 가산 아래에 커다란 물항아리가 있었고 그 물항아리 안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친구들과 가산 위에 놀고 있을 때 어떤 아이가 조심하지 않아 큰 물항아리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른 친구들 모두 당황하였으며 어떤 아이는 울었고 어떤 아이는 소리쳤으며 어르신을 찾으러 뛰어갔다. 사마광은 당황해 하지 않고 돌 하나를 들어 항아리를 맞추어 때려 부셨다. 항아리 속 물은 흘러나왔고 물항아리에 빠진 친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 사마광은 또한 신동으로 알려져 있어 7살때 좌씨춘추의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집의 사람들에게 들었던 내용을 강의를 했었다고 한다.

 

 

송 철종(宋哲宗, 1076년 ~ 1100년)은 북송의 7대 황제(재위 : 1085년 ~ 1100년)이다. 송 신종의 여섯번째 아들. 휘는 조후(趙煦). 시호는 헌원계도현덕정공흠문예무제성소효황제(憲元繼道顯德定功欽文睿武齊聖昭孝皇帝)이다.

 

 

1085년 북송 신종이 붕어하고 철종이 즉위하였다. 신종이 붕어하고, 다음 해에는 왕안석도 사망한다.

 

선인태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 신임을 받았던 구법파의 사마광이 재상이 되었다. 재상으로 취임하게 된 사마광은 모역법 폐지와 차역법의 부활을 도모하고, 이것을 5일 이내로 실행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원래 사마광의 지휘도 기회주의적인 면이 많아서, 사마광이 상정하고 있던 차역법 그 자체가 이미 실현불가능 할 만큼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많은 지방관은 모역법 폐지에 반발했고, 도저히 기일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채경은 개봉부라고 하는 가장 곤란한 장소에서 기일에 맞춰 법령의 개폐하고, 사마광을 기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신종 때에는 신법파에 가담하여 신법을 지지하였고, 구법파가 득세하자, 구법을 지지한다고 말한 태도는 구법파의 급선봉이였던 유안세(劉安世), 왕암수(王巌叟) 등에게서도 심한 비판을 받고,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마광도 오래 집권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고, 신법과 구법의 당쟁은 더욱 가속화되어 정치혼란으로 인해 송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화된다.

 

선인태후의 정권도 9년 만에 끝나고, 철종 황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또 한번 신법이 부활한다. 이 때 많은 구법파 관료가 추방되고, 대신 신법파 관료가 등용되었다. 당시의 권력자 장돈(章惇)과 증포(曾布)는 열렬한 신법 추진파였고, 신법을 국시라고 간주할 정도로 신법을 추종하였다.

 

철종 황제의 친정도 6년 남짓으로 끝나고, 휘종 조가 시작된다. 1100년 철종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채로 25세의 일기로 붕어하자, 동생인 휘종이 황제로 즉위한다.

 

 

채경(蔡京, 1047년 ~ 1126년)는 북송 말의 정치가, 재상, 서도가. 자는 원장(元長). 흥화군 선유현(복건성 선유현)사람. 행정관료로서 유능하였지만, 권력욕이 강한 인물로 지조가 없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영종 때 채양의 종손으로, 남동생은 채변이고, 채유 등 아들이 몇 명 있었다.

 

생애

희녕3년 1070년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당시는 아우 채변의 승진이 빨랐다. 그 때문에 채변이 형 채경을 위해 관직을 미루도록 타진했다는 말이 있었다. 후에 채경도 두각을 나타내고, 신종 조최가 임종할 쯤에는 수도 개봉부의 장관이 되었다.

 

신종이 붕어하고, 선인태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 신임을 받았던 구법파의 사마광이 재상으로 취임하게 된. 사마광은 모역법 폐지와 차역법의 부활을 도모하고, 이것을 5일 이내로 실행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원래 사마광의 지휘도 기회주의적인 면이 많아서, 사마광이 상정하고 있던 차역법 그 자체가 이미 실현불가능 할 만큼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었다.

 

실각

그 때문에 많은 지방관은 모역법 폐지에 반발했고, 도저히 기일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채경은 개봉부라고 하는 가장 곤란한 장소에서 기일에 맞춰 법령의 개폐하고, 사마광을 기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신종 때에는 신법파에 가담하여 신법을 지지하였고, 구법파가 득세하자, 구법을 지지한다고 말한 태도는 구법파의 급선봉이였던 유안세(劉安世), 왕암수(王巌叟) 등에게서도 심한 비판을 받고,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인태후의 정권도 9년 만에 끝나고, 철종황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또 한번 신법이 부활한다. 이 때 많은 구법파 관료가 추방되고, 대신하고 신법파 관료가 등용되었다. 당시의 권력자 장돈(章惇)과 증포(曾布)는 열렬한 신법 추진파였고, 신법을 국시라고 간주할 정도로 신법을 추종하였다. 채경에 이러한 권력자들에게 신용을 얻지 못했고, 그 때문에 채경도 눈에 띄었던 활약은 없었다. 그래나 그는 후궁이나 내시와 결탁하여, 스스로의 출세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또 이 당시에는 이미 아우 채변과의 사이가 소원해져, 그 처와도 자주 싸웠다고 한다.

 

재등용

철종 황제의 친정도 6년 남짓으로 끝나고, 휘종 조가 시작된다. 이 휘종 조는 초기에는 신종 황제의 황후 향태후의 지도의 따라 신법파와 구법파의 균형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때 신구 한충언, 증포를 재상으로서 맞이하고, 채경도 중앙에 복귀했지만, 증포는 채경을 신용하지 않았고, 또 한번 파면되었다. 그러나 향 태후의 급서에 따라 휘종 친정의 시작되자 휘종의 사랑을 받던 내시 동관의 추천으로 채경은 신속하게 중앙에 복귀했다.

 

휘종 조에 있어서 채경은 16년간 태사(재상)의 지위에 종사할 정도로 권력을 집중하였다. 그에 반대한 자는 신구 양당 어느 쪽을 불문하고 추방하고, 그들을 일괄 구법파라고 몰아서 숙청하였다. 추방된 구법당은 삼백명에 이르렀고, 또한 그 자손도 연좌시켜 과거시험의 자격을 박탈했다. 이렇게 생겨났던 간당의 인명 일람으로 원우붕당비(元祐朋党碑)를 건립하고, 천하에 알리게 했다. 그러나 이 기념비에는 본래 분명히 신법파에 속한 장돈(章惇), 안도(安燾)도 포함되고 있었고, 구법 탄압을 채경의 권력 장악정책으로 이용하였다. 채경은 이 그 밖에도 신법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중과세를 징수하고, 휘종을 즐겁게 하였다. 대토목공사를 통해 왕실의 재정을 탕진 시켰다. 이것은 당시와 후세에도 그를 간신이라고 비판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최후

휘종 조 말기에 권력유지의 방편으로 실권은 채경으로부터 그 아들 채유(蔡攸)에게 물려지게 된다. 갑자기로서 발흥한 금과 연대한 북송 정권은 오랜 기간의 염원이었던 연운16주를 요나라로부터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조정은 금나라의 실력을 깔보고, 금나라와 맹약을 몇 번이나 어겼기 때문에, 1125년에 금나라에 공격을 당해 허무하게 북송은 멸망한다(정강의 변).

 

금군의 침공에 의한 북송의 멸망 직전, 휘종은 장남의 흠종에게 제위를 양위했다. 흠종은 원래 채경 정권을 싫어했고, 여론을 무마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이강을 등용하여 뒷수습을 하게 한다. 이강은 내시 동관과 채경 등을 유배시키고 사형을 시킨다. 채경은 사형 직전에 병사를 하게 된다.

 

 

송 휘종(宋 徽宗, 1082년 11월 2일 ~ 1135년 6월 4일)은 북송의 제 8대 황제(재위 : 1100년 ~ 1125년). 시호는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이며 휘는 길(佶). 제6대 황제 신종의 아들로 예술방면으로는 북송 최고의 한 사람이라고 손꼽힌다.

 

송 휘종북송의 제8대 황제재위이전 황제다음 황제

 
1100년 ~ 1125년
철종
흠종

 

 

생애

송나라  북송 신종의 열한번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1100년 2월 형 철종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채로 25세의 일기로 붕어하자, 동생인 휘종이 황제로 즉위한다. 중신들은 다른 황태자에 의한 황위 계승을 바랐지만, 황태후 향씨(欽聖憲肅皇后)의 뜻에 따라 휘종에게 권좌가 넘어갔다. 치세 초에는 온건한 신법파로 황태후의 신임이 두터웠던 증포를 중용하고, 증포는 신법과 구법 양파로부터 인재를 등용하고, 신법과 구법의 다툼을 가라앉히고 점진적인 개혁을 진행했다. 하지만 신법파의 채경 등의 책동에 의해 증포는 실각하고 채경이 집권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예술가로서의 휘종

문인, 화가로서 휘종의 재능은 높게 평가되고, 송대를 대표할만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손꼽는다.

책의 분야에서는 송나라의 4대가라 일컬어지는 소철, 황정견, 채양 등의 4사람을 열거하는데, 휘종과 그의 재상이던 채경도 포함될 수 있다. 휘종은 금체라고 불리는 필체를 만들기도 했다.

 

수금(휘종의 호)체라고 칭해지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고, 회화로는 사실적인 원체화를 완성하여 풍류천자라고 칭해졌다. 현재 휘종의 친필은 극히 귀중한 문화재가 되어 있으며, 일본에 있는 도구도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황제로서 휘종

그러나 황제로서의 휘종은 문인의 재능에 한 치도 미치지 못했다. 스스로 예술을 식량이라고 할 정도로 정원 조성에 이용할 큰 암석들을 백성들을 동원하여 나무를 밀게하여 남쪽의 대운하를 사용하여 운반하게 했다(화석강 )또 예술 활동의 자금 만들기를 위해,수호전의 악역으로 유명한 채경이나 내시 동관 등을 등용하고 백성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했다.

 

신종, 철종 때는 왕안석의 신법을 이용하여 국가재정을 건전화 시켰지만 , 휘종은 그것을 스스로의 사치를 위해 이용하였던 것이다. 토지를 측량할 때에는 기존보다도 짧은 길이를 이용하고, 그것에 의해 발생한 잉여 논밭을 강제적으로 국고에 편입하거나, 매매계약서가 애매한 토지를 몰수하는 등 무리한 수단도 취했다.

 

이와 같은 악정에 시달린 백성들의 원한은 높아져서, 방랍의 난이라고 하는 농민 반란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반란 지도자의 중에는 산동에서 활동한 송강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것을 모델로 하여 탄생한 것이 명 시대의 소설 수호전이다.

 

정강의 변

1121년(선화 3년), 금나라 송나라(북송)와의 맹약에 의해 요나라를 공격했지만, 북송은 방랍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강남에 출병 중이었고, 휘종 자신의 결단력도 부족해 요나라에 대한 출병이 지연되었다. 다음해 겨우 북송은 북방에 출병하여 요나라의 천조제가 있는 연경(베이징)을 공격했다. 북송 군대는 연이어 패배를 당하고, 성과를 올릴 수 없자 북송군의 지휘관 동관은 금에 원군을 요청. 해상의 맹에 의해 금나라는 장성 이남에 출병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지만, 북송의 요청에 의해 출병하여 순식간에 연경을 함락시켰다.

 

이 결과 맹약대로 연운16주 중 연경 이남의 6주는 송나라에 할양되었지만, 금군은 연운 이북을 약탈하고 연운 16주의 백성들도 금나라로 이주시켰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는 세수를 징수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또한 금은 연경 출병의 댓가로 은 20만냥, 비단 30만 필, 전 100만관, 군량 20만석을 요구했고, 북송은 이것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25년(선화 7년), 송나라 연운16주의 일부 반환에는 성공하였지만, 금에 점령된 나머지 주의 탈환을 계획하고, 요나라의 패잔군과 몰래 금을 합공 하기로 획책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금에 발각되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송나라로 출병하는 사태를 초래한다. 당황한 휘종은 자기칙당(自己則當)(사직서와 같은 것)을 내어 퇴위하고, 장남인 황태자 조환(흠종)을 즉위시켜 태상황이 되었다. 금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개봉에서 탈출했지만, 흠종에 의해 되돌아 오게 되었다.

 

1126년(정강 원년)에 금나라는 북송의 개봉을 함락시키고, 휘종과 흠종은 동시에 포로로 잡혀 금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정강의 변). 금나라는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흠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이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휘종은 1135년(소흥 5년) 현재의 헤이룽장 성 의난현에서 54세로 사망했다.

 

 

동관(童貫, 1054년 ~ 1126년)은 북송 휘종(徽宗)때의 환관이며, 자(字)는 도부(道夫)이다. 어릴 때 환관 이헌(李憲)에 의해 길러졌고 황궁의 급사가 되었다.

 

휘종은 그림, 글씨 등 예술에 뛰어난 솜씨를 가졌고 예술에 관한 식견도 탁월했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서 나랏일에 소홀히 하여 훗날 금나라로 붙잡혀가는 비극을 키운 셈이 되었다. 휘종은 각종 예술품을 수집하기 위해 항주(杭州)에 명금국(明金局)이라는 정부 기관을 설치했으며 동관은 명금국에서 일하는 관리가 되었다. 동관은 같이 일하던 관리 채경(蔡京)과 무척 친한 사이가 되었다. 휘종은 자신의 예술품 수집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동관을 아끼게 되어 조정으로 불러들였는데, 동관은 채경이 중앙 조정의 고관이 되도록 밀어준 뒤 서로 손을 잡고 환관과 대신들을 수족처럼 부리면서 조정의 권력을 잡았다. 동관은 송나라 서북변 지역군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채경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권력의 절정을 누렸다. 또 휘종이 전국 각지에서 기화요초를 수집하여 대궐을 장식하도록 한 '화석강'(花石綱)을 실행하고 이를 주관하는 조정 기관인 응봉국(應奉局)을 설치하고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수도 개봉(開封)으로 실어오게 했다. 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백성들의 불만이 커져 방랍(方臘)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금나라와의 동맹

동관은 1111년 요나라 9대 황제인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耶律延禧)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에 갔다오던 중 요나라 관료 출신인 마식(馬植)의 헌책을 듣고 여진과 손을 잡아 요나라를 섬멸하고 연운 16주를 되찾을 계책을 세웠다. 이것이 실행에 옮겨져 마식이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를 만난 때가 1120년이었는데, 아골타는 마식의 눈 앞에서 요나라의 수도 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를 단숨에 점령해 보였다. 이때 맺은 협정에서 금나라는 고북구(古北口)까지 점령하고, 송나라는 요나라의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즉 연경(燕京)까지 점령하는 한편 연운 16주를 송나라가 차지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강남 지역에서 방랍의 난이 일어나고 기세가 갈수록 커지자 동관은 손수 진압에 나섰으며, 이 때문에 금나라와 동시에 요나라를 공격한다는 계획은 제때 실행되지 못했다. 난이 진압된 후에야 동관은 병력을 거느리고 연경을 공격했지만 노구교(蘆溝橋)에서 대패했다. 이후 요나라의 장군 고봉(高鳳)과 곽약사(郭葯師)가 연운 16주에 속하는 탁주(涿州)와 역주(易州)를 바치고 항복하자 이에 기운을 얻은 동관은 요나라가 애원하는 것을 무시하고 다시 20만 대군을 동원해 연경을 공격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요나라가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송나라 대군은 전멸하다시피 하여 쫓겨났다.

 

이 소식을 들은 아골타는 송나라를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금나라 군대를 보내 연경을 점령하고 연운 16주 중 태행산 동쪽 7주만 송나라에게 내주는 한편 연경에서 걷는 세금과 매년마다 거액의 돈과 비단을 금나라에게 바치도록 했다. 또 두 나라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항복하는 자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결과였으나 조정에는 연경을 되찾았다는 것만 크게 알려져 동관에게 왕 작위가 내려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맹약이 맺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송나라가 금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영주사(領州事) 장각(張珏)이 송나라에 투항해 왔다. 송나라는 장각을 받아들였으나 맹약을 상기시키며 항의한 금나라의 위협에 의해 장각을 죽이고 장각의 목과 두 아들을 금나라로 보냈다. 또 하동로 선무사(河東路宣撫使) 담진(譚稹)이 금나라에 제공하기로 했던 군량의 양도를 거절하여 문제를 일으키자 휘종은 동관이 담진을 대신하게 했다.

 

또 송나라는 금나라의 눈을 피해 도주중인 천조제를 동관으로 하여금 맞아들이게 했는데, 이것이 금나라에게 알려지자 금나라는 동관에게 사신을 보내 천조제를 내놓으라고 했으나 동관은 전혀 모르는 척 했다. 사신이 계속 재촉하자 부하 장수에게 색목인의 머리를 대신 바치라고 지시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천조제는 몰래 빠져나와 도망가다가 이듬해인 1125년 금나라에 붙잡혔다. 송나라가 맹약을 거듭 어긴 것이 확인됨으로써 금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할 구실을 얻었다.

 

금나라는 송나라에 천조제의 생포를 알리는 한편 태원(太原)에 있던 동관에게 운중 지역의 할양을 요구했다. 동관은 갑작스런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뒷일을 부하들에게 맡기고 혼자 개봉으로 돌아와 버렸다. 뒤이어 금나라가 대대적으로 중국을 공격해 들어오면서 북송의 몰락을 부르게 되었다.

 

몰락과 죽음

1126년 정월에 금나라 군대는 마침내 황하에 이르러 개봉을 위협하자 휘종은 흠종(欽宗)에게 양위하고는 동관 등을 거느리고 남경 응천부(南京應天府:오늘날의 중국 하남성 상구(商丘))로 피신했다. 2월에 송나라가 영토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고 금군이 철수하는 가운데 동관이 휘종을 복위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동관은 휘종과 함께 3월에 개봉으로 돌아왔으며, 돌아오자마자 조정 안팎으로 동관과 채경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동관은 얼마 되지 않아 유배를 떠나야 했으며, 도중에 처형되고 동관의 머리는 개봉 한복판에 내걸렸다. 권력을 남용하고 휘종의 눈과 귀를 가린 그의 모습은 시내암의 소설 수호전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송 흠종(宋 欽宗, 1100년 - 1161년)은 북송의 제9대 황제(재위: 1125년 - 1127년)로 북송의 최후의 황제다. 정식시호는 공문순덕인효황제(恭文順德仁孝皇帝)이며 휘호는 단(亶)이지만 1102년 2월에 훤(烜)이라고 고치고, 같은 해 12월에 환(桓)이라고 고쳤다. 휘종의 장남이자 남송에서 즉위한 남송 고종의 맏형에 해당한다.

 

 

송 흠종북송의 마지막 황제재위이전 황제다음 황제

 
1125년 ~ 1127년
휘종
남송 고종

 

생애

1125년, 부황 휘종 금나라와의 외교정책에 실패하여 금나라가 북송을 정벌하려고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하였다. 이 사태에 휘종은 자기칙당(사직서)을 내고, 제위를 황태자 조환에게 양도하고 태상황이 되었으며. 황태자 조단이 황제에 등극하니 흠종이다. 다음해 금나라가 개봉을 포위하자 흠종은 이강(李綱)을 등용하고 방어를 했지만,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를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금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었다.

 

정강의 변

그러나 금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송나라의 관리들 사이에서 금나라에 대해 강경론이 대두하게 되고, 배상금과 영토 분할을 거부하도록 방침을 바꾸었다. 송나라의 배신에 금나라는 다시 한번 개봉을 공격하고, 함락시켰다.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 군에 의해 포로가 되고(정강의 변), 1128년 에 한주(길림 성 리수현)을 거쳐 1130년에 동북의 흑룡강성 의난현으로 끌고 간다.

 

이때 남송의 재상 진회도 같이 끌려가게 되는데, 이후 탈출하여 남송의 재상이 되었을 때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대책없는 강경론을 기피하는 계기가 된다.

 

최후

1127년, 흠종의 남동생 조구가 고종으로 즉위하여 남송을 세우고, 흠종은 복잡한 입장에 처해진다. 흠종의 남송 귀환이 인정되면, 고종은 제위 찬탈자가 되기 때문이다. 송나라는 역대 왕조 가운데에서도 특히 정윤론(正閏論)이 엄격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금나라의 측근들도 흠종 귀환을 계획했지만, 고종으로부터 자신의 입지를 고려하여 억류 요청이 완곡하게 나오게 되었고, 결국 남송에 귀환은 실현되지 않았다. 고종의 생모인 위 부인이 남송에 귀환했을 때에도 흠종은 위 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남송으로의 귀환을 고종에게 의뢰하도록 눈물로 탄원했다고 전해진다.

 

흠종은 그 후도 30년 이상에 걸쳐 동북에 계속 감금되었고, 1161년에 오국성에서 61세로 병사했다. 그 후 흠종의 자손은 해능양왕에 의해 살해되고, 대가 끊어져 북송은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                                        *                                     *

 

인류 역사는 어느 시대 사람들이나 그 당대에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선조들이 바보는 아니기 때문이다. 송나라 역사도 당이 망하고 오대십국의 혼란한 가운데 후주의 근위대장이었던 조광윤이 선양을 받아 창업되었지만, 3대 진종 시대에 최전성기를 누린게 아닌가 생각된다. 비록 요나라와 서하에 매년 많은 재물을 주고 얻은 평화지만 무역을 통한 막대한 부가 흘러들어오게 되면서 그 효과는 역설적이게도 송나라의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는 이야기다.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주인공인 장헌명숙황후 유씨는 지혜롭고 현명하여 진종이 많이 의지를 하는 편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요나라와 전쟁통에 잃게 되고 송나라를 위해 헌신적인 희생을 치르지만, 진종의 신임을 받아 나중에는 황후로 등극하게 된다. 결국 황후 유씨는 아들을 얻지 못하고 신비 소생의 아들인 조정, 즉 진종의 여섯번째 아들을 황태자로 양육하여 진종 다음 황제인 인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지도자로 양육하는 것은 로마 시대나 송나라 시대나 마찬가지로 어떤 품성과 지혜를 가진 여성이 양육하느나애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지도자급 지도층의 부인들이 권력과 재물을 이용하여 갖은 불법과 비리를 저지러면서 자녀를 좋은 대학이나 대기업에 취업시키려고 안간힘을 쏟는 뉴스를 보면 그 자식들이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뻔한 일이다. 

 

오늘도 이 시대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어차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누구나 흙으로 돌아가지만 후대를 위해 무엇을 하고 갈 것인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드라마를 그냥 재미로 보고 생각를 끝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드라마에서 내가 당사자라면 어떤 처신을 하며 선택을 하면서 살아갔을 것인가를 되뇌여보는 생각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 요나라, 금나라, 서하, 남송은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