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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여름 9 : 정명공주

 

 

 

강남의 여름 9 : 정명공주, 그녀는 누구인가?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궁궐 창경궁.

 

 

 

여름도 절정이고 휴가철도 절정인 듯하다. 태양의 강렬한 에너지가 폭염이 되어 대지를 녹이고 있고 나무마다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우리집 빌라 주변에 심어 놓은 호박 줄기도 사방으로 세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밤마다 잠을 설치고 우리집 강아지 땅콩이도 더운지 내 옆에서 자다가 현관 바닥에 배를 깔고 잔다. 전국 강과 바다, 산의 계곡마다 여름 피서를 위해 찿아간 사람들로 북적인다. 서울 시내는 유령도시처럼 차량이 뜸할 정도이다.

 

삶에 찌들어 분노로 가득찬 국민들이 분명히 가는 곳마다 무질서와 탈법, 불법이 판을 칠 것이고 각종 불행한 사건이 수도 없이 발생할 것이다. 교통사고, 음주운전, 폭행, 강간, 강도, 절도, 익사, 화재, 낙상, 침수, 식중독, 행불 등 인생이 망가지고 죽음을 초래하고 장애인이 되는 등 자신의 인생은 물론 가족과 가정까지 붕괴되는 불행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야하는 가장의 심정을 누가 알리요. 행복을 찿아 떠나면서 엄청난 불행을 같이 동반하는 인간의 운명적인 삶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매주 일요일마다 올리는 신변잡기가 점차 나에게는 부담이 되고 있다. 서울 강남의 모습도 사진으로 많이 올렸고 몇 년 동안 주변 이야기도 올릴만큼 올린 듯하다. 또 우리집 재건축으로 이사도 가야하는 등 주변이 여러가지 일로 분잡하여 좋은 글을 올리기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주말에 평일에 올리는 로마의 역사를 대신해서 올리고 신변잡기는 기회가 되는대로, 때와 시기가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시기가 되면 올리려고 한다. 사실 방문자들이 역사보다 신변잡기에 더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어 계속하고 싶지만 이 정도에서 조금 자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란 너무 까발리고 자신을 드러내면 그것이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불리한 영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가 저 잘났는데 남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조할리도 없고 결국은 너 잘났다는 식으로 비난하거나 오해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비와 궁금증은 그 사람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관심을 갖게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화정 이연희 김민서 급방긋 비하인드컷 / 사진: 김종학 프로덕션 제공

 

 

요즘 방송에서는 역사 드라마로 선조와 광해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화정>, <징비록>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화정>의 정명공주는 인목대비의 딸로 영창대군의 누나이라는 사실도 이 드라마르 통해서 알게 되었다. 사실 그녀의 이름은 임진왜란, 조선군의 연전연패, 선조와 조정의 피난, 광해군의 분조 활동, 의병 궐기, 이순신의 분전, 선조의 광기, 정유재란, 광해군의 등극, 권력을 잡은 대북파의 대대적인 숙청, 인목대비 폐비, 영창대군 살해, 명.후금전쟁,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에 가려 제대로 이름이 거론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권력 싸움의 피비린내나는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 당찬 생각으로 불의와 맞서며 살얼음판을 걸어며 엄청난 굴곡진 삶을 살아간 조선의 공주, 그녀의 기구한 삶을 살펴본다.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년 6월 27일(음력 5월 19일) ~ 16859월 8일(음력 8월 10일))는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선조인목왕후의 딸이며 영창대군의 누나이다. 광해군 때 폐서인되어 어머니와 함께 감금되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인조반정 후 공주로 복권되고 중추부동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과 결혼했다.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 홍국영, 원빈 홍씨 등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었다.

 

 

정명공주
공주

 

배우자

영안위 홍주(永安尉 洪柱元)

자녀

7남 1녀
홍태망(洪台望),
홍만용(洪萬容), 홍만형(洪萬衡),
홍태량(洪台亮), 홍태육(洪台六),
홍만희(洪萬熙), 홍만회(洪萬懷),
홍태임(洪台妊)

왕조

조선 왕조

부친

선조

모친

인목왕후 연안 김씨

친척

광해군(이복오빠), 원종(이복오빠),
인조(조카) 등

출생

1603년 음력 5월 19일
정릉동 행궁

사망

1685년 음력 8월 10일

국적

조선

 

 

생애

 

유년기

1603년 6월 27일(음력 5월 19일)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 사이에서 선조의 21번째 자식이자 10번째 딸로 태어났으며, 선조에게는 유일한 적녀이다. 선조는 52세의 나이에 본 늦둥이 딸 정명공주를 무척 귀여워했으나 이복오빠 광해군이 즉위한 뒤 정명공주의 외할아버지 김제남과 동생 영창대군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이후 어머니 인목왕후가 서궁에 유폐되면서 정명공주도 함께 감금되었다. 인목왕후를 폄손하는 절목에 정명공주와 관련하여 "공주의 늠료(廩料)와 혼인은 옹주의 예에 따른다"고 규정했다. 당시 정명공주의 폐서인 여부를 놓고 류간(柳澗)이 '대비(인목왕후)를 후궁으로 대우한다면 그 딸인 공주도 옹주(翁主)로 강등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으나, 이이첨이 그 말을 듣지 않고 공주를 폐서인하되 오로지 늠료와 혼인만 옹주의 예에 따르도록 했다. 이미 아들을 잃은 인목왕후는 딸마저 잃을까 두려워 광해군이 정명공주의 일을 물으면 죽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인조반정 이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명공주는 공주로 복권되고 어머니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정명공주는 21세로, 이미 혼기가 한참 지난 나이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공주를 서둘러 시집보내기 위해 부마간택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주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전국에서 단 아홉 명만이 부마단자를 내어 간택령에 응했다. 결국 부마단자를 받는 기한을 늘리고 신랑감의 나이 제한을 약화한 끝에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을 부마로 간택했다. 그 과정에서 인목왕후는 사위 홍주원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말인 어승마를 타고 궁에 들어오라고 하여 조정에 문제를 일으켰으나, 인조는 반정의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를 벌하지 못했다.

 

인조는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내어주어 정명공주의 살림집을 짓게 하고 또 정철을 내어주는 등 그녀를 후대하였다. 본래 《경국대전》에서는 공주의 집은 50간을 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었는데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에 이르렀고, 경상도에만 8,076결에 이르는 넓은 땅을 하사받는 등 엄청난 호사를 누렸다.

 

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왕후를 닮아 선이 굵고 힘이 넘치는 한석봉체를 잘 썼는데 조선 후기의 서예가 남구만은 자신의 저서에서 정명공주의 글씨를 칭찬하기도 했다. 인목왕후 또한 한석봉체를 잘 써 생전의 선조를 기쁘게 했는데, 정명공주도 서궁에 유폐되어 있을 당시 아버지 선조를 닮은 글씨를 쓰며 어머니를 위로하였으나 30대와 40대 때에는 붓글씨를 끊었고, 한문도 쓰지 않았다.

 

인조의 의심을 살 것이 두려워 바느질과 가사에만 전념하며 의도적으로 정치를 외면하였다. 인목왕후 사후 궁중에서 발견된 무도한 백서(帛書)로 인해 인조와 효종의 의심을 산 적도 있으나, 인조반정의 공신인 장유, 최명길 등의 구명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인조와 효종이 죽고 나자 현종, 숙종 2대 동안 정명공주는 종친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남편 홍주원과의 사이에 7남 1녀를 두었으며 1685년 9월 8일(음력 8월 10일)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공주 가운데 가장 장수한 기록이었다.

 

 

사후

죽은 뒤 홍주원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숙종 때 이조 참판을 지낸 홍석보는 그녀의 증손자이며, 수찬 이인검은 외증손이다. 혜경궁 홍씨로 잘 알려져 있는 헌경왕후 홍씨는 그녀의 6대손이다.

 

 

가족 관계

친정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증조부 : 제11대 중종대왕(中宗大王, 1488~1544, 재위 1506~1544)
  • 증조모 : 창빈 안씨(昌嬪 安氏, 1499~1549)

    • 조부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1559)
    • 조모 : 하동부대부인 하동 정씨(河東府大夫人 河東 鄭氏, 1522~1567)

      • 아버지 : 제14대 선조대왕(宣祖大王, 1552~1608, 재위 1567~1608)

        • 이복오빠 : 제15대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
        • 이복올케 : 폐비 문성군부인 문화 유씨(廢妃 文城郡夫人 文化 柳氏, 1576~1623)
    • 외조부 : 연흥부원군 증 영의정 의민공 김제남(延興府院君 贈 領議政 懿愍公 金悌男, 1562~1613)
    • 외조모 :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光山府夫人 光州 盧氏, 1557~1637)
      • 어머니 :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1632)
        • 남동생: 영창대군 의(永昌大君 㼁, 1606~1614)


시가 풍산 홍씨(豊山洪氏)

  • 시조부 : 대사헌 증 영의정 도헌공 홍이상(大司憲 贈 領議政 都憲公 洪履祥, 1549~1615)
  • 시조모 : 선무랑 김고언(宣務郞 金顧言)의 딸 증 정경부인 안동 김씨(贈 貞敬夫人 安東 金氏, 1554~1616?)

    • 시아버지 : 예조참판 홍영(禮曹參判 洪霙, 1584~1645)
    • 시어머니 : 좌의정 문충공 이정귀(左議政 文忠公 李廷龜, 1564~1635)의 딸 정경부인 연안 이씨(貞敬夫人 延安 李氏, ?~1656[13])

      • 부마 : 영안위 문의공 홍주원(永安尉 文懿公 洪柱元, 1606?~1672)

        • 아들 : 홍태망(洪台望, 1625~?) 조졸
        • 아들 : 예조판서 정간공 홍만용(禮曹判書 貞簡公 洪萬容, 1631~1692)
        • 자부 : 송시길(宋時吉)의 딸 여산 송씨(礪山 宋氏)

          • 손자 : 홍중기(洪重箕) - 홍봉한·홍인한·홍상한의 할아버지
          • 손자 : 홍중범(洪重範)
          • 손자 : 홍중연(洪重衍) - 청풍김씨 김석익(金錫翼)의 딸과 결혼
          • 손자 : 홍중복(洪重福)
          • 손자 : 홍중주(洪重疇)
        • 아들 : 이조좌랑 홍만형(吏曹左郞 洪萬衡, 1633~1670)
        • 자부 : 증 영의정 민광훈(贈 領議政 閔光勳)의 딸 여흥 민씨(驪興 閔氏) - 인현왕후의 고모

          • 손자 : 홍중모(洪重模)
          • 손자 : 홍중해(洪重楷) - 홍창한의 할아버지
        • 아들 : 홍만희(洪萬熙, 1635~1670)
        • 자부 : 황연(黃沇)의 딸 창원 황씨(昌原 黃氏)
        • 아들 : 홍태량(洪台亮, 1637~?) 조졸
        • 아들 : 홍태육(洪台六, 1639~?) 조졸
        • 딸 : 홍태임(洪台妊, 1641~?)
        • 사위 : 창녕인 조전주(曺殿周, 1640~1696)
        • 아들 : 홍만회(洪萬懷, 1643~1710)
        • 자부 : 증 영의정 영안군 홍명일(贈 領議政 寧安君 洪命一)의 딸 남양 홍씨(南陽 洪氏)

 

 

정명공주의 삶, 책과 드라마에서

 

책 이야기를 하려는데 이 드라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MBC 특별기획 <화정>. 그 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다뤄졌던 광해군 시대를 소재로 하는데, 50부작이라는 장편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광해가 아니라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다. 핏빛 권력투쟁 속에서 죽은 사람으로 위장한 채 살았던 정명공주의 삶을 통해 17세기 조선 정치사를 들여다본다는 드라마의 기획의도가 흥미롭다.

하지만 역사왜곡은 피해갈 수 없었나보다. 드라마 초반 광해군을 피해 죽은 사람이 된 정명공주를 일본 유황광산의 노예로 전락시켰다가 조선 '화기도감'의 유황장인으로 변모시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완벽한 허구다. 그렇다면 진짜 정명공주는 누구인가.


'화정'은 어떻게 탄생했나... 비극은 공주를 단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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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죽음, 광해군 집권, 계축옥사, 인조반정, 병자호란, 소현세자 죽음, 효종, 현종, 숙종까지 이어지는 혼돈의 역사를 살다간 여인. 그녀는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광해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조선시대 최장수 공주이면서 조선 최고의 여성 서예가이기도 한 정명공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이 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던 역사 저술가 박찬영의 <화정 : 정명공주와 광해군의 정치기술>이 바로 그것.

죽음에서 부활해 비정한 권력투쟁 속에서도 83세까지 살았던 정명공주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이 모든 것의 열쇠가 생전에 그녀가 남긴 '화정'(華政)이라는 글씨에 숨어있지 않을까 추론한다.

광해군의 이복 여동생인 정명공주는 드라마 속 표현대로 하자면 '순혈의 피'다. 선조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는 왕실의 첫 번째 적통으로 사랑을 독차지했고 이복 오빠인 광해군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정명공주의 뒤를 이어 영창대군이 태어났지만 세자로 삼기에는 너무 어렸다. 선조가 승하하고 마침내 왕좌에 오른 광해군은 1614년 '7서의 옥'이라는 역모 사건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어린 영창대군을 처형한다. 광해군은 1618녀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강등했고 정명공주 또한 옹주로 강등돼 어머니와 함께 경운궁에 유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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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공주가 석봉체로 쓴 '화정' 출처: 간송미술관
ⓒ 이민희

 


유폐 생활은 비참했다. 끼니를 제대로 이을 수도 없었고 경운궁은 돌보는 이가 없어 쥐와 벌레가 들끓는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살아남았으나 살아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없어 죽은 듯 지내야 했던 정명공주는 서예에 몰두했다. 자식과 권력을 모두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정명공주는 한석봉 필법을 수련하는 데 정진했다고 한다. 공주가 남긴 작품인 '화정'(華政)은 가로세로가 73센티미터에 이르는 크기로 남자도 쓰기 힘든 대작이다.

"비극은 공주를 단련시켰다. 그 단련의 결과가 바로 '화정'이었다. 정명공주는 '화려한 정치'가 아닌 '빛나는 다스림'을 가슴 속에 새기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당장은 '화려한 정치'가 자신을 핍박하더라도 언젠가 자신을 다스렸던 '빛나는 다스림'이 그 빛을 드러낼 것이기에, 정명공주에게 몸만 간신히 뉘일 수 있는 방 안은 세상 끝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본문 154쪽)

정명공주의 처세술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침묵'이다. 그녀는 서궁에 유폐된 고난의 시기에도, 광해군의 실각 이후 공주 신분으로 복귀돼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기에도 스스로 움직여 정적들의 표적이 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침묵의 기술을 구사했다.

저자는 "조선사회에서는 선과 선이 부딪쳤을 때는 어느 한 쪽이 결국은 죽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악순환을 깨는 방법이 있다, 한 걸음 물러나 상대가 움직일 여지를 주는 빛나는 다스림이다"(본문 103쪽)라고 '화정'의 의미를 해석했다.

"내가 원하건대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었을 때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입에 올리고 정치와 법령을 망령되이 시비하는 것을 나는 가장 싫어한다. 내 자손들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경박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이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숙종 8년 정명공주가 80세 되던 해 막내아들 홍만회에게 내린 글, 본문 66쪽)

정명공주는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겸손하고 존귀함을 잃지 않아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고 한다. 공주와 동시대를 살았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정명공주의 묘지에 "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에 걸맞게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해 오복을 향유했다"라는 비문을 남겼다.

광해는 정말 어진 군주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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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정 : 정명공주와 광해군의 정치 기술> 표지
ⓒ 리베르

 

정명공주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광해군이다. 저자는 "광해군이란 프리즘만으로 당대의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시각의 사각지대를 갖게 된다"(분몬 4쪽)라며 정명공주라는 새로운 프리즘을 통해 광해군 시대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광해군 하면 연관 검색어처럼 따라오는게 '대동법'과 '실리외교'다. 이 두 가지 때문에 '개혁군주'로 평가받지만 저자가 보기에 이는 상당히 과장된 평가다.

"광해군은 현군(賢君)인가, 혼군(昏君)인가? 광해군의 '화려한 정치' 여정에는 늘 정명공주가 광해군의 그림자인양 따라다니고 있었다. '화려한 정치'가 빛을 타고 있다면 '빛나는 다스림'은 그림자에 얹혀 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는 눈이 필요하다."(본문 183쪽)

흔히 광해군은 양반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동법을 시행한 '애민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대동법 시행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경기도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행해졌다. 1609년 곽재우를 비롯한 신하들이 대동법의 확대를 주장하자 광해군은 오히려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며 이를 반대했다. 결국 대동법은 흐지부지됐고 광해군은 오히려 토목공사를 위한 특별 공물 징수에 더 신경을 많이 썼다.

저자는 "정책의 주안점이 조세 개혁을 통한 민생 안정보다는 토목 공사를 통한 왕권 강화, 즉 화려한 정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라면서 "광해군이 세자 시절부터 지녔던 '빛나는 다스림'에 대한 초심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본문 117쪽)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무리한 토목공사는 인조반정의 주요한 명분이 됐다.

쇠락하는 명과 부상하는 후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조선. 저자는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탁월한 외교적 수완이라기보다는 힘 약한 나라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평가한다. 명-후금의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라는 명의 요구를 거절하지도 못하고, 후금과 전면적으로 싸울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명과 사대부의 요구를 못이겨 1만3000여 명을 파병했다. 이 중 무려 9000여 명이 전사하고 4000여 명 후금의 병력에 편입되거나 농사에 동원됐다.

저자는 "광해군에게는 주도적으로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숱한 옥사로 조정에는 제대로 된 인재가 사라졌고, 대동법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흐지부지해졌다. 국방에 신경을 쓰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궁궐 공사로 국력을 낭비해 집중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라며 "이것은 광해군의 한계, 조선의 한계였다"(본문 166쪽)라고 지적했다.

광해군이 현군(賢君)이었는지, 혼군(昏君)이었는지는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그의 정치를 백성을 향한 '빛나는 다스림'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광해군의 집권으로부터 이어진 17세기 조선의 정치사는 민중에게는 '잔혹사'였다.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수많은 백성이 고통받고 죽임을 당했다.

조선의 권력층은 당파싸움에 열중하며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았다. 17세기 중반 '대기근'의 시기, 백성들은 죽은 자식을 삶아 먹을 정도로 굶주리며 나라가 파멸의 지경에 이르렀지만 위정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참혹한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늘에 가려져 있던 정명공주의 '화정'을 더 돋보이게 한다.

"세상에 선과 악의 싸움은 드물다. 선과 선의 싸움이 대부분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자신을 향한 '빛나는 다스림'이다. 붕당에 찌든 조선은 '선'이 '선'을 죽이는 사회였다. 화정이라는 화두가 우리 머릿속에 늘 머무른다면, 빛나는 다스림이 나로부터 시작해 주변으로 확산된다면, 남을 다스리기 전에 나부터 다스리나면, 나와 너는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머리말, 본문 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