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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여름 10 : 희미한 광복과 미완의 해방

 

강남의 여름 10 : 희미한 광복과 미완의 해방

 

 

                                                                                           내방역 무궁화 동산

 

희미한 광복과 미완의 해방

 

광복 70년! 한 방송사에서는 광복 70년 미래 30년 대한민국 100년 을 내다 본 거창한 방송 슬로건을 내걸고 기획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몸부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광복 70년이 지났으나 아직 우리는 진정한 광복을 찿지 못하고 있는 듯하고 해방이 되었으나 아직 진정한 해방을 찿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광복이 빛을 되찿는 것이었으나 찿은 빛은 어둠의 희미한 빛이었고 해방을 맞았으나 미완의 반쪽 해방에 불과했다. 우리의 자력으로 해방을 이룬 것도 아니요 강대국들의 탐욕스런 영역싸움에 휘말려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멀쩡했지만 한반도는 일제를 대신하여 남북으로 미.소에 의해 반토막 나고 말았다.

 

우리의 광복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뜻한다. 억압과 탄압 속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노예처럼 살아온 36년. 망국의 한을 그제서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나라가 망한 것이 백성들이 잘못해서 망한 것도 아니다. 500년 동안 조선을 지배하던 양반사대부들과 이씨 왕족들에 의해 나라가 망한 것이다. 지도층의 탐욕과 무능이 망국의 원인이 되었고 백성들은 다시 일제의 노예가 되었다. 나라가 망하자 일부는 만주나 중국으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주를 했고 그 중 뜻있는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펼쳤다. 나라가 망하고서야 망국의 비참함을 깨닫게 되었고 망국의 원인을 뼈저리게 느끼며 다시 나라를 되찿겠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미약함 힘으로 일제와 맞서기에는 바위에 계란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국내에 남은 사람들 중 친일파를 비롯한 일제 앞잡이들은 일제의 수족이 되어 조선 민중 탄압과 수탈에 앞장섰다. 수많은 젊은 남녀들이 전쟁터로 끌려가서 총알받이와 정신대가 되었고, 광산이나 공장으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어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고 오로지 나라가 망한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자신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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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은 오백년 동안 지배층으로 군림하면서 철저하게 백성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며 부귀영화를 누렸고 중엽에는 임진란과 호란을 당하여 망국의 위기가 왔음에도  일부 충신, 열사들의 희생으로 용케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했으나 60년 세도정치로 나라가 절단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말기에 결국에는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자 왕족끼리 권력다툼에 서로 외세를 끌여들여 싸움질에 여념이 없더니 당시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던 국제적인 제국주의 시대라, 청일,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국제적인 묵인하에 강압적인 무력행사와 압력으로 인해 조선은 총한 방 쏘지 못하고 일부 왕족들과 친일파들이 앞장서서 나라를 통채로 들어바쳤다.  

 

왜 조선은 이토록 무력화된 나라가 되었는가? 노론 세력은 조선이 망국의 길로 가는데 주도적인 세력이었다. 사실 조선은 이미 중엽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망하려다가 유교사상의 결실로 수많은 충신.열사들이 목숨을 희생한 결과 기사회생하였으나 이미 정치적으로 깊은 불치병에 걸린 상태였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치루고 승리하여 등극한 다음에 오로지 적자만이 왕통을 이을 수 있도록 법전에 명시했다. 그러나 사실 적자가 왕통을 이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양반사대부들은 신권우위론을 내세우며 왕을 왕으로 보지 않았고 중국의 지방정권, 즉 왕을 중국의 신하로 보았다. 조선이 개국된 이래 하루가 멀다하고 명에 대한 사대는 그치지 않았고 각종 때가되면 사절을 보내 명 황제에게 정성을 다했다. 그 덕분에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명군이 파병되었고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역사적인 평가에 공과가 엇갈리는 선조는 임진왜란을 잘 견디어냈고 뒤를 이은 광해군은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 급속히 성장하던 후금의 침공을 우려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정세를 관망하였고 한편으로 광해군과 대북파는 자신이 정통성이 없는 적자가 아님에 정치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적자로 태어난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과도한 정적 숙청에 무리수를 두다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쫒겨났다.

 

인조의 극진한 명에 대한 사대는 정묘, 병자년에 두 번이나 후금의 침공을 불러왔고 병자년에는 남한산성으로 피란가서 항쟁 40여 일 만에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청의 속국이 되었다. 소현세자, 봉림대군, 3학사를 비롯하여 조선인 포로 50만 명이 볼모로 끌려갔고 소현세자는 명.청전쟁을 직접 눈으로 참관하고 서양문물에 심취한 상태로 개화되어 돌아오자 인조는 주변 간신들의 모함으로 자신이 청을 등에 업은 세자에게 왕위를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에 소현세자를 비롯한 세자비 강씨, 어린 세손 3명을 처단했다. 인조가 죽고 뒤를 이은 효종은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자신의 명분만 내세운 꼴이 되었는데,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허무한 구호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당시 청나라는 '삼번의 난'을 진압할 정도로 군사적.정치적인 안정화를 취하고 있었고 창업 후 수성기에 접으든 상태라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기에는 무리였다.

숙종은 환국정치로 다소 왕권을 회복하였으나, 숙빈 최씨 소생의 영조는 경종이 후사없이 짧은 치세로 졸하자 서자로 왕권을 이어받아 정통성 논란에 휩쓸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는 등 오랜 세월동안 고통을 받았으며 그의 탕평책도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정저쟁에 휘말려 사도세자가 죽고 세손인 정조가 왕위를 이었으나 급진적인 개혁 노력도 노론 세력의 끈질긴 반대로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그후 순조 이후 조선은 외척세력이 성장하면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잡은 노론 세력은 허약한 왕족을 골라 옹립하면서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농락하면서 철저한 세도정치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주도적인 역활을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등장한 인물이 흥선군, 고종, 민비였으니 그들은 조선이라는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훌륭하게 연출한 명배우들이었다. 그들은 모처럼 되찿은 왕권을 주도하기 위해 같은 왕족끼리 서로 외세를 끌여들여 상대를 제압하려 했고 이를 이용하여 일제는 노일전쟁,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로 미국과 비밀리에 가쓰라-테프트 조약을 맺고 미국은 필리핀, 일제는 조선을 독차지 하기로 약속했다.

 

 

 

 

당시 국제정세는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로 영역을 나누어 식민지를 쟁탈할 때라 국제정세에도 어둔하고 힘도 없이 60년 세도정치로 깊은 병에 걸렸던 조선은 갑오개혁을 포함한 수차례의 개혁도 결국 파벌싸움으로 실패하고 국왕 고종은 시해음모가 두려워 외국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는 등 몸부림을 쳤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했다.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의 강력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왕족과 노론, 친일파가 합세하여 일제에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나라를 송두리채 들어 바쳤다. 협정서 몇 장으로 타국에 나라를 통째로 들어바치는 이러한 경우는 세계사에서도 찿아보기 힘든 기이한 경우다. 

 

일제는 조선을 병탄하면서 동학봉기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를 무차별적으로 탄압하였고 민족주의자, 독립투사, 지주, 지식인 등을 친일파로 전향시키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국유지로 강점하였고 식량자원을 탈취하였다. 광산을 채굴하여 지하자원을, 산림을 무차별 채벌하여 산림자원을, 철도를 부설하고 도로망을 만들어 중국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헌병과 순경으로 강력한 무단통치를 실시하고 일제 앞잡이를 양성하여 수많은 민족주의자, 독립투사, 지식인을 탄압했다. 1919년에는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라는 미사여구에 속아 민중들이 맨손으로 3.1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무차별 탄압으로 수많은 민중이 처참하게 죽임을 딩했다.

 

 

 

 

일제 강압통치가 20년~30년 계속되고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일제가 망하리라고 조선인들 중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일제는 중일전쟁을 유발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 본토로 진공했다. 승승장구하던 일제는 여세를 몰아 동남아를 향해 침략의 마수를 전개했는데, 필리핀, 싱가포르, 말레이 반도, 버마로 전선을 확대하는 한편 미국의 하와이를 기습하여 미태평양 함대를 괴멸시켰다. 전승을 구가하던 일제는 광정면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병력과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조선반도 인력과 물자를 철저히 수탈했는데, 이광수, 최남선 등 친일파 지식인들을 사주하여 강연, 신문 등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동원하고 여성 문인들이 선동하여 정신대 여성도 동원했다. 군대에 동원되지 않은 사람들은 광산, 공장 등지로 끌려갔다. 일제는 놋그릇을 포함하여 오강단지까지 공출이라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각종 물자를 철저히 수탈했다.

 

그래서 일본인이 되기 위해서 젊은이들은 일본군 사관학교나 일본대학에 진학했으며 스스로 친일관료가 되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천황 군대에 지원했고 천시받던 하층민은 헌병과 경찰의 앞장이가 되어 항일 독립투사, 민족주의자, 지주, 지식인을 탄압에 앞장섰고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부녀자들은 일본놈 성노리개가 되었고 일제 군경을 위해 몸을 불살랐다. 이름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고 일본글과 말을 유창하게 말하고 쓰며 일본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망해버린 나라에 무슨 독립이냐, 한시절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것을...... 항일이 무엇이냐 쓸데없는 만용이요, 민족이 어디 있느냐 일본인이 되면 되는 것을......

 

만약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우리는 지금도 반도인으로 낙인찍혀 현재의 재일동포처럼 천시받고 차별받으며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문화와 전통을 상실하고 일본말을 쓰며 반쪽 일본인이 되어 하층민으로 대부분 살아가고 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미국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산호초 해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제는 미군에 대패하여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더니 점차 미군의 개구리 뜀뛰기 전술에 주요 요충지 섬들이 차례로 점령되었고 오키나와 전투, 필리핀 해전에서 가미가제 특공대를 투입하여 자살공격을 감행하여 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일제의 최후 발악과 더불어 본토 결전을 앞두고 최후까지 옥쇄를 감행하려 했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 본토 공략에 막대한 인명 피해를 고민하던 차 신무기인 원자탄을 완성하여 히로시마, 나까시키 두 도시에 투하를 하자 순식간에 두 도시의 대부분의 건물과 수십 만 시민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놀란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게 되고 일제 천황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서 무조건 항복을 선포하게 된다. 그래서 일제는 동경만 미함정에서 미국에 정식으로 항복조인식을 거행하게 된다.

 

 

 

 

미국은 소련을 대일전에 참가토록 독촉했고 이에 소련군이 만주를 포함하여 남진하자 미국은 일본 본토를 독식할 속셈으로 소련과 협상을 통해 대일전에 참전한 소련의 몫으로 만주를 포함하여 한반도 38도 선을 기준으로 하여 남북으로 양분하여 일제 무장해제 지역으로 나누어 북한 지역을 소련, 남한 지역을 미군의 무장해제 지역으로 나누게 된다. 38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고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해서 일본군 무장해제와 동시에 점령지 군정을 실시했다.

 

사실 김일성 정권이나 이승만 정권은 소련과 미국에 의해 태어난 정통성이 없는 꼭두각시 정권에 불과하다. 역사를 보면 성공한 쿠테타를 인정할 수밖에 없고 정통성 자체도 의미를 상실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정권은 힘에 의해서 창출되기에 정통성을 따질 문제가 되지 못한다.

 

일제 강점 이후 독립투사들로 구성되어 망명정부 역활을 했던 임시정부는 내부 갈등과 분열로 인해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연합군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전승국이 되지도 못했고 미군정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아 시간을 끌다가 개인자격으로 겨우 입국을 허용했다. 또 해방 당시 일제의 행정을 여운형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이미 지방 조직까지 갖추어 일제로부터 정부 행정기능을 인수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일체의 기존 조직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말을 가장 잘 듣는 세력을 골라 양성하면서 그들에게 모든 힘을 실어 주었고, 세력투쟁 가운데 김구 등 유력한 민족주의자들이 제거되면서 총선거를 치룬 결과 미국이 가장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이승만 세력이 정권을 잡도록 음양으로 지원했다. 북한도 소련군 출신의 젊은 김일성이를 내세우고 북한 정권을 창출했으며 사회주의 체제로 냉전시대 최첨단 전선으로 남한과 극한 대립을 이루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도 못했고 남북이 갈라져 각기 사상과 이념을 달리하는 두 개의 정통성 없는 정권이 태어나 반세기를 지냈다. 북쪽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통치하는 김일성 세습 독재정권이 3대째 이어오고 있으며 민족통일전쟁이라는 미명하에 6.25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이 불바다가 되었고 이념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반세기 넘게 수많은 간첩을 포함하여 납북 어부, 납북 항공기, 비무장지대 전초기지 공격, 수많은 무장공비 침투, 서해교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무인기 정찰, 비무장지대 지뢰 살포 등 오늘날까지 휴전선에서 서로 피를 흘리고 있다. 또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총칼을 겨누고 서로를 비방하며 군비경쟁을 초래하였고 남북의 막대한 군사비 지출은 민생경제를 파탄나게 만들었다. 그동안 북한은 전쟁준비에 광분하며 남한 적화통일에 목표를 두고 정권유지와 군사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북한은 자신들의 김씨 세습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3대째 세습이 계승되고 있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등 무리한 군사비 지출로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대외적인 봉쇄조치로 북한 경제가 파탄이 나고 있으며 주민들이 가난과 굶주림, 무지비한 인권 탄압 등을 견디지 못하고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필사의 탈북을 시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는 아직 진정한 광복을 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쪽은 겉은 독립국이나 사실은 미국의 속국이 되어 미군에 의지해야만 국방을 유지할 수 있는 처지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배신의 역사를 잊은지도 오래다. 전작권을 극구 사양하며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해주기를 바지가랑이를 잡고 애걸복걸 하고 있다. 미군이 떠나면 남한은 금방 북한군의 침공으로 하루 아침에 적화된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사실 북한의 현존 군사력과 핵무기, 미사일, 화생무기, 비정규전 부대 등 비대칭전력을 현재 남한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에는  세계에서도 보기드물게 외국 군대가 주둔하면서 매년 조 단위 이상의 비용을 대며 주둔하게 하고 있다. 미군 지원 예산인 방위비에 대한 국회의 국정감사는 해본 적도 없다. 수도 서울은 적의 방사포 등 강력한 위협을 머리위에 이고 살고 있는 처지라 미국의 말에 목을 메는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남미, 중동, 이프칸, 유고 등 세계 각지에서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군을 지원해주거나 다른 명분을 내세우며 전쟁을 벌여 기존의 미운 지도자나 좌편향 정부를 전복시키는 짓을 수없이 자행해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각종 폐기 직전의 노후 무기를 사주어야 하고 만들지도 않은 최신형 무기 도입은 부르는 게 금액이고 유지관리를 위한 수리부속은 엄청난 고가에 할 수 없이 구매하고 있으며, 이전해준다는 기술은 갖은 핑계를 대며 이전을 미루거나 거부하고 있다. 또 각종 불평등 조약으로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고 있으며 세계평화란 미명하에 각종 통제기구를 만들어 핵물질 재처리, 미사일 사거리, 핵개발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북한의 위협을 과장되게 유포하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당장 미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말한마디에 우리 정부나 군은 오금을 펴지 못하는 처지의 나라다. 각종 다국적 기업, 기업 사냥꾼들이 갖가지 악랄한 방법으로 국부를 유출해가도 말 한마디 못하는 나라다. 누가 대한민국이 자주 독립국이라고 할 것인가? 과거 고려가 몽고의 속국이 되었듯이 지금은 미국의 속국이 되어 있다. 조선이 명나라, 청나라에 사대하였지만 이러지는 않았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에서 직수입된 사회체제다. 고려시대 몽고 지배 100년 동안 거의 몽고화되어 가던 고려 사회나 지금의 우리 사회나 마찬가지다. 미군 전투식량에 들어있던 초크릿 단맛을 처음 맛보았던 국민들이다. 설탕은 커녕 사카린도 없던 50~60년대 그 시절, 헐벗은 우리 어린이들이 미군이 탄 차량이 지나가면 "헬로~",  "헬로~"라고 외치며 따라가면 미군 흑인 병사가 던져주던 은박지에 싸인 초크릿을 주워 맛을 보는 순간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단맛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 단맛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고 그러기를 세월은 반세기가 넘게 지났다.

 

미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경제체제와 정치제도인 자유민주주의를 한국에 이식시켰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이러한 요구를 철저히 수용하였고 그것은 우리들이 5천 년 동안 그토록 바라던 정치.사회체제였으며 바로 북한과 다른 체제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획책하다가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 하야하고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이승만이 국부라고 하지만 그는 국부가 나이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의 친일파 재등용은 독립정신과 애국정신 등 민족정신을 철저하게 무너지게 만들었다. 제2공회국 장면 정권은 무능하여 혁명 후 무질서한 정치.사회를 바로잡지 못하고 북한의 남침 위협까지 조성되자 박정희에 의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제3공화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어 5천 년 동안 무능한 지도층에 의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국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지금의 풍요로운 사회를 이룩했다. 서독 광부.간호사 파견, 월남전 참전, 중동 파견 등 피와 땀을 희생한 덕분에 오늘날의 경제적 풍요를 이루었다.

 

그런데 문제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미쳐 성숙하지 못한 정신세계의 붕괴다. 후진적 정치는 조선시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이 양극화를 초래하여 극심한 자본만능주의라는 사회병리현상으로 나타났다. 돈이 인간보다 우선시되는 사회, 인간성을 상실하고 천박한 자본주의 사고가 팽배해진 상태다.

 

자본이 인간 개인이나 가정보다 우선시되고 총포보다 더 무서운 폭력이 되어 모든 것이 돈이면 해결되는 시대이며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회다.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는 차단되고 개천에서 용이난다던 시대는 사라졌다. 국가나 사회보다 내가 우선이요, 전통적인 충과 효 사상은 사라진지 오래다. 시대정신을 구가하는 지식인들이 사라졌고 민족정신도 사라졌다.  중국놈, 왜놈, 미국놈 할 것없이 수많은 타민족 피가 섞였지만 우리는 단일민족, 배달민족의 거짖된 민족주의 용어에 속아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우둔한 사람이 많다. 국제화시대, 다문화 시대에 민족주의를 벗어나 관용과 포용심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우리가 진정한 광복과 해방을 이루는 것은 남북이 통일되어 선진적이며 모범적인 정치체제와 미래를 위한 새로운 먹거리와 아이템을 개발하여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세계적인 부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동북아는 물론 세계의 물류 중심지로 자리메김하고 강대국이 업신여기지 못할 강력한 힘을 가진 절대 중립국을 만들어 동북아 평화질서는 물론 국제적인 질서유지에도 중추적인 역활을 담당하여 세계평화 유지에 앞장서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인륜이 바로선 양심과 도덕, 배려와 사랑이 넘치고 더불어 다같이 잘 살아가는 사회, 법은 누구나 모두에게 공정하고 모두에게 평등하며 인간관계나 정치.경제적인 분야에서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가정이 행복하고 윤리.도덕이 우뜩선 동방의 가장 빛나는 나라. 그런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아직 진정한 광복이 되었고 완전한 해방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광복절 아침에 이 글을 쓴다. 서초동 -